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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오후, 늘 다니는 야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직은 좀 이른 철인데도 볕바른 곳에는 벌써 봄이 한창이었다. 마치 무한히 큰 함지박에 봄을 가득 담아다가 이곳 양지바르고 옴팍한 곳에 덜퍽지게 부어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제비꽃·양지꽃·별꽃 등 앙증맞은 꽃들이 바위틈이며 마른 풀숲 사이 여기저기에 깜찍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탐스러운 원추리 새순이 수북하게 돋아 있었다. 위를 쳐다보면 노란 생강나무꽃이 햇볕을 받아 눈이 부셨다. 산벚꽃도 머잖아 만개할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는 멧비둘기의 구구대는 애절한 울음소리, 저쪽 능선에선 장끼의 힘찬 외침과 날갯짓하는 소리가 산골을 울렸다.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 했던가. 봄이 오기 바쁘게 성급한 녀석들이 벌써 짝을 부르느라 한층 소란스러웠다.

겨우내 움츠렸던 내 가슴에도 봄이 온 듯 흥겨워졌다. 한창 봄기운에 들떠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으로 다소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었다. 가끔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직박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뿐 숲길은 적적했다. 원래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데다 오후 시간에는 더욱 조용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여인 한 명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여인은 몸이 불편한듯 지팡이를 짚고 기신기신 걸어 내려왔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와 서로 비껴갈 순간, 여인이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왼쪽 다리를 붙들고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왜 그러세요. 도와 드려요?”

내가 급히 쫓아가며 묻자 여인은 왼쪽 허벅지를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허벅지 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어마지두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있으면 도움을 요청해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선 119로 전화를 걸었다. 내 설명을 듣더니 바로 출동하겠다고 하면서 그동안 아픈 다리를 높이 올리고 힘껏 마사지해 주라고 했다. 여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며 몸을 좌우로 비틀고 괴로운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땅바닥에 털썩 꿇어앉아서 여인의 왼쪽 다리를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무릎 주위를 꼭꼭 주물러 주었다. 그러자 “더 위쪽에요!” 하고 숨가쁘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자꾸 무릎 위 허벅지 안쪽으로 끌어갔다.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다.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내가 이 여인의 그물에 잘못 걸려든 게 아닐까? 여인이 갑자기 소리라도 지르면 어떻게 하나. 요즘 한창 번지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에 말려드는 건 아닌지…. 언뜻 극도로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이 남자가 다짜고짜로 나를 넘어뜨려 허벅지를 만지고….’

혹시 이런 황당한 사태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내 자신이 당당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데 무슨 상관이랴. 아파서 죽겠다고 비명 지르는 여자를 구해준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혼자 생각하면서 허벅지 마사지를 계속했다.

멀쩡한 사내가 맨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여자의 다리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는 광경을 누가 보았다면 참 가관이었을 것이다. 날씨가 그리 덥지도 않은데 내 얼굴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리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아마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 시간이나 된 양 길게 느껴졌다. 그때까지 구급차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있는 힘을 다해 여인의 허벅지를 계속 주물렀다.

그러는 동안 여인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살포시 미소까지 띤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리에 쥐가 자주 나는 바람에 종종 이렇게 고통을 겪는데 잠시 응급처치만 하면 곧 괜찮아진다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 여기에는 자주 오느냐, 참 좋은 분 같다는 둥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숨 넘어가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던 여인이 생뚱맞게 매화타령을 하는 격이었다.

경황이 없어 얼굴도 제대로 못 보다가 그제야 좀 자세히 뜯어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40대 중반쯤 되었을 보통의 여인이었다. 흰색 추리닝 바지에 적갈색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거무스름한 얼굴이며 루주를 바르지 않은 입술 등 대체적으로 편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머리를 좀 길게 잘라 어깨에 찰랑거리는 모습이 한층 젊어보였다. 언제 아팠더냐 싶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바뀌는 게 희한했다. 119에 전화만 해주고 그냥 지나갈 걸 괜히 사서 고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더구나 여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대장부 남자가 어찌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으랴. 작으나마 일일일선一日一善을 했다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아무리 선행이라 해도 이렇게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야릇한 선행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저 밑에서 구급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내가 또 다른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급박한 목소리로 119에 신고를 했는데 여인이 멀쩡하게 앉아 있으니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제 괜찮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난 전화를 한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여인에게 우격다짐으로 재촉했다. 빨리 누워서 많이 아픈 시늉을 하라고. 여인이 쿡쿡거리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맹랑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 구급차가 도착하고 구급대원 두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올라왔다. 누워있는 여인을 들어서 차에 싣는 것을 보고 나는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 위쪽으로 허청허청 걸어 올라갔다.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생각해보니 여인을 마사지하는 동안 상대가 여자라는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느라 많이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도 오욕五慾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하다.

따사로운 햇볕과 훈훈한 바람결에 몸이 나른해져서 걸음걸이가 자꾸만 비틀거리는 봄날 오후였다.



하병주 수필가 전남 순천 출생. 광주일고, 전남 법대 졸업. 국가공무원 30년 근무. 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신촌에세이포럼 회원. 2016년 매일신문 제2회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특선. 수필집 『세웃골 솔밭 그늘에』,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시오』,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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