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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목 향로 / 김병락

부흐고비 2022. 1. 20. 14:09

결국 이게 올 줄이야. 돌이켜봐도 요번 일은 결정을 잘한 것 같다. 제사 때 결 고운 목 향로를 보고 아마 가족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거다. 조상께서도 “정말 잘했네.” 하시며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향을 타고 방안에 가득하리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봐도 옴팡진 갈색 나무가 반들반들한 게 대견스럽다. 누가 들으면 참 한심스럽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나대로 이리 흥분하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상품권이 하나 생겼다. 만 오천 원권이다. 제품을 살 때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다. 그걸로 인해 지난번 대형마트엘 한번 갔었는데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성과 없이 끝나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다. 꼭 결판을 내겠노라고 다짐하고 집을 나섰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인데 꼭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꽤 신경이 쓰인다. 나는 쇼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혼자 구경하고 있을 때 판매원이 거들면 씩 꽁무니를 빼 버리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만다.

그냥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다닌다는 표현이 맞겠다. 매장 측에서 보면 한갓 돈 안 되는 천덕구니 고객일 뿐이다. 여느 사람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애착을 갖고 요모조모 살펴도 보고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대부분 건성으로 휙 지나친다. 가격표만 훑고 가는 경우가 많다. 집사람하고 쇼핑하면 늘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간다. 아내는 같은 물건이라도 견주어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거기에 별 관심 없는 난 이내 지치고 만다. 어쨌든 오늘은 혼자 의기 충만하여 마트에 오긴 했으나 여태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 만 축내고 있다.

문제는 물건이 좋더라도 상품권 액수에 맞아야 한다. 다시 시작이다. 우선순위를 세웠다. 자주 찾는 생활용품 전시대부터 가보자. 먼저 집에 필요한 게 뭐 없을까를 생각해보고, 그다음 가성비를 따지자. 옷가게로 발길이 옮겨간다. 상품에 붙어있는 글씨는 왜 그리 작은지 겨우 인지를 하고는 금 새 놓아버린다. 아무리 봐도 내 것은 아닌 것 같아서이다. 그 옆 등산복 판매대로 발길을 옮긴다. 혹여 세일하는 게 있나 싶어 훑어보아도 입만 딱 벌리고 만다. 이거다 싶어 관심을 가지다가도 옆쪽으로 몇 번 옮겨 다니다보면 감각이 둔해져 원위치가 되고 만다. 그새 다리가 아프고 머리도 어질하다.

왜 이럴까. 급기야 조바심이 난다. 고작 만 오천 원인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요즘 누구는 펀드니, 전매니 해서 수천, 수억을 쥐락펴락하는데 상품권 하나로 시답지 않게 애를 태우다니…. 오늘은 나눠서라도 상품권을 꼭 쓰고 말리라. 매장 직원과 여러 번 부딪친다.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사람을 만나면 괜히 미안하다. 저쪽의 한 부부가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는 모습이 부럽다. 서로 쳐다보며 옷의 색상이며 크기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뭇 다정스럽다.

물건 하나 고르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니, 세상일 뭘 제대로 할 수 있으랴.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의욕 부족에다가 확실한 가치관이 서지 않아서일 게다. 몸도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정보의 끄나풀을 놓치지 않으려고 뉴스를 접하고, 휴대폰은 아예 손에서 떼지도 못할 지경이 됐다. 이 상황이 내 몸과 사고로 연결되어 지는 게 서글퍼진다. 나이 탓만 해서는 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간다고 했는데….

그러다 번득 눈에 뜨이는 게 있다. 밥그릇, 수저, 식기 등이 즐비한 곳에 이르러 발길이 딱 머문다. 명절 제기 진열장이다. 그래 맞아. 오리 목 향로! 제법 모양도 나고 품격을 높일 수 있어 가족들도 좋아할 것 같다. 더는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됐다. 결정하자. 계산대에서 전혀 졸아들 일 없이 당당하게 지불하고 나가도 되겠다. 적은 액수지만 상품권을 빨리 소모하지 못해 애태우던 게 묵은 때를 벗기듯 가뿐해졌다.

결국 내 숙원사업은 두 달이나 걸렸고,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밖을 나왔다. 가을장마가 며칠째 이어진다. 나는 암탉이 알을 품듯 우산을 깊게 내려쓰고 가슴에다 꼭 안았다. 향을 피우지 않아도 콧속으로 솔솔 진득함이 배어든다. 오리처럼 푸다닥 하늘로 솟아오르고 싶다.


김병락 수필가 △2006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2020, 2021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수필집 ‘매호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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