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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잠의 퍼즐 / 현정희

부흐고비 2022. 2. 5. 09:22

포근한 아침이다.

“잠은 잘 잤어요?”

“아니! 위층에서 한밤중에 내려오는 물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어.”

남편은 졸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깊은 잠을 잔 내가 계면쩍다. 남편은 조그만 소리에도 잠을 깨어 거실이나 작은 방으로 베개를 들고 잠자리를 이동한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불면의 밤을 보낸다. 조각난 잠을 퍼즐놀이처럼 맞추다가 겨우 잠이 든다.

큰딸도 잠들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바스락거림에도 잠을 설치고 토막잠을 잔다. 수면 부족한 생활의 고통을 들려주지 않더라도 짐작이 간다. 그래도 잘 견디며 사는 딸이 기특하지만 안쓰럽다. 아들과 작은딸은 나처럼 깊은 잠을 잔다. 천둥이 울려도 세상모르는 아기처럼 잔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단잠을 자고 나면 생기를 얻어 힘든 직장 일도 척척 해내는 듯하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괜찮아. 잠을 푹 자고 나면 다 괜찮아져.”라고 다독다독한다.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부와 명예, 건강, 꿈과 희망…. 개인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단잠은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 근원이다. 잠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고마운 은총이며 사랑이다.

밤낮없이 바쁜 삶을 살다가 과로로 쓰러져 깊은 잠을 자고 나서야 잠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나도 심신이 지쳐 잠을 잘 수 없는 극한 상황이 오니 단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눈을 감고 “100, 99, 98…” 숫자를 세면서 잠을 청한 적이 있다. 문학 작품을 읽고 쓰면서부터는 금세 잠이 든다. 문학이 나를 구원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는 집중할 수 없다. 심신이 피곤하면 언제 어디서나 새우잠, 토막잠이라도 잔다. 푹 자고 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신비로운 힘이 솟아나 하는 일도 수월해진다. 하지만 아직도 잠은 연구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비밀 세계이다.

잠자는 동안 보이지 않는 귀향 열차를 타고 본향을 잠시 다녀오는 걸까. 꿈을 꾼다. 궁금하던 일이 꿈속에 나타나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암시해준다. 꿈의 메시지는 상징이나 신묘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현실세계와 잠의 세계는 꿈의 다리로 연결되는가. 꿈이 주는 영감은 현실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열 달 동안 품었다가 태어난 아기는 열일곱 시간 정도 꿀잠을 자면서 자란다. 충분한 잠을 자야 잘 큰다. 차츰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잠을 줄인다. 무엇보다 좋은 수면습관은 한평생 행복을 안겨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섯 시간 잠을 자야 상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오래 자면 오히려 기운이 없다. 새우잠, 나비잠, 선잠, 낮잠, 토막잠, 꽃잠, 단잠…. 잠의 퍼즐 조각 이름이다. 잠을 자는 동안 우주는 충만한 기운을 채워주는 듯하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밤의 고요를 즐긴다. 한 잔의 물을 마시며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잠자는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유토피아이다. 현실에서 해방된 진실한 내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온듯하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 “꽃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재가 될 때까지 빛의 언어를 발굴해야 한다. 별천지는 비밀로 가득하다.

잠은 영면을 위한 준비과정일까. 병이 나면 우선 관찰하는 것도 “잠은 잘 자요?”이다. 일생의 삼 분의 일을 잠으로 보내고 십이 분의 일은 꿈을 꾸면서 보낸다고 한다. 만약 내가 구십 살까지 산다면 삼십 년은 잠을 잔다. 사랑으로 살아도 짧은 인생이 다. 진갑인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삼십 년이라면 십 년은 잠으로 보낼 것이다. 십 년은 휴식과 여행으로 보낼 것이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간도 고작해야 십 년이다. 시간 낭비하며 허송세월 보낸다면 아깝다. 이 순간 살아있음이 소중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자전과 공전하므로 밤낮이 생기고, 계절이 바뀌는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고 살아가면 행복한 삶이 되리라. 밤이면 정원의 나무들도 나와 함께 단잠을 잔다. 모두 편안한 밤이 되길 바라며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나비잠을 자면서 정글을 벗어나 환상의 나라로 훨훨 날아간다. 파도 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꽃향기 가득한 길을 벗어나자 비밀 동굴의 문이 열린다. 환호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현정희 제주 서귀포시 남원 출신으로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료, 《수필과비평》 등단. 제주수필아카데미, 백록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조약돌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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