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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갑순 시인
전남 순천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시와 산문》으로 문단에 올랐으며, 제2회 서울시인상, 제4회 국제한국본부광주펜문학상, 제16회 광주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꿇어앉히고 싶은 남자』, 『나를 묶어주세요』, 『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 『강물이 흐를수록 잠은 깊어지고』, 『상처도 사랑이다』, 『나무들』, 『나무들2』와 평론집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 『현대시와 낭만적 층위』가 있다. 전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현 한국연구재단연구원.
님이시여 / 허갑순
그대 그리는 마음 날 주고 가소/ 내 목숨 끝나는 날까지/ 그대 향한 그리움 여기 벗어두고 가면/ 행여 떠난 길 되돌아올 줄 모르는데/ 봄 그리워 그리워 하다가/ 봄이 오는 길 저만치 혼자 가는 님이시여/ 꽃이 피는 길 저만치 혼자 가는 님이시여// 그대 사랑 내 가슴에 묻고 가소/ 내 아픔 다하는 날까지/ 그대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어/ 가슴에 서리서리 그리움 맺히는데/ 꽃 피어라 피어라 하다가/ 봄 사무치는 길 저만치 혼자 가는 님이시여/ 꽃 흐드러진 길 저만치 혼자 가는 님이시여//
스무 살 적에 / 허갑순
내가 스무 살 때 나는/ 열아홉 살을 앓았습니다/ 늦가을 우리 반 교실 뜨락에는 노오란/ 실국화가 무더기로 피어있었습니다/ 나는 천일버스를 타고 새하얀 칼라를 세우고/ 천하가 꿈으로 버무러진 00대학교 부속여자고등/ 학교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무겁게 교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새들은 / 허갑순
십이월이 되어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나무들의 잔인한 시선을/ 견디며 연일 포클레인은 제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눈은 오지/ 않았다 부지런한 인부들은 땅을 열고 아직 얼지 않은 누우런/ 살점을 걷어내고 거대한 지폐 다발을 묻었다 삼각 깃발이 안/ 방 깊숙이 꽂히고 전신주에는 길을 잃은 새들이 가로등 대신/ 켜진 어둠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새들은 다시 둥지를 틀 수 있을까 부실공사라는 피켓이 어지럽게/ 웃는다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들의 보금자리 일/ 호가 허물어져 내렸다 아침이 오기 전부터 분주해진 덤프 트럭/ 에는 저자거리로 팔려 나가는 흙더미 속에 파묻혀 새들의 보금/ 자리 2호가 실려나갔다 축 늘어진 들 것에 실려 며칠째 방치된/ 삼호는 적당한 절차를 밟아 화장터로 보내질 것이다 피곤한 인부/ 에게 접수된 소식은 아 · 무· 일· 도· 없· 었 ·다 였다 숲은 그렇/ 게 해서 지상에서 지워졌다 아름다운 C가 지워졌다 C를 안고/ 있었던 건강한 팔뚝도 지워지듯이 아프게 패인 연필 자국이 선/ 명한 땅바닥에 금을 긋는다 oo 아파트 공사 현장 건설 사업부/ 성실, 시공 안전, 아파트를 짓는 공사는 겨울이 깊어져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C가 웃는다 사라져간 웃음은 아름답다 아직/ 지상에 남아있는 새들이 웃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새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눈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어느 비둘기의 하루 / 허갑순
매연이 짙게 깔린 도청 앞 분수대를 지날 때면 한 쪽이 기울어진 빌딩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맨손으로 타고 오르는 비둘기를 만나곤 한다/ 머리에 푸른 띠를 두르고 흰구름을 욺켜 쥔 손 안에는 울음을 그치지 않은 무등산이 빈혈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구부리고 있는 등 뒤로 비수가 되어 꽂히는 바람 발을 헛디딜 때마다 파닥거리는 푸른 초원 비가 오는 거리를 떠돌다가 가난한 화가의 화폭에 갇히기도 하고 전국체육대회의 화려한 휘장 속에 숨이 막혀 쓰레기로 만들어진 평화를 물어다 날리기도 했다/ 어제는 김씨라는 이씨라는 비둘기가 하수종말처리장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공원 안의 비둘기 집들은 한 집 두 집 비어가고 살기 위해 열심히 날개를 비벼 보았지만 벌써 눈자위는 움푹 꺼지고 신호등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밧줄로 껍질까지 단단해진 어둠을 묶고 손가락에 송진가루를 바르고 하얗게 웃는 별 더 높은 꼭대기 더 넓은 하늘을 기어오를 때마다 아래로 미끄러지는 현실/ 일당 몇 천원에 허리를 꺽고 주기도문을 술잔에 풀어 놓으면 때도 시도 없이 도지던 위장병/ 위장병에 특효약이라는 동전 한 닢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피가 돌지 않는 빌딩의 가슴에/ 푸른별이 돋아나고 피로에 지친 그림자가 전라로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 한 줄기 스며들지 않는 땅 속 어둠,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사방으로 뻗어가는 뿌리/ 그 뿌리가 뒤척일 때마다 떡잎에 피가 돌고 아주 천천히 실핏줄로 눈을 뜨는 도시/ 낮은 지붕은 낮은 지붕끼리 살을 맞대고 가파른 빌딩을 발로 밟고 튼튼한 날개로 아스팔트를 걸어다니며 다음날 가장 이른 아침을 쪼아 올릴 것이다/ 구구구 구구국 구구국//
일몰 / 허갑순
저, 가게 문이 닫힌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저 혼자/ 스르르 목숨 끈을 놓아버린다/ 그래,/ 오늘은 이것으로 끝을 내는 거다/ 종일 가슴앓이를 하던 사랑을 놓아주는 거다/ 핏덩이 째 그리워하게/ 불안한 가지들을 잘라 내는 거다/ 흔적 없이 왔다가 가도 생은 자꾸/ 뻘 밭에 지 발목을 적시고/ 핏물로 고이는 저녁/ 차갑고 무겁게 파고드는 눈물/ 독초롤 피었다가 그새 허물어지고 마는/ 저 붉은 생채기/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핏줄이 아프다/ 상처가 불게 타오를수록 맹렬하게/ 살고 싶어지는 진실한 사랑 하난 가져보았으면/ 나는 사랑 하나를 놓아주려 한다/ 밤과 낮이 사이좋게 뒤집혀지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끊어 앉히고 싶은 남자 / 허갑순
보여지는 것// 보여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허무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덜 우매합니다.// 날마다 눈 뜨고 보고/ 보여지는 것이/ 영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여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데드 마스크/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보여지는 것은/ 사랑받는것만큼이나/ 허무합니다.//
길이, 누워 / 허갑순
길이 캄캄하다는 것은/ 내가 심한 길치이기 때문인지요/ 길이 환하다는 것은/ 햇빛이 밝기 때문인지요/ 길이 캄캄하기도 환하기도 하는 것은/ 끊어질 듯 팽팽한 햇빛 때문 일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느 날,/ 명치끝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아픔으로/ 건너오는 새하얀 길을/ 어둠이 걷히고 파리하게 뭄을 뒤척이는/ 예리한 면도날에 나를 베이게 하고/ 지금은,/ 그 사람이 밟고 간 길들이 한 길가에/ 조용히 누워 물끄러니 나를 바라보고/ 지독히 가느다란 줄들이 나를 꽁꽁 묶어버리는//
#미투와 me too 사이 / 허갑순
수업 시간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이 휘둥그레 입을 열고 물었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미투의 사연을/ 입에 담기 거시기하니까 도통말이막힌다/ 시사문제랍시고 국민이 알 권리를 남발하면서/ #미투와 me too 사이에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연민을 가득 입안에 넣고 me too는/ 내가 무지 사랑하는 말이었다고 고백했다/ 아 그들이 왁자하게 떠들었다 똥구멍같은/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수치스러워졌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me too는 #미투와 다르다/ 예를 들었다 친구야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나는 너를 죽도록 끝까지 사랑하면 좋겠다/ 등 등 등//
실종 / 허갑순
골짜기들이 물방울을 털어낼 때마다/ 나무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래된 바다는 경건하게 몸을 감싸고/ 안개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오늘 아침 게으른 산책에서/ 나의 부재를 믿지 않았다./ 하얗게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꽃들은/ 나의 정체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나는 여기서 튕겨나가고 싶었다./ 내가 실종된 이곳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듯이 나의 실종은/ 짤막한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녹차밭을 어지럽게 기어오르는 안개/ 그가 불쑥 내민 것은 이별이었다./ 한 번도 내게 불평을 말하지 않았던/ 그래서 삶이란 것이 에피소드 같았던/ 한참을 지나서야 뭉퉁하게 만져지던/ 안개들이 하얗게 몸을 비틀었다./ 꽃들의 얼굴에 생채기가 돋았다./ 내 주머니 속에서 오래된 너의 기억이/ 조용히 문을 닫는다./ 문 닫히는 순간이 너와 내가 소통하는/ 시간이라면 나는 문을 닫는다./ 밟았어도 더 이상 땅이 흔들리지 않는다./ 익숙한 얼굴들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하수구 / 허갑순
깨어 있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싶을 때/ 나는 하수구를 찾아간다/ 아파트 한 귀퉁이를 흔드는 물소리가/ 아직 어둠으로 흐르기 전에/ 소싯적 찰랑찰랑 발목을 잡던 고향집 도랑가를/ 맴돌다 눈물 한 방울 섞어 보낸다/ 빛바랜 추억을 안고 물소리도 한 대 어우러져 흐르면/ 한 세기를 도려낼 것만 같았던 썩은 냄새도/ 제법 제 살 속에 섞여 풀 풀 향수로 풀어지고/ 이른 봄 못다한 사랑 그 앞에 무릎을 세우면/ 천지를 쿵쿵 울리는 소리/ 마른 바람 나뭇가지 훑는 소리 무심하게 흘러가도/ 마지막 남은 아픔 쩍쩍 사지를 찢는다/ 아! 나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 내 몸 안의 것들을 모두 쏟아내고 나면/ 나는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움에 짓물러진 사람끼리 서로 눈물 닦아주며/ 춤디 추운 우주로 흘러가는 것일까/ 어둠이 그 속에 별들을 심으면 은하수 부끄럽지 않게/ 밤마다 울고 있다//
상처도 사랑이다 / 허갑순
너는 네 방식대로 사랑을 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이별을 한다/ 한 때의 사랑이 모호했다면/ 지금의 이별은 상처다/ 너의 사랑이 찰나의 웅변이었다면/ 나의 이별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즐기되 빠지지 않는다는 너는/ 빠졌음으로 진정으로 즐겼다는/ 애애한 공식이 된다/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강이/ 있었다면 너는 한 번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 너와 나의 강을 이어주는 것은/ 너와 내가 아니고 고작 배를/ 타고 지불하는 배 삯 정도다/ 돈이 삶을 능가하고/ 이별이 사랑을 초월하고/ 나는 너의 얼굴에 지도를 그린다/ 모호한 웃음과 너덜거리는 지갑 몇 개/ 초라한 지폐가 나뒹구는 거리를/ 상처는 유폐된 돈이다 허가진 돈님/ 돈님이 구른다 쓸쓸한 상처 위를/ 명쾌하게 때로는 더럽게 치사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 뒹굴어라/ 유리벽을 닦는/ 아무리 닦아도/ 이별이 사랑이라는 말은 우호적이다/ 상처도 사랑이라는 말은 퇴폐적이다//
사랑, 너 우울하냐 / 허갑순
납작한 벽 위에 동그란 벽을 걸었다/ 흰 도화지가 제 삶을 십자가로 못 박은 채 시간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다 그렇게 떨어뜨려진 사랑을 길들이기를 수십년/ 어느날/ 앙금 하나가 벽 위에 고이기 시작했다/ 벽에서 벽으로 어둠이 굴러다나고 천둥 같은 것이/ 고막을 찢어버리고 번개 같은 것들이 찌릿찌릿 교차되었다/ 파란 심줄이 불끈 솟아오르는 하늘, 그 둥그스럼한 어깨가/ 허물어져 내렸다 음, 음, 신음소리가 천지에 요동치고/ 째깍 째깍, 덜컥, 짧은 팔과 긴 다리로 다시 태어나던/ 그 불쌍한 사랑이 다시 벽 위에 박제되어버린 순간,/ 벽이 벽을 껴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다/ 속살 깊이 혀를 말아 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철저하게 계산된 뒷거래가 있을 뿐/ 밋밋한 젖가슴도 만져지지 않고 온 밤을 설레게 했던/ 기다림도 벽이 되어버렸다/ 벽과 벽시계의 사랑은 가느다란 5센티 밖에 도l지 않는/ 못들의 장난이었다 벽과 벽시계는 게거품을 문 채/ 무거워져버린 체중을 지탱하면서 여전히 벽이 되어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 다녔다 벽과 벽시계가 빛에게, 빛이여/ 흰벽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먼지 한 톨, 한 줌 연기,/ 물 한 방울 품어줄 수가 없었는데/ 그 하얀 가슴에다 대못을 들이대고 째깍 째깍, 덜커덩!// 사랑, 너 우울하냐.//
세탁기 / 허갑순
그 날 아침/ 나는 늦잠이 들었다/ 햇빛에 잘 달구어진 대낮을 비몽사몽 돌리고 있을 때도/ 나는 깊은 잠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탈, 탈, 탈, 탈, 가슴 속 밑바닥까지 털어버리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던 것일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익을수록/ 내가 아무렇게 벗어 놓은 허물들이/ 이방안의 얼굴처럼 생소하다/ 어느 새/ 벗은 몸 위로 독한 가루비누가 쌓이고/ 내가 나를 꾹 꾹 눌러 죽이고/ 어제 밤 깡소주에 밀린 사랑 한 조각이 아직 숫처녀의/ 그것처럼 부끄럽게 웅크리고 있는데/ 이윽고 문이 닫히고 문이 닫혀야만 내가 나를 빨 수 있는/ 시커먼 내장을 팍, 팍 문질러 빨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고/ 그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불꽃 튀기는 사랑을/ 천만 볼트로 달구어진 한 덩어리의 사랑을 쥐어짜면/ 다시 문이 열리고 나는 내 안의 어둠 들이 환한 대낮으로/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쯤 익명의 편지를 쓴다// 묵은 사랑일수록 첫사랑이라고 사랑한다고 오래 오래//
불안 / 허갑순
싹....둑 싹...둑, 싹..둑 ,싹.둑, 싹둑 싸아둑 사싸싸아뚝 사쓰아뚝 싹둑싹둑싹뚝싹뚝! 탯줄 끊어내는 소리 들린다. 진통이 시작된지 1년이 지났지만 불안은 아직도 코로나19 뱃속에서 탯자리를 고르고 있다. 비비꼬여버린 코로나19를 싹뚝 싹뚝 싹뚝 싹뚝 싸-아-아-악-뚝! 팬데믹을 싸.................................................................................................................뜨뚜뚝!// 상황은 쉽사리 종료되지 않는다.//
그 여자 / 허갑순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시선을 가볍게 걷/ 어내며 무료한 오후 한나절을 군번마냥 목에 걸었다./ (내과 2병동에서)/ 노오란 구두코가 시계추처럼 빨라질 때마다 신음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싸늘한 환자 대기실로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병동을 잘못 찾은 걸까)/ 더러운 입술을 달그락거리고 기름때가 끼어 오히려 빤질빤질/ 한 옷자락이 석고마냥 굳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 깃발을 흔들어/ 댔다./ (내가 문제가 있는 걸까)/ 길쭉하고 구멍이 작은 귀에다 손가락을 틀어넣고 빙빙 돌린/ 다. 누우런 살갗 밑으로 언뜻 들이비치는 실핏줄이 빙빙 돌아/ 간다.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의 손잡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미쳐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기청청기에도 걸리지 않는 무공해 웃음이 정제된 웃음을/ 비웃으며 벌쭉벌쭉 웃고 있을 때 건장한 남자 간호사가 여자를/ 거두어 갔다./ (증발해 버린 오후)//
탯줄 / 허갑순
오색 단풍이 들자/ 가을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가슴이 멈추고 자궁이 열렸다/ 검붉은 아침이 눈을 떴다/ 부스스/ 춥고 지루한 도시가 뒤척인다/ 누군가 강보에 싼 희망을//
영산포 / 허갑순
날 저물어 어둑한 길을/ 소리 소문 없이 지나칠 때/ 비릿한 생선냄새가 발목을 붙든다/ 사람 사는 모습이 늘 그렇듯이/ 비오는 날에도 영산강은 흐르고/ 길게 목을 빼고 늘어선/ 나무들의 기다림은 언재부터인가/ 그리움으로 짓물러지고/ 이별은 쉼없이 흘러가다 어느/ 낯선 마을에 제 뼈를 묻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슬픔을 모두 잘라냈지만/ 아직 반반한 얼굴 기억 속에서/ 모두 게워냈어야 하는데/ 영산포에서 영산포를 기억갈 수 없어/ 나는 갑자기 말을 더듬고/ 입 속을 벌겋게 달군 새마을호 열차가/ 오래된 긴 터널을 향해 질주한다.//
부평초 / 허갑순
한 때는 바다를 꿈꾸었지/ 만선의 포만감과 무엇보다도/ 넒은 창공으로 흩어지는 무수한/ 날개들의 추락을 받쳐줄 수 있는/ 어부들의 그물로 살고 싶었어/ 튼튼한 그물의 구멍으로 아침마다/ 식탁에 오르른 싱싱한 태양을 건져올리고/ 멀리 우주로 헤엄쳐 나가는/ 먹이사슬의 운명을 바람으로 풀어놓아/ 눈 멀어 보지 못하는 장님의 눈에 꽂혀/ 푸른 융단으로 깔리고 싶었어/ 철없이 날 뛰는 물벼룩 떼 작은 날개 밑에 품어주고/ 철분결핍증을 앓는 새들의 숲에 향기로운/ 춤으로 남겨져서는 땡그랑 땡그랑 울리는/ 총소리보다 더 멀리 가고 싶었어/ 더 이상 바다가 꿈이 아닐 때 서서히 조여오는 두려움/ 하얀 물보라가 일으키는 아찔한 현기증/ 푸른 숲은 텅비어 가고 긴 독백으로 갇히고 마는 바다/ 한 덩이의 밥/ 밥을 타고 오르는 끈끈한 눈빛/ 영하의 수은주를 오르내리는 가난한 불빛/ 작은 얼굴들 파르르 떨리는 웃음/ 서로 엉키고 마는 뿌리에 대하여/ 앞으로 앞으로 흐르지 못하는 바다에 대하여/ 우린 서로 닮을 일이다/ 얼굴 맞대고 어딘가로 흘러갈 일이다//
봄이 되었다 / 허갑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출발하였다/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만날 수 있다/ 운명처럼/ 낯선 문명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다시 나를 찾아오는 까닭을 묻는다면/ 그것은 네가 봄이기 때문일까/ 첫사랑은 불발로 끝났지만/ 너는 집요하게 나를 첫사랑으로/ 이끈다/ 도시의 거리, 거리엔 영원한 불멸이 숨을 고르고/ 아픈 사람들조차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오래전에 너는 나를 길들였다/ 기다림이 찬란한 어둠이라는 것을/ 삭막한 겨울을 견디는 그냥 침묵이라는 것을/ 가지마다 눈물이 피었다/ 어리어리한 눈망울에 갇혀있었던 네가/ 오늘은 눈물이 되었다/ 비가 되었다/ 봄이 되었다//
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 / 허갑순
꽃잎에 물이 들었다./ 연분홍으로 번졌다./ 어둡던 세상이 갑자기/ 환한 웃음으로/ 터졌지만/ 늘, 알 수 없는 안개도/ 뭉텅하게 만져졌다./ 후회뿐인 아침에도/ 햇빛 찬란한 오후에도/ 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 밖으로 번져나갔다,/ 안은 이미 다시 어둠으로/ 꽃잎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번져나갔다./ 그렇게 퍼지다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무수한 얼굴들로 번져나갔다.//
네잎클로버 / 허갑순
허공에서 손사래를 치다말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굳어진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들이 땅위를 기어 다닌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나무들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살아있다는 것들의 미소가/ 잔인하다 웃을 수 있다는 잔인함, 주검들이/ 널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퀭한 시선과 잔인한 미소가 교차하고/ 네 잎, 심장이 네 개인 클로버가 거기, 있었다/ 삶은 아직 유예하다 내 몸도 아직 멀쩡하다/ 그런데도 내 영혼은 천금처럼 무거워 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를 앓고 있다/ 아침부터 뿌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전기 톱날이 태풍 볼라벤을 베는 날에도 나는/ 멀쩡하게 책을 읽었다 창들이 휘었다/ 문이란 문은 모두 굳게 닫혔다 나도 나를 닫아걸었다/ 클로버 네 잎을 행운이라고 정말 믿고 싶다/ 무거운 시간들이 손끝에서 자유롭다/ 향기로운 영혼들이 어두운 세상을 마구 날게 하다/ 작은 몸들이 나를 들어 올린다 간지럽다/ 날개가 여러 개다/ 행복한 것일까/ 키 큰 아카시아 나무가 전기 톱날에 무너졌다/ 이미 지난밤에 삶이 끝나 있었다//
꽃들은 / 허갑순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동안에/ 꽃들은 제 앞길을 열며갑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꽃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에 꽃들은/ 무거워서 제 삶의 무게만큼 쓰러져 눕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동안/ 땅 속 어둠 속에서도 꽃들은 앞으로 걸어갑니다/ 꽃들은 가을인지 겨울인지 다 알고 있지만/ 그 침묵이 너무 커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꽃들이 / 허갑순
창문 너머 꽃들이 웃고 있다/ 꽃들은 벌써 울고 있다/ 비온 날 한참동안 꽃들이 울고 있다/ 꽃들은 이미 웃고 있다/ 꽃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표정을 바꾸고/ 때도 시도 없이 자지러지게 울거나 웃는다/ 꽃들은 그 울음이 너무 깊어서 헤아리기 어렵고/ 꽃들은 그 웃음이 너무 깊어서 흉내 낼 수 없다/ 햇빛에 잘 길들여진 꽃들은 아프지 않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온종일 문을 열고 사람을 기다리는지/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져 온다/ 가상현실 속의 꽃들은 마지막 유서를 쓰고/ ‘종료시간 5분전’/ 생각 없는 여자 하나가 창 밖으로 급히 전송되고//
아카시아꽃 / 허갑순
아카시아꽃이 피었다/ 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허옇게 거품을 베물었다/ 그 앵돌아진 사연들이/ 제각기 꽃잎이 되고/ 꽃술이 되고 독이 되었다/ 아카시아꽃 그 아래 서 보면/ 그리움을 삭이지 못한 채/ 허옇게 삭발한 여인들이/ 일제히 합장을 한다/ 무지렁이의 기도가 지천을/ 울리면 아직 꽃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이승을 건너가기/ 위해 무시로 꽃향기를 밟고/ 꽃향기를 밟고 꽃향기를 밟고//
민들레 / 허갑순
시멘트 바닥 깨진 틈새로/ 하늘이 빠끔히 들여다보인다/ 비 개인 하늘은/ 고철수집상 담벼락에 끼어/ 그 자리가 대낮처럼 환하다/ 문득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굽은 등이 생각난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그 사이 얼기설기/ 그물을 치고 내 안에 꽝! 꽝!/ 못질을 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비바람에도 끄덕 없는 전천후 가난을/ 한웅큼씩 뿌려주시던 어머니/ 마당 가득 싹이 난 슬픔들을/ 지치지도 않으시고 막무가내로/ 길들이시던 아버지/ 시멘트 바닥 깨진 틈새로/ 노오란 못 하나 반짝이고/ 나는 그 자리에 꽃으로/ 못 박히고 말았다//
담쟁이 넝쿨 / 허갑순
이른 새벽녘/ 아직 잠 못들어 뒤척이는 어둠이/ 내 늑골을 타고 기어오른다/ 납작하게 엎드린 채 기어오르다가/ 숨이 가픈지 푸른 잎들을 해실해실 토해놓는다/ 가느다란 실핏줄로 사다리를 만들고/ 부드러운 등뼈로 기둥을 세우고/ 내장이며 쓸개를 온통 드러낸 채/ 오체투지의 고행 길을 서슴없이 해치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을 오르면서/ 고지를 행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는다/ 얼마나 많은 길을 더듬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아 왔을까/ 사는 것이 이렇게 오르막길이라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은 내리막길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느 오늘도 독거미처럼 덫을 놓고/ 누군가를, 누군가를 포획하고 싶어졌는지/ 이방인의 딱딱한 가슴에다 깃발을 꼽고/ 이렇게 펄럭이고 싶어졌는지//
백련 / 허갑순
내 안에 검은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물의 맨 마지막 뿌리에 닿지 못한 샛강들도/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갑니다/ 애초,/ 생각이 많을 것이라는 귀띔조차 해주지 않으시고/ 고통이랄지, 번뇌랄지, 왜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않았나/ 모릅니다/ 그렇게 모두를 흘러보내고 하얗게 절벽이 된 가슴으로/ 세상 것들과 나란히 몸 섞으며 흘러가시겠다면/ 그 몸서리 쳐지던 절망뿐이어서 나는 다시/ 깨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워낼수록 허기가 지던 내 안의 삶들이/ 오늘은 결가부좌를 틀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강물이 세차게 흘러갈수록 내 잠은 더 깊어지고/ 나는 정수리부터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두런거리는 연꽃잎들 사이로/ 백련 한 송이 비집고 일어나 천천히/ 이승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가을 연꽃 / 허갑순
연꽃이 가벼워지기 시작한 날/ 제 삶의 무게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한 날/ 연꽃은 다시 시궁창 물 속에 제 촉수를 담그고/ 그 동안의 삶의 찌꺼기들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뿌리부터 까맣게 타들어가는/ 연꽃들의 욕망은 사바세계를 향하고/ 가을 햇살처럼 투명한 연꽃잎 한 장/ 잠자리 날개로도 어쩌지 못하는/ 절망은 다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도 좋을/ 가을, 연꽃 방죽에는 잠자리들 편을 가르며 날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저편으로 가을 연꽃잎들/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 / 허갑순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한숨이 묻어 나온다고 생각했을 때/ 긴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던 어머니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어머니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운 미소도/ 오랜 세월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가난도/ 더 이상 화두가 되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많이 걸어서 군살로 박힌 아버지가/ 어머니는 짧게 머리카락을 쳐내버리고/ 반쯤 헤벌어진 입술 사이에다 자식들을 묻어버렸다/ 푸르디 푸른 봄날을 해체하고/ 당신 가슴 속에서 화석이 되어버린 사랑을 해체하고/ 어머니는 그렇게 위대하게/ 뜨거워진 대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짙은 안개처럼 조용히 땅 위로/ 내려 앉고 아직,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하얀 정구공처럼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4월의 눈 / 허갑순
꽃들의 얼굴이 무거워서/ 멈추어 섰는데/ 거기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4월에도 눈이 온다// 꽃들은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부릅뜬 두 눈에서 푸-ㄹ풀 담배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세찬 바람과 함께 꽃을 비벼서 끄자/ 눈은 4월에도 내렸다// 눈은 차창을 때리고 지나간다/ 한참이나 지난 봄이지만/ 다시 한번 발길을 돌리다가/ 분명, 4월은 눈이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꽃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눈은 한길을 가로질러 내게로 온다/ 4월에도 눈꽃이 핀다. 딱 한번//겨울이 도도하게 자리를 잡고 지나가고//
태양의 문신 / 허갑순
아침에 눈을 떴다/ 지난밤에 흔적이 지워졌다/ 적막강산이 내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누런 먼지를 뿜어올린다/ 몇 년째 전깃줄 위에서 너덜거리던 재개발 현수막/ 밤이면 듬섬듬성 불빛이 새어나와 그나마 안도의 숨을/ 고르게 했던 3단지 주공아파트/ 두 달 전 마지막 건물이 폭삭 내려앉고 천둥이 치고/ 포클레인이 분주하게 분탕질을 쳤다/ 머리가 잘리고 허리가 두 동강난 건물들 위로/ 사람들은 맹렬하게 사격을 퍼부었다/ 덤프트럭이 날마다 시체들을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른 해를 마다하지 않고 봄이면 탐스럽게 피워올리던/ 벚꽃들과도 변변한 작별인사 한번 못했다/ 눈을 감고 나무들의 숨소리를 따라 간다/ 허허벌판에 누런 문신이 하나 쓸쓸하게 박혀있다/ 그 위에 커다란 적막이 누워 태양의 면적만큼이나/ 먼지투성이인 지친 몸을 부풀리고 있다/ 이제 뾰쪽한 탑들이 세워질 차례다/ 한차례 비바람이 불자 부스스 문신이 지워졌다//
바람의 유서 / 허갑순
고독하지 않기 위해/ 그곳을 떠나왔다/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히고/ 키 큰 나무들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날개가 없어도 안녕하다/ 빗장을 여는 손도 단단하다/ 언젠가 마지막이란 말을/ 함부로 발설했을 때/ 나조차도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너를 만질 수 없어서 종이를 꺼낸다/ 편지를 쓸 수 없어서 그저 흘러/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한다/ 나는 너의 틈새를 무수한 소리로만/ 기억한다// 바람이 그쳤다//
비오는 날 아침, 조간신문은 / 허갑순
울렁거림이 계속되었다/ 방금 먹어치웠던 생선 한 토막이 위장 속에 섞이지 못했다/ 세계화로 세계화로 뻗어나가지 못한 신문 사설 한 토막이/ 도시의 외곽에 묶인 채 도심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 위로 질주해나가는 크고 작은 활자들이 부지런히/ 아침밥상과 섞이고 걸쭉하고 기구한 사연들이 뭉클하게 만져졌다/ 사람들은 입씨름을 계속해도 좋았다/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계속해도 좋았다/ 21세기와 코로나19가 얽히고/ 백화점과 재래시장이 얽히고/ 공무원과 샐러리맨들이 한데 얽히었다/ 가로 세로로 차들이 얽히자/ 가로와 세로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쪽 저쪽에 구멍이 뚫리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베스터셀러가 되지 못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토해 내기가 무섭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활자/ 누구에겐가 등을 떠밀린 채 무섭게 질주해 가는 얼굴/ 지느러미가 젖는다/ 누덕 누덕 기운 햇빛마저 젖는다, 자꾸 젖는다/ 비오는 날 아침 조간 신문은//
그렇게 지날 것이다 / 허갑순
사람들은 그렇게 지날 것이다/ 물오른 나무들 곁을 눈 먼 그리움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상처 한켠에/ 추억 한 짐씩 부려놓고 화석이 되어버린/ 시간들을 새벽 강가에 뿌려 놓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바람, 골목 휘돌아 후미진 공터로 달아나듯/ 그렇게 속수무책 별이 되어버린 어둠 속을/ 가슴 벅찬 사랑 휘저으며 휘저으며/ 떠나지 못하고 새벽강을 바라볼 것이다// 어둠을 닦아내면 풀잎 이슬을 달고/ 발돋음 하는 어린 것들 큰 물살 뚫으면/ 나는 어디만큼 왔을까, 너는 어디만큼 왔니/ 겁없이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들 그 곁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옛날 옛적 보리밭을 지나/ 아직 눈 내리는 밤과 다투어 피고 지는 꽃, 꽃/ 시작, 끝, 끝, 시작, 시작, 시작, 끝, 끝, 끝/ 새벽강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쉿!//
호남평야 / 허갑순
서쪽 어디쯤에서 가슴을 열어 놓은 채로 겨울을 품으면/ 눈은 발 밑에서 오래 서걱거렸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겨울이 오기 전부터 뒹구는/ 작은 벌레들의 잔기침 소리 종일 이웃마을에서 이웃마을로/ 번져나가고 안부를 묻는 초롱초롱한 눈망울 거두어들이면/ 들녘은 잠시 휴식을 취한다/ 겨울은 그렇게 실없이 잔잔한 품 속으로 기어들어/ 어제의 풍성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을 지워버린다// 익산이 그랬고 고창이 그랬고 나주가 그랬고/ 펑퍼짐함 아랫도리 건강하게 버티고 서, 서/ 쑥쑥 아들 딸 낳아주던 이쁘디 이쁜 얼굴이야/ 만고풍상인들 사족을 못쓰던 투박한 너털웃음/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널찍한 가슴팍으로/ 뛰어오르면/ 메뚜기 후두둑 옆구리를 치고 달아나던/ 그 아슴한 추억인들 채머리 흔들며 비껴가는 그 곳// 평야는 반듯한 바둑판의 이치를 모른다/ 검은 돌과 흰 돌의 승부에는 처음부터 무관하다/ 어느 집이 누구의 집보다 많다든지/ 어떤 이보다 한 수 위라든지/ 농자금보다 대선자금에 눈이 멀었다든지/ 높은 산들의 고만 고만한 이유에 목을 맨다든지/ 도시가 농촌보다 살기 좋다든지, 에/ 전혀 아니올씨답니다. 만// 황금벌판 영순이 삽살개 저수지 낚시터 염생이/ 어느 날 소문없이 앓다가 너도 나도 다같이/ 낮아져서 여영 뜬 열로 앓고 나면/ 도시로 도시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그립지도 않아/ 뒤척이며 막연히 바라보고 싶지도 않아/ 겨울은 지나가는 뜬소문처럼 흘러갈 것이고/ 물줄기 콸콸 샛강 뚫으면 막혔던 숨통 흐르고 흘러/ 금강을 뚫고 만경강을 후벼돌고 씩씩거리며 영산강에 이르면//
섬진강 가에서 / 허갑순
늦게 출발한 나는/ 늦게 섬진강에 닿았습니다./ 저녁노을이 산고를 치르듯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 섬진강가에 들꽃들을 앞세우며 닿았습니다/ 작년보다 더 빨라진 물살을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항상 출발이 늦어졌고/ 나는 심하게 멀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인기척만 느껴져도 멈추어 섰고/ 서있는 그대로 돌이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물비늘 반짝이며 흘러가는 섬진강의 적막이었습니다/ 언젠가 맨 마지막 손님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섬진강이 점점 깊어지는 것이, 그리움으로 몹시/ 야위어 간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나는 그만 신발을/ 벗어들었습니다/ 이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섬진강 가에서/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물비린내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휴지처럼 구겨진 신발을/ 닦습니다//
보성강 / 허갑순
멀리서 바라보는 너는/ 그 날의 주인공처럼/ 눈부셨다/ 낮은 보폭으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너는/ 아름다웠다/ 지난 겨울 너는 내게 와서/ 여자처럼 수태를 하고/ 오랜 시간 배를 움켜쥐며/ 산고를 치루었다/ 그 때 헛구역질하며 토해놓은/ 그림 같은 마을들이/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고/ 말씀보다 더 은혜로운 강물이/ 슬픔을 다독이면 섬진강은/ 너를 품에 안아 기르고/ 나는 모태신앙으로 어머니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서/ 다시 흘러간다.//
강물의 주소 / 허갑순
강바닥이 드러난 강을 건너면서/ 오래 전 내 기억에서 멀어진/ 내 불쌍한 등뼈를 생각했다/ 나는 그때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며/ 강바닥을 뻔질나게 기어 다니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물은 내 키를 넘어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다/ 죽어버린 새들의 발에 채인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강물은/ 내 어두운 등뼈에 홈을 파기 시작하고/ 나는 그 아픔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거뭇거뭇한 저승꽃이 강물에 떠밀리며/ 이미 지나왔던 길 위에서 전설처럼 아득한/ 낡은 집 한 채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는 강물의 주소를 묻지 않기로 했다/ 다시는 강물의 등뼈를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움의 그리움 / 허갑순
겨울 햇살은 자꾸 눈 속에 갇히었다/ 서울을 빠져 나가는 고속도로 한 켠에도/ 벌써 햇살은 쌓여 있었다./ 고속버스의 전조등이 조용히 길 위에 누워있는/ 눈송이들을 비추자 햇살은 말없이 흩어졌다/ 손으로 잡을 수 없었던 시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몰려간다 그새 버스 안도 햇살에 달구어져 따뜻하다/ 갑자기 햇살이 그립다 그리운 햇살이 또 그립다/ 나는 차창에 머리를 대고 겨울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나를 버스 안에 가두었다/ 앞으로도 5시간은 족히 갇힌 채로 달려야 한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도 달려가고 있다/ 하얀 눈송이와 부챗살 같은 햇살이 유일하게 내 앞에/ 서있다 사람은 때때로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몹시 그리운 것은 고향의 고샅길이나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이다/ 어머니가 사립문을 열고 동네 우물터로 물 길러 나가신다/ 아버지는 소여물을 쑤시고 돼지 여물통에 그득하게/ 한 상 차려 놓으신다/ 동구 밖 당산나무 밑에는 한 해의 소원을 비는 기도소리가 낭자하다/ 그렇게 그리움은 갇힌 채로 나를 담금질 한다/ 갇힌 상태로 바라보는 나무들도 그리움으로 목이 메었다/ 겨울 햇살이 자꾸 하얀 눈송이에 갇힌 이유도 그리움/ 때문일까/ 변변한 그리움도 만들지 못하는 나는 그리움의 그리움을 향해 달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하얀 눈 속에 갇힌 햇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싸래기눈 / 허갑순
순천에 가는 날 싸래기 눈이 날린다/ 작은 좁쌀만도 못한 게 여간 야물다/ 민낯을 툭툭 치고 달아나는 솜씨가/ 매섭다/ 독수리의 눈처럼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그럴 때마다 부연 하늘이 부르르 몸을 떤다/ 나뭇가지들도 흰 비늘을 부지런히 털어낸다/ 쌓이지도 못하고 날리기만 하는 눈발을 보면서/ 어제까지 미완성으로 날리기만 하는 아버지를/ 더듬어 보았다/ 더듬을수록 아버지의 슬픔이 깊어진다/ 깊어진 슬픔과 차창을 스치고 흩날리는 눈물이/ 싸래기 눈은 타협을 몰랐다/ 정지된 겨울 풍경과 쌓이지도 못한 아버지의 고향이/ 서로 엉기지 못하고 흩어지기만 한다/ 순천이란 이정표에도 닿지 못하고 눈은 자꾸만/ 더 잘게 부셔져 내린다/ 기침소리가 가끔씩 정지된 시간 속에서 되살아난다/ 너무 추워서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했던/ 꽁꽁 얼어붙은 아버지가 마지막 휘갈겨 쓴 연서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작지만 아주 단단하게/ 적혀 있었다/ 저 눈 가루들은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이후에도 이전에도 없었던 지금 이 순간의 사랑에 대해/ 못났지만 아주 작은 눈들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쌓여갈 것이다//
어떤 사랑 / 허갑순
어둠도 흘러간다는 것을/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불을 켜고,/ 고속도로에 서 있어 보면 안다/ 어둠도 때론 대낮보다도 환한 낯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기는 전등, 부드럽게, 손가락에,/ 스위치를 켜보면 안다/ 어둠도 어둠 나름이어서/ 아버지는 일찍부터 어머니를 개 패듯 팼고/ 어머니는 곡예사처럼 이리저리 삶을/ 위태하게 타고 넘었다/ (사랑때문이라고 했다.)/ (사랑했기때문이다라고 했다.)/ (죽으면썩어질놈의삭신 사랑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타고 넘었다/ (아직사랑이뭔지몰라서.)/ (사랑이밥먹여주냐.)/ (사랑좋아하시네.)/ 아버지의 어둠과 어머니의 어둠이/ 무슨 짐승들의 혀처럼 착착 감기었고/ 대낮보다 더 환한 낯짝을 들고 저기, 저 모퉁이를/ 흘러가고 계시다 흘러서 흘러가서 눈물 한 방울로/ 모질게 나를 흔들고 계시다//
간판 / 허갑순
내 품에 품었던 거/ 오지게 품었던 거/ 체온 깊숙이 꽂힌 거/ 독하게 꽂혔던 거/ 사람들의 입쌀에 올린 거/ 무지하게 올랐던 거/ 보고지고 보고지고/ 잊혀지고 잊혀지고 잊혀지고/ 펄럭이는 깃발, 푸른 깃발/ 빨간 물고기처럼 나는/ 검붉은 내장 속을 표류한다/ 필사적으로 그대 앞에서 팔딱거린다/ 사람들의 얼굴이 찬란한 네온싸인에/ 섞여 재빠르게 지워진다/ 방금 게워낸 창자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산업주의의 꽃이요/ 나는 자본주의의 밥이요//
나무들 2 -상한 영혼끼리 / 허갑순
슬퍼하지 마/ 나무들 흐느낀다/ 오래된 마을 입구에서 흐느낀다/ 지금 마악 성불한 아기스님까지 흐느낀다/ 슬퍼하지 마/ 나뭇가지 흔들린다/ 낡고 초라한 시골길이 함부로 흔들린다/ 큰 스님 염불소리 뼛속까지 흔들어 놓고/ 슬퍼하지 마, 나무들/ 어둠과 어둠을 지나서 네 곁에 이르르면/ 상한 얼굴끼리 얼굴 부비고/ 사람들이 그리워, 그리워 여기서/ 서 있다 잠시 서 있다 갈 수 있게/ 여기서 흔들리다, 흔들리다 갈 수 있게//
나무들 12 -부활 / 허갑순
어느 날/ 오래된 말씀들이/ 자신들이 낙엽인양/ 땅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내 발 밑에 커다란 무덤을 파고/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어둡고 음습한 무덤 위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 아무렇지 않게 알몸 위에 나이테 하나만 걸치고/ 매너리즘에 빠진 나무들은/ 그리움이 앙금처럼 고이기 시작한 나무들은/ 한 생애 동안 몇 번이나 뒤돌아볼 수 있을까/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돌아와서 나는 무엇으로 살아남을까/ 나는 오랫동안 무덤 앞을 서성이다가/ 천천히 성호를 긋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전 크기만한 나뭇잎들이 “우~와” 하고/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무들 16 / 허갑순
햇빛이 쨍한 오후 한나절/ 나무들은 그들의 몸을 햇빛 위에/ 부리기 시작한다/ 기진맥진해진 자동차들이 그 곁을 지나간다/ 사막을 걸어오는 동안 세상이 두어 번 바뀌었어도/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정수리부터 젖어들기 시작하여/ 딱딱한 시멘트바닥을 홍건이 적시고/ 아직 비릿한 잎사귀에서는 억울하다는 듯/ 푸른 피가 뚝! 뚝! 떨어진다/ 나무는 햇빛이 쨍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제 몸 속에서 단단한 못이 되어버린 햇빛을//
나무들 17 / 허갑순
비 속에서/ 나무들의 피돌기가 한창이다/ 맘껏 열어놓은 그들의 수관부를 타고/ 도시의 열기들이 조금씩 식어가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끼인 그들의/ 피투성이 언어가 작은 나뭇잎들을/ 체관부 밖으로 힘껏 밀어낸다/ 나무들은 아무렇지 않게 배설하게 될/ 그들의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일까/ 작년 이맘때 사람들이 흘리고 간 말들이/ 저렇게 충실하게 가지에 매달고 있는/ 저 억척스런 오기 좀 봐/ 비 속에서/ 점점 생기를 더해가며 내 앞을 달려가고 있는/ 어깨가 떠 벌어지고 여드름 자국이 흉흉한//
나무들 56 / 허갑순
마른 장작더미에서 탁탁탁 불꽃이 인다/ 주춤 주춤 머뭇거리다가 한 참 만에 손가락만한 불쏘시개에 불이 붙었다/ 매캐한 세상이 들고 일어나고 잘 젖은 나무들은 말이 없다/ 오랜 침묵이 계속되자 나무들은 또 한 번 몸을 뒤척인다/ 말을 아끼는 나무들도 오늘은 마당으로 뛰쳐나와 머리를 들이 민다/ 불쏘시개가 또 한 번 탁!탁!탁! 파열음을 낸다/ 불붙어 사납게 뒤틀린 세상에서는 나무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말할 때 빛이 난다/ 제 몸을 아낌없이 다 버릴 때 하늘을 삼킬 듯한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거대한 숲이 하나의 불쏘시개가 된다/ 아직 만만하게 태울 나무 한 그루 만들지 못한 나는, 어디선가 타닥!! 타닥!! 타고 있을 그대들이 보고 싶다./ 그대들이 검은 아가리 속에서 날카로운 불꽃으로 거듭나는.//
나무들 78 / 허갑순
저녁이 오면 나무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무겁게 끌고 다닌다/ 가로등의 불빛들이 자주 나무들과 몸을 섞는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뭇잎들이 밀감빛 가로등 밑으로 번져 나갈 때/ 서로 엉킨 신들은 얼굴이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 종일 사막을 헤매고 다니던 태양의 속살보다 어둡다// 잔인해서 사림들이 절대 만들어내지 못한 신, 바다의 바다,/ 어둠을 길들이는 미끈한 지느러미가 나무들 사이로 미끄러져 간다/ 싸이렌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오디세우스의 귀 속으로 흘러들 때/ 수족같은 귀하들의 귀를 밀납으로 봉해버렸다, 죽음의 의식을 잠시/ 미루는 동안 산화는 오디세우스를 묶고 있는 돛대 위에 싹을 틔웠다// 모험을 끝내고 무사히 귀향한 그는 신들의 반열에 올랐던 것일까/ 거리를 가로질러 질주하려는 본능을 여기, 천년의 잠 속에 다시 묶는다/ 화석으로 묻고 화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잠수 탄다. 탄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그곳으로 죽음들이 뻔뻔하게 낯짝을 추켜세우고/ 호머의 서사시를 줄줄 외우던 환상의 바다 속을 헤엄쳐 간다// 가까이에 교회의 첨탑이 깜빡거린다 기도를 하기 위해 나무 밑에 모였었다는/ 순박한 전설을 황급히 밀어 넣고 일어선다. 지나가기 위해 멈추어 선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거리 저편에서 겁없이 홀로서서 맨 먼저 기도소리가, 눈 먼/ 기도 소리는 싸이렌의 감미로운 노래였을까, 쓰나미였을까, 죽은 나무들을 통과/ 하기 위해 계몽스런 방사능이 심장을 파고든다// 나무들이, 뿌리들이 뒤집혀지고 혼돈의 목소리가 종횡무진 소용돌이 친다 처음이 된 바다,/ 쓰나미의 바닥이 된 나무들, 쓰나미는 이미 계몽된 바다다 신화가 된 바다다 바다가 저녁 가로등 불빛에 까딱인다 까딱, 계몽된 돛대에서는 늘 푸른 나무들이 산다 계몽된 요오드 플루토늄 세슘, 계몽된 쓰나미, 쓰나미가 된 나무와 바다가 신들이 사는 동네에서 잔치를 벌인다/ 피의 잔인함과 피의 계시에 따라 나는 한 마리 순한 양, 곧 재단에 오를 신들의 제물// 화사한 꽃들이, 나무들이 뒹구는 이곳은 이미 죽은 자들이 살고 있었다 빛도 닿지 않은 바다 속을 그리워하면서, 그 바다를 영혼이라 부르면 안될까, 아주 어두운, 생명의 시원지를 다시 쓸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영혼도 살아남을 수 없는 방사능의 도시가 나무들의 어둠 속으로 황급히 미끄러진다// 나무들의 내장을 들여다 본다 계몽된 내장에는 쓰나미가 된 나무들과 바다가 서로 엉켜//
나무들 112 / 허갑순
너를 쓰지 않으면 입이 고프다/ 입안에 쓴물이 고이고/ 너를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쓸쓸하다/ 머리가 텅 비고 가슴에 슬픔이 고인다/ 너의 목소리조차 그립다/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너의 암호/ 너는 오늘도 사방으로 너의 촉수를/ 드리우고 나를 건성건성 바라본다/ 나에게 범람한 초록물이 너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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