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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죽이잖아 / 강철수

부흐고비 2022. 2. 15. 08:04

질식할 듯 갑갑한 시간이 마디게 흘렀다. 모르던 사람이 만나서 평생을 산다는 일은 인연이란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곁에서 지켜보며 웃어주는 사람, 나의 허물과 약점을 드러내 보여도 괜찮은 사람, 나에게 아내는 세월과 함께 그렇게 흘러왔다. 뉘라서 자신의 젊은 날이 아쉽지 않으랴.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통보가 왔다. 아내 것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아내에게 이왕 나왔으니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예상한 대로 아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쉽게 갈 것 같지 않았다. 며칠을 재촉한 끝에 결국 함께 병원에 가게 되었다.

정작 병원에서의 검사는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대충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서 재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재검을 해야한다는 말에 아내는 또 귀찮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내용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폐의 X‒ray 결과 의문의 점이 발견되어 폐결절이 의심되니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폐결절, 생소한 병명에 병원으로 전화도 하여 보고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았다. 증상에 따라 수술도 해야 하는 중대한 질환이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낀 듯 집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봄날 논배미의 쇠뜨기처럼 돋아났다. 암울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자고 뒤척거리다 날이 샜다. 검사를 받아야 하기에 아내는 빈속으로 병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CT 촬영실로 갔다. 정밀 촬영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아내의 무표정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내는 잔뜩 긴장을 하고 드럼통 같은 촬영기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나 또한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였다. 별별 방정스런 생각이 다났다.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을 떨치고 싶어 창가로 가 밖을 보았다.

지난 세월이 단막극처럼 연상되었다. 서로 다른 나무가 연리지가 되기까지 나름 굴곡 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소나무 옹이처럼 단단하고 버겁게 견뎌온 세월이었다. 살 만하면 탈난다더니……. 늙고 병들면 서러움만 쌓인다고 했던가. 모든 일들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그동안 잘 챙겨 주지 못한 것만 생각이 나 마음이 아팠다. 더욱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한참 후 하얗게 질린 상태로 나왔다. 의사의 판독을 기다리는 동안의 초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손과 발에 땀이 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의사의 호출을 받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의사가 모니터 사진의 어느 부분을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려는 순간 숨이 멈춰졌다.

“폐결절이 아니라…….”

의사는 턱을 괴고 뜸을 들였다. 아니 그러면 더 고약한 병이란 걸까? 뜸을 들이던 의사는 폐결절이 아니라 평소 나쁜 자세로 빨리 먹는 습관으로 생긴 식도의 변형 증상이라고 했다. 숨이 쉬어졌다. 의사는 자세를 곧게 하고 천천히 먹는 습관을 가지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안심도 되었지만 아내의 식사 습관을 직접 본 것처럼 정확하게 진단하여 내심 감탄했다.

평소 아내는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이 있다. 꼭 바빠서도 아니다. 별 할 일이 없어도 시간에 쫓기는 듯, 의자에 삐딱한 자세로 앉아 후딱 먹는다. 천천히 먹으라고 하면 오히려 내가 늦게 먹는 거라고 핀잔을 하곤 했다.

우리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석고처럼 하얗던 아내의 얼굴이 본색으로 돌아왔다. 의사의 한마디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듯한 느낌이다. 간사하면서 약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 생각해 보면 결국 재검 통보를 받기 전 상황으로 돌아온 것인데 왠지 기분은 노랭이의 빚을 갚고 나오는 것처럼 개운하였다.

하루 종일 빈속으로 시달렸을 아내가 죽이 먹고 싶다고 하여 전복죽 등을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긴장도 풀리고 어제 낮부터 굶었으니 오죽 배가 고프랴. 적당히 식은 죽을 아내는 참 빨리도 먹는다.

“의사가 천천히 먹으랬잖아.”

“죽이잖아.”

“누가 죽이는데?”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집안에 다시 데시벨 수가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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