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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시인
△전북 군산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9년 《정신과표현》 등단(2009)
△시집 『침향』,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침향(沈香) / 이화영
하롱베이를 다녀온 그가 팔찌를 내민다/ 촘촘히 몸 맞대고 있는 흑갈색 나무 구슬이 눈에 들어온다/ 상처의 진액으로 제 아픔을 동여매는 나무// 농라를 쓰고 하노이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한여름에도 차디찬 내 손끝을 생각한 마음이 애틋하다/ 희귀한 것들은 때로 모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휑한 손목에 팔찌를 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가 나를 휘감는다/ 섬뜩하다/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검은 윤기가/ 이따금씩 눈빛도 낯익다/ 수천 년 전 혹 나는 침향나무가 아니었을까/ 내 앞에 한줌 구슬로 현신한 저 흑갈색 원형은/ 울울창창한 숲에서 나의 무심에 베인 그 나무는 아니었을까// 늦은 밤 도마뱀의 꼬리 잘린 생각 하나 잡는다/ 향이란/ 한 방울의 아픔마저 거두어/ 끝내는 숨구멍을 온통 점령하는 것// 조였던 팔찌를 벗는다/ 방향芳香을 끝낸 구슬이/ 살짝 부풀어 오른 손목에 자국을 남긴다/ 누워 있는 비로자나불이다//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 이화영
동백의 이마 위로 바람의 숨결이 흘러갔다/ 잎 새의 무릎 위로 날아든 부고/ 술렁이던 숲이/ 일순간 오래된 손톱을 세워/ 서둘러 간 젊은 호흡을 맹렬하게 움켜쥐었다// 훗날을 맹세하는 법을 잊은/ 서늘한 이름이/ 이승의 저물 녘 3악장을/ 섬 밖 풍경으로 연주한다// 수북수북 썩어가는 무릎의 악보에서/ 갓 핀 여린 것들의 얼굴이/ 지워지고 사라진다/ 휘봉이 솟구칠 때마다 아득해지는 거리/ 한 때 지척이었던,// 꿈길 밟은 몸 시름 깊어지듯/ 오늘 따라 유난히 동백 붉은 이유는/ 지난 밤 자시를 넘지 못하던 새의 울음/ 동백에 쏟았기 때문일까/ 검은 구름이 울울창창 밀려온다/ 파르르 떨던 꽃송이 툭, 숨을 놓는다/ 이른 아침/ 물새의 맑은 첫 숨결/ 옆구리에 깊게 불어 넣은 후였다//
몸속의 사원 / 이화영
당신과의 인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된 후// 내 몸속에 사원이 생겼습니다/ 사원의 누각에 걸린 종에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바느질하듯 정으로 새긴 형상입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생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한동안 버려두었던/ 종채를 찾아 누각에 올라갑니다/ 당신의 음성이 종소리 되어 울려 퍼져 나간 자리마다/ 우묵한 우물이 파였습니다/ 우물이 찰박찰박 깊어질 때/ 벌레와 몸을 기댄 풀잎이 고요를 젖히며 일어납니다/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애무와 애원사이 / 이화영
스콜 한차례 지나간 인도 열대우림 속/ 코브라 숫뱀이 여왕 뱀에게 다가와 유려한 애무를 펼친다// 연 이틀 달무리 피고 질 때까지 다른 수컷과/ 수십 번 날아오른 여왕 뱀의 나른한 표피는/ 더운 입김을 피해 느릿느릿 도망친다// 긴 몸만큼이나 긴 거부/ 숫뱀의 관능의 열기가 목울대 쪽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순간,/ 핥던 목에 독니를 콱 박는 숫뱀// 혈관을 타고 번지는 여왕뱀의 마지막 결기어린 毒白/ -죽음이 인연이었다면/ 이렇게라도 끝내서 다행이야-// 정글의 하루는/ 애무와 죽음이 자웅동체로 내린다// 얼굴 붉어지던 심장의 고동 소리도/ 단단한 가슴이 주던 달콤함도/ 본능의 행성은 이제 캄캄하다// 짐승의 始原은 송곳니와 독/ 애초부터 짐승에게 관념 따윈없었다// 애무와 애원사이에는/ 당신도 나도 모르게 키우는 독니 하나있다// 해질 무렵이면/ 꽃들은 상처를 원하고/ 그것들은 더 빛이 난다//
come on virus / 이화영
나포 강변을 찾은 날/ 오리떼 발목에 금속 링이 붙어 있다/ 시베리아를 떠돌다 온 여린 발목과 바람을 읽어 버린 날개짓은/ 서해의 냉기를 비웃듯 울음을 남기고/ 들판에서 얻어먹은 저녁을 자유로운 비상으로 카메라에 남긴 채/ 바람난 들고양이를 경계하며/ 선잠 자다가 총알 맞듯 봄을 맞겠지/ 오염된 꿈속에서 죽은 벗들을 위해 해질녁에 진혼곡도 부르겠지/ 눈을 뜨면 번들거리는 바다/ 그 위로 태양은 뒤척이며 떠오른다/ 무수한 깃털 속에 무수한 죽음을 묻고/ 기름 엎은 배들은 멀쩡히 항구를 드나드는데/ 땅강아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의 진혼곡에 내 손과 혀가 굳는다// 컴 온 베이비,/ 눈에 뵈는 게 없어 너는 좋겠다/ 내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새들이 흘리고 간 깃털이나 만지며 콜록콜록,/ 언젠가 감기에 걸린 내게 그가 혀를 밀어 넣으며 속삭였던 말이/ 허공으로 비말飛沫처럼 튀어 오른다/ Come on virus, kiss me please!//
새를 만나다 / 이화영
새 울음이 들려와 빨래를 널었습니다/ 펄럭이는 자락이 작은 깃 같아서/ 가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대상은 다정합니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은/ 빨래사람 짓을 합니다//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이 습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입니다// 새의 이니셜은 고독합니다/ 나는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할 것입니다// 빨래의 오른 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먹었습니다// 동이 터 옵니다/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 며칠 빨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소리 / 이화영
4시 50분 쯤 푸르스름한 여명이 사위를 물들였다./ 곧이어 새들의 요란한 노랫소리가 몰려왔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텐데 귀청이 찢길 것처럼 발성이 크다./ 새소리를 표현할 때마다 곤란해지곤한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구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운다/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상사랑이로구나”// <너영나영>이라는 제주도 창민요이다./ <오돌또기>, <이야홍타령>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민요이다./ ‘너영나영’은 제주 방언으로 ‘너하고 나하고’뜻이다.// 흥겨우면서도 슬픈 가락이다./ 사방이 환해지면서 새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새들의 아침인사가 끝나가고 있다.// 글쓰기가 경계에서 시작하듯 새소리도 경계에서 시작한다./ 풍경과 소리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실존의 경계이다./ 어제라는 경계에서 시작한 오늘이 왔다./ 하루가 밝았다.//
새는 / 이화영
엇박자 날갯짓이 유리벽에 부딪혀 파닥거린다// 갇힌 순간/ 바람과 공기의 흐름을 잃은 새는/ 계단을 흐르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짹짹,/ 금세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데/ 새는 생각을 찢을 수 없다// 옥상 문을 열고 빗자루를 들어 새를 몰았다/ 뿔 없는 작은 짐승이 몸을 돌려 포효하듯/ 빛을 향해 날아갔다//
37도 2부 / 이화영
사랑할 때와 임신한 여자의 아침체온은 같다// 성스럽기도 하고 외설스럽기도 해서 입 밖으로 뱉어내기 조심스럽다 북극 이글루에 사는 이누이트 족은 남자 손님이 찾아오면 하룻밤 부인을 내어준다 뱉은 입김 쩍쩍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은수저에 상다리가 부러지는 밥상은 아니지만 지상에서 가장 붉은 심장을 보시한 뜨거운 온도를 내어주는 것이다// 종족 보존을 위한 이누이트 족 남자의 마음은 밤새 하얀 고드름 창이 되었을 거다 강물이 찰랑대고 흙이 부풀어 바람이 달아 지는 봄이 오면 여자의 둥근 배 위에도 봄풀의 뿌리가 자랄 거다// 북극 반대편 보일러가 지글 지글 끓는 방에 틀어 박혀 고독을 믿지 않는 그들의 생존 방식을 영상으로 답습하며// 문득, 궁금하다/ 내 남자의 체온은 하얀 결정체 몇 개 쯤 맺혀있다 녹아내릴지//
달의 정원 / 이화영
오랜 시간 땅거죽을 기어 없어진 다리/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기억하지 못 한다/ 태양아래 벗어놓은 허물처럼 오그라들어 잠든/ 숲속의 정적도 기억하지 못 한다/ 빛이 들거나 어둠이 깔리거나 자박 자박 얕은 물길을 통해/ 누군가 건너오는 소리// 나는 너에게 돌을 던질 수 가 없다/ 달이 차면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욕망/ 가시 박힌 상처를 더듬는 일 따위는/ 처녀를 버린 후 부터 잊은 지 오래/ 역광으로 터져버린 박주가리의 씨방이나 기억 하라지// 비릿한 달빛이 거울에 박힌다/ 물에 녹인 아스피린을 먹고/ 긴 목을 흔들며 모딜리아니의 여인이/ 동공 없는 파란 눈으로 내 아이가 자란 곳을 들여다본다/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숨긴 암록의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다/ 깜깜한 숲에 또 다시 달이 뜬다/ 그곳,/ 이브가 쫒겨난/ 무화과나무가 출렁이는//
종이컵에 권고함 / 이화영
야무지지 못하다고/ 반짝이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아요/ 진열장위에만 얹혀있는 것이 더 비참한 운명/ 쓰이고 나서 버려지는 것이 어디 당신뿐인가요/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 단단한 유리가 못 된 것을 슬퍼하지 말아요/ 그래도 당신은 행성을 떠돌다가 돌아온 먼지 가운데/ 미량의 생기를 얻어 나무가 되고/ 울창한 숲을 이뤄/ 한때 나비들에게 어깨를 내주어 지친 날개를 쉬게 했죠/ 희고 얇고 가벼운 당신의 몸에 커피를 풀어놓고/ 나마저 거기에 풀어 놓으면 검고 얇고 축축한 악마의 영혼이/ 내장 같은 미로를 빠져 나가요/ 당신은 어쩌면 사수좌에서 쫓겨난 별인지도 몰라요/ 지금도 태어난 곳을 그리는 당신,/ 그러니 함부로 폐기되진 말아요/ 농담 같은 일회성을 끝내고 계속 부활하든지/ 꽃씨를 받아 빛 고운 창틀에 올려 지든지/ 메마른 사람의 입술에 나팔꽃을 피우시던지//
당신이 누구든 –지렁이 / 이화영
비 그치고/ 축축한 콘크리트의 냉기 속/ 찢긴 옆구리로 기억이 새나간다// 향기가 수상한 이 숲은 어디인가/ 홀려 홀려 이곳에까지 이르렀다/ 마로니에 꽃이 흘리는 흰 피를 느릿하게 문지른다/ 달빛에 섞여 번들거리는 몸에 고요가 내린다/ 땅의 음성이 희미해져간다 머리가 혼미해진다/ 한때 풍성했던 늪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살던 흙속에서 깊이 잠들 수 있다면// 부드러운 빵의 속살같이 찢어지는 풍요로운/ 죽음은 내게 주어지지 않는 걸까/ 이 숲의 모든 향들이 낮게 아래로 흐르는 소리/ 살고 싶어 땅을 팠다 일미리미터도 열리지 않는 딱딱한 땅/ 몸마디 붉게 부풀어 올랐다// 하등인 내 머리 쪽에 둥근 관을 새겨 주신 뜻은/ 무던히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지령/ 태양이 몰려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야 한다 늪으로…/ 마로니에 꽃이 낙혈을 견딜 때쯤/ 나는 흙으로 돌아가 있을까/ 포복의 한 생에 덧붙여 말하노니/ 내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기 전/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단말마로 나를 관통해 줘, 당신이 누구든//
Mate / 이화영
수피가 너무 두꺼워 닿을 수 없는/ 수피가 아늑한 당신을 mate라 하겠다/ 당신을 우려낸 시간이 캄캄하게 말라간다/ 우기의 첫 돋움과 눈 맞춤/ 단 한 번 잊은 적 없어/ 그날 그 숲을 기억하며 지글지글 주문을 왼다/ 당신을 음용하는 방법은 적도를 기억하는 붉은 열매를/ 먼저 이해하는 일/ 찻잎 맛을 가늠하는 어리석음은 목젖에 묻는다/ 당신의 줄기에 얹혀 노닐다/ 당신 무릎에 귓불을 누인다/ 무량한 영겁의 인연이 열리나 가히 풀어내지 못하고/ 무릎의 눈물을 먼저 해독한다/ 뿌리 없는 업들이 뿌리를 찾아 돌아간다/ 끊임없이 다른 芳香으로 푸릇 우려 나는 관계를/ 나는 비껴갈 수 없다/ 물 불 별 꽃으로 들던/ 환각의 갈피에 있는/ 저 줄기와 잎에 대한 편집증이 시간이 흐를수록/ 내 입술에 *가만하다//
* 가만하다-조용하다. 내밀하다. 은밀하다
젖은 캣츠 아이, 릴리의 안부가 궁금해 / 이화영
라일락 그늘 아래 내 고양이 보러간다/ 이 길은 서천(西天)에 드는 길/ 흰 빛이 감싸고 있는/ 태생부터 눈빛 선한 이들이/ 무릎을 맞대고 물푸레나무 이파리로 흔들리는 곳/ 사랑과 이별을 한 날에 치른 내 고양이 릴리/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솟구치던 꽃들의 열기가 식고/ 목요일에 바람이 불면 라일락 나무에 수액이 차오를까/ 우연하게 꿈틀거리는 잔등이 눈부신/ 릴리의 흑요석 눈동자는 극약/ 텅빈 눈이 아파요/ 저 눈을 내 혀로 보드랍게 핥아주면/ 그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만나 따뜻한 숲이 될까/ 서걱거리는 몸짓들이 잎처럼 나부낄까/ 목을 쓰다듬어 주는데/ 낮은 음률이 손길을 타고 온다/ 타던 꽃잎들이 쏟아지던 날/ 날 두고/ 어둠 속으로 어둠 되어 떠난 길은 안녕한지……/ 젖은 캣츠 아이/ 릴리의 안부가 궁금해//
너… 가는 거니 -푯대 / 이화영
뜨거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에서/ 나가는 여자의 허리 아래/ 나비가 앉았다/ 물에 젖은 날개가 무거운 것인지/ 날아가는 법을 잊은 것인지/ 한 쌍의 더듬이가 실룩거리는 여자의 엉덩이 위에서 살짝 뒤틀린다/ 나비를 훔쳐보던 나는 문득 궁금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일까 아니면/ 한 남자와 뜨거운 맹세일까/ 먹물을 먹은 침이 여자의 몸을 촘촘히 건너가며/ 골반을 수놓을 때/ 여자는 숨 막히는 통증에 몸을 비틀었을라나/ 몸의 푯대를 나비로 세운 그녀의 중추에 사내의 자국이 깊다/ 샤워를 하는 여자의 몸에 거품 꽃이/ 타래처럼 흘러내린다/ 목욕탕이 꽃밭인 듯 향을 좇아 갑자기 늘어난 나비 떼/ 그녀를 좇던 내 입술이 나비를 부르자/ 말라붙어 보이지 않던 나비의 겹눈이 커지며 나를 돌아다본다/ 습기를 먹은 나비가 카르마(karma)의 눈 속으로 들어간다// 너… 가는 거니?//
우리 엄마 / 이화영
부쩍 자주 말하는 칠순 엄마의 여름,// 젊은 날 노름에 정신 팔린 늬이 아버지가/ 날 얼마나 거시기 했는지 아냐/ 삭신 녹여 부은 곗돈 떼먹혔다고/ 눈만 뜨면 날아오던 구박은 말로 다 못 하것다// 텅 빈 쌀 도가지엔 바람만 드나들지/ 시린 등은 비빌 곳두 읍지/ 넋이 빠져/ 물기 마르지 않은 자식 방구석에 밀어둔 채/ 미친년처럼 집을 나갔다// 늬가 한번 도 본 적 없는 언니는/ 그렇게 잃었다아/ 빈 뜰 해바라기 보며/ 배고파 울다 끝내 해를 따라 가버린 거지// 먼발치서 슬픈 소식 듣고/ 속이 미어져 허둥지둥 달려 왔는디/ 이젠 그냥 맞아 죽어도 조응게/ 맘대로 하라고/ 보퉁이 대신 호미를 들었다// 그렇게 서방 잊고 일만 하다/ 흙물에 닳아빠진 손톱/ 펴진 못한 허리 자꾸만 굽어가도/ 늬들 오물거리는 입만 생각했는디/ 그게 내 유일한 낙이였당게// 봐라/ 호박꽃이 송이채 떨어진다, 잉/ 아까워라// 엄마는 쪼그라진 가슴을 몇 차례 쓸어내리고/ 담자락 디딤대를 타고 올라간/ 신산한 호박 줄기를 살핀다// 엄마 손이/ 해를 따라가다 까맣게 되어버린/ 아기 손가락 같다//
스물여섯의 프로타쥬 / 이화영
내 나이 스물여섯/ 3월의 눈이 내리고 후배의 소개로 첫 선을 보는 날이었다/ 출근길 가슴엔 증류수 같은 물방울이 뽀글뽀글 끓어올랐다/ 남자를 만나고 한 달 지나 붉은 벽돌집 레스토랑에서/ 친구 두 명을 불러 그를 소개 시켰다/ 며칠 푸근하더니 칼바람 창을 때리는 오후였다/ 한 친구가 그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빠르게 매듭짓는 성정 꿈틀 하더니 머릿속에/ 한 줄의 단어가 주홍 글씨처럼 새겨졌다/ 끝내 고개를 떨구며 번쩍하던 그의 눈빛을 보내고 나서/ 바람에 우는 전신주처럼 나는 떨었다/ 감꼭지 떨어진 이유를 꼭 말해야 아나/ 꽃샘추위 속/ 공원 귀퉁이 눈 녹지 않은 응달/ 햇살 한 줌에 기대어 핀 개나리를 보았다/ 허방 짚은 친구의 눈길 같았다/ 꽃살 스물여섯 기억의 문양을 문지르면/ 알러지처럼 돋아나는 음각위로/ 그녀와 나의 하이힐 소리가 자꾸 뒤 섞인다/ 똑, 똑, 또각, 또각//
드리궁틸*에 가면 / 이화영
꿈꾸는 것은 절대 금지/ 타는 갈증 일어도 제대로 땅에 발을 붙여 벼랑길만 지나시라/ 곧 하늘 열리며 부르는 소리 들리면/ 허공을 끌어안은 몸이 한때 야크였거나/ 그의 창자로 들어간 소금 한 줌은 아니었는지/ 잘 살피시라// 저기 죽은 자의 살덩이 쪼아 먹는 독수리가/ 억겁을 돌다 내려와 탐하는 거라면/ 난자질로 삶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는 온전한 순간을 즐기시라// 환상의 기대는 욕심의 무게/ 목숨은 족히 한번 죽음으로 영원할진데/ 주린 배 채운 새 큰 날개 펼쳐 데려간 영혼이나 잠시 그리워하시라/ 바람 길 따라 떠나야 할 몸/ 마지막을 지켜본 친구들에게 쓸쓸한 미소나 보내주시라/ 천장사여, 자 이제/ 내 두피를 벗기고 뼈와 살을 잘게 부수어/ 햇살과 바람에 알맞게 섞어/ 몰려드는 독수리 떼에게 한 점 남김없이 던져 주시길// 목울대 꽉 채울/ 딱딱한 부리에 찍혀 넘어 오는 소리 들으며/ 불온하게 맛보았던 이승의 꿈은 다 잊었다고/ 전해 주시라//
* 드리궁틸: 티베트에 있는 천장天葬터
매생이 / 이화영
살얼음 달라붙은 남도 시장/ 댕기머리 모양으로/ 웅크리고 있는 푸른 고집이 있다// 한 숟가락 입 속에 떠 넣자/ 김 한 올 없던 것이/ 달아오른 생떼 같은 열기로/ 입 속을 훌렁 벗겨놓는다// 어느 슬픔이 몸 바꾸고 있었나/ 촘촘 고운 결/ 화염 같은 열기를 싸안은 저 속은/ 끝내 진초록으로 타버렸나/ 마알간 울혈의 춤사위가 공복의 아침을 헤 젓는다// 몸 담은 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숨 놓아 버리는 고단한 결기/ 풀씨마다 슬어놓은 恨이 시퍼렇게 살아/ 찬물 속에서 남도 가락에 황홀하게 흔들린다// 몸 전체가 긴 뿌리여서 깊을 수밖에 없는/ 죽어서도 웅크린 채 꿈꾸는 生//
코이 / 이화영
나는 작은 어항에서는 어른 손가락 길이만큼 자라/ 주인님 보시기에 흡족한 모양을 하죠/ 아주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아이 팔뚝만큼 클 수 있어요/ 강물에 나를 놓아주면 여한 없이/ 내 눈이 보이는 곳까지 등뼈를 늘리기도 하죠/ 나는 그릇 크기만 한 생각의 여행을 떠나곤 하죠/ 책가방 던져두고 꿈꾸는 아이처럼/ 밤이면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몸 안에 담고 나면/ 어느새 입고 있는 사랑 한 벌 발견 합니다/ 작은 어항에 들어온 이후/ 하늘을 본지 오래/ 물금이 줄 때마다 줄어드는 뼈들/ 숨 쉬는 순간까지 나를 늘리고 깎는 일로/ 내 아가미는 눈물 마를 날 없지요/ 처한 환경에 따라 몸을 달리한다는 말/ 참 좋지만/ 멀리 강으로 간 친구들/ 등 뼈 곧게 펴고 비단 지느러미 팔랑이는 소리/ 꿈결에 들려오면/ 혀가 오그라들 것 같은 甁속의 病/ 천 년쯤 지나면 약이 될라나요//
빈 집 / 이화영
빈 집에 들어섰을 때/ 방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을 때/ 등을 기대고 있는 소파가 생경해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릴 때/ 방안에서 계속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박동치는 숨소리가 엇박자로 들릴 때/ 왼쪽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멈추지 않을 때/ 개구리 울음소리인가 싶어/ 창문을 열었을 때/ 문 밖 은행나무 뼈대와 야윈 달을 볼 때/ 곤한 잠에 든 엄마의 손사래가/ 유리창에 부딪힌 나비처럼 파닥거릴 때/ 엄마 요강을 부시면서/ 부식되어 허물어지는 목숨이 느껴질 때/ 암모니아의 격렬한 고요가 고독으로 밀려들 때/ 엄마가 가슴팍까지 들어찬다//
검은 호리병에 담긴 모란* / 이화영
스며든 빛이/ 검은 호리병의 선을 뭉그러트린다/ 사라진 선을 문장으로 읽는다// 그대 가지 마라/ 나는 호리병으로 남을 터이니/ 그대는 모란으로 담겨라/ 오방을 떠돌다 온 바람이/ 그대 안에 깃들면/ 살지고 외로운 밤은 익어갈지니,// 가을구름 한 폭 베어와/ 고요를 나누는 저들의 필법을/ 나는 오랫동안 훔치며/ 서성일 것 같다//
* 문인화가 홍형표 작품
혀가 쑥쑥하다* / 이화영
빈 라일락 밑에서/ 낳는 소리도 없이 고양이가 새끼를 낳을 때/ 몰래 저승을 다녀온 듯한 표정으로 노파가/ 고양이 새끼를 가져갈 때// 느리게 흐르던 바람이 잠시 휘몰아쳐/ 마지막 남은 꽃잎을 멀리 밀어 보낸다// 비바람 거세게 몰아친다/ 어디로 떠났을까/ 쏟아지는 빗물이 잔털을 적셔도/ 잔등의 위엄 부드럽게 몸을 말아 세우고/ 눈물조차 죄를 더하는 일이 될까/ 깨문 혓바닥 욱신거리는// 빈 라일락 밑에서/ 고양이가 땅에 비친 제 그림자를 새끼인 양 핥는다/ 핥고 또 핥는다/ 흙먼지가 묻고 묻어서 혀가 쑥쑥하다// 내가 수고양이라면 그 곁으로 다가가/ 암고양이 혀에 묻은 흙먼지를 핥아내고 싶다/ 깨끗해지기는커녕 내 혀마저 쑥쑥해져도/ 빈 라일락 밑에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해 지면 사람처럼 그녀를 등에 업고/ 빈집으로 스며들어 나란히 잠들고 싶다//
* 쑥쑥하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내게 다 들켰다 당신! -망고씨 / 이화영
노란 원형질이 울먹울먹 액즙을 쏟고 있다/ 덜 상한 부분을 도려 낸 후/ 당신의 부드러운 육질을 지나/ 만나게 되는 단단한 밑씨// 혀를 잃어도 좋다/ 당신의 달콤함은 불보다 더 치명적이니까// 세상을 거부하듯 빗장 걸은 당신의 입은/ 향의 기원을 따라 더 깊고 아득한 토굴이 되고/ 당신의 등줄기에/ 바람이 게워낸 말이 들러붙어 끈적거린다// 무엇으로 당신을 열 수 있을까/ 당신을 열어 무엇이든 꽐꽐 쏟아내고 싶은데// 천 번의 울음을 삼키고 눈물마저 단단해진 섬유질 남자/ 그 속을 열어보고 알았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새순,/ 그 기습적인 물컹함// 당신의 종피를 따라가다/ 당신 생을 에두르고 있는 체모가 때 늦게 보였다/ 후훗, 내게 다 들켰다 당신!//
강을 건너간다 / 이화영
두 나비가 강 이쪽에서 노닐다가/ 한 마리가 강을 건너간다// 江은 이별의 긴 틈이다/ 이별은 아주 멀어져야 아름다운 법/ 등을 돌려 강을 건너는 나비의 눈이 젖어 있다면/ 강은 더 격렬하게 안개를 피워 이별을 감춰 주리라/ 그리하여 오늘밤 강에 내려와/ 더 젖어드는 물별은 이별의 사생아/ 기억을 모르는 나비가 별이 된다 했다/ 넘치는 기억을 털어내려고 그의 날갯짓은 숨이 가쁠 터/ 내가 꽃일 때 소리 없이 날아와/ 여린 입술을 묻고 고충을 털어놓던,/ 이별을 예감하며 격렬했던,/ 그 나비가 흘리고 간 노래 한 소절/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을 깨뜨리며 흘러간다/ 팔랑,//
몸이 바뀌는 시간 / 이화영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향기가 먼저/ 보슬보슬 내려앉고 있었다 비 맞는 라일락의/ 잎잎이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를 냈다/ 라일락과 허공 사이로 기타소리가 빠져나와/ 내 어두운 빗장뼈를 열고 스며들었다/ 속에서 울리는 음률에 살결이 촘촘하게 떨렸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비의 악보를 품에 품었다/ 공유하는 음악이 있는 사이여야 연인이라지/ 그 음악의 초원에서 사랑을 한다지/ 풀잎같이 흔들리며/ 자맥질하는 숨이 이슬같이 맺히며/ 서로의 호흡으로 悲歌를 부른다지/ 위험한 소원을 구름으로 풀어 허공에 놓으며/ 서로를 씻어줄 빗방울을 기다린다지/ 마침내 비가 如一하게 쏟아지면/ 서로의 몸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간다지/ 몸이 바뀌어야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는/ 둥근 음악처럼!//
나비, 저녁 숲으로 가다 / 이화영
저녁 산책을 했다/ 추웠고 음울한 詩월이었다/ 생생하게 내 곁을 스쳐가는 나비/ 젖은 땅에서 오르는 푸르스름한 안개는 가시나무에/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었다// 색을 거부한 숲은 싸늘하다// 어둠은 나비의 피부/ 검은 수프를 마시고/ 잘 익은 풍성한 식사를 더듬더듬 먹어치우는 나비/ 저녁 숲을 하얗게 갉아먹어도 살이 차오르는/ 저주받은 어둠은 나비의 피부// 금색 햇살이 사라진 숲에 리라소리 살랑인다/ 새벽별마저 심지를 꺼버리고 나면/ 권태는 나비의 혈관을 얼어붙게 하지/ 온기가 필요해/ 장전된 기억을 날려 줘// 날개를 접은 나비들 무반주 합창을 하며/ 저녁 숲에 목을 걸고 있었다/ 마치 물방울인 듯/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었다//
소접素蝶 / 이화영
시끄러운 가을비가 다녀가고/ 나비가 날개를 펴는 법을 잊었다/ 나비의 젖은 날개를 결 따라 천천히/ 한 장씩 찢어 날렸다// 일몰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울음이 되어버린 사내가/ 결빙의 시간 속에 자신을 가두어/ 염전의 우물 속으로 들었다/ 흰 폐를 소원하여 맑은 숨을 기도했으나/ 끝내 비인칭 물고기가 되었다// 내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물고기가/ 상한 지느러미로 느리게 밤하늘을 거슬러 올라간다/ 거친 날숨은 몸속에 흰 알을 슬어놓고/ 존재 한 적 없는 고요 속에서 별을 틔웠다/ 손을 빌어 별을 훔치고 싶었으나/ 죄를 더하는 일이 될까 귀로 훔치었다// 눌러 붙은 겹눈은 뒤로 사라져가고/ 갸름한 더듬이는 갸륵하게 몸 안으로 시들었다/ 축축한 것들에 대한 기의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나와 다른 것은 두렵도록 닮았으므로/ 어제는 바깥을 오늘은 안쪽을 지웠다/ 동공이 사라진 텅 빈 눈 속이/ 제 어둠인 듯 흰나비가 떼 지어 날아올랐다//
하나의 이름을 버릴 때 / 이화영
나비가 피는 계절이 있다// 나비는 하냥 피어났고/ 내일도 필 것이다/ 나비가 피기까지 열세마리 꽃이 날아들었다/ 꽃 이름을 부르면 나비가 쑥대밭이 될까봐/ 눈으로 쫓았다// 나비가 정신없이 물들어 갈 때/ 꽃은 어디를 향해 뜨거워지나// 손 지문 닮은 협곡을 따라/ 꽃이 빙빙/ 나비가 빙빙// 암녹의 베일은/ 몸 풀기 좋은 구유였다/ 눈이 쏙 빠지는 해산이 끝나면/ 세상은 변명으로 붉었다// 나비/ 저녁에 이름을 버리고/ 아침에 혁명을 노래했다// 동면에 드는 열세마리 꽃들//
무화과나무에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 이화영
새 한 마리 무화과 아래로 날고 기차 아래로 구름이 흐른다/ 우리끼리 떠나자며/ 모르는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일요일 밤은 무화과나무에 달을 달아주었다// 며칠 내리는 비에 무화과 살이 찢어졌다/ 꽃 복 없으면 열매 복도 없나니// 몸을 잃고 몸의 정치를 시작했다/ 볼품없는 몸의 서사는 추상과 가정의 경계에서 뒤틀렸다/ 한사람의 온도를 둘로 나누었다. 여전히 한 사람의 온도다// 무화과가 힐을 신고 전라인체 허공에 떠있다/ 누드로 쏟아지는 관음은 해석이 무의미하다/ 한쪽 다리를 내린 비안개가 팔을 내어준다/ 재미없는 마을을 지나갔다//
이별하는 호모사케르 / 이화영
낙화의 담론입니다// 화단이 어두워져도 나는 어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이 페이지에서 당신은 불길합니다// 우리는 외떡잎 문제적 식물/ 씹는 맛이 좋아 창을 열고 서로를 검색합니다// 11월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귀엣말도 없습니다/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는 이름값입니다// 족제비 붓에 먹물이 스밉니다/ 수도사가 씹어 삼킨 종이입니다/ 거짓은 아라비아 무늬 같아서 겉이 그럴 듯합니다// 내 말은 망가지고 부서지고 비정상적입니다/ 말이 말을 따르지 않는 날들입니다/ 데려 올 방법이 있을까요// 감정이 기복이 심한 부실한 레시피입니다/ 가늠하는 스핑크스처럼 묻습니다/ 나는 당신의 쓸쓸한 메뉴입니까//
폐기된 어느 저녁 / 이화영
꽃이 온다/ 저녁이 와도 우리는 흩어져 있었다// 식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보다 많은 식탁보 레이스는/ 낡은 자세로 공기방울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거실의 사물들이 표정 없이 어두워져간다/ 사료를 씹는 고양이 소리가 부럼 깨는 소리 같아/ 의식을 치르듯 무릎을 꿇었다// 익명의 첫 문자를 칼질하며/ 어디로 튈까 망설이는 기울어진 5시//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흔들고/ 깨진 화분조각 흙속에 고양이 발톱이 찍혀있다/ 지문을 남기는 도발적 메시지를 해독하지 않았다// 도화선 같은 불빛이 거리에 흐르면/ 집들은 대개 비슷하게 행복하거나 조금씩 다르게 불행하다// 우유‧마우스‧소주‧삼겹살‧밥공기‧드레싱과/ 강남역 10번 출구는 같은 맥락이다/ 치아를 닮은 사탕을 사면서 꿈이 없기를 바랬다// 담장 너머 백일홍은 오늘도 답장이 없다//
스물여섯의 프로타쥬 / 이화영
내 나이 스물여섯/ 3월의 눈이 내리고 후배의 소개로 첫 선을 보는 날이었다/ 출근길 가슴엔 증류수 같은 물방울이 뽀글뽀글 끓어올랐다/ 남자를 만나고 한 달 지나 붉은 벽돌집 레스토랑에서/ 친구 두 명을 불러 그를 소개 시켰다/ 며칠 푸근하더니 칼바람 창을 때리는 오후였다/ 한 친구가 그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빠르게 매듭짓는 성정 꿈틀 하더니 머릿속에/ 한 줄의 단어가 주홍 글씨처럼 새겨졌다/ 끝내 고개를 떨구며 번쩍하던 그의 눈빛을 보내고 나서/ 바람에 우는 전신주처럼 나는 떨었다/ 감꼭지 떨어진 이유를 꼭 말해야 아나/ 꽃샘추위 속/ 공원 귀퉁이 눈 녹지 않은 응달/ 햇살 한 줌에 기대어 핀 개나리를 보았다/ 허방 짚은 친구의 눈길 같았다/ 꽃살 스물여섯 기억의 문양을 문지르면/ 알러지처럼 돋아나는 음각위로/ 그녀와 나의 하이힐 소리가 자꾸 뒤 섞인다/ 똑, 똑, 또각, 또각//
겨울숲 우화 / 이화영
암록의 허물이 얹어 있는 겨울 숲의 일이란/ 붉은 의심을 떠나보내고/ 시리도록 맑은 풍경을 비워두는 것이다/ 몸 하나 버릴 것 없이 온 몸이 공양인 계절은/ 뿌리에서 불 같이 타오르는 묵음 뒤로/ 지상의 배후는 사는 일이 차갑다// 차가운 관능을 한 줄 문장으로 풀어놓았는지/ 저무는 산그늘이 검푸르다// 낡은 슬픔으로 피어있는/ 병속의 마른 꽃들에게/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나비유충을 보낸다/ 목이 잘린 물物들의 핏기와 향이 사는 오래된 방/ 나비는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하고 죽어갈 터인데/ 어깨를 맞대고/ 서서히 꺼져가는 숨결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실은 다른 이름의 부화라는 걸/ 나비는 알까// 별조차 없는 어둠 속 천지에서/ 짝을 잃고 미쳐버린 나비 한 마리를 위해/ 결로의 아침을 비워둔다/ 나와 같고 나를 빨개지도록 썼고/ 축축하고 물기 있고 젖어있는//
계단의 시간 / 이화영
목재루버계단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계단에 앉아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린다/ 그리움이 극렬해지면 죽음을 몰고 오기도한다/ 누가 놓고 갔는지 쑥부쟁이 한 다발이 놓여있다/ 저 꽃도 계단에 기대어 꺾여버린 지상의 꿈을 꾸고 있을까/ 시간이 졸아드는 동안/ 제 그림자를 먹은 공간은 치즈처럼 늘어졌다// 고요가 벽을 친다/ 그의 수줍은 미소도 내 어깨를 벽으로 몰았었다/ 그 순간은 말이 녹아 없어졌다/ 스크린 가득 흐르는/ 호르몬의 탱고가 눈썹에 떨어졌다/ 가슴에 손을 대면 숨 찬 나이테가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는 개미의 밀교를 더듬어 가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줄지어있다/ 가늘고 긴 이별은 모범적이어서 지루했다/ 메마른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의 목소리로 환幻을 불러들였다/ 저무는 저녁이 아슬하고 멋져서/ 잊으려 했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태양을 먹은 소리는 냄새를 기억한다//
* 1954년 만들어진 트로트 곡
물이 나에게 / 이화영
수초와 돌 틈을 유영하는 물고기를 본다/ 물의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저들의 지느러미를 보면 알 것 같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물보다 빠르게/ 투명한 막을 가르면서/ 오래된 정인처럼/ 빠져나가는 물길 슬그머니 당기었다/ 풀어주는 지느러미 활/ 꼬리의 탄력이 들려주는/ 낮은 통주저음에 귀를 기울인다/ 음표가 하나씩 거품으로 사라질 때마다/ 태어나는 맨발의 아가씨들/ 나는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없으나/ 내 옆구리를 스쳐 간 안부를 묻었고/ 그들의 가락을 들어 본 적 없으나/ 내 귀는 심해의 변주에 대하여 길 들여져 있다/ 은밀하게 거래 되는 수신 없는 발신/ 미지의 행성에서 이름 없는 혈족으로 떠돌다/ 오래 전 바다 밑에 순장 된/ 나는 하백의 이름 없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사이프러스 / 이화영
오는 소리도 없이/ 숲으로부터 맵찬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이 깊어가는 지/ 한 낮인데도 어둑어둑하더니/ 길 위의 죽음처럼 눈이 무진하게 쏟아진다/ 서늘한 오늘을 종이삼아 몇 자 기별을 전한다/ 지는 소리도 없이/ 이파리가 질 때/ 생이 저만큼 멀어져가더라도/ 땅에 닿는 순간까지 생명을 담아/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금기錦綺 / 이화영
가죽이 터진 라일락 나무가 허물을 벗고 있다./ 흔들림을 피하는 일은 뿌리와 이파리에 대한 불명예다/ 어린 색시를 잃어버린 늙은 지아비 몸짓으로/ 물길을 트는 마른 줄기 숨이 차다/ 만질 수 없는 뿌리를 향한 간절함이/ 동편으로 사시랑이 같은 꽃잎 내밀었다/ 나 저 꽃 보는데 저 꽃 나 볼까/ 금기의 다른 뜻이 곱고 화려한 꽃이라면 저 꽃은 금기다/ 허용되지 않는 질문이 어둑발 내린다/ 금기여, 신발 아래 온 데로 가거라//
강을 건너간다 / 이화영
두 나비가 강 이쪽에서 노닐다가/ 한 마리가 강을 건너간다// 江은 이별의 긴 틈이다/ 이별은 아주 멀어져야 아름다운 법/ 등을 돌려 강을 건너는 나비의 눈이 젖어 있다면/ 강은 더 격렬하게 안개를 피워 이별을 감춰 주리라/ 그리하여 오늘밤 강에 내려와/ 더 젖어드는 물별은 이별의 사생아/ 기억을 모르는 나비가 별이 된다 했다/ 넘치는 기억을 털어내려고 그의 날갯짓은 숨이 가쁠 터/ 내가 꽃일 때 소리 없이 날아와/ 여린 입술을 묻고 고충을 털어놓던,/ 이별을 예감하며 격렬했던,/ 그 나비가 흘리고 간 노래 한 소절/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을 깨뜨리며 흘러간다/ 팔랑,//
어둠의 형식 / 이화영
어둠이 오는 소리는 밥 냄새를 닮았다/ 옷을 벗은/ 콩 같은 점 하나/ 아픔으로 깊어간다// 여러 겹의 껍질을 가지고 있는/ 어둠의 수피는/ 어둠의 생각/ 어둠의 표현/ 어둠의 주름으로 깊어간다// 풀밭에 숨어 있는 새 발톱/ 그림을 그리는 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외떡잎식물은/ 싹의 형상으로 깊어간다// 일정한 거리를 달려줘야 단련되는 말처럼/ 짐승을 손으로 잡는/ 흰 옷 입은 부족의 하루처럼/ 세상 모든 이름은 어둠으로 깊어간다//
피아노 / 이화영
당신은 여든여덟 개의 심장을 가진 나부裸婦다/ 당신의 떨림이 허공을 흔들 때/ 파피루스에 흘린 기억들이 번개처럼 사방에 꽂히고/ 흑백의 간극이 주는 목마름은/ 페달의 공명을 타고 숲으로 날아간다// 당신 혈관 속으로 흐르는 무수한 음들이/ 내 심장에 희로애락을 무량하게 무늬 새긴다/ 당신 생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끝이 아릴 때,/ 당신은 무슨 꽃을 먹고 사나 궁금했다// 당신의 내부로 이르는 계단은 처음부터 미로였다/ 달세뇨, 다시 당신을 더듬어 가는 왼쪽 페달을 밟으면/ 그믐달이 치맛자락을 끌어 잡고 눈 내린 강변에 미끄러진다/ 당신의 내장을 긁어내면 돌돌 말린 오선지의 늪이 있어/ 아직 아가미 한번 벙긋하지 못한 물고기와,/ 잎을 뚫고 나오지 못한 가시연꽃의 통증이/ 태초의 소리를 깨우고 있다//
덧없는 환영들 / 이화영
피아노 건반 위에 남겨진 환영은 나비였다/ 바람이 없는 날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없는 날은 나비가 오지 않았다/ 지루하고 심심하면 칼로 손바닥에 오선지를 그으며/ 핏물이 흐르는 방향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 생각했다// 바람이 없는 날이 많아서/ 칼을 긋는 날이 많아서/ 상처는 으름 열매처럼 벌어졌다// 눈을 감으면 바다를 건너는 나비의 날갯짓이 보였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피가 멈추지 않았는지/ 잠들지 못한 나비의 날개가 푸석해 보였다/ 바람이라도 불어와 나비의 날개에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고/ 육지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나비의 피를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푸른빛일 거라 생각했다/ 바다로 떠난 나비가 돌아왔다// 나비가 벗어 놓은 슈즈 한 켤레 건반 위에 남았다.//
100g -감정의 허기 / 이화영
마음을 무게로 표시한다면 몇 그램일까// 마음은 감정이란 추 때문에 기울 때가 많다// 닭 가슴살 한 덩어리는 100g이다/ 달걀 한 개의 단백가는 100인데/ 내게는 자꾸 100g으로 읽힌다// 그가 한 줌 재로 왔다/ 적멸 100g// 배를 깔고 엎드려 있으면/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우울이 솔솔 올라왔다// 내 중얼거림은/ 내게서 끝났다// 손에 쥐어졌던 기억/ 달걀을 쥔 것 같아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비, 저녁 숲으로 가다 / 이화영
저녁 산책을 했다/ 추웠고 음울한 詩월이었다/ 생생하게 내 곁을 스쳐가는 나비/ 젖은 땅에서 오르는 푸르스름한 안개는 가시나무에/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다// 색을 거부한 숲은 싸늘하다// 어둠은 나비의 피부/ 검은 수프를 마시고/ 잘 익은 풍성한 식사를 더듬더듬 먹어치우는 나비/ 저녁 숲을 하얗게 갉아먹어도 살이 차오르는/ 저주 받은 어둠은 나비의 피부// 금빛 햇살이 사라진 숲에 리라소리 살랑인다/ 새벽별마저 심지를 꺼버리고 나면/ 권태는 나비의 혈관을 얼어붙게 하지// 온기가 필요해/ 장전된 기억을 날려줘// 날개를 접은 나비들 무반주 합창을 하며/ 저녁 숲에 목을 걸고 있다/ 마치 물방울인 듯/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다//
마녀 백설공주 / 이화영
몽환을 잘게 썰어 즙을 빨아 먹는 아침/ 혹, 이 과즙은 백설공주가 씹다 남긴/ 독이 든 사과일지 몰라/ 한입 깨물면/ 몸속으로 독기가 환하게 번져나갈지도 몰라/ 너는 어디에서 왔니/ 달콤 상큼하게 생겼구나// 백설공주의 엄마는 마녀였어/ 사과에 주문을 걸어 붉은 입술로 깜찍하게 속여 온 거지/ 착한 아이는 엄마를 잃어버리는 거야/ 아이는 엄마를 닮고 싶어 사과를 먹는 거야/ 일곱 사내를 끼고 놀아난/ 백설공주의 분탕질은 독사과에서 비롯된 거지/ 착한 아이가 마녀가 되는 과정은 지루할 만큼 단순한 거야/ 백설의 모순을 풀려고 하지 마/ 초록물고기에서 빨강 사과로/ 퍼스나콘을 바꾼다고 풀리는 건 없어/ 은밀과 치밀로 반죽한 이 질긴 선택을 즐기는 거야/ 백설공주가 여자아이를 낳고/ 일곱 사내가 하나같이 친자라고 다투는 사이/ 지겨운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백설공주의 바구니에 독이 든 사과들이 수두룩한 설정 엄마를 읽어버린 아이를 찾아/ 길 떠나는 백설공주의 머리 위로/ 雪이 설설 내리기 시작할 때// 마녀 백설공주의 이야기는 새롭게 펼쳐지는 거야/ 훗날, 제가 낳은 딸이 성큼 처녀로 자라면/ 그때 딸을 찾아와 독사과를 내밀까// 빨간 사과를 든 백설공주가/ 문 앞에 서 있어//
분홍 감옥 / 이화영
아랫니를 다 빼고 틀니를 하신 엄마/ 음식을 다 드신 후/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다음 틀니를 빼 물속에 담가놓으신다// 엄마의 아랫입술을 손으로 내려 본다/ 치아가 사라진 잇몸/ 치아가 나오기 전의 아기 잇몸을 보는 듯/ 물 묻힌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싶은,// 치아를 빼고 난 후, 엄마의 말수는 급격히 줄었다/ 자식이 묻는 말에도/ 엄마의 대답은 그려…… 아니…… 정도,/ 치아만 사라진 게 아니라/ 잇몸 드러내던 엄마의 미소도 사라졌다/ 그 미소에 전염되던 내 미소도 사라졌다/ 분홍 경고만 남기고 사라진 치아// 치아는 한 사람의 생애에서 묵묵한 권력이다/ 당당하게 음식을 씹고/ 환하게 웃고/ 쏟아내는 말들을 물컹하게 단단하게도 하는// 권력을 잃어버린 엄마의 잇몸은/ 자식 앞에서도 입을 작게 오므리게 한다// 틀니가 물속에 죄수처럼 갇혀 있다//
판문점의 봄 / 이화영
평화여 북으로 가자/ 평화여 남으로 가자/ 두 손을 높이 잡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태극기 흔들어 보자// 말이 통하지 않던 금수 같은/ 그들의 행보와는 다른 모습이기에/ 일련의 의심과 불안을/ 내려놓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민족으로 통하는/ 뜨거운 피를/ 믿기에 설렘은 반갑기만 합니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서/ 서로 무장을 하고 등을 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눈빛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따뜻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판문점에 평화의 씨앗이 심겨지길 기대해 봅니다./ 아~~잊지 못할. 2018년 4월 27일.//
고양이를 위한 블루스 / 이화영
창고 같은 소극장 조명이 켜지고/ 젊은 여가수는 파리한 몸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어/ 긴 터널을 지나는 듯한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눈빛의 짐승이 꿈틀거렸어// 숨을 쉬는 동안/ 발톱은 감추고 허리는 둥글게 말아야 돼/ 눈은 번뜩이되 두리번거리지 않는 거야/ 뛰지 말고 걸어 게을러 보일수록 우아하니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고/ 도시는 어둠을 용서하지// 불온한 색기를 품은 몸에 제멋대로 켜지는 신호등/ 주차원이 외부차량 주차금지의 율법을 내세우고/ 취객이 길모퉁이에 방뇨를 하고 침을 뱉어도/ 한 귀로 흘러버리는 거야/ 할퀴고 물리는 게 길들여버린/ 상처를 서로 핥아줘야 해// 기타에서 튕겨 나오는 전자음과 강렬한 드럼 소리가/ 객석을 압도했지만 정작 숨 막히게 했던 건/ 그녀가 야생의 눈빛과 긴 손가락으로/ 우리의 가슴과 아랫도리를 거짓말처럼 주무른 것/ 그것뿐이었다//
튤립의 언어 / 이화영
빈 마당 같은 정오였다 뜨거움을 가장한 얼굴을 허공, 먼, 튤립이라 부른다 붉게 얼어 실감나지 않는 한여름에 내리는 눈, 가는 목 허공에 걸치며 사는 이유 몇 개 떠올리며 붉은// 마을회관에 간 그녀가 돌아올 시간이다 유모차를 운전하는 몸이 기우뚱 거릴 때 발은 난간 위를 걷는듯하다 그녀 입술에 숨은 말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허공, 먼, 튤립이 먼저 마중간다// 여름해가 진다 볼 이쁜 그녀부터 주름까지 그녀를 담은 무수한 자물쇠 찰칵 찰칵 진다 그녀는 흙의 여자 차가운 것은 차가 워서 뜨거운 것은 뜨거워서 죽어 나갔다// 저녁상을 물리자 그녀가 틀니를 물그릇에 담는다. 입 가리며 웃던 손이 이제 식사 중에도 틀니를 뺐다 본론보다 서론이 긴 숭늉 같은 말을 처음 듣는 말처럼 나는 응응 시늉했다// 그녀 곁에 없어도 내 몸에 장착된 그녀는 나를 발사했다 천지사방에서 날아오는 장전된 그녀 그녀에게 가는 길은 좁고 깊어 물고기가 빠져 나가듯 부드럽게 유영을 해야 한다// 내 목에서 정수리를 단면으로 자른 물고기가 튀어 나왔다 어느 어종인지 모르겠으나 생각은 허공, 먼, 튤립으로 낭자했다//
능소화 / 이화영
둑방길 지나는데 시멘트 담벼락 움켜쥐고 능소화가 피었다/ 우주 한 귀퉁이를 휘어 감고 오르는 본능적인 꽃/ 여름 내 폭염마저 흔들어 놓고 갈 저 주황빛 웃음이 치명적이다/ 더 이상 기다림은 거부하듯 입술 언저리 말아 올리며 목젖까지 보이는 헤픈 년// 그때도 7월이었지/ 그 애랑 들렀던 강촌 민박 덜렁거리는 간판아래/ 손바닥만 한 화단 오만하게 뒤틀려 등나무를 타고 오르던// 꽃이 너무 환해 손으로 가리키자/ 그 애 입에서 꽃 이름이 입술과 같이 튀어나왔다/ 능.소.화/ 생장이 빠른 것에 비해 줄기가 약해 해마다/ 할아버지가 뒤뜰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버팀목을 만들어 주었다는/ 설명도 같이 피어올랐지// 등을 켠 꽃잎마다 이별을 베어 물고 고른 숨 내 쉬지만/ 움켜쥔 손톱 멍 자국이 가실 때쯤이면/ 다시 피 멍이 든다// 그리움만큼이나 길어진 모가지/ 한차례 웃비* 지나자 선혈 쏟듯 뚝뚝 낭자하게 진 모습에/ 한동안 그 애를 움켜쥐고 있던 내 손아귀가 맥없이 풀린다/ 내 손이 허공에 들린 듯하다/ 꽃물 든 이 병病,/ 남은 여름이 위험하다//
* 웃비: 한창 쏟아지다 잠시 그친
꽃殺 / 이화영
그대를 건너가지 못하는 자시(子時)/ 비가 숨을 낮춘 채 내린다/ 자주 달개비 엷은 이마에/ 쓸쓸이 방울방울 적합으로 맺히는지/ 서성이는 고양이의 눈에 가느다란 실금을 긋는지/ 문밖으로 비가 오는 듯 안 오는 듯// 염천에 미열이 오르내리고/ 어릴 적 엄마의 목단 이불을 덮는다/ 흔들리는 이불 속으로 든 바람이 갈고리로/ 무릎을 헤집는다// 아가야 울지 마라/ 꽃물이 오르니 견뎌야 할 날이 많겠구나// 그대를 지나 다른 것에 풀어지고 싶으나/ 내 몸은 그대의 침묵 속에 녹아들도록/ 알맞은 형상으로 빚어 오래된 눈물로 비어 있다// 아가야 두려워 마라/ 네 꽃이 흰 빛을 지닐 때가 되었구나// 문밖에 그림자로 서 있는 나무가/ 입술 하나 파르르 떨군다/ 내 입술도 함께 파르르 떤다// 꽃의 공포는 꽃의 은유와 더불어 시작된다/ 고요 속 소란이 들끓는 몸 길에서/ 꽃의 정령이 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밖에 고양이의 울음이/ 끊기듯 가늘게 이어지는/ 시간이 멎은 밤이었다//
꽃을 지나다 / 이화영
꽃들이 말을 걸어오고/ 내 계절은 깊어지지 않는다// 눈에 들어앉은 꽃잎들/ 새 살과 새 숨결로 몇 날 꼼지락거리더니/ 분분하게 평평한 돌에게로 날아가/ 냉기서린 돌바닥에 무욕의 몸짓으로 식어간다// 거짓말 같은 낙화/ 꽃의 열기를 식힌 돌이 젖는다. 돌이 운다// 눈꽃을 이고 있을 때도 돌의 허리는/ 검게 젖어 들었다/ 마음이 들러붙으면 물기로 젖어 드는 법/ 눈꽃을 이고 있는 돌이 뜨거워 보인 것은/ 냉기를 품고 있는 암반 같은 사내의 가슴을 읽어 내린 탓// 떠나야 할 때를 놓치지 않은,/ 죽어 더 아름다운/ 뭉개진 꽃의 노래를 먹은 돌은 시들 줄을 모른다/ 꽃을 지나는 노을이 문드러지고/ 바람은 돌에 가둔 꽃의 기억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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