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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술맛과 인생 / 차하린

부흐고비 2022. 2. 6. 09:24

술통에 귀를 대어본다.

톡 톡, 와글와글, 보글보글,... 잠결에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산골짜기 어느 모퉁이에 졸졸 흐르는 얕은 물소리 같기도 하고, 저녁 때 가족을 기다리며 끓이는 찌개 소리 같기도 하다.

지난여름, 백스코에서 열리는 부산국제관광전을 보러 갔다. 그곳에서 인스턴트처럼 물만 부으면 술이 만들어지는 작은 플라스틱 통을 보았다. 술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나도 쉽게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두 통을 샀다.

통에는 누룩과 마른 지에밥이 분량대로 들었다. 술 제조를 홍보하는 사람이 한 통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넣고 다른 통에는 오미자와 대추를 넣어 주었다. 집에 가서 그어준 눈금까지만 물을 부어 7일정도 숙성시키면 술이 된다고 했다. 술통 표지에 붙여놓은 제조법을 보면서 막걸리나 법주를 만들어 보란다. 법주보다는 요즘 많은 사람들로 부터 관심을 받는 막걸리를 만들기로 했다. 국화와 구기자를 넣은 통에 산에서 떠온 약수를 붓고 숨구멍으로 뚜껑을 조금 열어두었다.

아침저녁 한차례씩 나무 숟가락으로 술을 저었다. 처음에는 마른 지에밥이 물에 불어 뻑뻑해서 잘 저어지지 않았다. 삼일쯤 되니 밥알이 삭아지면서 젓기 쉬웠다. 누룩에 있던 효소가 발효되면서 밥알이 삭으니 시큼한 냄새와 더불어 공기방울이 기지개를 켜듯 밀고 올라왔다. 술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술통에 가만히 귀를 대어 본다. 이 소리는 주위가 시끄럽다든지 머릿속에 잡념이 있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고 귀를 가만히 열면 수런거리는 술의 태동소리가 들린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마을에 술도가가 있었다. 내 친구 영옥이네 집이다. 어쩌다 그 집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에는 금방 쪄내 온 지에밥이 멍석 위에 하얀 목화솜을 펼쳐놓은 듯 눈부셨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영옥이는 일꾼들 눈을 피해 지에밥을 작은 손으로 뭉쳐서 주었다. 두 손으로 꼭 잡고 조금씩 떼서 먹을 때는 졸깃한 맛에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술통이 있는 가게 문으로도 가끔 드나들었다. 그럴 때마다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영옥이 보다 먼저 다가왔다. 일본식 원형욕조만큼 큰 나무 술통에는 쌀뜨물 같은 뿌연 막걸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영옥이 엄마는 막걸리를 사러 온 사람들에게 기다란 막대기로 술을 휘휘 저어서 양은 주전자에 담아주셨다. 인심 좋은 영옥이 엄마는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을 불렀다. 잘 익은 술맛을 보라며 거래가 아닌 정을 나누었다. 영옥이도 자기 어머니 몰래 내게 술을 내밀었지만 시큼하면서 텁텁할 뿐 그 맛을 몰랐다.

사람들은 좋을 때나 힘들 때 술을 찾는다. 술의 힘을 빌려 흥을 돋우기도 하고 힘든 마음을 분산시키기도 한다. 술을 전혀 못하시는 아버지를 닮은 나는 술이 목에서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둘째 아이를 가졌던 무더운 여름날, 갈증이 나면서 생전 마시지도 않던 막걸리가 문득 생각났다. 막걸리를 사서 한 잔을 마시니 갈증이 가시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술을 더 멀리 했다. 가족들 모임이나 어떤 모임에서든 원샷 하라면서 억지로 술잔을 건넸을 때 난감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정도이다보니 술 마시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맞추지 못했다.

어떤 이는 ‘술맛을 모르는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마라’ 했다. 술을 찾고 싶을 만큼 질곡의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 무슨 인생을 알겠냐는 뜻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 가슴 속에는 삭히지 못한 응어리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응어리가 술통 속 공기방울처럼 보글거리며 올라올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소멸되는 경우도 있지만 가슴에 깊이 박히면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술을 찾는다. 술을 만들기 위해 누룩의 효소가 필요하듯이 마음을 삭히기 위해 술이 필요한 경우다. 이때 마시는 술은 완충제 역할을 해서 마음 속 응어리를 허물기도 한다. 그러나 술의 힘을 빌려서 고된 삶을 녹여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슴은 얼마나 답답한지 술 마시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숨구멍이 있어야 술이 발효하듯 답답한 심사를 술로써 숨구멍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속앓이를 해야 한다. 생속앓이는 독한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다.

요즘은 내가 먼저 막걸리를 찾을 때가 있다. 몇 년 전 추석 차례를 준비할 때 시어머니께서 먹어보라며 건네준 막걸리를 먹어 본 후 부터였다. 어릴 적 영옥이가 내민 술맛과 달랐다. 톡 쏘는 듯 시원함이 가슴을 타고 흐르면서 달작하고 순한 오묘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술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쉰이 넘어서 막걸리 맛을 알게 되었다. 술맛도 시대나 나이에 따라 변하는지 이제는 한잔 정도는 거뜬히 마실 정도로 변했다.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면서 술통을 맴 돈지 일주일이 지났다. 술을 거르기 위해 그릇 위에 채반을 놓고 하얀 무명천을 펴 놓았다. 발효된 술을 천천히 쏟아 부었다. 시큼한 술 냄새와 국화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베 보자기를 오므려서 두 손으로 꼭 짰다. 손가락 사이로 노란 국화꽃을 닮은 시간이 흘러내렸다. 걸쭉한 술 속에는 인생과 같은 질곡의 삶이 녹아있는 듯 했다.

막걸리는 다섯 가지 맛이 적당히 배합되어야 최고로 친다. 인생도 막걸리처럼 오미 같은 삶을 잘 숙성 시켜야 성숙되는 것일까. 막걸리를 통하여 첫 술맛을 알게 된 나는 인생의 오미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국화 향을 품은 막걸리를 음미해본다. 천천히 목을 타고 넘는다. 국화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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