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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익어가는 포도주/ 오승휴

부흐고비 2022. 1. 30. 08:23

사람 사는 게 천차만별이다. 하루하루를 즐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참으며 내일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부귀영화를 쫓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덕을 베풀고 남을 위한 봉사에 생을 바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기대했던 사업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가볍게 출발한 사업이 큰 성공을 이뤄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그래서 살맛나는 세상이라 하는가 보다.

아쉬움이 있다면 세월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준비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 또한 필요하다. 허지만 기다려 주지 않는 세월을 어쩔 것인가. 소중한 현재의 시간을 아껴 알찬 삶을 사는 수밖에. 할 수만 있다면 서로서로의 힘이 되어, 영혼이 젊고 푸르게 사는 것이리라.

산들바람 부는 어느 날, 반가운 친구 K의 전화를 받았다. 사업을 하는 동창생인 그의 저녁식사 초대. 환갑을 넘기고서 서로 만나는 게 얼마만인가. 오랜만에 보고픈 사람끼리 함께 만나자고 고향을 찾은 것이다. 흔쾌히 초대에 응하겠다고 했다.

나이도 아랑곳없이 사업에 열정을 쏟고 있는 그 친구, 풍찬노숙이 두렵겠는가! 나고 자란 고향을 사랑하면서도 한곳에 갇히지 않고 더 큰 꿈을 키우고 있다. 젊은 시절 의회의원 등 공직활동을 하다가, 객지에서 늦게 시작한 사업이 근년에 크게 번창하고 있다. 사업 운을 타고난 성공한 사업가로 소문이 자자하다. 이력만큼이나 삶의 자세가 어연번듯하고 긍정적이며 인간관계 또한 오달지게 뛰어난 친구다. 사려 깊고 넓은 혜안에다 쌓은 기반이 튼튼해서일까. 그에게로 사람들이 늘 몰려든다.

이른 저녁시간, 식사자리 분위기는 퍽이나 오붓했다. 이순을 넘긴 동창생 벗들 몇몇과 특별 초대 받은 팔십을 바라보는 원로선배 한분. 나누는 정담에 시간이 갈수록 술맛이 무르익어 간다. 청춘시절의 사랑과 사업 이야기는 술안주다. 눈치 빠른 식당 여주인이 분위기 맞춰, 포도주 몇 병을 내놓는다. 얼큰해지는 술기운에 선배가 분위기를 잡는다. 머릿결은 희끗희끗해졌으나 얼굴은 환난을 모르는 듯 동안(童顔)처럼 구김살 없이 밝다.

“나이 듦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네. 포도주가 익어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선배가 포도주를 권하며, 잘 익은 술맛은 마셔보면 다 알게 된다고 한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친화력이 뛰어난 그 선배가 오늘따라 더 멋스럽다. 20대에 조직의 단체장을 시작으로 사업뿐 아니라 정치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경륜을 두루 쌓은 존경받는 어르신이다.

인생 삶의 희로애락도 곰삭으면 선배처럼 순수하고 고운 얼굴로 피어나는 것일까. 나처럼 육십을 넘어선 인생이 익은 포도주 맛을 내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기쁨, 슬픔과 즐거움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 걸까. 익어가는 포도주, 그분의 가식 없는 얘기가 점점 더 진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늙었다고 흉보지 말게나. 사람은 마음속에 젊음을 품고 산다네. 어린애와 놀면 어린애가 되고, 이십대와 함께 하면 청춘이 되는 게지. 사업 실패로 벌렁 나자빠졌다고 웃을게 아니야. 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할 분이 아닌가. 꽃은 벼랑에서도 핀다네.”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냈으나 몇 년 전 부인을 잃은 선배다. 그리움과 미안함이 사무치는 표정이다. 나이 듦의 설움과 외로움, 자신의 아픈 삶의 경험을 고스란히 토로하는 것 같다.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억척스런 자세와 파란 창공으로 퍼져나가는 영혼의 울림에 모두가 숙연해진다. 그분의 얘기는 계속된다.

“이제야 나이 듦을 느낀다네. 어제 충혼묘지 참배 길에서 벗들이 훗날 내 묘비에 직함을 뭐라 새기면 좋겠냐고 묻더군. 순간 멈칫해지더라고.”

좌중에 궁금증을 불러들인다. 선배는 ’국회의원이라 새길까, 도의회의장이라 할까?’ 라는 벗들의 물음에 씩 웃었다는 것이다.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인간 즉 ‘우인(愚人)’이라 새겨 넣어달라고 했다 한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지 그들도 웃더란다. 천명을 알고 즐기니 또 무엇이 소망일까. 잘 익은 포도주 향기처럼 존경심이 출렁출렁 잔에 넘쳐흘렀다.

친구 K와 선배의 걸어온 길이 꽤나 닮았다. 태어난 곳도 동향인데다 조직 관리나 의정활동은 물론 사업추진 스타일도 엇비슷하고, 환난을 딛고 일어선 성공의 과정도 그러하다. 선후배 간에 형제처럼 신뢰가 크고 깊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서로의 아픔을 도닥여주며 끌고 밀어주어, 뻗어나갈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오늘처럼 친구들의 모임을 마련하고 선배를 모시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도타운 선후배의 정이 새록새록 돋보인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은 이들에겐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나 보다. ‘하면 된다’는 긍정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아닐까. 긍정적 사고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내가 남에게 먼저 이것을 보내면 상대도 그것을 갖게 마련. 긍정 에너지가 마음 안에서 줄기차게 샘솟아야, 영혼이 젊어지고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걸 이제 알겠다.

달콤한 술맛이 입 안을 감친다. 익어가는 포도주, 선후배의 어울림이 참 아름답다.


 

오승휴 수필가 1948년 제주 서귀포시 출생 △2007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제주지부장. △제주문인협회, 제주수필문학, 귤림문학 회원. △2012년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수필집 『내 마음을 알거야』, 『담장을 넘을까 봐』, 『억새꽃 핀 들녘』, 『하얀 숲속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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