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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혜천 시인

부흐고비 2022. 1. 27. 06:34

김혜천 시인
서울 출생, 2015년 《시문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푸른문학상 수상.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조계종 12기 포교사.

 


 

적정(寂靜) / 김혜천
마방이 잠시 먼 산을 쳐다보는 사이/ 꽃 한 송이// 떨// 어// 진// 다// 천 길 협곡/ 몽롱하게 멀어지는 방울소리// 오색 술 달린 안장을 상으로 받은 날이다// 피멍으로 짊어진 모차와 소금/ 모봉을 넘을 때 마다 하나 씩 빠지는 발톱/ 각혈로 얼룩진 차마고도/ 그 길에서/ 시시때때 다짐했다/ 호시탐탐 노렸다// 등짐으로 닿을 수 없는 그곳/ 명성으로는 더 멀어지는 그곳// 벗어버리자/ 죽음만이 완성이다// 바람의 변주를 타고/ 오방색 춤사위/ 허공을 훠이훠이 젓는다//

폐허에서 오는 봄 / 김혜천
위태로운 발상은 젊음의 다이빙/ 그림자를 보는 건 내공을 보는 일이다// 지상의 발 부친 것들은 중력을 이겨낼 수 없어/ 어깨가 안으로 굽듯/ 낡아가는 것에는 지친 영혼이 깃들어 았다// 이쪽과 저쪽을 버티는 벽을 허무는 일은/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고염나무가 나선으로 뻗어/ 허물어져 가는 벽을 받치고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 검정개의 충혈된 눈// 속삭임도 없이 찾아와/ 뒷덜미를 물어뜯는 삶과 죽음의 경계// 모든 대지는 육탈된 몸의 잔해다/ 우리가 밟고 선 자리가 죽은 자의 무덤 아닌가// 그래서 역사와 자연은 하나다/ 너와 나는 폐허에서 도래한 봄이다// 봄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폐허 속에서 온다//

불씨 / 김혜천
울음새 꽃 이파리 한 잎, 말갛다// 새의 날갯짓이 공기방울을 떨구는/ 오카리나 풍 선율의 아침// 길길이 날뛰고 으르렁 대던 먼 바다를 날아온/ 난자의 란(卵)과 난 막(膜) 사이/ 씨앗 하나 깃든다// 갯바위 정수리 주름과 주름 사이로 분사된/ 괭이갈매기 배설물/ 우연한 마주침은 또 하나의 주름을 만든다// 꽃받침을 제치고 돋아나는 꽃잎/ 꽃잎 위에 꽃잎을 얹는 꽃잎// 물질의 바닥에서 미로를 헤엄쳐/ 정신의 꼭짓점으로 솟아오른다// 원뿔이 넓은 밑면을 가질수록 높아지는 꼭짓점// 헌 누더기 벗어 던지고/ 새로 태어난 자여/ 날아오르라/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 속으로//

물컹한 허기 / 김혜천
빈혈 같은 낮달이/ 서쪽으로 흐르는 뒷마당/ 가마솥엔 돼지머리가 끓는다// 생각의 골격을 이루던 뼈를 발라내고/ 베 보자기에 둥글게 싸/ 맷돌을 눌러 놓으면/ 상형문자 빽빽한 보름달이 뜬다// 그가 달에 남기려 한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기록을 해체한다/ 눈꼬리와 입꼬리가 귀때기에 맞닿은/ 넉넉한 웃음, 명문장이다// 웃음의 배후는 포만/ 무엇이 되기 위해 돼지가 내게 체험된다/ 환한 웃음이 몸에 합성된다// 허기를 베어 먹는 사이/ 달은 야위고// 냐옹...../ 토담 밑 웅크렸던 길고양이/ 떼로 몰려와 빈 보자기를 찢는다// 달은 다시 허기로 배가 불러오고//

벗어나기 / 김혜천
눈먼 자가 촛불을 들고 어둠을 더듬는 동안/ 넥타는 사라지고/ 소금쟁이 한마리 수면 위 고요를 흔든다/ 사념의 바람 수면을 치면 물은 얼고/ 소 발자국에 고이면 바닥이 갈라진다/ 쉽게 열리지 않는 꽃봉오리/ (업) 했다 안했다/ (앎) 안다 모른다/ (시간) 과거 현제 미래/ (공간) 여기와 저기/ 머뭇거림이여/ 네 개의 문을 통과하라/ 명상처럼 내려 앉는 빛/ 티끌에 묻힌 빛을 응시하라/ 그곳에서 빛나는 너 그대로의 너에게로//

소리의 질료 / 김혜천
누가 숲을 고요하다 하는가// 정령들의 눈동자가 아침을 핧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숲에는// 나무와 나무의 간격을 이어주는 바람의 숨결/ 나비 날개짓에 춤추는 이파리들/ 꽃술의 달콤함을 터는 꿀벌의 진저리/ 바위에 붙은 가슴 부풀어 올라 키득대는 이끼들/ 유두같이 매달린 버찌의 젖몸살 앓는 소리/ 죽은 나무 등걸에 피어난 상황버섯의 물기어린 속삭임/ 직박구리가 쪼아 떨어뜨린 나뭇가지의 신음/ 지층을 흔들고 솟아난 동충하초의 함성// 비척거리는 내 활자들 허공 더듬는 소리// 세로로 가로로 공기를 흔들며/ 흩어지는 소리, 소리들// 5월의 숲/ 말 그 너머의 세계, 소리들이 환하다//

찻물의 내변內辨 / 김혜천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물 한 사발 푸른 불꽃 위에 올린다// 해안 蟹眼-하안蝦眼-어목魚目-연주連珠-용천慂泉-등파고랑騰波鼓浪-세우細雨// 게의 눈알 만하게 바닥에 들러붙은 물의 꿈/ 바닥을 딛고 떠올라 새우의 눈을 뜨고 세상을 엿본다/ 점점 넓어지는 동공, 둥글고 또렷한 물고기의 눈으로 대양을 헤엄친다/ 수면으로 떠오르며 구슬을 꿰듯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 심연의 고요가 거꾸로 치솟는다/ 마침내 북을 치듯 파랑이 일듯 한바탕 끓어오르고서야/ 잔 빗방울이 수면 위에 내리듯 잦아드는 물// 그저 바라보고 기다릴 뿐/ 잘 익어 한 잔의 차가 되어 쓰여지길 기다릴 뿐//

품크툼의 향연 / 김혜천
빛의 보폭을 조절한다/ 색조를 맞추는 조리개가 어지럽다/ 동공에 포착된 먹잇감이/ 125분의 1초 스투디움* 안에 갇힌다// 누가 나를 정보의 틀 안에 가두었는가/ 내 안에 창은 언제나 열려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마라토너의 발놀림/ 흩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구름/ 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소리/ 찰나에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의 아우성/ 빛 뒤에 숨어 있는 섬광의 촉수/ 탯줄로 이어지는 깊숙한 곳을 찌르는 상처// 수없이 망설이는 손가락 끝의 떨림/ 꿈틀거리는 창 안 에는/ 빛이 속도로 끝없이/ 푼크툼*의 향연이 이어진다//
* 스투디움(studium); 사진기법으로 사물이나 혹은 사람에 대해 열성적이긴 하지만 강렬 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반적 감정
* 푼크툼(punctum); 라틴어로 점(鮎)을 뜻하며 화살처럼 아프게 찌르는 강렬한 요소

드라이 풀라워 / 김혜천
인사동 오래된 전시실/ 미로에 갇힌 꽃/ 흑백 사진에 담긴 명암을 본다// 레몬잎 아이리 억새 해바라기 잇꽃/ 연밥 다북쑥 냉이꽃이 말라간다// 말라간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것/ 절벽에서 어둠으로 허물어지는 것/ 헐거워진 그물같이 멀어져 간/ 너와 나/ 풍장 되어 바싹 말라가는 몸/ 다시 젖을 수 있을까/ 내안에 말라버린 물관을 찾아본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 사이로/ 빛의 음성을 듣는다//

바라춤* / 김혜천
상여도 없이 떠났다/ 북한산 기슭 비워두었던 방에 연탄불을 피워 넣고 주말을 맞았다/ 신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알몸으로 껴안은 부부를 자욱한 안개가 삼켰다/ 그녀의 몸 안에 애벌레 한 마리도 함께 잠들었다/ 어허이 어헝/ 비도 울지 못하고 추적대는 날 이승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의 하늘은 어디일까/ 부부가 살던 무릉도원에 해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 춤사위 곁으로 나비 세 마리 팔랑거린다//
*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춤

달마산 미황사 / 김혜천
달마산 심장 햇볕 좋은 곳에/ 한 송이 우담바라 피었네/ 무지렁이 광목 적삼처럼 색 없어 더 환한 꽃/ 익고 익어 고개 숙인 벼 이삭 같은 꽃/ 더는 갈 곳 없는 삭정이들이/ 버석거리는 맘 한 움큼씩 안고 올라와/ 흐르는 물처럼 무심 되어 내려가는 곳/ 새벽 찬 공기로 죽비를 치고/ 눈 푸른 납자가 자박자박 도량석 돌고 나면/ 종소리 덩덩 나무 깨우고/ 짐승들 깨우고/ 공중을 나는 목어의 지느러미 어루만지는 곳/ 달이 맑은 울음 토하다 잠이들면/ 염불 소리에 깃 털고 일어난 새 한 마리/ 붉은 햇덩이 덥썩 물고 솟구치는 곳/ 그곳에,/ 갈라진 기둥 틈새로 기우뚱 무너지는/ 아직 닿지 못한 마음 하나/ 동그랗게 엎드려 있네//

알(卵)의 분화 / 김혜천
어떤 상태로든 분화할 수 있지만/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이미 분화된 기관들과 공존한다// 먹고 자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고/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는 일상의 파노라마,/ 일상은 분화의 터전이다// 막막하기만 한 미지의 영역도/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매일매일에 속한다/ 물이 대지의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사물을 일으키듯/ 신체는 몸의 각 기관을 흘러 다니는 힘에 의해 분화되고/ 하나의 사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셋팅된다//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게 하는 힘,/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만들어 내는/ 그 무엇,// 매 순간 제로에서 출발하고 도착점이 없는 알卵은/ 다음 발을 내딛을 수 있는 현장이다//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낸 유기체를 저항하는 힘/ 고정된 문화의 지층에서 탈출하는 힘/ 끊임없이 걸어가는 노마드// 알卵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의해/ 끝없이 분화하는 기관 없는 신체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

화형식 / 김혜천
흰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리는 폐교 운동장/ 메마른 한 무리의 짐승들이/ 엇갈리며 쌓은 나뭇더미에 불을 놓는다/ 사색의 화형식// 작은 불꽃이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조용히 일어나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몽상의 밤// 웅크린 짐승에게 점화된 불꽃이/ 푸르고 붉은 눈꽃에 올라타/ 먼지들의 꿈처럼/ 허공에서 춤추며 소리친다//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라// 삼킬 듯 일어난 불/ 지푸라기처럼 삼켜버린 자작나무 숲/ 동굴나비 한 마리/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흔적 없이 타지 않고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재를 털고 날아가는 나비/ 누군가의 동굴에서 불타오른다//

걸어가는 사람 / 김혜천
더러는 휘어지고/ 더러는 꺾인 겨울 연밭/ 얼키설키 몸을 포갠 적요를 바라보며/ 연상되는 자코메티 전//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몸/ 비정상적인 커다란 발/ 성난 듯 허망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사람// 살을 다 발라낸 생선 가시처럼/ 빈한한 실존 앞에 명치 끝이 아프다// 살아있다는 것은 직립을 포기하지 않는 것/ 걸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 바라본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 존재는 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정수(精髓) 아닌가// 소멸 이후 어둠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두렵지만/ 군더더기 없는 깡마른 몸으로/ 너머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생은 직진이니까//

그늘의 미학 / 김혜천
모네의 정원에 달이 푸르다./ 물상에 드리운 달그림자/ 뽀글뽀글 물방울이 밀어 올리는 속삭임/ 공중에 궁륭을 이루다 다시 중심에 돌아와 앉는다.// 존재를 드러내는 모든 형체는 산알이다./ 무드라다, 인디오의 춤사위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둥근 윤곽/ 천 길 그늘 아래서 들리는 무한 천공의 소리.// 그늘은 수태의 묘궁이다./ 수면아래 알들의 수런거림/ 둥근 사리 한 방울 수련 잎에 올라앉는다./ 무엇이 되기도 전 사라저간 것들이 눈 뜨는 시간./ 어깨 위에 드리우는 달의 노래에 부푸는 수련 봉오리.// 그늘 벗어나/ 활짝 웃는 네 얼굴에 입 맞추는 한낮.//

찻물의 내변(內辨) / 김혜천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물 한 사발 푸른 불꽃 위에 올린다// 해안蟹眼-하안蝦眼-어목魚目-연주連珠-용천慂泉-등파고랑騰波鼓浪-세우細雨// 게의 눈알 만하게 바닥에 들러붙은 물의 꿈/ 바닥을 딛고 떠올라 새우의 눈을 뜨고 세상을 엿본다/ 점점 넓어지는 동공, 둥글고 또렷한 물고기의 눈으로 대양을 헤엄친다/ 수면으로 떠오르며 구슬을 꿰듯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 심연의 고요가 거꾸로 치솟는다/ 마침내 북을 치듯 파랑이 일듯 한바탕 끓어오르고서야/ 잔 빗방울이 수면 위에 내리듯 잦아드는 물// 그저 바라보고 기다릴 뿐/ 잘 익어 한 잔의 차가 되어 쓰여지길 기다릴 뿐//

나비장 / 김혜천
나무의 결을 따라 나비 잠을 깨운다/ 닫힌 공간 속에는 더 많은 나비가 잠들어 있다// 자주 열리지 않는 문/ 열쇠는 선반 위에 두지 않는다// 접혀 있는 옷들 사이사이 스민 기억의 파장/ 오랜 버팀이 쌓여 있는 곳/ 더 깊은 방 옻칠 속에 갇힌 보석의 신비// 억압은 서투른 힘이다// 쌍용이 달을 희롱하는 몽상의 밤/ 달빛이 겹겹의 문을 연다/ 바람이 습향을 거풍한다// 사물과 사물의 말 없는 소통/ 열고 닫힘은 생동하게 하는 힘// 내밀한 공간 안에 잠들어 있던 장중한 서사들/ 정겨운 말들이 실눈을 뜨며 술렁거린다/ 벌레들도 구석의 작은 살롱을 열고 소란스럽다// 소리를 읽어내며 공간을 확장해가는 나비/ 달 걸린 자작나무 끝으로 날아오른다/ 푸른 숲 실루엣을 입고//

슬랙라이너slackliner / 김혜천
안드로메다까지 밧줄을 건다/ 땅 위에서 몸을 띄워 줄 위에 선다/ 발아래는 눈 덮인 천 길 크레바스/ 그대로가 하나의 거대한 棺/ 쉼표의 낙하와 마침표의 장애물/ 현기증으로 흔들리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선다/ 보이는 건 이름 없는 투명한 눈/ 아득한 無, 有의 바다/ 백색은 네가 아니다/ 색채는 밖에 있고 너는 내 내부에 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너의 눈동자/ 빛의 명암을 제어해야 만날 수 있는 너/ 광활한 영토에 영롱한 색을 품어 가는 길이다/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올 수 없는/ 고도에서 흘러내리는 별빛을 받아 적어야 하는//

아틀란티스 / 김혜천
남루한 옷을 걸치고/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예리한 촉수를 세워/ 순서도 없이 의식면에 떠 올랐다 사라지는/ 이마주의 파편을 잡으러 서럽게 떠도는 광대/ 적의 심장을 관통할 화살촉에/ 다이아몬드를 다는 거룩한 낭비/ 잃어버린 대륙을 찾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유목의 피를 흘린다/ 신전과 보석들은 어디에 잠들어 있나/ 보였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보이는 신기루/ 언어의 사원은/ 닿을 수 없어 더 닿고 푼 꿈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질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아틀란티스//

순간의 삶 ㅡ이덕주 시인 영전에 / 김혜천
몸 안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퍼덕퍼덕 뛰던 심장을 경계 밖으로 몰아냈다/ 69세, 아홉 수 벽을 넘지 못하고/ 체온이 식기도 전 한줌의 재가 된/ 순간을 살다간 망명가여/ 잘 가시라/ 부디 생,멸 없는 곳에 영면하시라//

허들 / 김혜천
바닥을 다지던 시간들이/ 여름 강물처럼 흐르고 출발선에 선다/ 중력에 짓눌릴 때마다/ 몸 안에 속도를 내는 전사들/ 끝없는 물음을 품고 달리는 정신의 높이/ 밑면이 높을수록 높아지는 꼭짓점/ 내부에 겹겹이 도사린 장애물을 뛰어 넘어 도주한다/ 도약은 더 이상 뛸 수 없이 기진 했을 때 온다/ 올려다보며/ 올려다보며 수없이 발돋음 하던 높이/ 표상에 갇히지 않는 살아있는 속도로 선반을 뛰어 넘어/ 부드럽게 착지하는 고양이/ 두눈에 펼쳐진 푸른 초원에 맺힌 이슬//

풀에 대한 에스키스 / 김혜천
누가 그를 잡풀이라 하는가// 그것은 네가 그에게 붙인 어이없는 이름 일 뿐/ 그는 건기에 사막을 이겨낸 불꽃/ 쓰나미를 건너온 풀꽃// 탈출을 위해 동냥하지 않는다/ 밖에서 오는 것들은 모두 동냥이므로/ 수없이 발목을 잡던 몸 안에 동냥치를 몰아낸다// 그는 생존을 위해 벽을 넘어야 하는 전쟁기계/ 끝없이 벽과 벽 사이 틈새로/ 스스로를 전염시키듯 뻗어 나간다// 유목민은 적을 향해 당기는 화살촉에 보석을 달 듯/ 낭비를 멈추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담아내는 푸른 하늘로/ 밀도를 만들고/ 공간을 점유하면서 풀꽃을 피운다// 차가운 금속성의 세계에서/ 아무도 그의 공간을 포획하지 못하도로/ 연금술사의 망치소리와 함께/ 깊숙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물음과 함께//

몽상가의 턱 / 김혜천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포갠 두 손 위에 비스듬히 턱을 괸몽중사유좌상을 모셔왔다// 몽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뇌에 자극을 주어 유연하게/ 한다. 굳어버린 일상속에서 저 너머를 바라보는 새, 매의 세계를 보게 한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내 창에 걸터앉은 그대여// 나를 바람되게 하여/ 산을 날게하고/ 바다를 걷게 하고/ 달을 베어 먹기도 하고/ 솔처럼 푸르게 하고/ 꽃이파리와 입맞춤 하게 하고// 고뇌하고 절망하였다가/ 다시 살아/ 시공을 넘나들어/ 새로운 우주를 도모하게 하면서/ 몽중에도 찾아와/ 내 영혼을 깨우는 그대여// 나 이제 사는 날까지/ 그대 맞는 마중물, 자리끼 놓아두려오//

침묵의 사계 / 김혜천
시간 속에 스며 있던 침묵이 하루하루 몸을 일으킨다// 가장 먼저 광장에 도착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한다/ 공이 담벼락에 맞아 튕겨나오듯 아이들의 말소리가 마치 봄의 사물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 튕겨나온다// 그렇게 돌연 봄은 오고/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꽃들/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오는 어린 이파리들/ 한 그루 나무에서 또 한그루의 나무 에게로 옮겨가는 연둣빛 침묵// 숲속의 침묵이 여름 한낮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거칠게 여름을 부려놓을 적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여름은 소란스럽게 찾아왔다 울울한 숲 사이를 뛰노는 정령들, 고라니가 등불처럼 까만 눈동자를 밝히는 한낮의 고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푸른 기세도// 침묵이 한 번 숨을 고르고 가을이 오면 먼 길 떠나기 전 전깃줄에 앉은 철새들처럼 사과나무가지에 매달려 익어가는 사과들, 떨어지는 사과를 받으려고 내미는 손 사이에 흐르는 정적, 사물의 색이 점차 짙어지고 침묵은 이미 추수의 감사로 사과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노래 속에 공명한다// 침묵이 눈이 되어 내린다 모든 사물의 공간은 순백의 침묵에게 점령당하고 시간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인간의 말도 침묵 속에 갇힌다 침묵은 이정표와도 같이 망각과 용서만이 남은 하얀들판 생각이 정지된 무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소리의 질료 / 김혜천
누가 숲을 고요하다 하는가// 정령들의 눈동자가 아침을 핧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숲에는// 나무와 나무의 간격을 이어주는 바람의 숨결/ 나비 날개짓에 춤추는 이파리들/ 꽃술의 달콤함을 터는 꿀벌의 진저리/ 바위에 붙은 가슴 부풀어 올라 키득대는 이끼들/ 유두같이 매달린 버찌의 젖몸살 앓는 소리/ 죽은 나무 등걸에 피어난 상황버섯의 물기어린 속삭임/ 직박구리가 쪼아 떨어뜨린 나뭇가지의 신음/ 지층을 흔들고 솟아난 동충하초의 함성// 비척거리는 내 활자들 허공 더듬는 소리// 세로로 가로로 공기를 흔들며/ 흩어지는 소리, 소리들// 5월의 숲/ 말 그 너머의 세계, 소리들이 환하다//

호미곶虎尾串 / 김혜천
조선 10경을 내 달리던 호랑이가/ 밀렵꾼에게 총상을 입었다/ 압록강은 노을처럼 붉게 물들고/ 동해엔 핏빛 꽃잎들이 앞 다투어 졌다/ 어른들은 부단히 산골을 먹였으나/ 누워 신음하는 육십년/ 아직도 숨어 번뜩이는 이리떼 눈빛/ 통한의 환갑 넘기고/ 장기 읍성에서 다시 맞는 일출/ 금화분 들고 너울너울 춤추는 큰 바다/ 꼬리 흔들어 호령하리라/ 손 높이 들어 외치리라/ 이제 가슴 열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자고//

팔월의 강 / 김혜천
고 이무원 시인은/ “소반에 올린/ 한 사발의 물에서/ 어머니가 쌓아 올린/ 물 탑”을 보았다// 나는/ 한 방울의 물방울에서/ 섬진의 도도한 물결을 본다// 물방울 솟아 샘에 고이고/ 사뿐히 넘쳐흘러/ 천의산 천의들녘을 적신 후/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 마침내 바다에 이를 때까지/ 시원에서 들리는 맑고 푸른 소리// 팔공산 데미산에서 발원하여/ 곡성에 이르고/ 하동을 거쳐/ 광양에서 남해가 될 때까지/ 삶이 내지르는 피울음을 나르던 물/ 물은 어머니의 기도이고 역사이며 문학이었다// 팔월의 강을 따라 모여든 문도들/ 인위가 아니고/ 순리대로 생겨난 질기고 순한 문학끼리 어우러져/ 너른 산맥이 되고 끝없는 대해를 이룰 때까지/ 침곡 역에서 레일바이크를 타고/ 섬진강 뒤태를 따라가 보자//

오리엔탈왕꽃무지 / 김혜천
그를 만나로 길을 떠난다/ 어스름부터 숲을 뒤졌으나 은신처가 깊다/ 야행성 곤충들은 달빛을 따라 길을 찾는다/ 은은한 암내를 풍기는 나무껍질을 볏겨 놓고 텐트에 불을 켜 놓으면 보름달로 오독한다/ 숲을 한 바퀴 돌아오니 날 파리부터 아귀사마귀 암살노린재까지 걸어 나와 도감을 그린다/ 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유배되어 몸을 숨긴 동굴은 길고 슾하다// 걸어온 숲을 다시 한 바퀴 돌아 왔을 때 어둠을 천천히 빠져나온 오리엔탈왕꽃무지* 부부 세크로 피아 나무의 축축한 양수 위에 신방을 차렸다/ 날마다 소멸되어 청동처럼 굳어버린 내 의식 속에 나비를 불러내는 일에도 푸른빛으로 유인하는 친환경 사냥법이 필요하겠다//
* 멸종위기 풍뎅이과의 한 종

바람과 색 그리고 / 김혜천
정오의 빛에 알몸을 비친 빨래들/ 부끄러움도 없이 카리부해 바람에/ 축축한 기억들이 춤춘다// 칸나 꽃잎을 짜 칠한/ 파란 하늘을 달리는 자동차/ 눈을 찌르는 원색의 의상들/ 빨강색 음악과 살사// 그것은/ 억압과 유약함을 벗어던지고/ 오늘과 내일을 이어가는/ 내 안에 쉼 없이 피 흘린 저항의 불꽃// 허기진 입 크게 벌리고/ 멈추어선 풍경들이/ 카메라 앵글로 쏟아져 들어온다// 뒤틀리고 꺽이고 휘어지고 옹이진/ 원시림 나무의 속처럼/ 가장 중요한 곳을 비우고 채우면서 견뎌낸// 바람도 잠든 말레꼰 해변/ 야지수 그늘 아래/ 견고한 시간의 무게를 팔베개에 누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계 / 김혜천
언 땅이 녹고/ 전잎 제치고 올라오는 황새냉이 어린싹/ 뿌리 식물은 주변을 넓게 돌려 판다/ 중심 뿌리도 없이/ 물길을 감지하며 뻗어 나간 뿌리줄기들/ 땅속에 넓은 지도를 그려 놓았다/ 분열증적 에너지로 모든 경계와 구분을 전복시키며/ 無 혹은 多 방향으로/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머물러 있지 않는 유목민처럼/ 고원을 넘고 넘고 있다/ 숨 쉬고 먹고 노래하고 쓰고 달리고/ 종착역도 시발점도 없는 선들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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