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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리랑 / 우희정

부흐고비 2022. 2. 6. 09:18

첩첩산중의 골짜기. 떠돌이 소리꾼 유봉을 따라 그의 아들과 딸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산을 돌아 내려온다.

창극 〈서편제〉는 그렇게 열렸다. 백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이후 20년 만에 보는 무대공연이다. 영화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청산도의 황톳길에서 가락에 몸을 실어 덩실거리던 〈진도아리랑〉의 가락이 아련하다.

간다~ 간다~~~~
내 돌아간다
정든 임 따라서 내가 돌아간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리꾼의 한 살이가 여전히 목울대를 뜨겁게 한다. 아버지 유봉과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아들 동호, 그리고 딸 송화의 소리가 어우러져 푸른 산을 흔들고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아버지는 가르치고, 아들은 장단을 치고, 딸은 소리를 한다. 배고픔과 소릿길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아들이 훌쩍 떠나버리자 딸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득음得音의 멀고 먼 길에 딸이 지레 소리를 포기할까 봐 아버지는 고육책을 짜낸다. 자신의 신체를 자르듯 딸의 두 눈을 버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잠든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는 아비, 그에겐 오직 딸을 명창으로 만들기 위한 한 가지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눈이 멀어야 눈으로 뻗칠 영기가 귀와 목청으로 옮겨가 득음을 할 수 있다는 믿음, 한을 품어야 일생을 소리에 바칠 수 있다는 명창을 향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신앙이다.

소리의 최고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아비의 열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먼 송화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아비를 쑤셔댄다. 피를 토하듯 불러도 득음은커녕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맞으며 송화는 마침내 겹겹이 쌓인 한恨을 토해낸다. 영혼을 친친 동여매고 있던 고통을 소리로 승화시킨다. 버리고서야 얻을 수 있는 그것은 원망을 버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달관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 말했다. 절망이 뒤섞인 삶의 바닥을 들여다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한’이 단지 낯선 감정일 뿐이라고. 한평생 곡절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생을 어느 정도 엮어낸 이력이라면 어찌 ‘한’을 모를까. 끊임없는 외침과 벗어날 길 없는 사회제도와 모진 결핍의 가혹한 운명을 끝끝내 살아내노라면 ‘한’은 필연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토록 많은 아리랑이 있는 것이리라. 너나없이 자신의 처지를 아리랑 가락에 읊조리면서 살 수밖에 없었음이다. 그것으로 위로와 희망을 삼으며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무대는 헤어졌던 오라비가 찾아와 마주 앉은 마지막 장면이다. 세월은 어린 소녀의 머리에 서리로 쌓이고 오라비의 얼굴에도 주름살을 굳혔다. 늙은 송화로 분한 안숙선 님의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그 애절과 비통에 나도 모르게 빠져버렸다. 그것은 주인공이 그토록 갈구했던 득음의 소리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득음의 경지에 이른 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예쁜 얼굴을 가졌다. 무용을 전공했으면 아마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거기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다. 한데 하느님은 더러 실수를 하시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형평을 맞추기 위해 줬던 걸 다시 빼앗기라도 하시는지.

사춘기 시절 의식을 잃을 정도로 호되게 열병을 앓았다고 한다. 한데 그 후유증으로 손발의 자유를 잃었다. 뼈가 녹아내려 손이 꼬이고 다리가 비틀려 장애인이 된 것이다. 선천성 장애였다면 체념도 빨랐을 터이지만 성인을 바라보던 때에 당한 횡액을 어느 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으랴. 강하게 도리질을 쳐대며 살아왔으리라.

그런데 나는 요즘 그녀가 혹 ‘득음’을 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건강하던 소녀 시절에 머물러 있던 그녀가 이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본다. 또 그만큼 깊어진 삶의 진솔성에서 득음이 ‘창’에만 있으랴 싶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러는 좌절하고 포기도 하지만 죽음을 맞는 날까지 평생을 살아내는 일이 바로 득음을 향한 과정인 것만 같다.


우희정 수필가 △《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한양수필문인회 동인 수필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수필집 별이 비나는 하늘, 폴라리스, 속절없다, 시린 꽃빛아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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