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노향림 시인

부흐고비 2022. 3. 3. 14:24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69년 《월간문학》에 「겨울과원」을, 1970년 《월간문학》에 「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K읍 기행』,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푸른 편지』,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구상문학상, 인산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

 



위로 / 노향림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된/ 시골 간이역에서/ 낭자하게 피 흘리는 선홍빛 샐비어 꽃/ 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 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선연한 피들을/ 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내 안의 저녁 풍경 / 노향림
배밭 너머 멀리 저녁 구름이 걸렸다/ 필라멘트 불빛처럼/ 역광이 구름 틈새로 새나오고/ 당신은 아직도 바다를 행해 앉아 있다/ 등 돌려 텅 빈 독처럼 앉아 있는/ 당신에게 시간은 저녁을/ 가득하게 퍼 담고 있어/ 하얗게 지는 배꽃들이/ 당신의 발등과 무릎 어깨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진다/ 바다 위에서는 새들이/ 한쪽 발을 들고 머리를 주억거린다/ 그들이 이따금 모래톱을 물고 나는 사이/ 떠돌던 당신 마음은/ 어떤 빛일까/ 밤은 저만치 젖은 날개 터는 소리로/ 파도 위로 걸어오고/ 그렇게 당신은/ 오래도록 생각에 묻힌다//

풀잎 일기 / 노향림
장독대 밑에 피어 있는 한묶음 닭의장풀들은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부스럭대며 서늘한 바람 속에 흔들린다. 있는 힘을 다해서 흔들린다. 가는 손이라도 꺾이면 보랏빛 꽃도 혼백처럼 진다. 하늘에 닿는다는 믿음 하나로 가을의 끝에서 흔들린다. 앙상한 뼈가 드러난 형체로 짓밟혀도 그렇게 흔들린다.// 가을 하늘도 속수무책이다.//

가족 / 노향림
나는 서투르다. 은행나무 분재를 들여놓아도/ 곧 낙엽져 떨어진다. 허리 잘린 그 몸에 아기손처럼 돋아/ 하늘을 받들던 잎들이 진다. 그 뒤에 하릴없이,/ 죄송하다는 듯이 물이나 잔뜩 끼얹어 줄 뿐이다./ 흙속에 가늘게 뻗은 뿌리들이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철도원 / 노향림
긴 골목길 끝나는 곳 돌아나오면 철도가/ 숨듯이 엎드려 있다. 멀리서 땅 땅/ 망치 두들기는 소리 들리고 어디선가/ 무개차가 돌아나와 텅 빈 삶을 적재하고/ 이마 맞댄 동네 처마 밑으로/ 제 힘 다해 키 낮추며 기어간다./ 살아온 무게만큼 나무토막, 부서진 안테나,/ 사금파리, 호루라기소리, 풍금소리 등 잡동사니를/ 싣고 새똥이 흐릿하게 앉은 침목 위를/ 느릿느릿 간다. 맘 놓고 간다./ 끝없이 이어진 철로 위 여름도 뒤 따라서/ 짐 실은 당나귀처럼 터덜터덜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이따금 끊기다 이어놓은/ 길 위에서 갈 곳 없는 시간이 막혀있다./ 아직 햇볕이 따갑다고 함석 지붕/ 한쪽이 다 삭은 건널목 초소의 간수가/ 앉아서 졸고 있다. 나올 생각을 않는다.//

종이학 / 노향림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홍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원조 최대포집 / 노향림
공덕 오거리 먹자골목엔/ 원조 최대포집 간판이 도처에 있다./ 드럼통 속 구공탄 불꽃 활활 타오르고/ 그 위 쇠강판 씌우면 누구든 원조 최대포집./ 알전구 흐린 불빛 아래 어깨 굽은 원조들이/ 불그레한 얼굴로 둘러앉아 있다.// 그가 박가이건 이가이건 김가이건/ 서로 모르는 사이도 이마 맞대고 둘러앉아/ 하루지기가 되는 집./ 생고기 굽는 냄새 자욱하고 허연 민짜 껍데기들/ 지글거리다 바싹 탄 시간들처럼 오그라든다.// 사는 일이 그렇고 그렇다고 동행한 허기들이/ 불판 위에서 뜨겁다고 몸 뒤집는다./ 양념 된장에 쪽마늘을 마구 축내다가/ 여기 토종 생마늘 풋고추!/ 쇠강판도 덩달아 달아올라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 번번이 자리 놓쳐 문밖에 어둑하니 기웃거리는/ 무표정한 몇몇 얼굴들이/ 먼 공중에 박힌 낯선 하현달 같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티었다고/ 굽은 어깨 흔들며 서로 지는 줄도 모르고/ 원조들 부딪는데/ 좀체 일어설 줄 모르는데.//

지하철 안에서 / 노향림
나는 지하철을 즐겨 탄다./ 시간이 절약되고 무엇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전천후로 달려 모든 약속시간에 댈수 있어서 좋다./ 열차가 역사로 들어오기 직전 뚜우- 하는 짧은 신호음은 시공을 뛰어넘는 추억여행같다./ 유년기에는 기차역을 자주 서성거렸다./ 기차가 검은 몸체를 뒤틀며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까닭모를 설움에 젖어 손을 흔들고는 했다./ 이런 아련한 기억을 연상케하는 지하철이 좋다./ 시를 쓰다가 잘 나가지 않을 때 나는 무작정 지하철을 탄다./ 종점에서 내리지 않고 한바퀴 비잉 돈다./ 이때 지하철은 내 상상력을 높여줄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한다./ 미니 콤팩트디스크를 귀에 꽂은 날이면 금상첨화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고전음악 감상실이 되기도 한다./ 겨울빛이 짙어져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 지하철을 꽉 메운 이런 이들로 인해 내 마음도 겨울을 탄다./ 계절마다 또 다른 모습의 배경으로 오는 감각./ 이런 감각은 삶을 정말로 역동적이게 한다./ 이런날 자욱이 눈발이라도 내리면 아,살아있다는 사실의 고마움이여! 하고 무의식중에 탄성을 발한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삭막한 풍경이 연출되는 곳이 또 지하철이다./ 이젠 쉽게 노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얼마전까지 8명도 끼어앉던 좌석이 7명이 앉게 되었다./ 6명이 앉아있는 모습을 본 어느 중년이 "아 조금씩만 좁혀 주실까요?" 한다./ 그리고 거의 앉을 자세를 취한다./ 중년의 남자가 무안을 당한 것은 그렇게 정중하게 말을 해도 좁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무표정이다./ 정물처럼 꿈쩍도 않는 사람들을 보면 오늘의 세태가 한눈에 드러나는 듯하다./ 서로가 바쁘게 살아 피곤해서 편안해지고 싶은데 왠 말이 많으냐는 듯한 표정이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도 꿈쩍않는다./ 아예 눈 감고 앉아 상대편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주 작은 이기심들을 충족시키는 모습들을 보면 슬퍼진다./ 지하철에서는 서있는 자의 편안함을 누리겠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를 자기로서 버티고 주장하는 모습이 공공장소에서는 그렇게 이기적이 된다.//

 

맑은 날/ 노향림
길을 가다 멈춰 서서 보았습니다./ 하르르 꺼질 듯 졸다가 깨어나다/ 제 눈 속에 눈다래끼만한 하늘을/ 밀어넣고 있는 풀꽃/ 애기똥풀꽃! 속삭여 주자./ 하늘은 어느덧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미풍에 흔들리는/ 또 다른 푸른 커탠이 되어 주었지요./ 때마침 지나는 바람이/ 불쑥 그의 등을 칩니다./ 노랗게 시든 깨알같은 쓸쓸함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마음을 마구 토합니다./ 어디선가 침묵새 한 마리 아득히/ 침묵을 흘리는지/ 하늘과 땅 사이에/ 혼자 앉은 애기똥풀꽃이/ 글썽이는 눈물도 없이/ 자꾸만 시드는 제 귀를 쫑긋댑니다.//

어떤 개인 날 / 노향림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은/ 더욱 팽팽해진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 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k읍 기행 / 노향림
오랜 만에 만나는 분위기.// 하나의 선이 되어 평야가 드러눕는다.// 일대는 무밭이 되어/ 회색 집들을 드문드문/ 햇볕 속에 묻어 놓고// 몇 트럭씩/논밭으로 실려가는/ 묶인 고뇌와/ 고장난 時間들.// 지나다 보면 낯이 선/ 사투리들이/ 발길에 툭 툭 채였다.// 길가 사람들 속에서/ 구부정한 말채나무가/ 혼자 목을 쳐들고./ 할 일 없이 혼자 쳐들고 있다.//

연습기(練習機)를 띄우고 / 노향림
길에는 머리 산발(散髮)한 흙바람이/ 이따금 보였다// 언덕 뒤는/ 항공대학(航空大學).// 몸속에 감춘 조그만 바늘들을/ 꺼내 들고 버드나무들이 보여준다.// 생시(生時) 꿈에 깊이 박힌/ 녹슬은 말들/ 바늘들로 드러난 공기(空氣)의 흰 속살을/ 찌르기도 한다// 그 위로는/ 날아가더니/ 내 마음에 뜬/ 하늘로 가/ 다시 나는 연습기(練習機)들.// 가진 것 없이/ 식은 꿈 접어 날리며/ 긁히는대로 사람들은/ 살아 남고.//

남천(南天) / 노향림
남천은 괴롭다./ 고층 아파트 베란다로 이사온/ 그가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절벽이 삶일까 생각하는 사이/ 멈췄던 생각들이 주춤주춤 빠져나간다.// 각혈하듯 제 잎들을 토해서/ 빨갛게 언 발등을 덮는다./ 추위에 꼼지락거리는 화분 위로 내놓은/ 발가락이 많이 텄다.// 강변도로에는 혼돈이 식어서 밀리며 정체 중이다./ 밀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나트륨 가로등의 목에 겨우 걸터앉아 조는/ 짧은 오후가 서쪽 하늘에 밀려 있다.// 눈뜨면 이마에서 사라지는/ 쇠오리들의/ 발꿈치.// 밤섬이 한 순간 수많은 은빛 가락지들을/ 뒷발질해 띄워올린다./ 출렁거리던 섬이 마침내 상공으로/ 떠서 날아간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한겨울 오후/ 남천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찬 땀을 매달고 섰다.//

봄비 1 / 노향림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많이 튼 살갗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無性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 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몇 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 것을.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인다. 온종일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미처 피하지 못한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닌다.// 스스로 물소리를 만들며/흘러가는 비, 비.//

봄비 2 / 노향림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 라일락이 밥알 같은 꽃을 매단 주위는 온통 환했다.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온다.//

베스트셀러 시인 / 노향림
‘나무의 수사학’을 펴낸 손택수 시인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젊은 시인상을 받을 때/ 밝힌 수상 소감이다./ 시집이 나오고 일주일 동안 책이 하도 잘 나가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는 꿈을 꾸었단다./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가짜였다고,/ 어머니가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한 권 한 권/ 사다가 쌀독 속에 쌓아 두었던 것./ 가끔 노친네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는데/ 시집 외상, 5000원/ 시집 외상, 8000원/ 어머니 글씨가 선명했고 시인이 시인 자신의 시집을/ 사는 것 같아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한다./ 그 뒤 한 달을 기다렸다가 서점에 들러 보니/ 딱 한 권 팔렸다고./ 그 말을 들은 시인은 처음엔 실망했지만/ 그 한 권을 사간 사람은 혹시 시인일지 모른다고/ 그 한 권을 산 독자를 위해 계속 쓰겠노라 했다./ 시인은 시밖에 몰라서 늘 목말라해도/ 투명한 영혼의 젖줄은 계속 풀어내야 한다고./ 독자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 위해 쓰는/ 오, 진정한 베스트셀러 시인.//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 노향림
해에게서는/ 언제부턴가 종소리가 난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소리 앞에/ 무릎 꿇고 한데 모으는 헌 손들/ 배고픈 영혼들을 위한 한끼의 양식이오니/ 고개 숙이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늘이 지상의 빈 터에다 간판을 내걸었다./ 무료 급식소,/ 무성한 생명력의 소리 받아먹으려고/ 고적함을 견디며 서 있는 길고 긴 행렬/ 깃털처럼 야윈 몸들을 데리고/ 될 수 있는 한 웅크린다./ 아무것도 움직여본 적 없고/ 스스로를 쳐서 소리 낸 적 없는 몸짓이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동치는/ 해에게서는/ 수세기의 깨진 종소리가 난다.//

깨꽃 핀날 / 노향림
붉게 혀를 늘어뜨린 개꽃들에게서는/ 초경의 비린 냄새가 난다/ 부드럽게 피어 그 꽃의 이마에/ 한 뼘의 가을이 와서/ 발 딛다 미끄러진다./ 기척 없이 하늘도 내려오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는 한다.// 여러 겹의 혓바늘 돋는 병을 앓던 그대/ 어느덧 맑게 목청 튼 깨꽃으로/ 피어나 있다.//

동백숲길에서 / 노향림
아름드리 동백숲길에 서서/ 그 이름 기억나지 않으면/ 봄까지 기다리세요.// 발갛게 달군 잉걸불 불꽃이/ 사방에서 지퍼진다면/ 알전구처럼 밝혀준다면// 그 길/ 미로처럼 얽혀 있어도// 섧디설운/ 이름하나/ 기억하나/ 돌아오겠지요.//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디 햇빛 아래 소리없이 핀/ 작디작은 풀꽃들,/ 녹두알만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면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떼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마포우체국 / 노향림
마포 새우젓 동네의 마지막 보루였던/ 옛 우체국이 간밤 통째로 사라졌다./ '철거 중' 팻말 하나 없이/ 누구는 공중 부양된 것을 보았다 하고/ 누구는 땅속 깊이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사방 빙벽처럼 둘러서 있는 초고층 유리벽 건물들 사이/ 반딧불이같이, 희미한 등대같이/ 한밤중까지 불빛 깜박이던 납작 집 한 채./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에메랄드 빛 하늘 훤히 내다보며/ 청마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는/ 우체국 창문./ 나는 한정판 첫 시집을 소중히 안아 들고/ 육필로 정성껏 쓴 봉투에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었다./ 내 분신들이 시인이 사는 곳 잘 찾아 나설까/ 돌아선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설레게 했던 곳.// 포클레인, 덤프트럭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퇴적층처럼 쌓인 잔해 속에 다만 깨진 화분 하나/ 납작 엎드려 있다./ 대낮의 햇살에 초록 인광 번뜩이는 남천이다./ 넘어진 바닥에서도 손가락만 한 이파리에/ 선연한 핏방울 흘리며 나 살아 있어요 외치듯/ 흔들린다.//

꿈 / 노향림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소나무들은/ 앙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냄새/ 바람 사이의 흐릿한 호얏불,/ 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 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자연(自然) / 노향림
전남 해남군/ 산이면(山二面)에 가면/ 산과 바다가 맞물려 있습니다.// 어린 날 숨죽여 묻어 둔/ 울음 소리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삭지 않고/ 더욱 짙푸르게 울리는 울음 소리.// 산과 바다엔 밤이/ 오고 있었습니다.//미처 고백하지 못한 내 죄(罪) 몇 벌/ 벗어 걸어 둔 생소나무 숲 사이로/ 관절 풀린 길 하나/ 저절로 꼬여 있습니다.// 갈밭 머리엔/ 어린 날 놓아 버린 하늘이/ 한 구덩이 빠져 아직도 허우적입니다.// 날 선 갈대들이 서로 살을 베어/ 피 흘리는 사이로 아득히/ 비명 소리가 살아 있습니다.// 어딜 가나 스며드는 바다/ 그 푸른 빛만이 내 몸속에/ 느릿느릿 가지 않는 시간처럼/ 살아 있습니다.//

바다 / 노향림
부독본(副讀本)이 펼쳐져/ 한 페이지 속에/ 주먹만한 바다가/ 멍이 든 잔등을 지고/ 엎어져/ 터진 자리마다/ 사금파리로/ 와그르르 와그르르/ 쓸어내지는 바다,/ 바다.//

바다 1 / 노향림
날마다 피나무 사이로 기어다니던/ 굶은 들쥐와 발톱 굵은 바람들이/ 몰려나와서/ 먼지 쓴 채 잠들어 있는 하늘과/ 오래된 수평선 모서리를/ 갉아 깨운다./ 때로는 혼자 입을 앞발에 묻고 비빈다./ 잠 속에서 깨어난 활자와/ 묵은 종이들이 못 이기는 척/ 부서져 내리고/ 내려가야지./ 마음먹는 것일까./ 그의 등뒤로 하얗게 눈이 내린다./ 절망의 응답처럼.//

 

만 3 / 노향림
명량 대첩지 울둘목 수심 깊은 물속은/ 바닥으로 갈수록 소용돌이친다./ 그 거친 물살은 겨울 숭어 떼의 아늑한 안방이다./ 그곳에만 놀다가 눈에 백태가 끼고/ 눈멀어진 봄날엔 수 천 수 만 마리의 군단으로/ 몰려서 물이 얕은 쪽으로만 헤엄친다./ 이따금 리더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길목을 지킨 낚시꾼에게 그만 들킨다./ 잠을 안자며 다음날 새벽까지 한곳만 응시하던/ 뜰채 낚시꾼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불과 일 이 초의 순간의 포착,/ 그들이 지나는 물길만 숨죽여 지켜보다가/ 흰색 몸뚱어리를 보는 순간 휙 낚아채 버린다./ 뜰채에 두 세 마리 씩 건져 올려지는 숭어들/ 이놈덜, 지요 지요 하고 항복하면 놓아 줄턴디,/ 이 순간 니들 헌텐 바다가 苦海여/ 뜰채 속에서 발버둥치는 숭어들을 보며/ 낚시꾼은 미안하다는 듯 한마디 뱉는다./ 숭어 떼의 몸부림에 바다가 요동친다./ 뜰채 낚시꾼도 바다에 낚일세라 그 뒤에서/ 잘 꼰 헝겊노끈으로 서로의 허리를 묶었다./ 일행이 배낭에서 도마와 칼을 꺼낸 뒤/ 순식간에 회를 떠 초고추장 찍어 맛을 본다./ 싱싱한 봄날 새벽이 토막 난 횟감처럼 희뿌옇게/ 공간을 넓히고 섰다.//

섬 / 노향림
머리를 들 듯 들 듯/ 들지 않는 섬/ 턱을 들어 올리려고/ 물결 위로 기어와서/ 작은 손가락으로 간질이는/ 새벽빛도 있으나/ 평생을 그는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봐도 거기에는/ 흩어져 날리는 흰 깨끔같은/ 허무밖에 더 있을까/ 숙인 채 그는 그 자리에/ 단단히 숨어들어/ 머리를 들 듯 들 듯/ 들지 않는다/ 이제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섬이 되고 싶다//

 

                 압해도* / 노향림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서해바다 그 푸른 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하이얀 뭉게구름/ 저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가면 친구여/ 바다 소나무 사잇길로 가자/ 우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 압해도: 전남 신안군 압해면에 속한 섬으로 군청소재지.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약 1.8㎞.
註) 시인은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 살았다. 장사하는 어머니를 따라 자주 압해도를 왕래하며 압해도 연작시 80여편을 발표했다. 압해도 주민들은 시향으로 언급된 데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압해도 8 / 노향림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을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호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압해도를 듣지 못하네//

 

여름이 가다 / 노향림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 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가난한 가을 / 노향림
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에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 새는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행여 무리를 빠져나온 무녀리들 방향 없이/ 빈터에서라도 낙오되어 길 잃을까/ 드문드문/ 따듯한 입김 어린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지시등 따라 창 밑까지 선회하다가/ 있는 힘 다해 지상에서 가장 멀리 치솟아 뜬/ 허공에 무수히 박힌 까만 충치 자국 같은 비행체들/ 캄캄한 하늘을 날며 멀리로 이사 가는/ 철새들이 보이는 가을날의 연속이다.//

가을날 / 노향림
먼 풀밭에/ 활주로가 까만 고무줄처럼/ 몽땅 풀려져 나와 있었다.// 간이 비행장.// 한 끝의 신호기 너머/ 얼굴이 뻘겋게 취한/ 夕陽이/ 이제 막 돌아와 서 있고// 격납고 속에는/ 부서진 명령과 鄕愁가/ 난삽하게 쌓여 있다.// 그 앞에서/ 얘기를 마악 끝낸 바람들이/ 제 신발들을 부산하게 찾고 있다.// 하늘 높이/ 새똥만한 구름 사이에선/ 누군가가 반짝 보여주는/ 주머니칼 하나.//

가을편지 / 노향림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 같은 한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어놓았습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난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 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을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나와 함께/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 흩어져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함께 누워있는지/ 두리번댑니다./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 줄의/ 우리 고통, 안녕!//

가을 노래 / 노향림
누군가 동전만한 햇볕들이/ 텅 빈 거리에 떨어진 것을 봅니다.// 인사불성인 땡볕과/ 아스피린 몇 알.// 아직 귀가하지 못한/ 중학생 아이의 탈선이/ 숨죽여/ 리어카 뒤에 숨고 맙니다.// 지천으로 쌓인 철 이른 밀감들이/ 철 안 든 아이들의/ 말들로 묻혀 있고// 들여다보면/ 편두통을 앓는지/ 말에는 아직/ 발긋발긋 실핏줄이 비쳐 보입니다./ 날개 없는 어깻죽지도 보입니다.// 햇볕에 등 기대고/ 기댈 데가 있어/ 대만족인 주인은 듣고 있습니다.// 이따금 가을의 섬세한/ 은빛 날개 스치는 소리.//

배꼽 / 노향림
꽃에도 배꼽이 있는가.// 흔적 없이 죽음을 수납하는 꽃들에게는// 배꼽이 자란다.// 열매 꼭대기에 오똑하니 올라앉아서/ 방금 떨어진 저 배꼽이/ 향기로운 전생이었다는 것을// 태를 태워 묻은 아득히 먼/ 고향이었다는 것을/ 터질 듯한 온몸으로 보여준다.// 상처 아문 자리에 봄이 돋고/ 은빛 금빛 장신구에/ 보랏빛 티셔츠를 입은// 제비꽃들이 일제히 만개한 배꼽들을 열고/ 깔깔거리는 동안// 지상엔 웃음들이 수북이 쌓인다./ 봄이 쌓인다.//

복음 약국 / 노향림
복음 약국 주인은 한쪽 다리가 짧다/ 일요일에도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지하 주차장이 넓은 신축 교회에서/ 풍금 소리로 예배가 시작되고 성탑의/ 음악 소리는 쟁쟁하게 퍼져나간다/ 멀리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는 동안/ 그는 한 손에 신문을 든 채/ 굵은 테 안경 너머 졸고 있다/ 그의 복음은 혼자 숨어서 읽는/ 주기도문처럼 수직 상승해 공중 어디엔가/ 떠돌고 있을거라고 믿는다/ 한쪽 다리가 무겁게 질질 끌려도/ 날마다 찾아오는 비둘기에게/ 허물어 질듯 작은 쪽문을 빠져나와/ 봉투에 넣은 쌀알들을 흩뿌려 준다/ 그의 복음은 늘 쓰디쓴 알약이지만/ 신도들의 가방에 든 구원의 말씀 몇 알보다/ 언제나 약효가 세다/ 복음 약국 문은 좀처럼 닫히지 않는다/ 깜깜한 밤하늘의 잔별들에게도/ 개방해 놓고 있다//

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 노향림
베란다 창틀에 쿵! 무언가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에서 표백되어 가던 햇빛 몇 벌이 출렁거린다./ 위층에서 던진 화분이 떨어지고/ 나는 난간에 걸린 푸른 줄기를 순간 낚아챘다./ 날개는 많이 상해 있었지만 잔뿌리와 줄기는/ 몇 몇 남아 있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뒤 며칠 만에 깨어났다./ 기진해 있던 입에서 뭉친 숨길처럼 광합성을 토해내고/ 철봉 하듯이 제 몸을 늘이는 것이 아닌가./ 잎이란 잎에서는 푸른 박쥐들이 튀어나와 날아올랐다./ 날마다 허공을 붙잡고 제 몸 늘여 내려오더니/ 우리 집 베란다를 곧 진초록으로 물들여 놓는다/ 잠도 자지 않고 제 몸을 늘이고 늘이는/ 그를 나도 모르게 그만 꺾고 또 꺾어내었다./ 자고나면 생기고 생기는 매듭들/ 통제할 수 없는 그 생명력을 보는 건/ 왠지 서러운 일이었다./ 어느덧 몸 수척해진 스킨답서스/ 그는 언제고 날아갈 태세로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세먼지 없는 어느 날 위층 요란한 곤돌라 소리에/ 열린 창문으로 박쥐 떼처럼 그것들이/ 정말 날아가 버린 건 얼마 전이었다./ 빈 하늘뿐이었다.//

교외 / 노향림
언덕에 오르면 몇 량의 낡은 시간들을 떼어놓고/ 달아나는 화물차가 보였네./ 풀섶 끝 사르비어 꽃들이 시뻘건 피를 억억 토해내고/ 저 아래 골짜기로만 주택들은/ 한 무더기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고/ 어디선가 창백한 햇볕 하나가 걸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네//

시간 / 노향림
철거중인 수인선 폐선로가/ 뻘밭 속에 파묻혀 있다./ 제 살 속에 완강하게 끌어안고/ 집착처럼 버티는 동안/ 모든 길은 이 계절에서 끊긴다.// 빗속에서 뒷걸음치는 농게 몇 마리/ 뚫린 입으로 게거품을 뿜어 올린다/ 흐린 하늘을 가득히 띄운다.// 수차가 부서진 채 나뒹굴고/ 바닥에 귀 대어보면/ 시간이 팽팽하게 걸러지는 소리/ 소금들이 체중을 내리는 소리// 바람이 딱 새 몇 마리/ 수평선 위에 가볍게 내려놓는다./ 그 너머 햇살 맑은 바다가 숨어 있는지/ 왼종일 마룻장 삐걱 이는 소리가 들린다/ 옛 물길 거슬러오다가/ 발 헛디딘 허공이 도적처럼/ 흥건히 잠겨 있다// 몸부림치지 않고는 한 발짝도/ 건너뛸 수 없다고/ 뻘밭 속에 탈선한 고통 몇 량이/ 더듬더듬 느리게 얼굴 지운다/ 소래포구가 저를 지운다//

느티나무 주차장 / 노향림
키 큰 느티나무들로 울타리가 된/ 주차장은 강변에 있다./ 누구나 들어가고 누구나 나오지 못한다./ 밤엔 밤을 결박하러 들어온 차량들로 만원이다./ 정지선 큰 그물에 갇힌 차들이 강물에서 갓 올라온/ 물고기 떼처럼 팔딱이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그 등짝들 위로 찌익 금이 간 하현달이/ 웬일인지 혀를 빼물고 길게 뻗어 있다./ 벌써 건너 버스 종점은 불 꺼진 채 조용하다./ 밤 깊어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느티나무들/ 커단 제 잎들을 마주 때리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아우성 소리 떠밀고/ 강물은 제 몸 뒤집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회벽처럼 이마 벗어진 여명이 희미하게 다가오고/ 외눈박이 젖은 눈으로 제 발등을 내려다보는 가로등 아래/ 취객 몇 밤새 제 슬픔들 토해냈는지 주차장 뒤로 사라진다./ 일찍 깨어난 차들은 다투어 주차 관리원이 없는/ 입구 쪽으로 달려나간다./ 속도를 내며 함께 달려나가는 차들/ 그러나 아직도 제 몸 안에 그어져 있는 것은/ 오프 리미트!//

몸 / 노향림
고통은 살 속에다 못 박는 일이다.// 탕 탕 허리 뒤 어느 벽에/ 척추 두번째 뼈에 못을 박나 보다.// 시간이 휘두르는 사나운 망치에/ 내 몸은 이미 절반쯤 부서져나갔다.// 어느 대는/ 천천히 눈 떠보면 몸의 폐허 대신/ 시린 하늘이 거기 보일 뿐.//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너무 환한/ 빛으로 죽음이 가볍게 떠 있을 뿐.//

차마고도 / 노향림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본 것뿐인데/ 등 뒤가 까마득한 茶馬古道,/ 茶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너머/ 그 너머//

추억이 마려운 얼굴 / 노향림
고속도로 휴계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봉지를 사들고/ 그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눈을 찌를 듯 높고/ 타고 온 트럭은 등 돌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잠시 벗어 걸어두고/ 마구잡이로/ 시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뒷덜미를 끌고/ 들어갔다/ 나옵니다// 하릴없이 등 돌려 남겨두고 온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찌르레기새처럼 박혀 있고/ 깡마른 얼굴로/ 노을이 중얼거립니다.// 여기서 늙음까지는 몇리?//

편지 / 노향림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멍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황조롱이 생존법에 관한 관찰 / 노향림
강변아파트의 비좁은 환기구 앞에서 비는/ 황조롱이네 집을 가려주고 내린다./ 생존을 향한 새들의 이동에 한여름에도/ 주인은 환풍기를 틀지 않는다.// 몇 날이고 비는 내려서 먹이를 찾지 못한/ 어미 새는 장마 속에서 버티다가/ 허공에 한번 치솟았다가 수직강하 하는 것이/ 생존법이라고 어렵사리 나는 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친다.// 퍼붓는 빗속에 어미는 허공을 날개 끝에 매달아놓고/ 앞발을 모으고 고수부지에 사뿐히 내려앉아 보여준다./ 배추흰나비와 호랑나비의 찢긴 날개를 찾는 법/ 이파리에 붙어 떨고 있는 애벌레를 보면/ 잽싸게 발톱으로 낚아서 솟구치는 법// 몇 차례 새끼들은 물어다 준 먹이를 물었다./ 황조롱이는 다시 날개를 펴 수직강하 한다./ 비가 내리는 어둡고 습한 풀숲에는/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와 잔영이 남아/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생존법이 숨어 있다.//

정동진역 / 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제라늄 / 노향림
어여쁜 이름 제라늄/ 제철이 지나 잎 다 떨군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붉은 혀를 빼물고 간신히 피어 있네요./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이라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피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철 지난 가지 끝의/ 생각들에게 말을 걸어요./ 창틀 없는 창가로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아 막막하게 뜬 하늘 오래 바라보아요./ 저 광대무변한 이천 몇억 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세고 있나요?/ 환하게 피었다 지는 저 별빛에도/ 속삭이는 몸짓과 뜨건 피가 함께 흐른다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제라늄/ 그 주위를 맴돌면서 작디작은 얼룩이/ 그대의 흐린 눈빛에 어른거려요./ 가지 끝에서 툭 꽃잎 떨어지는 소리 환해요./ 등 돌려 누운 어둠들이 이 지상을 뒹굴며/ 가만가만 혀로 핥는 소리/ 제라늄 제라늄//

마루 / 노향림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새들은 길을 트며 날아간다 / 노향림
기르던 한 쌍의 새가 날아간 빈 새장엔/ 피 배인 햇살이 툭툭 떨어져 나뒹글고/ 뾰족한 부리로 낟알만큼씩 쪼아댄 시간들이/ 모이통과 함께 한구석에 넘어져 있다/ 까마득히 날아간 새들이 숨쉬었던 흔적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공을 뚫고/ 누구도 넘보지 않을 더 먼 곳/ 바람만 재빨리 누웠다 일어서는 곳/ 모든 새들은 온몸으로 길을 트며 날아간다/ 좁쌀만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지상은/ 언제나 원근법의 깊은 아름다움이 파인/ 3D SF 화면처럼 반짝인다/ 어느 곳은 연둣빛/ 어느 곳은 바다 빛/ 어는 곳은 눈물 빛//

어느 거장의 죽음 / 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집 / 노향림
전셋집들이/ 불티나게 나왔다.// 호박넝쿨이 목을 아래로 내린/ 베란다 있는/ 집도/ 나왔다.// 갠 하늘이/ 물먹은 종이처럼/ 간간이 펄럭이고// 집을 얻으러 떠도는/ 사람들이// 철로꽃같이/ 워진 가슴에/ 없는 영혼으로/ 목을 뺀 채/ 기웃거리는/ 개천 가// 들여다보면/ 물 속에/ 흐트러진 하늘 끝이/ 모두 집이었다.//

 

빈 집 / 노향림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안 와?/ 손님들의 우스갯소리들이/ 달그락거리며/ 빈 찻잔 위에 놓여 있다.// 어딘가 사람이 있을 거야,/ 물 젖은 샴푸냄새 낀/ 체취가 떠돈다./ 휴지통을 뒤지다가/ 겨우 잠든 우스갯소리들.// 그 곁/ 재떨이 위에/ 눈감고 누운 정적(靜寂)이/ 영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밖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사람 말고 또 누가 와?// 성에 낀 유리창/ 목 부러진 형광등 불빛도 차츰/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사람 살지 않는/ 어딘가에/ 흐린 나뭇잎 사이/ 나뭇잎 발자국 소리 하나.//

 

그리운 서귀포1 /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마른 갯벌엔 눈 감은 게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엉또폭포 / 노향림
엉또폭포를 보신 적 있나요?/ 제주 서귀포시 올레길 7-1코스/ 엉뚱한, 폭포라는데요./ 제주 사투리 엉과 도의 합성어 엉또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숨고 싶으면/ 작은 바위틈이나 굴속에 숨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몸 야위며 있다가/ 내려가고 싶으면 불쑥 뛰쳐나가/ 언제든 뛰어 내린다는군요./ 자신을 스스로 적막 속에 가둔 자유인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요./ 햇볕 쨍쨍한 날이 계속되면/ 제 속이 불 속의 명부전처럼 활활 타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간밤 몰래 폭우 몇 줄기 기운차게 내리면/ 폭포가 되어 내 여기 나와 있어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소리를/ 사람들은 갑작스레 듣게 되지요./ 콸콸콸콸 쏴아쏴아 콸콸콸콸//

해녀 / 노향림
맑은 날이면 압해도는 안 보이네./ 둔덕 너머 사는 여자들이/ 허리춤에 제각기/ 갈쿠리와 그물을 차고 나갔다가/ 살이 까지거나 허벅지가 긁힌 채/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네./ 한밤중이면 그물에 걸린/ 겁 먹은 바다가/ 으르렁으르렁 털 투성이 짐승이 되어/ 울고 있네./ 어디서 출렁이며 떠돌고 있을까/ 살아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섬./ 실눈을 뜨고 그 섬을/ 몰래 본 사람들은/ 인기척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네.//

황혼(黃昏) / 노향림
구화학교(口話學校) 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그 뒤에 하늘이/ 정신 잃고 눈 몇점으로/ 남아서 떠 있다.// 한동안 생각하고 나더니/ 노선버스 한대가 들어가고/ 나온다.// 깊섶에 내다 넌 이불들/ 털어들일 때다.// 언덕받이 뒤로/ 느릅나무 몇몇이 헐벗은 몸을/ 간간히 떨고 섰다.//

장마 / 노향림
풀밭에 죽음의 재가 떨어졌다./ 체르노빌에서 날아 온 살이 상한 빗방울들/ 이마 벗어진 하늘에 머물렀다./ 비가 죽지 않고 가늘게 목 떨어지는 소리/ 갈 곳을 잡지 못한 말소리들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썩고/ 금이 간 소리 하나 오래 헤매며/ 허공에서 길을 잃는다./ 한 달 만에 비는 본전마저 털리고 떠나갔다.//

점묘법(點描法) 1 / 노향림
길바닥에 흰 거품같이/ 늘어붙은 종이 꽃.// 맹아학교 뒷길이/ 잊혀져 있다.// 찌그러진 빈 구루마 한 대./ 까까머리 아이 하나/ 제 설움을 꼭 끌어 안고/ 시든 웃음소리도 끌어 안고// 어느듯 들어와 숨은/ 첫 추위를/ 끌어내고 있었다./ 가난의 밑바닥까지/ 죄다 뒤집어내고 있었다.// 긴 블록 담장 위에 걸린/ 팔 부러진 바람 한 줄기// 그 너머 하늘 속엔/ 까만 점자처럼/ 흩어져 오는 어둠.//

지붕 위의 바이얼린 / 노향림
한 남자가 지붕 위에서 바이얼린을 켭니다./ 날마다 그 소리는/ 우리집 지붕을 타고/ 하늘 멀리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까마득히 한 점 가오리 연(鳶)이 되어/ 목덜미가 반짝 빛나기도 합니다.// 어느날 나는 베란다에 나가/ 몰래몰래 연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얼레를 채 돌리기도 전에/ 무언가 뚝 떨어져 박살이 났습니다./ 창창한 앞날이 끊기고/ 박살난 것은 몇 마의 하늘입니다./ 그래도 누군가 다시 바이얼린을 켭니다.//

신생아실(新生兒室) / 노향림
성(聖) 베드루 병원(病院)이었다./ 입구(入口)에서 오른쪽은 신생아실(新生兒室).// 그 곁/ 마가목(木) 숲에 가면/ 주먹만한 하늘이 많았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유리 조각 속에서/ 모두 제 나이 또래의 하늘을/ 데리고 갔다.// 뒤에 남은 햇볕은/ 저 혼자서/ 로킹․체어를 흔들고 있다.//

역촌동(驛村洞) 입구 / 노향림
미야다네 약국문을/ 나서는/ 바람들의 얼굴은/ 모두 희었다.// 다리께,/ 화물(貨物)트럭 위에/ 실려있는 문명(文明)과/ 뙤약볕들.// 안보이던 개울이/ 흰 머리칼을/ 흔들며/ 개척 교회당 뒤로/ 숨는다.// 풀밭에 깨알같이/ 외국어(外國語) 철자(綴字)들이/ 부러져 있다.// 들녘 끝에/ 온 마을이/ 알약같이 흩어져 있고// 느릿 느릿/ 첫 겨울의 산맥(山脈)들이/ 돌아 눕는다.//

들길 / 노향림
잡초 무성한 들판을 걷는다/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의/ 한 달분의 약 처방전 받으러 가는 길/ 로도핀 아라셉트 치매약 성분의/ 알약을 삼킨 탓일까/ 서로 다른 몸짓으로 쑥부쟁이 개쑥/ 냉이 땅버들도/ 멍한 낯빛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넣고 굴린다/ 흩어지는 햇살이 멀리 양평 쪽 강물 위에/ 은화(銀貨)처럼 쏟아져 구른다/ 그 속을 거꾸로 처박힌 얕으막한 산들이/ 팔짱을 끼고 비껴서 있다/ 하반신에 풀이 돋는 바위도 보인다/ 치유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면/ 산풀도 나즈막하게 얼굴이 뜨는 것일까/ 버드나무가 발바닥 적시며 몸 가렵다고/ 바람 속에서 박박 긁는 소리/ 발소리 죽이고 아치형 철제 대문이 슬몃 열린/ 병원 안마당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두 잊은/ 끝모를 시간만이 고여 있다//

말 1 / 노향림
어떤 말[言語]인지 말은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걸터앉아/ 저녁해가 지는 것을 혼자/ 바라다 보기도 하고 훌쩍/ 어둠 속 어디엔가 사라져/ 버립니다.// 말에게도 뼈가 있고 살아/ 있는가 봅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어느 날은/ 어둑하게 창 밖에 서 있거나/ 느닷없이 1층에서 5층까지/ 쿵쿵쿵 소리를 냅니다.// 어느 때는 매일 밤 매일 낮/ 온 동네를 소리없이 헤매다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말의 얼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말은 이제 바람이거나/ 허공에 사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몇 채의 마을 / 노향림
안식(安息)으로 몇 채의 마을은 지어져 있다/ 그 해의 첫 추위가 오고// 눈 내리깐 채 허리동아리 뿌옇게/ 얼어버린 겨울해.// 등성이마다 감각(感覺)을 잃은/ 꽃 몇대가 심겨져 있고// 몇몇 풀들은 아직도/ 파랗게 성깔을 죽이지 않고 있다.// 작은 살림집 마당에 저 혼자 기웃거리는/ 저무는 날의 까칠한 얼굴.// 어느 때부턴가 자귀나무들은/ 말문이 막힌 채 자라가고// 무심한 듯한 시절이었다.//

날이 어둡고 우리는 / 노향림
해안까지는 해일이 일었다.// 방파제 너머 끊어진 수평선/ 어디를 떠가버리는지/ 희끗희끗 보였다.// 배편과 차편 모두 붙들어 매고/ 시간과 함께 우린/ 어둠 속에 깊이깊이/ 들어가 있었다.// 바람과 비에 긁힌 살을 하고/ 돌밭 머리/ 샛길 하나/ 쓰러져 있고// 가늘고 뼈가 무른/ 풀 몇이/ 찢겨져 있고// 날이 어둡고/ 우리는.//

눈 / 노향림
망가진 새들이 추락한다./ 내리는 눈위에 혼(魂)이 있고/ 내리는 눈에는 프로펠러가 있다.// 양 다리를 쩍 벌리고/ 흐린 구름들이/ B­29처럼 떠 있다.// 내리는 눈들은 어디로 날아가나./ 내리는 눈에는 감은 눈이 있고/ 내리는 눈에는 시동 걸린 엔진이 운다.// 내리는 눈들은 쓰러진 마을 하나 끌고/ 먼 나락으로 추락할까.// 엎드려, 더 납작하게!// 추억, 귀를 막아도 들리는/ 내리는 눈속으로만 들리는/ 완벽한 폭발음.//

빈민촌(貧民村) / 노향림
빈 터는 그 중간 쯤에 놓여 있다.// 벗어진 이마를 숙이고/ 자갈돌들이/ 깊은 생각에 묻혀 있다.// 지나는 굴다리 옆으로/ 눈이 퀭한 반디꽃들과/ 그 속에 뼈를 묻고 엎드린/ 녹쓴 선로(線路)가 둘.// 저 끝 적탄장(積炭場)에/ 한나절 동안/ 실어다 쌓은 재난(災難)과/ 목숨이 끊긴 어스름들.// 길 가운데/ 시커멓게 썩은 몸을/ 버리고/ 빗물이 들길을/ 가고 있다.// 끊어진 기적(汽笛)소리의/ 그 시체들이/ 빈 터 속에 나가 떨어진다.//

서쪽 하늘 / 노향림
새소리들이 쌀톨처럼/ 서쪽 하늘에 흩어졌다.// 고개를 처박고/ 하체를 흔드는/ 소리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날이 보인다.// 빗줄기들이 발소리를 굴리며/ 어느 구름 끝에/ 뛰어다니는지// 흐린 날/ 하늘 끝에서/ 폐를 부풀리는 나무// 히스트라짓 냄새 가득한/ 바람이/ 햇볕이/ 하늘에 기대어 쓰러져 있고// 누가 그걸 일으켜 세우는지/ 서쪽으로/ 하얗게 삭아서 날이/ 저문다.// 나무들이/ 뚫린 입으로/ 가득 저녁을 물고// 같이 삭는 소리.//

모년모일(某年某日) / 노향림
모년모일(某年某日) 시간들은 얼어있다.// 작은 몸집의 나무가 옴짝 못한 채 서 있다.// 앉아서 즉결 재판소 건물이/ 눈송이로 뿔뿔이 날리는 문래동(文來洞) 일대를/ 양옆에 끼고 있다.// 공중엔 가까스로 소리없는 하늘 하나를/ 걸어 놓았다.// 망루(望樓)와 철조망들이/ 그 앞에서/ 희디 흰 잔해(殘骸)들로 쌓여갔다.// 눈 한 송이로 된 아이가 나와서/ 덤덤한 배경으로 갈아입고 어울렸다.// 오고있는 우리들 뒤로는/ 끝도 없이 앞날이 쓸려 내리고/ 쓸려 내리고//

가을 구화학교(口話學校) / 노향림
무엇이 될까. 생각합쳐/ 하늘이 고개 높이 들고/ 모여 서서,// 얕으막한 구화학교(口話學校) 울타리/ 손에 손에 갑갑함 칠한 채/ 은사시나무들/ 늘어 서서// 무엇이 될까. 하늘은 하늘대로/ 골목은 골목대로/ 탁탁탁/ 갈라서 있다.// 앞날이 없는 아이들이/ 예사처럼 웃는다.// 엇바뀌어 누운 마른 풀속의/ 그는/ 마음뿐인 평화(平和) 만들며// 코박은 실기장(實技場) 돌들은/ 저희끼리 얼굴 찡그리며/ 우울하다.//

단 한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 노향림
함박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사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 젊은 날 쓰신 수필집 애독자였어요./ 옆자리 중년 여성도 한 마디 한다./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요./ 아직도 시를 읽는 독자 있어요?/ 그럼요, 단 한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 걸요./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 말 뒤로/ 한결 더 소리 낮춰 절규하듯 내리는 함박눈/ 나는 슬그머니 회의 시작 전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雪國/ 차량이나 지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가 넓은 백지의 대설원이다./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안건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시의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공중에서 놀란 눈발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린다./ ‘출입금지’ 팻말을 단 아파트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의 적막한 발등에/ 나는 그만 시 한 줄을 꾹꾹 찍고 돌아 나온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남명 시인  (0) 2022.03.07
조오현 시인  (1) 2022.03.04
홍수연 시인  (0) 2022.03.02
김영호 시인  (0) 2022.02.28
박남규 시인  (0) 2022.02.25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