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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유월이 오면 / 백남일

부흐고비 2022. 2. 10. 08:21

초연硝煙 잦아진 능선을 훑고 골짜기에 내려섰을 때였다. 바위 너덜겅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움집 하나를 발견한 분대원 하나가 수신호를 보내왔다. 주검 같은 적막에 지질린 우리 수색대원들의 눈초리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분대장은 나와 정 하사를 탐색조로 내려 보내고 만약을 대비해 엄호사격을 위한 자리배치를 지시했다.

채마전이라 할 처지도 못되는 손바닥만 한 텃밭엔 푸성귀 몇 잎이 6월 가뭄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정 하사가 나직이 말했다.

“백 하사, 자네가 안에 들어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게. 나는 밖에서 망을 보겠네.”

그는 뭔가 켕기는 어투로 말하며 턱으로 집안을 가리켰다. 돌담에 걸친 사립 안을 들여다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한 노파가 토방에 앉아 산나물인가를 다듬고 있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요즘 이 근처 골짜기에서 혹시 인민군 잔당을 못 보셨습니까?”

큰소리로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귀가 어두운지 한참만에야 그런 사람 없다고 어눌하게 대답했다.

중대에서 수색 나온 지 이틀째, 보급을 제때에 받지 못해 밥을 시켜먹을 수 있느냐고 간청했더니 조와 감자뿐이란다. 우린 감자 한 솥 안칠 것을 당부하고 대원들에게 합류하도록 연락을 했다.

헛간 통가리에서 감자를 꺼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왜 피난을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멧갓 일궈먹고 사는 화전민은 민주나 공산주의가 도대체 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고 좀 엉뚱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호구지계糊口之計에 여념이 없던 50년대의 기근에 난리마저 터졌으니 산속 애옥살림은 외양간이나 진배없었다.

무쇠 솥에 찐 햇감자의 터진 균열 사이로 보송보송 하얀 분이 피어났다. 우린 보초 한 명을 마당에 세운 뒤 방에 들어가 걸신들린 듯 특식을 즐겼다. 그런데 그 때였다.

“비상!”

단말마의 비명 같은 초병의 외침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우린 토방에 세워둔 칼빈 소총을 낚아채듯 움켜쥐고 다급히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정 하사의 총부리는 부엌 아궁이를 향한 채 여차하면 방아쇠를 잡아당길 듯 정조준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냐고 채근했지만 그는 낯빛이 백지장인 채 넋 빠진 사람마냥 아궁이 속만 겨누고 있었다. 그리곤 한참만에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저기 저 아궁이 속에서 방금 귀신이 나타났다간 이내 사라졌다는 것이다.

집 안팎을 살피며 사주경계에 골똘하던 중 무심히 부엌 안을 들여다봤단다. 그런데 그 때 아궁이 속에서 머리 산발한 젊은 여인의 하얀 얼굴이 비죽 내밀었다간 정 하사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할 듯 아궁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면 백주에, 그것도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이 긴박한 전쟁 통에 귀신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분명 이 움집은 모종의 아지트로 이용당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는 변고가 아니겠는가? 분대장은 부엌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셋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격을 개시한다. 하나, 둘, 셋!”

그러나 오소리 잡은 굴속같이 검게 그을은 부엌 안은 괴괴한 침묵만 흐를 뿐 귀신도 낮도깨비의 그림자도 얼씬대지 않았다. 그러자 분대장은 위협사격으로 허공을 향해 한 발의 총을 쏘아대자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아궁이 속이 아닌 안방 방고래 밑 어딘가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잽싸게 전투대형으로 흩어져 움집에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탐을 하기 위해 귀신같이 얼굴을 내밀었던 그 아궁이 속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화염에 휩싸인 화전가옥火田家屋을 바라보며 계곡을 빠져나오는데,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오던 노파와 맞닥뜨렸다. 며칠 전 여맹위원장이라는 처녀 한 명을 앞세워 3명의 인민군이 찾아와 막무가내로 구들장을 들어내고 굴을 파더라는 것이다. 부역죄 附逆罪로 총살해도 그만인 ―시대를 잘못 만난 그 노파를 남겨둔 채 중대본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백 하사는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6· 25전쟁에 참전한, 나보다 6살 많은 5촌 당숙이다. 그는 해마다 유월이 오면 악몽 같은 그날의 피어린 전투 체험을 나에게 풀어놓곤 했다.

그는 철원 735고지에서 포로로 잡혀 끌려가다가 타고난 기지와 완력으로 호송하는 중공군의 목을 조르고 탈출한 담력 센 국군 용사였다. 허나 휴전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나고 보니, 155마일 철책에 녹이 슬었듯 팔순을 넘긴 기개氣槪와 기억력에도 녹이 슬어갔다.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민족상잔의 실화 스토리를 오히려 내가 중간중간 아귀 맞춤을 해주어야만 하니 가는 세월이 속절없다.

종북사상從北思想이 꼬리를 치는 요즘 나는 당숙을 뵐 때마다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 없다.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국론이 분분하단 말인가? 당신의 우려를 덜어드리기 위해 여기 야전 비사 한 토막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의 흩은 마음을 질정叱正했으면 한다.



백남일 수필가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천안경영정보 고등학교 교사, 천성중학교 교감. 한국문인협회 천안시 지부장 역임했다.

1994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으로 『여백의 철학』, 『억새들의 춤사위』, 『허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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