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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줄칼 / 이치운

부흐고비 2022. 1. 14. 08:57

제4회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붉은 꽃무리가 해마다 늘어간다. 엄지손톱만 한 반달 모양의 녹 하나하나가 햇빛을 받아 선연한 핏빛을 반사한다. 흙 한줌 물기 한 방울 없는 곳에서 피는 꽃의 생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시골집 어두운 광에는 낡은 대나무 소쿠리가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그곳에 담긴 물건은 대부분 50년 전 아버지가 집을 지을 때부터 썼던 도구들이다. 육지로 나서면 자잘한 것들에 불과 하지만 섬에서 살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다. 소쿠리에 담긴 괭이, 호미, 부엌 칼, 낫, 쇠톱, 못 등은 쓸모없어지면 외면당한다. 그렇더라도 버리거나 버려질 수 없다.

시선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길이는 한 뼘 정도이고, 손잡이는 동백나무이고 칼은 줄톱을 갈아 만들어졌다. 생전에 아버지는 그 칼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셨다. 찢어진 그물코를 깁거나 생선을 손질할 때, 고구마를 맛깔스럽게 깎거나, 갈치 국에 호박을 삐져 넣을 때 언제라도 쓸모 있게끔 했다. 손수 지은 집에 달았던 문패도 그 칼로 조각했다. 아버지는 이것을 줄칼이라 했다.

아버지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로 생을 마감했다. “한번 뱃놈은 영원한 뱃놈이랑께”라고 호기 있게 일갈했던 아버지는 뱃놈이라는 신분을 평생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거친 파도와 맞서야 하는 남자에게 뱃놈은 하대 말이 아니라 바다 남자에게 어울리는 신분의 명칭이다.

평생 칼을 사용하는 직업이 적지 않다. 대목수는 한옥을 짓기 위해 정과 끌을 한 몸으로 취급한다. 재단사는 품에 맞는 옷을 짓기 위해 재단 가위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다닌다. 쉐프는 맛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용도에 적합한 식도를 소중히 보관한다. 이들을 칼잡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섬에서는 만능 줄칼을 허리춤에 차고 다녀야 어부라 불릴 만 했다.

동네 어른 중에서도 몇 분만이 줄칼을 만들 줄 안다. 바다 물길을 알고 고기를 잡는 어부의 도리를 아는 집안 대주쯤 되어야 줄칼을 만든다.

쇠의 성질을 알고 인생의 끈기가 있어야 줄칼을 찰 수 있다. 줄칼은 온전히 숫돌에 쇠를 문질러 갈아낸다.

숫돌은 쇠를 다듬는 과정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녹을 제거하거나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금강(金剛)과 비수(備水)를 사용하고, 칼날을 세우기 위해서는 내담인지(內曇刃砥)를 사용한다. 칼에 딱 맞는 숫돌을 구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자연석으로 만든 숫돌을 사용했다. 그 돌에 강철을 문질러 갈려면 성미 급한 뱃사람으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뱃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급한 성질을 모두 죽여야 쇠를 대할 수 있다.

아버지는 쇠의 재질과 숫돌 종류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단숨에 잘라 낼 수 있는 칼날을 만들어 냈다.

섬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할 때는 금기를 따른다. 소리도 섬에는 노루를 신성시 여겨 배에 페인트를 칠할 때 노루표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제비표 페인트를 사용한다. 아버지가 줄칼을 만들 때도 엄격히 지키는 일이 있다. 줄칼 만드는 날짜가 정해지면 생선 배를 따지 않고, 손에 피 묻히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다툼도 일절 삼가 했다. 보리가 주식(主食)인 집안에 이웃집 소가 일 년 동안 일곱 식구가 먹어야 할 보리 싹을 먹어 치워도 어머니는 화를 낼 수 없다. 좋아하는 보해소주조차 마시지 않는 것이다. 집안 분위기가 평화스러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절대 신조였다.

쇠를 갈 때는 쥐는 힘과 호흡이 중요하다. 호흡이 거칠어지면 칼날을 망친다. 엄지손톱만한 줄칼 하나 만드는데 대략 반나절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아버지는 오른손에 줄톱을 단단히 틀어쥐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왼손을 떠받친다. 조상에게 제를 지내기 위해 경건하게 술잔을 받아 올리듯 줄톱을 쥐고 숫돌과 마주한다.

먼저 톱날을 없애야 한다. 두어 시간이 지나면 뾰족한 톱날이 사라지고 호박조차 썰 수 없는 정도의 뭉뚝한 쇠판만 남는다.

다음으로 날카로운 한쪽 모서리를 문질러 반달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부와 가장으로서 척박한 섬 생활의 버거운 짐을 지려는 듯 등 굽은 자세로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두 시간 가량 흘렀다.

다음 순서는 뭉뚝한 쇠를 숫돌에 문질러 날카로움을 세워야 할 차례다.

날을 고르게 갈아낼 때까지 아버지는 줄톱과 숫돌이 하나가 되도록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을 모은다.

칼날은 날카로워도 뭉툭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품성을 지녀야 한다. 물건을 깎거나 자를 때 날이 얇으면 부러지고 굵으면 베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스치기 시작할 때 쯤 쇠는 어부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일부를 내어준다. 혈기왕성한 젊은 뱃사람의 성격처럼 날카롭고, 모가 나있던 줄칼이 점차 둥글고 부드럽고 넉넉하고 원만해진 아버지의 성품처럼 닮아갔다.

겉으로는 무뚝뚝하나 속심이 깊은 아버지에게서 나는 힘든 객지 생활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교훈을 배웠다.

철공소 보조 일을 하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치러내고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아버지가 인내를 몸으로 깨우쳐 주셨던 것들이다.

아버지가 만든 손톱만한 반달 모양의 줄칼은 생명을 앗는 칼이 아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의사의 메스도 아니다. 나라를 지키라고 왕에게서 하사 받은 사인검(四寅劍)도 아니다. 그것은 가족을 위한 칼이었다.

나는 숫돌과 마주앉아 칼날에 피어 있는 한움쿰의 붉은 녹 꽃을 숫돌에 갈아내기 시작한다. 어부로 사셨던 아버지의 흔적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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