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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숲, 섬을 열다 / 남정언

부흐고비 2022. 1. 19. 14:35

숲이 사람을 부른다. 숲속을 걸으면서 나무를 보고 자신을 반추한다. 아늑한 숲에서 지친 삶을 위로받으며 회복하고픈 본능이 살아나 숲을 찾아간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숲에서 힘을 얻어 귀환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쪽빛 바다에 눈이 시리다. 항구에 정박한 배를 탄다. 배는 사람을 싣고 섬에 부렸다가 숲길을 산책하고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다시 육지로 간다. 궁농항에서 뱃길 따라 이십여 분 만에 도착한 섬은 과거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거제 저도猪島다.

지난여름 47년 만에 섬을 개방했다. 아직은 예약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섬이다. 시멘트로 정비된 길이 끝나면 이내 정갈한 녹색 숲이 열린다. 숲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여럿이 걸어도 좋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나무계단 위에 선명하다. 바람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릴 듯 말 듯 하지만 파도 소리에 묻어오는 "쿠~악"하는 왜가리 울음소리는 선연하게 들린다. 저도의 왜가리는 소나무가 빼곡한 산꼭대기에 무리 지어 산다. 왜가리 한 마리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옛날 옛적에 유배 온 선비처럼 외로워 보인다. 왜가리는 늦가을까지 머무르다 추워지면 필리핀 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다.

망봉산 둘레길 발아래는 땅이 아닌 절벽해안 바다를 블루 카펫으로 깔아 놓았다. 새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와 은빛 물결, 새소리마저 작게 들리는 '숲섬'에 들어온 듯하다. 잠시 복잡한 일은 육지에 맡겨두고 숲에 집중하는 사이에 가슴이 뻥 뚫린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꿈을 꾸다가 섬에 와서 섬에 갇혀버리지나 않을까 하던 걱정은 사라진다. 오랫동안 막혔던 내 몸의 혈이 풀리고 피가 돈다. 심장이 정직한 감성을 펌프질하듯 마음에 피를 공급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숲이 울창하다. 섬 전체를 병풍으로 두른 동백나무와 해송, 팽나무를 보면서 나를 깊이 되돌아본다. 햇살 받은 나무는 사람 몸과 같다. 아름드리 곰솔 나무를 안고 귀 기울이면 심장에서 공급받은 마음의 몸에 동맥이 통과하듯 재빨리 움직인다. 숲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무 향기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오는 모세혈관처럼 생기를 불어넣는다.

오래된 수로에 쉬지 않고 물이 흐른다. 수종이 다른 소나무와 팽나무가 함께 서 있는 연리지 길을 걸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역시 정다워지기를 바란다. 사방이 바다인 섬에서 레이다 망을 가동하듯 천천히 몸을 돌린다. 쭉쭉 뻗어있는 맹종죽 길을 지나 황톳길을 내려오면 탁 트인 모래 해변이다. 섬이 숲이었는데 어느새 다시 바다다.

숲이 섬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역사는 때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남겨주기도 한다. 저도는 역사의 흐름과 맥을 함께 해왔다. 일제강점기엔 군사 기지로 포진지가 설치되면서 길을 내고 배수로를 만들었다. 6·25 전쟁 때 연합군의 통신소와 탄약고로 군사지역이었다. 이후로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 휴양지로 선택된 곳이기도 하다. 해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일반 시민의 출입과 어로 활동이 완전히 통제되었는데 그 덕분에 숲의 생태가 보존되었다. 섬을 시범 개방하고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망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역사가 만들어낸 상생협의체라 생각한다.

저도 일대 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옥포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던 곳과 가깝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며 결코 왜국이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되고자 목숨을 내놓고 지켰다. 바다는 고요한 수묵화처럼 묵은 이야기를 저장한 채 말이 없다.

섬에 오기 전에 섬은 바다에 고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섬이 바다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다. 그러고 보면 인간 세상도 고립되어 사람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던 섬 같은 징검다리가 사라져간다. 거제도를 가려면 거가대교를 지나 가덕도에서 대죽도 중죽도를 거쳐 해저터널을 통과하는데 저도 바다 밑이 국내 최초 해저 침매터널 구간이다. 섬과 섬을 잇는 터널과 다리처럼 저도의 숲도 사람을 불러들이며 원만하게 풀어내는 다리라 여겨진다.

한때 나도 건강을 잃고 마음마저 고립되었다. 바다 한가운데 엄격하게 통제된 저도 같았지만,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얽힌 매듭을 풀고 홀가분하게 다시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훈련하고 있다. 숲이 섬을 이루고 섬이 숲을 안고 있는 저도에서 비로소 평온을 느낀다. 무한 자유롭기도 하다. 열린 섬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닷바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마음의 문을 열면 온 세상 모두가 친구인 것을.

궁농항으로 돌아가는 뱃전에 하얀 물거품이 따라온다. 얇은 파도 사이에 거뭇거뭇한 무엇이 오르내리는데 토종 돌고래 상괭이다. 거제 바닷속을 들락거리는 상괭이는 돌고래와 비슷하지만, 주둥이는 없고 머리가 뭉툭하며 등지느러미도 없다. 서해와 남해에 가족 단위로 모여 사는 웃는 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상괭이와 배가 나란히 평행을 이루며 자유롭게 헤엄쳐 나간다. 배와 상괭이가 함께 산다.

이 모두가 두 시간 반 동안 생긴 일이다. 바다와 육지, 섬과 숲 그리고 인간은 각각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진 자연이다. 숲은 마음을 열게 해 준다. 섬의 바깥은 바다지만 섬 가운데 숲이 있다. 숲에서 찾아야 하는 건 한 그루 멋진 나무가 아니다. 넓고 깊은 공존의 꿈을 함께 나누며 자박자박 숲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런 숲섬을 찾아갈 것이리라.

되돌아본 저도 하늘에 왜가리 떼가 자유롭게 날고 있다. 섬이 점점 멀어진다. 섬 꼭대기에 푸른 숲이 보일 듯 말 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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