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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 맞는 쾌락 / 박혜숙

부흐고비 2022. 1. 21. 09:20

당신은 비를 맞아 본 적이 있습니까? 가늘게 내리는 보슬비나 우장을 갖춘 상태에서 맞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창밖으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뛰어 들어 본 적이 있었는가 말입니다. 저는 이따금 몽유병자처럼 앞뒤 생각 않고 빗속을 걷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동은 번번이 이성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짓을 하고 말았지요. 며칠 째 걸렀던 산행을 나섰습니다. 반쯤 올랐는데 하늘이 어두워지는 폼새가 수상했습니다.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왕에 나선 김에 목표 지점까지 갔지요. 돌아오는 길을 재촉했지만 먹구름이 지름길로 쫒아와 심통을 터트렸습니다. 약수터 정자에 왔을 때는 반쯤은 젖고 말았습니다. 올라갈 때 보았던 할머니와 다른 등산객 서넛이 함께 피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지붕 밑으로 몸을 들여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북받치는 설움처럼 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은죽銀竹' 산중에 내리는 비를 두고 시선 이백(李白)이 그리 표현했다지요. 푸른 숲을 배경으로 까마득한 하늘로부터 내리 꽂히는 빗줄기가 내 눈에도 은죽으로 보이더니 갑자기 잠들었던 충동이 들썩들썩 하는 것입니다. 이미 후줄근한 꼴에 더 체면이 뭐 있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빗속으로 성큼 나섰습니다. 만류하는 할머니에겐 급한 일을 둘러댔지만 내 걸음은 전혀 급하지 않았습니다. 흠뻑 젖고 나니 꺼릴 것이 없더군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편안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희열이 느껴집디다.

감쌀 것도, 보호할 것도 없이 다 까발렸을 때의 후련함, 무엇인가에 속박되어 있던 상태에서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산을 내려와서도 아주 천천히 걸으며 비 맞는 쾌감을 즐겼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실성한 여자나 쫓겨난 여편네로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실컷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소원 하나를 성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해방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천둥벌거숭이로 물장난 칠 때의 즐거움, 목욕탕에서 물 한바가지를 끼얹고 비로소 수치심을 털어내는 이치, 그것이 물의 속성, 정화력 때문일까요.

친정에 온 새댁은 석 달 열흘 만 내리라고 주문을 했다지요. 엄한 시가에 돌아가지 못하는 핑계가 될 만큼 비를 맞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강을 해칠 우려나, 후줄근한 몰골을 보이지 않으려는 체면 때문일까요. 그것이 된 시어머니의 눈총보다 더 무서웠을까요. 아니면 인류의 잠재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노아의 방부' 때문일까요. 어쨌거나 요즘은 비 맞을 일이 드물지요. 걷기보다는 차를 타고, 길가의 많은 건물들은 비를 피해주기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손가방에 들어가는 작은 우산의 공로가 크지요.

그러나 사람이 사는 일이 비 맞는 일은 아닌지요. 몸에 칭칭 감겨오는 젖은 옷처럼 귀찮은 일을 피하고, 일상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몸을 사리고 남의 눈을 의식해 마음 가는 일을 주저하게 되는 일련의 행위들은 비를 피하려는 심정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장마를 겪은 산은 한 바탕 몸살을 앓지요. 나뭇가지가 찢기고 숲은 이리저리 생채기가 납니다. 길이 패이고 널다리가 떠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바탕 비 치레를 하고나면 말랐던 개울에 물소리가 활기차지요. 나무들은 더 생기가 돌고 대기는 반짝반짝 빛납니다. 자연이 갖고 있는 자정의 능력을 부인할 수 없지요.

사람도 궂은일을 겪고 났을 때 더 성숙해지지 않던가요. 그래 비 맞기를 피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귀찮아도 힘이 들어도 때로는 그 속에 뛰어들어 볼 일입니다. 궂은일을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는 대지처럼 당신도 비 맞는 일을 체험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박혜숙 수필가 1994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빈들에 허수아비』.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인천지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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