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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화상 읽기 / 노현희

부흐고비 2022. 1. 15. 11:31

눈 속에 잡풀더미를 그려낸 화가가 있었다. 그는 거기에 얽혀 있는 다양한 선과 독특한 조형미에 반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표현해 봐’ 하고 속삭이는 풀의 유혹 앞에 주저앉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화가의 말에 야릇한 질투심을 느꼈다. 시골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풀더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그 심미안이 부러웠다. 글을 쓰는 일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에서 혹은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글의 생명이라 하지 않는가.

화가의 풀더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엉켜있는 그것들에게서는 시린 바람과 무표정한 흙의 군상, 부질없이 흩날리는 눈발이 보일 뿐 화가가 느꼈던 유혹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잔치가 끝난 뒤의 어수선함이랄까. 을씨년스러움 같은 것이 느껴지기만 했다. 그들이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이서 멀리서 서성거려 보았지만 풀더미는 끝내 말이 없었다.

다른 그림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 풀더미가 서운했다. 그러다 나중엔 화가의 미숙한 솜씨 탓이라며 미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혼탁한 눈을 경계하는 풀더미의 낯가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다시 그 그림 앞에 섰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들은 지금 겨울잠에 빠져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술관 밖에는 봄 햇살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갖가지 물건을 쌓아두고 파는 리어카 앞에서 구경을 하기도 하고 더러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서 골동품을 구경하고 엿장수의 품바타령과 가위질 소리를 들었다. 느슨한 휴일 오후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얼굴엔 약간의 나른함과 권태로운 일상이 보였다. 어쩌면 미술관에서의 내 모습도 그랬는지 모른다. 안이함에 젖은 눈빛으로 환희에 가득한 화가의 얼굴만을 풀더미에서 읽으려 했는지 모른다.

어느 화가는 모든 그림은 결국 그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도사린 자기표현의 욕구를 이야기하였다. 거울을 보며 그날의 기분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문득 발견한 눈가에 잡힌 여러 개의 주름살, 내게는 보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었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반 고흐, 잡다한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까. 오직 그림 속에서만 살고 싶은 염원이 자신의 귀를 자르게 한 것이었을까. 귀가 잘린 자화상을 그린 고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리는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을 때 ‘넌 곧 나야’ 하는 소리를 한다.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라는 말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보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끼는 것은 그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흙먼지가 날리는 길에 가게 주인이 물을 뿌렸다. 그것을 피하며 누군가 세상이 온통 먹고살기 힘든 전쟁터군 하는 소리를 했다. 전쟁터, 그 말을 듣자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던 거리의 곳곳에서 거짓말처럼 여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어느 곳에도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것이 없어 보였다. 열 개도 안 되는 물건을 펼쳐 놓고 앉은 노인이나, 엄마 품에서 연신 젖꼭지를 무는 아이도 모두 제 삶을 이어가는 하나의 몸짓인 것이었다. 내게는 그런 모습이 하나의 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사람과 물상이 이뤄내는 각가지 형태의 선으로 여러 개의 군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군락은 아무렇게나 뉘인 미술관의 풀더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것들은 쉴 새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적이지도 않고 은밀하지도 않았다.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의 엄포요, 비웃음처럼 여겨졌다. 냉소적이고 방관적인 내 삶에 대한 항변이었을까.

풀더미의 화가는 어떤 모습에 매료되어 말을 건넸을까. 그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교감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자기만족 혹은 자기 확인이라는 말도 떠올린다. 그러나 지금 거리의 어느 것도 내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나는 자꾸만 어디론가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내 자화상을 먼저 보고 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차분한 관찰이나 따뜻한 애정 대신 어설픈 직관이나 설익은 생소함으로 원고지를 메우려 했던 내 모습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소리쳤으나 그것은 그대로 목안에서 사그라져 버렸다.

뒤돌아본 미술관 외벽에는 ‘그림일기와 그림 읽기’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화가는 풀 더미의 일기를 읽었던 것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더미의 일기가 읽기라는 단어와 뒤죽박죽이 되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풀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공포감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어느새 거리는 저녁 기운이 감돌았다.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불빛은 이 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이 될 것이다. 진열대 유리 위에 엉거주춤한 애 모습이 흐릿하게 여러 겹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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