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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심우기 시인

부흐고비 2022. 1. 24. 09:21

심우기 시인
1964년 전북 함열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영미소설 전공).

2011년 《시문학》 등단. 시집 『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밀사』와 전자시집 『얼음 불기둥』, 영미번역시집 『그대여 내 사랑을 읽어다오』 외에 공저 다수가 있다.

함께하는 시인들 사무국장. 함시 동인.

 



실개울 / 심우기
너무 얕아 보여/ 내를 건너다, 그만/ 두 발목을 빠뜨리고 말았다//

울음 나무 / 심우기
울음으로 꽉 찬 나무는/ 산 겨울 땡땡 얼어/ 폭설 세차게 치고/ 고드름 속 헤집으려 해도/ 안을 열지 않는다// 한 올 실로 직조된 저마다의 슬픔은/ 서릿발 이파리를 내었다 거두고/ 꽃을 피웠다 꺼트린 모닥불처럼 금세 추워진다// 추우면 스스로의 비하와 열등감이 밀려든다/ 아무 소용 없는 감정에 의하여 단단한 외피를 만들어/ 안의 상처 난 옹이를 숨기고 둥근 나이테를 만든다// 잘 나고 이쁜 것들은 이렇게 많은지// 힘껏 문 울음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 싶다/ 봄이 올 때까지 천천히 자기 울음을 녹인다//

국수나무 / 심우기
안으로 단단히 반죽된 몸통. 제 껍질을 국숫발처럼 내주듯 거리에 하얀 국수나무꽃이 핀다. 시원한 멸치 국물 냄새 다 끓어 넘친다. 건져둔 멸치 비늘이 보도블록에 반짝인다.// 치과에 모시고 갔던 한 남자의 엉성한 이가 생각나 커다란 눈물이 냄비그릇에 빠진다. 퍼져 녹아든 눈물로 천천히 간을 맞춘다. 속 시원하게 하는 뜨거움이 슬픔이 내려가는 듯 착각에 빠뜨린다. 휘젓는 젓가락질에도 빠져 나가는 눈물, 멸치의 냄새가 났다. 국수의 끝이 다 보인다.// 양손 들어 올린 흰 대접에 검은 얼룩이 피어난다. 때 낀 열 개의 손톱, 짧은 손가락이 밉다. 다 건져먹은 슬픔에도 서러움이 남는지 뜨거운 국수 한 그릇이라도 나누지 못한 마지막 깨끗이 비운 그릇이 환한, 새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난 꽃 핀 길을 혼자 걸으며 내내 울었다. 나의 뿌리와 바다, 신이 된 한 남자를 생각하며// 헛헛한 공복, 시장기를 느끼는 더러운 배반감이 뱃속에서 꿈틀거린다. 모든 것들이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밤. 살아야만 한다는 의문스런 당위가 퍼진 국숫발 같은 나뭇가지로 더 길게 늘어져 뚝뚝 끊어진다.// 끄는 걸음에 바짓단이 쓸려 시커멓게 물들도록 바닥의 찌꺼기 눌어붙은 슬픔이 풀어지지 않는다. 나는 바닥에 붙어 바닥이 되었다.// 허수아비 / 심우기
길 잃은 까마귀 가만히 앉아 어깨를 쪼아대면// 아프다 인상을 쓸 줄도 아는데// 너의 메마른 팔뚝에도 피가 흐르더군/ 통퉁 부은 발로 밤이면// 성큼성큼 논둑 넘어 밤마실을 가는데/ 아침이면 언제나 그 자리// 속 다 비운 갈대 노래// 빈 벌판을 다 채우고 넘치는데// 두 팔 하늘로 벌려 수평을 잡는 외다리/ 마음 가득 복잡한 사람들// 도심 한복판서 떠나지 못하고 마른 눈알만 굴리는데/ 아직도 여린 너는// 부는 바람과 지는 이파리에도 눈물 흘릴줄 아는군// 내 아이 속마음조차 못 읽는데// 말은 못해도 너는 남의 속을 다 헤아리고 있군//

사막여우 / 심우기
사막의 시작은 어디이고 어디가 사막의 끝인가// 커다란 귀로 삼킨 사막의 열기가 밤으로 차가운 사막을 덥힌다// 별보다 더 많은 모래가 바람의 문양으로 흘러/ 묻힌 모든 것이 모래로 변하여 숨을 쉬는 열사// 숨은 전갈과 도마뱀을 물고 하루에도 수 번씩/ 폐허로 잠긴 성벽을 세웠다 무너뜨리는 반복이 교차한다// 허상의 국경에서 압수 수색당하는 카라반 대열의 꼬리/ 굶주린 사막여우가 따라붙는다// 바람의 냄새로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건너는 붉은빛 여우의 귀는 밝다// 사막이 되지 못한 죽은 낙타의 등 뼈에서 한 포대의 모래가 쏟아진다// 파도파도 퍼지지 않는 구덩이에 새끼들을 낳고 기르는 일과/ 척박의 바람이란 또 하나의 신기루를 쌓는 일// 울어도 들을 자 없는 사막에서 울부짖음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일이다// 침묵이 바람처럼 파고든다/ 몸 안의 말들이 모래처럼 슬어간다// 허기진 여우의 검은 눈빛이 더욱 빛나고/ 지도와 경계가 의미를 잃어 모래 알갱이에 파묻힌다// 작은 모래 한 알이 거대한 사하라를 옮긴다//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 심우기
커다란 호박잎 그늘을 사랑한 것이/ 개미만은 아니었네/ 가난한 시인도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먼 산과 바다로 갈 형편이 못 되는 시인은/ 마을 텃밭 울타리에 올라온 호박덩굴을/ 개여울 지나는 줄기 끝/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돌쩌귀에 걸친 해거름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놀다/ 등 뒤를 미는 노을에 마지못해 웃으며/ 앞길을 비춰주는 낮달에 이끌려 나오네/ 가난한 시인에게/ 당연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내와/ 떡잎 같은 아이들 있는 집으로 돌아가네/ 호박잎은 무럭무럭 커가고/ 그늘은 그늘을 사랑할 줄 아네//


말뚝 / 심우기
어린 흑염소에겐 힘은 말뚝이다/ 뿔이 나고 털이 억세져도/ 말뚝의 끈을 넘지 못한다/ 강한 뒷다리와 넓은 어깨로도/ 뽑지 못하는 말뚝은 신/ 늘 지는 싸움인 줄 알지만/ 고집은 염소고집/ 돌아와 빙글빙글 돌다/ 제 목을 감아 옴짝달싹 못하게 될지라도/ 갈 데까지 가고 본다/ 밧줄의 길이만큼이 세상인 염소에게/ 말뚝은 세상의 중심이다/ 권력이다/ 그래도 염소는 뱅글뱅글 돈다//

신발 안의 아기 새 / 심우기
새끼 새가 버려진 신발 안에 들어 있다/ 둥지처럼 몸을 싣고 가는/ 무엇을 품을까 섬 안의 섬처럼/ 둥둥 떠도는 새/ 부러진 나뭇가지 물고/ 속을 채워봐도/ 빈 구멍 숭숭한/ 신발이 새를 물고 간다/ 신을 신고 날아가나 다 잡힌듯한 새/ 검은 알을 품은 새/ 속도 모르고/ 껍질을 깨고 여린 털의 빨간 속살을 가진 새/ 신발 안에 어미 새는 없고/ 빠진 깃털과 보풀만 쌓여 있다/ 어느 작은 별/ 불빛 비치는 누군가의 처마 끝에 앉아/ 이 밤 쉬시고 계시는가/ 종일 울어 둘러봐도/ 보이지 않네//

운구 / 심우기
땡볕 속 개미들이/ 죽은 말매미의 울음을 지고 간다/ 장의행렬처럼/ 한 줄로 줄서서 간다// 검은 상복을 입고/ 허기진 허리로 슬픔을 입에 물고/ 뙤약볕 길을 간다//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기울어진 산 그림자가 지워질 때까지,//

결빙 / 심우기
맑았던 물이 얼어 물속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의 눈물도 단단한 결정으로 굳어버릴 때//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서로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단단해진 뼈만 쓰다듬는다/ 쿨렁거리는 피와 살이/ 눈물을 만든다/ 집 나간 사람 집 지키는 사람 혼자 노는 아이// 서로의 길 가고 있을 때/ 결국 혼자라고/ 말끝 하나에도 자갈을 물리는// 실금의 그것은 무엇?// 달그락거리는 자물쇠/ 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 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

종소리 / 심우기
그느드 르므브 스으 하고/ 어느 산사의 종소리 ㅡ로만 퍼져 나가면/ 멀리 각과 변으로 서 있던 산들이/ 느슨한 180도 한 선분으로 눕는 밤/ 그 선 위의 모든 것을 까만 물감으로/ 북북 칠하며 산 하나를 넘고/ 또 산 하나를 넘는/ 지치키 티피히이 하고/ 어느 도심 속 종소리 l로만 쨍그랑거리면/ 벽을 넘고 집 하나를 타고 넘어 이제는/ 커다란 빌딩도 훌쩍 넘어/ 널찍한 광장까지 이르러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깡충깡충 건너가는/ 몸이 걸친 옷 조각/ 실 오르라기 한 올 한 올 풀어져/ 소리를 타고 ‘ㅡ'와 ’l'로 부서져/ 뼈와 피로 도로를 넘고 길을 건너/ 이명으로 울리는 종소리/ 조그만 가슴 속/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그지느치드키 으 이/ 뎅 뎅 응하고 쨍그랑 댕그랑거리며/ 텅 빈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어느새 꽉 채우고/ 여운으로 터져나오는 … l l l//

괄호 / 심우기
꽃술 속의 괄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괄호/ 계곡과 산을 잇는 괄호/ 건너갈 수 없는 강폭을 메우는 괄호/ 코와 가슴 사이의 괄호/ 하늘의 푸른 선 하나를 끌어 와 벌린/ 대지와 하늘 사이의 환한 괄호/ 괄호 안엔 돼지가 산다/ 도시 비둘기가 구구대며 둥지를 튼다/ 나비가 날개에서 꽃가루를 괄호 안에 털어내고/ 배 밑창이 간지러운 꿀벌들이 괄호와 괄호 사이를 날고/ 딱딱한 돌덩이 암흑이 미세물질 잔뜩 묻힌 괄호/ 괄호 안에서 내가 방긋 웃고/ 괄호 속에서 꽃들이 튀어나온다//
* 월간 《시문학》 2011년 9월호 신인우수작품상 당선

첫눈 / 심우기
슬픔의 알갱이가 시효를 다해/ 옅어져 사라지기 전의 간절함이 눈이란다/ 혀를 내밀어 맛을 보아라/ 손바닥을 펴서 받쳐보라/ 눈을 커다랗게 떠서 나를 눈동자에 가둬 보라/ 반짝이는 차가움을 가려진 이마에 새겨라/ 눈이란다 첫눈이란다/ 몰래 간직한 그리운 마음이란다//

이교도 / 심우기
모든 기도는 신에게로 가는 계단/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기를/ 기도 중의 눈물은 마음에 찬 슬픔을 흘려보내는 것/ 위대한 이교도는 우상이라 부르는 커다란 돌과 오래된 나무를/ 유일의 해와 달, 짐승과 바람을 찬미한다/ 우상이 사라져도 우상의 그늘은 가슴에 남는다/ 어둠을 견디는 힘이며 추위 속의 영감이 믿음이다/ 산과 산이 만나 협곡을 이루고 강과 강이 만나 운무를 만든다/ 안개의 베일을 벗기면 돌이 부르짖는 소리와 땅이 울부짖는 소리있다/ 귀와 눈이 열려 광인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초목/ 어둠은 어둠 속에 있되/ 빛을 버리지 않으므로 불꽃의 집이다/ 어둠은 신성한 영(靈)이다/ 신성의 먼 기원은 안갯속을 지나는 것이며/ 오랜 기다림이며 오래된 미래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담아 침묵으로 묵힐 때/ 세상엔 사단의 길이 성사된다 저마다의 신으로 가득하다//

홍방울새와 개똥지빠귀가 무슨 말을 나눌까 / 심우기
보리수 다 떨어지고 이파리 짙어지면/ 이파리 사이 숨어있던 홍방울새와 개똥지빠귀가 서로 안부를 묻지// 너는 마음 어디까지 닿아 내려 보았냐고/ 정박하지 못한 영혼을 입에 물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그렇게 한철 여름은 폭염으로 가고/ 말라비튼 나뭇가지만 바스락대는 숲 속에 길을 잃고 눈먼 새 되어/ 공중의 하늘을 거꾸로 날다 보면/ 나는 너의 웃음을 듣고 너는 나의 울음을 듣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동기들과/ 부화하지 못해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슬픈 이야기가/ 바닥의 세상에선 소문처럼 떠돈다지// 나귀와 노새의 만남처럼 그렇게/ 아무렴 우리의 밀담 같을까/ 아무도 너와 나의 노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야//

새들의 저녁 / 심우기
저물녘의 새들이 노을을 쪼고 있다/ 강이 흘려보낸 생을 고개 숙여 반추한다/ 산들은 침묵의 불 밝히고/ 다 뜯긴 노을은 산 너머로 가라앉는다/ 시간의 바퀴에 휘감긴 물뱀/ 몸이 찢겨도 그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죽어도 한 번 문 것을 놓지 않는다/ 새들은 날며 먹지 않는다/ 저녁을 태우는 솔가지 연기가/ 시끄럽던 새소리를 재운다/ 서서히 길을 지우는 정적/ 어둠이 새 귀를 막는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 환영처럼 출몰하는 빛/ 역류의 강을 따라 침식하는 이포둑/ 일렁이는 침전물/ 새들이 낮게 난다/ 세상에 부유하는 것들을 물고서//

거울 속의 소음 / 심우기
1// 숫눈에 놓인 발자국 위의 발자국/ 빙원의 눈밭에 북극곰 세 마리가 먹이 사냥 길을 그린다/ 얼음 바다에 갇힌 고래 한 마리 얼음 피를 흘린다/ 왜 모두 소음이 될까//
2// 아침 화장하고 옷단장을 한 후 거울에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대답 없는 거울/ 어차피 듣고자 하는 것이 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거울/ 질문하는 사람은 답을 안다/ 누군가에게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3// 소리는 밝은 데보다 어두운 곳에서 잘 들린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린다/ 소리는 빛에게 눈을 감는다/ 거울이 문을 닫는다//
4// 치렁하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거울 속에 끼었다/ 그냥 그대로 자라나는 머리칼/ 있는 그대로를 반사하고 싶은 속성과/ 후면의 속을 투영하고 싶은 욕망이 거울 속에 꽉 차 있다/ 시간이 부옇게 거울 화면을 가린다//
5// 입은 다물었어도/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생각/ 단순해지려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 속/ 한 알의 씨앗 같은 남자/ 입을 틀어막고 왜소하게 서 있다//

백색 소음 / 심우기
소음이 지켜주는 정적에/ 아버지는 들어 있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시력이 다르듯이/ 왼쪽 귀와 오른쪽 귀의 세상이 다르다/ 점점 더 침묵의 바다로 빠져드는 아버지는 말을 잃고/ 손동작과 눈치로 세상을 읽는다/ 사람의 낯빛을 훑고/ 말보다도 속내를 먼저 파악하는 바람처럼/ 마음을 먼저 읽어낸다/ 엎질러진 물을 담지 못하듯/ 소음 사이로 스며들어간 청력/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을 만든다/ 톡톡톡/ 수면에 물비늘 펴지는 소리가 엷게 보인다/ 소리를 눈으로 본다//

도마뱀 / 심우기
푸른 거죽의 미묘한 꼬리를 가졌다 매일 잘라내도 새로운 꼬리를 갖추고 출근길에 오른다/ 묵은 외피를 비듬 털듯 문지르고 나오는 아침 저마다 번들거리는 얼굴// 아침마다 전기 10리터는 반드시 먹고 나온다 반짝 켜지는 휴대폰 형광으로 빛나는 도마뱀 노트북 컴퓨터가 스팟하고 꺼진다 핑하고 티비가 튕겨나간다 막 도착하는 전철은 거대한 전기 먹는 하마이다 어둠의 구멍에서 나온다.// 마구 꽂아넣은 콘센트로 벽의 이곳저곳을 쑤셔댄다 땅과 하늘을 날아온 전깃줄 잘라도 잘라도 새로 잇고 새로 자란다 검버섯이 마치 도마뱀의 원래 무늬였던 것처럼 회색 밀림의 숲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넘쳐나는 도마뱀들// 네온 불이 영원한 적이었던 것처럼 몰아세운다 휴식을 모르는 게임 지치고 졸린 눈알이 하품하고 멍한 눈빛으로 자판과 모니터를 본다 찌든 피부에 전자파가 날름거린다// 클릭하면 한 인물이 죽고 새로운 사건과 비리가 터진다 클릭클릭 너무 재미있는 세상 진지함이란 읽지 않은 종이책과 같다 정점 부분만 무한 반복으로 나오는 음악처럼 Let it go 무조건 전진 가는 거다// 툭 치면 느릿하게 뛰쳐나오는 도마뱀 전깃줄로 온몸을 칭칭 감고 반쯤 감은 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아는 척한다 선지자처럼 방금 보인 꼬리를 냉큼 자르고 도망친다 똥 싸놓은 개처럼 사라진다//

꼽추 춘자 / 심우기
반쯤 접고 세상을 본다/ 그림자도 딱 반이다/ 바닥이 품은 낙타의 등,/ 반지하 방에서 엄마 기다리는 아이에겐/ 해갈하는 물이었다// 하루를 꼬박 접었다 펼쳐 보이는/ 저녁이 오면/ 초승달을 베어 문 사과 빛이 반짝이고/ 굽은 등을 눕히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반지하 어둠 속/ 잰 발걸음으로 짧게 길을 끊는다//

설국열차 / 심우기
차가워 보이는 하얀 피부는/ 얼음 호수 같은 손등과 팔에 파란 심줄이 비친다/ 밤으로만 가는 기차는 늦은 여행을 하는 차창 안의 사람을/ 소리 없이 타관 객지로 나른다/ 흐릿한 객실 불빛 사이로 마른기침이 튀어나오고/ 밖은 어두워 건너편 의자에 앉은 여자의 뿌연 얼굴/ 차창에 촛불처럼 타오르며 흔들린다/ 어둠에 어둠을 더하는 터널 속/ 기차가 가진 온갖 소리를 되새김한다/ 모르는 여자의 피곤한 머릿결을 보면서/ 간음 같은 상상을 하며/ 생채기 같은 눈송이 떨어지는 겨울밤을 간다/ 입김에 창문이 가려지면/ 흔들릴 때마다 뜨거운 눈물로 닦는다/ 흘러내린 자국 따라 하얀 여자가 차창에 비추고/ 남자는 얇고 부드러운 살결을 사랑하지/ 닿으면 지워질 것 같은 여자/ 눈 녹듯 꺼질것 같은 그림자/ 백야의 밑부분을 서서히 채워가는 시간으로 기차는/ 밤을 태우며/ 깨지 않을 꿈을 싣고 설국, 먼 땅으로 간다//

 

의자의 꿈 / 심우기
같은 나무이기에 의자는/ 견딜 수 없는 햇볕이 쬐면 나무처럼/ 몸을 웅크려 새싹이 나길 늘 기다린다// 발아래 뿌리가 자라/ 땅속 깊이 박히기를// 꼭 기다리는 누군가가 반드시 찾아와 앉을 거라 기대는/ 하지 않지만 영원히 앉아 있는 것은 없다/ 저 무거운 적막과 허공/ 그것을 앉히고 공원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는 여름을 본다// 자라지 않는 의자/ 누군가에 이끌려 자리를 바꿔보지만 그의 꿈은 아니다// 오늘 밤에도 바람은 불고 의자가 높고 깊이 자라는/ 가위눌린 저녁이 찾아온다//

그 개는 / 심우기
저 커다란 개를 아파트 베란다에 키운다고/ 저 긴 혀와 뽀족이 세운 두 귀/ 노란 두 눈동자의 저 셰퍼드를/ 입마개를 하고 긴 줄에 묶인/ 그렇지만 당당하고 날렵한/ 깎인 발톱으로도 엘리베이터 벽에 흔적 남길 수 있는/ 윤기나는 머리털을 쓰다듬을 때마다 뻗치는 소름/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할까 봐/ 성대 제거 수술을 했지 그 개는/ 도대체 그 개가 말하고 싶을 때/ 배우지 못한 몸짓으로 하는 이야기를 가르쳐나 준 걸까/ 화가 나 짖거나 짝을 부르지 못하는 그 개는/ 주인을 찾거나 주인이 그 개를 찾을 때/ 들을 방법은 서로 없지/ 낑낑대며 신음 같은 소리만 내며/ 깨지지 않는 베란다 유리벽을 기분 나쁘게/ 두 발로 날카롭게 긁고 있어 그 개는//

없는 사람 / 심우기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은 원래 없는 사람이었죠/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실제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사랑도 그래요 잡히지 않는 거잖아요/ 나도 나를 믿지 못합니다./ 매일 조금씩 기억을 지우며 사는 90 넘은 치매 할머니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나를/ 나는 없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 걸고 이야기하고 손뼉치고 춤을 춰도 없는 사람입니다/ 굳이 기억되려 하는 게 우스워요/ 글과 그림 음악이 그렇죠/ 얼굴은 없고 이름만 남기고 싶대요/ 어제는 코를 잃어버리고 오늘은 입도 잃어버렸는데/ 내일은 뭐가 남을지 몰라요/ 여하튼 있는 대로 기억하기로 해요/ 없는 사람이 따스하게 포옹해줄게요//

첫사랑 / 심우기
쑥국새 한 마리/ 꽃밭에 숨었다/ 날개 다친 새인지/ 다리를 저는 새인지/ 아니면 배고픈 새인지/ 꽃밭을 휘저어 봐도/ 날아오르는 것은 없고/ 종일 기다려 봐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본 것이 맞는 건지/ 입맞춤을 하였는지/ 의문이 살짝 드는 저녁 어스름/ 발자국이 눈에 익다/ 새는 보이지 않고/ 꽃밭에서는 울음만 피어난다//

약술 / 심우기
커다란 병에 뱀이 들어가면 사주가 되고/ 도라지가 들어가면 도라지주/ 더덕이 들어가면 더덕주다/ 지네와 거미도 술이 되고 말벌과 벌집이 통째 들어가면 벌주다/ 35도 강소주에 담겨 약이 안 될 것이 무엇이랴/ 하물며 오가피와 맥문동 지리산 하수오까지/ 인삼주의 인삼이 용트림하듯 들어있다/ 벌거벗은 여인의 몸처럼 배배 꼬인 인삼의 몸/통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약술되어 취하게 한다/ 약소주에 잠겨있는 사람/ 홀딱 벗고 술병으로 들어가 취해 결국 약이 된다/ 술 권하는 세상 흔들린다/ 자 나를 맛나게 들이키시라/ 그리고 꺼이꺼이 크게 울으시라/ 말 없는 바다와 하늘을 보고 원 없이 그저 울으시라/ 술에 절은 사람을 술이 마신다/ 그것은 무슨 술이 될까/ 술 푸게 한다//

메아리 눈물 / 심우기
오늘 들으면 내일도 돌아와 있을 것 같은,/ 어둠을 횡단하는 흰 새들의 지저귐만 무장 반복되어/ 뱉은 말 도로 삼키지 못해 다시 나오는/ 색조화장을 하고 덧씌우는 볼 터치,/ 답 없는 인생의 쓸쓸함 같아서 매일 보는 얼굴/ 건너가는 넓은 호수고 긴 강을 적시는 눈물 같아서/ 낡은 슬픔으로 매일 저물녘 돌아가는 떼 새의 날개에 얹혀/ 목소리만 남아 떠돌이 구름 모습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와 눕는/ 낯선 도시 빌딩 같고, 잊힌 신화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몸을 보며,/ 메아리의 물결, 산을 돌고 넘어 길어진 나무와 바위가 떨던//

백화 / 심우기
복 지느러미 태워 뜨거운 정종에 띄운다 선술집 창밖 흰 눈 펑펑 날리고/ 껍질 타는 향긋한 냄새 퍼진다 뱃속 뜨듯해지고 눈물 글썽거리는 저녁// 온몸을 돌아 불쑥 올라오는 서러운 청춘/ 젊은 너는 가고 늙은 나만 남는구나// 나도 아이였던 적이 있던가/ 첫 키스에 설레던 날이 있었던가 기억 지우듯 눈은 차곡차곡 쌓이고// 출렁거리는 마음따라 눈은 밟히고 한 잔의 술에 차가운 심장은 데워지고 어두운 하늘에 흰 꽃이 핀다//

촉에 관하여 / 심우기
당신은 그것을 불빛이라 부르고/ 누구는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느낌 그 이상의 것이라 부른다/ 그것은 말랑말랑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지만 예리하다/ 불식 간에 파고드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어/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에서/ 전생과 후생을 엿본다/ 죽은 듯한 가지에 촉들이 피어난다/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빛의 밝기라고 보면 억측일까/ 마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다가 만 사이엔/ 촉이 진즉 왔다갔다고 보면 된다/ 어둠 속을 자꾸 헤집다 보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있다/ 하늘에 그물을 던져도 걸리는 것/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고 연緣이라고 불러도 좋다/ 뿌리에서 뻗어나온/ 조촐한 밥상이라고 불러도 좋다/ 촉이 오는 저녁이 몰려온다//

이유 없는 낙관 / 심우기
내일은 아마 좋을 거예요/ 이유 없는 낙관으로 오늘 하루를 보냈죠// 아니 달라지는 건 없어 내일도 똑같을 거야// 햇빛이 조금이라도 방향을 트는 만큼이라도 좋을 거예요/ 내일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밀려오는 새 물결처럼 그렇게요// 달라지는 건 없어 괜한 망상이지// 우린 꿈꾸는 만큼 다시 살아나는 거지요/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란 세상의 혁명처럼 지금의 눈물이 마르듯이요// 꿈은 의미 없는 허구일 뿐이야/ 내일의 태양이 오늘의 꿈이듯/ 우린 늙어가고 죽음으로의 느린 여행을 하는 중 아닐까// 아무도 살지 않는 달과 화성에 내딛는 첫걸음처럼/ 죽음도 모르는 세계로의 즐거운 여행이었으면 해요// 그렇게 이유는 없어요/ 살아있는 만큼 내일은 좋아질 거예요// 내가 없어도 꽃은 피고 별은 돌 듯이요//

경주남산 / 심우기
경주 남산/ 불산 계곡따라 걷는/ 나의 번뇌/ 남천 얼어붙은 실개천에/ 빠듯하게/ 흘러 나오는 개울줄기/ 알듯 모르는 듯/ 길찾아 오르다보니/ 세월이 닦고/ 바람이 갈아 만든/ 아기부처/ 할머니 보살/ 동그랗고 조막조막만하게/ 산 중턱바위에 숨어 있네//

9월 / 심우기
옥수수가/ 산비탈을 은빛 물결로 이루고 산을 밀고 온다/ 산자락의 노란 꽃들이 손 흔들면/ 하늘을 나는 기러기 깃털을 간다/ 붉어지는 고추를 따/ 가을별에 말리면 모든 것이 다 익어/ 강이 점점 깊어간다/ 풀이 마르고 소 먹일 풀을 베는 가을이 시작된다/ 그래서 조용한 벌초 시간이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크게 들리고/ 어린 밤들이 땅을 톡톡 건드리는 달이다/ 아주 기분 좋게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에 달이 춤을 춘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 나무껍질 갈라 터지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모든 열매가 끝맺음을 한다//

손톱을 깎다 / 심우기
손톱을 깎는다/ 오른손이 왼손을/ 왼손이 오른손을/ 차례로 한 번씩/ 오른손이 오른발을 깎는다/ 왼손이 왼발을 깎는다/ 오른손과 왼 발가락이 닿지 않는 거리/ 이것은 오심誤審이고 오래된 원한/ 숨이 턱 막히고 배가 눌린다/ 기침을 한다/ 탁 튀어나오는 발톱/ 어디로 튈까/ 방향 모르는 신문지 늘 빗나간다/ 손과 손만이 사이 좋게 나눠 깎는다/ 손과 손이 나누는 이 절단은 다정이다/ 단단한 손톱 밑/ 그곳은 푸른 지점 서늘한 곳이다/ 바늘로 푹 찌르면 피가 펑펑 나고/ 눈이 뽑히는 고통이 있다/ 내 몸의 지뢰밭이다//

신성한 숲 / 심우기
나무가 되느니 커다란 숲이 되겠어/ 사라진 당신이 돌아와 머물도/록 함께 떠났던 나뭇잎은 언젠가 돌아와 다시 피어나겠지/ 비록 늙어 알아볼 수 없어도/ 눈멀고 귀먹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느낄 거야/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다시 나에게로 묻는 질문과 대답 속에/ 숲은 자라 더 무성해지겠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뻗어나간 이름 모를 길을 따라가다/ 막다른 길이 되기보다/ 작은 연못 하나 품은 숲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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