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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덧나무의 선물 / 오승휴

부흐고비 2022. 1. 21. 09:12

초목이 우거진 숲길 따라 산등성이를 오른다. 혼자 걷는 산책에 맛들인지 벌써 몇 년이 된다. 산길에서는 사람들이 왠지 반갑다. 숲속의 풀과 나무에서도 자연의 소리와 아름다움을 만난다.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며 부딪히는 세상사에도 애정 어린 눈빛으로 관심이 더 깊어진다. 모든 근심이 산길에서 만나는 반가움과 아름다움에 용해되어버려 그럴까.

이 수목원 숲속 ‘체력단련장’ 한가운데에 야생하는 덧나무 한 그루가 있다. 자태가 빼어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상용 나무다. 꽃나무들이 제 멋을 뽐내는 요즘, 이 덧나무엔 넝쿨처럼 뻗은 가지마다 활짝 핀 꽃들이 볼만하다. 높이가 3m쯤 되는 활엽관목이다. 굵은 나무줄기엔 이끼가 돋아있고 버섯도 피어있어 수령이 30여 년은 되었음직하다. 이곳엔 정자(亭子)도 있고 나무 그늘이 시원해 산책객들이 여기서 쉬어간다. 오르내리는 길에 나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기도 하다.

해가 바뀌면 나무들 중에서 제일 먼저 뾰족한 새싹을 틔우는 나무가 덧나무다. 인동과에 속하는 이 나무의 뿌리와 껍질, 줄기와 잎은 모두 약재로 쓰이고 있다. 심장질환이나 각종 통증 치료에 효과가 있으며, 특히 부러진 뼈 치료에 효능이 크기에 접골목(接骨木)이라고도 부른다.

덧나무의 수명이 40년 정도라니 이 나무는 중장년을 넘어 이제 노년으로 들어선 셈이다. 그런데도 엷은 노란빛을 띤 흰색 꽃들을 무더기로 피워내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수령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주어진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비장하게 사는 사람 같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게 넘치는 정열과 왕성한 의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덧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이 놀랍다.

오늘도 이 나무에 꿀벌들이 꽃마다 달라붙어서 작업이 한창이다. 어떤 녀석들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쉼 없이 옮겨 다닌다. 손길이 닿지 않는 나뭇가지에 핀 꽃들이라 벌들이 마음 놓고 희롱하며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꽃의 유혹에 벌들이 놀아나는 것일까. 하기야 화창한 봄날인데 어느 쪽이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땀 흘리며 온힘을 다해 일하는 부지런한 꿀벌들을 보노라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그 무엇이 분수처럼 용솟음친다.

‘꽃과 여자는 아름다워야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무도 예외가 아닌가 싶다. 부드러움까지 갖추면 더하리라. 덧나무는 줄기의 가운데에 굵고 부드러운 연한 갈색 심이 있어 가녀린 여인을 연상시킨다. 넝쿨처럼 뻗은 나뭇가지가 푸른 잎으로 몸치장을 시작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산들바람에도 나뭇잎들이 유혹하듯 손짓한다. 콩알만 한 빨간 열매들이 닥지닥지 달리면 그 멋스러움이야. 지금은 밑동에서부터 세 갈래로 갈린 굵은 가지 중에 하나는 잘려 없어졌지만, 우산처럼 더부룩한 수형(樹形)은 아직도 아름답다.

작년 9월, 제주를 강타한 태풍 ‘나리’는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 숲속의 거목들도 강풍에 쓰러져 피해가 컸는데 이 덧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굵은 중심가지가 중간에서 꺾인 것이다. 몰골이 험악했다. 부러진 뼈를 치료한다는 접골목이 아니었던가. 자연 방풍이 잘 된 산 숲속에 있으니 끄떡도 없을 것이라고 안심한 게 잘못이었다. 시원한 그늘을 기대하기도 이젠 어렵게 된 것이다. 다리가 부러져 피가 흐르는 아픔을 느낄 만큼 충격이 컸다. 부러져 잘려나간 가지는 소중한 약재로 쓰이리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태풍이 지난 가을, 그 잘린 가지 밑동에서 새순이 솟아올랐다. 포근한 날씨가 겨울 내내 계속되자 계절에 아랑곳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다른 가지엔 아직 순이 움트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깊은 땅속에서 뿌리를 통해 그 가지를 살려내려는 힘이 용출해서일까. 기대를 많이 했다. 저리 자라 잘린 가지를 대신하려는가하고.

지난 2월,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기대를 걸었던 그 새순가지를 잔인한 늦추위 한파가 삼켜버린 것이다. 추위가 한동안 계속되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자 그동안 자란 가지들이 몽땅 시들어버렸다. 다시 잘려나가 더욱 안타까웠다. ‘일찍 핀 꽃은 빨리 진다.’라는 말을 곱씹어야만 했다.

한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봄, 남은 가지에서 뻗어난 줄기에 돋은 순은 잘 자라 잎이 더 푸르다. 꽃봉오리도 많이 맺어 꽃을 활짝 피워낸 거다. 부러진 뼈를 붙여낸 것처럼 튼실해 보인다. 잘린 가지를 살려내려 쏟았던 온힘을 남은 가지로 몰아주었는가 싶다. 더 활기차고 싱싱하다. 피눈물 나는 고통과 인내의 소산(所産)이리라. 덧나무가 내게 주는 선물일까? 나무가 겪은 고통과 기쁨이 느껴진다.

사람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수많은 고통을 겪기도 하고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값진 인생을 살면서 삶의 충만감을 느끼기도 한다. 교만과 아집, 경쟁과 미움으로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며 구원의 손길을 찾아 울부짖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인생길에서 순탄한 길만을 걷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달리다 쓰러져도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이 부럽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기쁨의 참맛을 안다.

주어진 생명의 씨앗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덧나무에서 생의 소중함을 배운다. 땅속에도 용트림하는 생명이 있음을 깨닫는다. 온힘을 다해 생을 살아가는 그 강인한 생명력은 어땠나. 덧나무처럼 남에게 유익한 존재인가. 꽃과 꿀벌에서 보듯 상생의 원리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법칙이 아니던가. 숲속에서 세상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초목 하나에도 존귀한 한줄기 생명이 흐르고 있음을 새롭게 느낀다.

숲속에 바람이 일렁인다. 한들거리는 덧나무 가지에도 봄이 한창이다. 올여름엔 넉넉한 그늘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아주 시원하고 상쾌한 그늘을.


오승휴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제주지부장. 수필과비평 이사. △제주문인협회, 제주수필문학, 귤림문학 회원.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수필집 『내 마음을 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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