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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짧은 만남 긴 여운 / 박태우

부흐고비 2022. 1. 17. 08:39

여행은 언제나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새로운 풍광을 감상하고 별미를 맛보며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떠올릴수록 즐거운 일이다. 다채로운 문화와 다양한 삶의 체취를 느끼면서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그곳이 낯선 땅, 먼 곳일수록 호기심과 기대감은 한층 더해진다.

몽골에서 보낸 여름 여행을 잊을 수가 없다. 늘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다람쥐 쳇바퀴 돌리다시피 살아온 나로서는 일상의 탈출은 생활 속의 오아시스와 다를 바 없었다. 여행의 대상지도 천혜의 자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몽골이 아닌가. 머나먼 낯선 땅에서 자연에 푹 빠져보고 싶은 소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온갖 상상력을 끌어들여 몽골 여행을 그려보았다. 광활한 초원, 밤하늘의 별빛, 칭기즈칸의 흔적, 들판에서의 말타기, 양고기 시식, 게르(몽골식 전통가옥) 체험 등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자연에 파묻혀 세파에 찌든 마음의 찌꺼기를 말끔히 털어내고 싶었다. 그 옛날 아시아와 유럽까지 호령하던 유목문화의 속살에 접근하고 싶은 충동도 지울 수 없었다.

몽골은 그러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벗어나자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광활한 초원을 누비는 양떼, 하늘을 찌를 듯 위용을 뽐내는 기암괴석, 끝없는 대지에 펼쳐진 야생화의 물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냈다. 분명히 몽골은 관광과 자원의 보고였다. 자연과 환경이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는 걸까.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손을 건네면서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고 싶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테를지 국립공원은 비경을 뽐내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테를지는 넓고 평평한 초원을 안은 채 사방으로 야트막한 산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본 알프스 산자락에 온 느낌이었다.

둘째 날, 초원에 설치된 게르의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시계 침은 오전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원의 싱그러운 새벽 내음이 그리워 혼자 살며시 게르를 빠져나왔다.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몽골은 백야 현상으로 여름에도 오전 5시면 해가 뜨고 밤 9시가 돼야 해가 진다고 했다.

시선이 지평선 끝자락을 벗어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비 갠 하늘에 무지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무지개를 낯선 땅에서 볼 줄이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가슴이 벅 차올랐다.

이번 여행 기간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인간이 뿜어내는 향기에 듬뿍 매료되었다. 테를지 공원에서 만난 몽골 소녀, 절러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와의 만남은 당초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테를지 공원에서 승마를 즐기던 중 통역의 소개로 우연히 그의 가족과 만나 그의 집에까지 들르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의 부모와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수태차, 마하주 등의 전통음식을 내놓으면서 정성껏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준비해 간 허르헉(삶은 양고기의 일종)을 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회식을 가졌다.

술에다 고기안주를 곁들이니 마음의 벽이 금세 허물어졌다. 시원한 바람, 초원의 싱그러운 향기도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몫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좌중은 시끌벅적해졌다. 곳곳에서 술잔을 건네며 웃음꽃을 피웠다. 흥에 겨운 때문인지 일행 중 누군가가 즉석에서 구수한 트로트 한 곡을 뽑았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쪽에서도 절러의 할아버지가 몽골의 유행가 한 곡으로 화답했다. 칠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깡마른 몸매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얼굴에 감도는 은은한 미소는 인심 좋은 고향 촌로를 연상케 했다.

우리가 한 곡을 하면 상대도 번갈아 가며 응수하는 식으로 여흥을 이어갔다. 즉석에서 한몽 노래자랑이 벌어진 셈이다. 마하주를 몇 잔 걸친 절러의 할아버지는 나이도 잊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곳곳을 누비며 흥을 북돋웠다. 서너 곡이 흘렀을까. 저쪽에서 어린 소녀가 나서는 게 아닌가, 두 뺨에 발그스레한 빛을 머금은 소녀는 다소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이름을 절러라고 소개했다.

빨간 모자, 분홍색 티, 청색 운동복을 걸친 소녀에게서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수줍음과 겸손함이 묻어났다. 소녀는 밝고 고운 음색으로 열창을 하여 좌중을 단번에 압도했다. 고운 화음과 함께 두 팔을 차례로 앞으로 뻗으면서 손을 몇 차례 감싸 쥐는 적절한 제스처는 귀와 함께 눈도 즐겁게 해주었다.

몽골의 말과 글, 문화도 모르지만 우리는 금세 절러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통역은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담긴 가사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용을 떠나 그의 밝고 고운 얼굴, 자연스러운 감정 처리, 적절한 제스처는 의미를 십분 전달하고도 남았다.

소녀의 노래는 만국 공통어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우리에게 여행의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다. 절러의 열창 속에 우리는 부모와 국가를 사랑하는 몽골 유목민의 독특한 정서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의 깜짝 이벤트에 빠져든 우리는 어느새 국경과 인종의 벽을 허물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절러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우리와 그의 가족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축제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낯설고 머나먼 이 역의 땅이 별로 생소하지 않았다.

우리의 이벤트를 자연도 축하해 주는 걸까. 그날따라 초원의 잔디는 그렇게 싱싱할 수 없었고, 높고 푸른 하늘은 그렇게 청명할 수 없었다. 손을 흔들면서 작별을 아쉬워하던 절러의 해맑은 모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그려진다.

이제 몽골을 연상하면 말도, 별도, 초원도 아니다. 절러와의 추억이 그 자리를 밀치고 들어와 있다. 몽골에서 보낸 4박 5일 간의 일정 속에 절러와 함께한 시간은 3시간 남짓했지만 마치 3일을 그와 보낸 느낌이 들었다. 이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 인연인가 보다.



박태우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경향신문사 기자 인생 33년 마감하고 2021.12월 정년퇴임.

저서 『실전 미디어 글쓰기』, 『한국의 맛』(공저), 수필집 『여섯 번째 가족』. 수필문예회, 대구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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