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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곗바늘의 속임수 / 김용순

부흐고비 2022. 1. 28. 08:38

그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아릿한 자괴심을 달랠 수가 없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십오 분도 넘게 수업을 앞당겨 끝냈던 어리석음.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계속 전화벨이 울리다가 끊기고 다시 울리고 그러기를 오 분 이상 반복됐다. 수업 중에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고집 세게 울리는 벨 소리가 심상치 않다 싶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의외에도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라 기억도 안 나는데, 수업 중이라고 해도 상대방은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끊을 수도 없었다.

교실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벌써 책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왜들 이러니?”

“끝났어요. 시계 봐요.”

아이들이 항의 비슷하게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싱글싱글 웃었다. 4시 53분,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다시 보아도 짧은 바늘은 5라는 숫자에, 긴 바늘은 11에 거의 가 있었다. 끝날 시각에서 3분이나 초과한 것이다. 학습 진도에 차질이 있었지만, 다음 시간에 들어올 학생들 때문에 연장 수업을 할 수는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다.

어림컨대 무려 15분이라는 시간을 전화받는 데에 빼앗겼다. 전화를 건 사람에게는 15분이지만 십여 명 아이들의 학습결손을 계산하면 150분을 그 사람이 축낸 셈이다. 하지만 수업 중이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시간을 끈 사람이 과연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었을까?

하찮은 시곗바늘이지만 개인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가 하면 때로는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기도 한다. 단 1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닫히는 전동차의 출입문을 생각해 보자. 한가한 사람에게는 1초라는 시간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 1초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 운명이 바뀌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6·25 때 한강다리 폭파 지휘를 한 장교의 시계가 5분만 늦게 갔어도 수백 명의 인명을 구했을 것이고, 2차 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원자탄 투하를 지휘한 지휘관의 시곗바늘이 5분만 게으름을 피웠어도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다. 나는 그래서 가끔가다 시계가 신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한 번도 건너뛰는 일 없이 똑딱똑딱 하는 신의 맥박을 따라서 한 생명체가 신생 성장 쇠멸을 반복하고 계절이 바뀌는가 하면, 지구에서는 화산이 폭발하고 외기권에서는 거대한 천체가 궤도를 벗어나 유성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절대 세력의 표상인 시곗바늘을 아이들이 함부로 돌려놓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이들이 교실을 나가고 나서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다음 수업은 정각 다섯 시에 시작되는데 그 수업을 받을 아이들은 밖에서 한가로이 잡담을 하고 있었다.

“너희 왜 안 들어와, 수업시간이 다 되었는데?”

내 딴에는 제법 호통치듯 큰 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 휴대폰을 꺼내 보이는데 4시 50분이었다. 속담 그대로 자다가 따귀 맞은 기분이었다. 신처럼 여기는 시계에 대한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서 현기증까지 일었다. 거짓말쟁이, 못된 것. 시곗바늘을 탓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곗바늘을 돌려놓은 아이들을 원망하는 것인지 나도 모를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 시계는 그때부터 인간이 조작한 한낱 계기판, 사람의 손가락으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불확실한 것, 장난감에 불과한 것으로 신의 위상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원망의 대상은 아이들도 아니고 시곗바늘도 아닌 나였다. 나에게도 휴대폰이 있는데 왜 그건 안 보고 시곗바늘만 믿었느냐는 것이다. 설사 아이들이 긴 바늘 짧은 바늘 모두 12라는 숫자에 갖다 놓았다고 해도 밤이 낮 되고 낮이 밤 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속임수에 당한 것은 그때만이 아니다. 월악산을 오를 때였다. 정상까지 2km라는 표지판을 보고 한 시간 가까이 가다 보니 3km라는 이정표가 또 나왔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돌아오다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저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 짓궂은 사람이 장난으로 표지판을 바꿔 놓았던가 보다. 곰곰 생각해 보니 임의로 정한 숫자의 속임수는 그런 경우만이 아니었다. 점수라는 숫자는 학생의 내면까지 측정한 계수인 양 속이고, 자산의 액수는 그 사람에게 행복의 지수인 양 속이고……. 숫자만이 아니고 소문과 간판에 속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사람이나 사물을 보여주는 대로 보지 말고 내 손으로 헤치고 속을 들여다보라고 했던가.

“여러분이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나는 달은 안 보고 여러분의 손가락만 보았어요.”

나는 다음 날 아이들을 꾸짖는 대신 나의 우직함을 고백하고 나서 나의 그런 버릇을 고쳐주어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사례했다.



김용순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충남지회 회원. 수필집 『내 안에 피는 꽃들』, 『몽돌의 노래』와 산문집 『유리 인형』. 허균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충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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