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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모자가 사는 법 / 염귀순

부흐고비 2022. 2. 22. 08:55

이만한 영광이 없다. 향긋한 화장에 외출복을 차려입은 주인이 머리 위로 정중히 모셔주니 세상이 내려다보인다. 폼 나게 길거리에 나서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 멋지다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눈길을 거느릴 땐 주인보다 더 으쓱해져 신바람이 난다. 내 본분은 주인의 외출 길에 패션으로 동행하는 일, 문제라면 ‘어떻게 제자리를 잘 지키느냐’가 될 것이다.

종종 현기증이 나기는 한다. 머리에 얹혀있다 보면 머리카락 냄새에서 벗어나고픈 순간도 있다. 그러다가 낯선 바람이 휘익 불어올라치면 행여 끌려갈까 또 안간힘을 쓴다. 까딱 잘못하다간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내리 박히는 낭패를 당할 수 있으므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굴곡 없고 희비가 섞이지 않는 삶은 없는 법,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볍게 나풀거려선 안 된다. 자중하고 자중할 일이다.

주인 덕분에 여러 곳을 두루 다녔다. 심심찮게 무슨 행사장에도 드나들고 북적북적한 인파 사이에서 시끌벅적한 도시 문화도 기꺼이 누렸다. 냉난방이 빵빵하게 갖춰진 백화점의 넓고 쾌적한 실내에서 별별 희한한 족속들을 일별하는 맛도 삼삼했다. 어느 날엔 예정에도 없는 하루 여행길에 훌쩍 올라 새로운 풍경과 조우하는 일은 내 삶에 활기를 준다. 뿐인가. 틈틈이 꽃 장식이나 리본으로 나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주인의 정성이야말로 분에 넘치는 호사. 이만하면 상팔자 아니랴.

주변에는 다양한 친구들이 유행을 선도한다. 신사들이 쓰는 중절모를 비롯하여 일명 벙거지모자라 일컫는 버킷 햇(bucket hat). 여름철 숙녀들이 즐겨 쓰며 넓은 챙이 물결 모양의 곡선을 이룬 플로피 햇(floppy hat). 남녀노소 계절 구분 없는 베레모도 있다. 어떻게 생겨먹었고 어떤 이름을 가졌건 ?폼에 살고 폼에 죽다.?가 우리들 패션 모자의 공통된 생리다. 속이 없는 물건들이라며, 얹혀사는 주제라며 폄하하진 마시라. 잊으셨나, 사물이든 사람이든 생은 어차피 천천히 정들여가는 여정이라는 것.

다행히 글을 쓰는 주인과 나와의 어울림은 그리 들뜨지 않으면서 예술적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부드러운 감성의 바람이 살랑살랑 감돌기도 한다. 나와 동행하지 않으면 지인들도 주인을 낯설어할 정도로 우린 서로의 ‘이미지’가 되었다. 세상엔 다른 삶도 많을 테지만 나를 애지중지하는 주인과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대로도 괜찮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여도 알아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더라고.

모양새가 다른 친구들 중엔 사철 땀에 절어 사는 녀석도 있다. 산행이 취미인 남자를 주인으로 만난 등산모 녀석은 머리의 땀 냄새를 사과 향기인 양 맡아야 한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역병이 창궐한 이즈음엔 거의 날마다 산을 오르는 주인과 밤낮 산길 들길로 붙어 다닐 정도란다. 가도 가도 험난한 산비탈과 ‘깔딱 고개’만 이어진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어쩌다 선선한 골바람이 위로해주고 노란 금잔화와 보라색 제비꽃이 마음을 달래주지만 땀내는 갈수록 심하다며 툴툴거린다. 매끈한 도시의 번화가를 폼 나게 활보해보고도 싶고, 음악의 선율이 잔잔하게 깔린 옥내에서 아늑한 시간도 향유하고픈 게 녀석의 요즘 희망이다.

하긴 그의 주인도 무심하시지. 종일 햇볕과 땀으로 기진한 하산 길에서도 녀석을 위한 일이라곤 잠시 내려 탁탁, 먼지를 털어주는 것이 고작이라나. 그윽한 분위기와 품위가 있는 곳엔 아예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세상에 모자조차팔자가 있어야 하냐고 녀석이 불만을 터뜨릴 만하다. 그러면서 어제도 오늘도 용케 잘 버텨나가는 걸 보면 자신의 자리에 점점 익숙해가는 모양이다. 아니 언젠가 멋진 날이 올 거라는 꿈으로 땀 냄새를 지그시 눌러 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 꾸불꾸불 에두르는 산길보다 산 아래의 길이 외려 가파른 삶이라는 걸 녀석이 벌써 눈치챘는가.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꿈꾼다. 온갖 욕망과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을 보면 그렇다. 평평한 길도 가다 보면 늘 제자리인 듯 느껴져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갖게 된다. 보다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려 버둥거린다. ‘보다 더’에 매달려 마음은 또 다른 탐심을 부추긴다. 오래된 것보다는 새것을 탐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며, 유혹에 흔들리고 변심 또한 잦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나도 살짝 걱정은 된다. 주인의 눈길이 나 몰래 다른 녀석에게로 옮겨가진 않을지. 나보다 훨씬 근사하고 독특하게 생긴 녀석을 불쑥 데려오진 않을지.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는 “아직 젊은가 보네!”라고 껄껄 웃지만, 애초 만만한 생은 없는 터다. 삶이라는 무대엔 숱한 변수들이 포복해있고 난데없는 풍우가 무시로 불어 닥친다.

무엇보다 조바심하는 건, 주인이 모자 안에다 가면의 모자 하나를 척 덧쓰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막연한 혼란과 아득한 내일이 혼재된 가면을 쓰고 사는 현대인들 아닌가. 상처를 가면으로 덮어 가리고 야릇한 분장을 한, 거짓이 진실 같고 가짜가 더 진짜 같은 판이라 갖가지 탈들이 속출한다. 우리 주인마저 자칫 위선적인 폼으로 세상의 닳고 닳은 그런 수라도 쓴다면…‥.

쉿! 이 모든 것은 오직 나의 기우이거늘, 친애하는 주인님은 내 속을 하마 헤아리고 있을 게다. 더 바싹 다가가 주인 몸의 일부를 가려주는 보호막이 되련다. 하나의 상처 뒤엔 또 다른 상처도 있지만 또 다른 희망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먼 곳은 동경의 대상일 뿐 피안이 아니다. 여태 보고 듣고 살아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알 것도 같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악다구니 세상 ‘지금 바로 여기’가 꽃자리임을. 속이 없는 물건이라고? 얹혀사는 주제라고? 웃는 얼굴로 돌아서서 폄하하지 마시라. 이것이 우리들, 모자가 사는 솔직하고 담백한 마음일지니.



염귀순 님은 부산문인협회 이사, 부경수필문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민족통일문예공모전 통일부장관상을 비롯해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수필집으로 『펜을 문 소리새』(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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