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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해가 바뀐 지가 엊그제 같은데 곧 이월일세. 겨울은 흰 눈이 풍성하게 내리고 모진 바람 소리가 창공을 휩쓸어야 제맛인데, 올겨울은 눈 구경도 힘들고 추위도 흐지부지 지나가는가 봐. 겨울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은 북풍한설 속을 걸을 때 인류가 태어난 태고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다고 하네. 그는 아마도 우리 인류의 핏속에 흐르는 빙하기의 DNA를 좀 더 많이 간직한 사람일 거야.

친구야, 자네가 유명을 달리한 지도 벌써 열흘이 넘는구먼. 며칠 전에는 자네가 나갔다는 메시지가 단톡방에 떴어. 아마도 자네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면서 카톡도 탈퇴시켰겠지. 아니면 주인 없는 핸드폰에서 간단없이 울리는 진동음이 마치 갓난아기 기침 소리처럼 듣기 괴로웠을 수도 있어. 그 메시지가 뜨고 나서 한참 동안 단톡방이 물속처럼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네.

숨바꼭질하다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면 놀이가 맥이 빠지잖아. 회원이라고 해 봐야 고작 여남은 명밖에 안 되는 단톡방에 한 사람이 빠져나가니까 왠지 우리도 돌아갈 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모두가 우울해졌다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고 하지만, 감기 걸린 지 삼 주 만에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그때는 이미 손쓸 방도가 없어서 설마설마하다가 유언도 제대로 못 들었다니 이런 허망한 일이 다 있는가. 저승이 한강다리 저 건너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옆에서 슬쩍 사라져 버렸어. 그리 급하게 가 봐야 했던 절절한 인연이 거기에 있었던가.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얼마나 냉정한지 몰라. 자네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고서 울적한 기분 때문에 며칠간 밤잠까지 설쳤는데도 장례가 끝나자마자 우리들 모두는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와 버렸거든. 내심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수소관으로 치부하거나 하나의 화젯거리로나 삼으려고 작정한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 나이 예순다섯의 건장한 사내가 그까짓 감기 때문에 죽기도 하더라.’ 혹은 ‘은퇴 후 이것저것 손대다가 살 만하니까 훌쩍 떠나더라.’는 얘기들 말일세. 친구 사이란 다 그런 거니까 그렇게 편하게 잊어 가리라, 책꽂이 한구석에 꽂아둔 교양과목 교과서처럼 어쩌다 한 번쯤 꺼내보리라 생각했던 거지.

그랬는데 단톡방 메시지가 자네의 부재不在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던 거야. 남들에게는 이번 겨울에 저세상으로 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자네가 특별한 존재, 무려 45년 이상 우정을 나눈 친구였던 거야.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것들이 남아 있었어. 이심전심으로 모이자는 얘기가 돌았고 제주도 이 교수만 빼고 다 나왔는데 몇몇은 부부가 함께 나왔더구먼. 공통적으로 절박감 같은 게 있었던 거야. 한 달 전까지 멀쩡하게 같이 등산하고 시시때때로 카톡했던 사람이 느닷없이,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버렸으니 우리들 마음속에 이별할 준비가 안 되었던 거지. 우리들의 수많은 추억들을 기억창고의 저편에다 그냥 이대로 던져 놓을 수는 없었던 거야.

각자 자기가 써온 기도문을 읽기도 하고 추모시를 낭송하기도 하면서 자네와의 추억들을 반추했는데, 아마 봄볕이 화창한 대학교 1학년 봄이었을 거야. 우리는 벤치에 모여 앉아 강의가 끝나면 뭘 하고 놀까를 궁리하고 있었어. 그런데 자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월의 노래>를 목청껏 선창해버려서 옆에 있던 우리도 별수 없이 합창해야 했었지. 나는 그날 돌계단 옆에 만개했던 키 큰 자목련도 선명하게 기억한다네. 또 하나, 짝사랑했던 사범대 여학생을 어렵사리 만나게 해줬더니 말 한마디 못하고 얼굴만 벌게진 채 앉아 있다가 밖으로 뛰쳐나가버린 얘기에 모두 웃었다네. 자네는 그 일로 한 일주일 결석해서 우리가 인천까지 찾으러 가기도 했었지. 하여튼 끝마무리에는 옛 추억 퍼즐 맞추기로 분주해져서 추모의 자리가 떠들썩했고, 다들 천도제 지내고 절집 나서는 사람들처럼 가슴이 후련하고 얼굴이 밝아졌다네. 어쩌면 천도제가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보다는 산 사람들의 애틋한 심정을 달래주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 면에서 적어도 우리들만큼은 자네의 장례를 전통방식으로 치렀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마당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간간이 들리는 아녀자들의 호곡 소리와 밤늦게 도착한 문상객들의 소란함이 어우러져서 어쩌면 축제 같기도 한 장례 말일세. 나는 어쩐지 전통 장례가 망자와의 이별절차로서 더 적당한 것 같아.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니 애써 무시했는지 모르지만, 삶의 바로 옆에 일상처럼 죽음이 있는 거였어. 게다가 자네처럼 훌쩍 떠나버리면 이승에 뭘 남긴다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 것 같아.

말수는 적지만 등산 가자면 눈이 빛나던, 흐뭇하고 든든했던 친구야. 오늘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해서 외투 단추를 모두 풀어헤치고 걸었네. 예년 같으면 시산제를 어디서 지낼 것인가로 벌써 여러 번 만났을 텐데…….

보고 싶은 친구야.

이제 내 핸드폰에서 자네의 번호를 지울 것이네. 예순 몇 년간 쌓아놓은 역사는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라네. 피안에도 목련꽃 피는 봄이 있다면 그때 그 벤치에 앉아 봄 노래를 합창해 보세.

                                                                                                                      친구 종혁, 절하고 드림.

추신: 조문하고 나오면서 우리들이 단체로 자네 영정에 절했잖아. 누군가가 “저세상에 먼저 가서 편히 잘살고 있어라.”라고 짧게 한마디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친구가 “그러지 뭐.”라고 했거든. 나중에 그 친구가 그러는데 자기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튀어나온 말이라는 거야. 자기도 속으로 ‘이게 뭐지.’ 했다는 거지. 오늘 새벽 문득, 그때 자네가 그 친구 입을 통해서 대답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상가에는 영혼이 떠돈다고 하던데, 혹시 우리 옆에 서 있었지 않았는가?.



김종혁 수필가 광주광역시 출생. 경희대법학과, 충북대 경영대학원 졸업, 서울보증보험(주) 상무이사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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