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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오현 시인

부흐고비 2022. 3. 4. 15:46

조오현(曺五鉉, 1932~2018) 시인, 승려
스님이자 시인, 필명은 조오현, 법명은 무산, 법호는 만악, 자호는 설악이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58년 속토 땅에서 낙지 선준 선사를 만나 삭발염의하였고, 1977년 대한불교조계종 신흥사 주지가 되었다. 1966년 문단에 나와 현대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남명문학상, 정지용문학상, DMZ 평화상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신흥사·백담사 회주, 춘천불교방송 사장, 불교신문 주필, 만해사상실천 선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시집 『상수도』, 『어머니의 하늘』, 『산에 사는 날에』, 『아득한 성자』와 산문집 『절간이야기』, 『무문관』 등이 있다.

 



아지랑이 / 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허수아비 / 조오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하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좍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시인의 말 / 조오현
중은 끝내 부처도 깨달음까지도/ 내동이쳐야 하거늘/ 대명천지 밝은 날에/ 시집이 뭐냐// 건져도 건져내어도/ 그물은 비어있고/ 무수한 중생들이/ 빠져 죽은 장경(藏經) 바다/ 돛 내린 그 뱃머리에/ 졸고 앉은 사공아//
* 시집 『아득한 성자』 서두에 붙인 시인의 말.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가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파도 / 조오현
밤늦도록 불경(佛經)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숲 / 조오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마음하나 / 조오현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을//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

일색변一色邊 1 / 조오현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 소리 들을라치면// 들어도 들어 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일색변一色邊 2 / 조오현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일색변一色邊 3 / 조오현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 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 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 몰현금: 줄 없는 거문고.

 

일색변一色邊 4 / 조오현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소리 들을라면// 언제 어디서 봐도/ 거문고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 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 과거 또는 미래의 티끌 없는 많은 시간

일색변一色邊 5 / 조오현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인연한 어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일색변一色邊 6 / 조오현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 중놈 소리 들을라면// 취모검吹毛劒* 날 끝에서/ 그 몇 번은 죽어야// 그 물론 손발톱 눈썹도/ 짓물러 다 빠져야//
* 칼 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훅’ 불면 잘려지는 예리하고 날카롱루 칼로 고대 명검.

 

일색변一色邊 7 / 조오현
세상은 산다고 하면/ 부황이라고 좀 들어야// 장판지 아니라도/ 들기름을 거듭 먹여야// 그 물론 담장 밖으로/ 내놓을 말도 좀 있어야//

할미꽃 / 조오현
이른 봄 양지 밭에 나물캐던 울 어머니/ 곱다시 다듬어도 검은 머리 희시더니/ 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서러움도 잠드시고// 이 봄 다 가도록 기다림에 지친 삶을/ 삼삼히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의 모습/ 그 모정 잊었던 날의 아 허리 굽은 꽃이여// 하늘 아래 손을 모아 씨앗처럼 받은 가난/ 긴긴 날 배고픈들 그게 무슨 죄입니까/ 적막산 돌아온 봄을 고개 숙는 할미꽃//

오늘 / 조오현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 하는//

사랑 / 조오현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시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하나님의 떡잎입니다./ 부처님의 떡잎입니다//

망월동에 갔다 와서 / 조오현
지난날 무슨 일로 광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망월동에 처음 가 보았다/ 그 정말 하늘도 땅도 바라볼 수 없었다// 망월동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망월동에서는 묵념도 안 했는데/ 그 진작 망월동에서는 못 본 것이 보여// 죽을 일이 있을 때는 죽은 듯이 살아온 놈/ 목숨이 남았다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나/ 내 지금 살아 있음이 욕으로만 보여//

琵瑟山(비슬산) 가는 길 / 조오현
琵瑟山 구비 길을 스님 돌아 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韻 들릴까/ 끊일듯 이어진 길 이어질듯 끊인 緣을/ 싸락 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 두루 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맷새 한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석굴암 대불(大佛) / 조오현
토함이 떠갑니다 동해 푸르름에/ 편주의 사공인 양 대불은 졸립니다/ 하 그리 바다가 멀어/ 깨실 날이 없으신 듯// 허공에 던진 원념 해를 지어/ 밝혔느니/ 밤이면 명명한 수평/ 달을 건져 올립니다/ 진토에 뜨거운 말씀을 솔씨처럼/ 묻으시고// 사모의 깃털 뽑아 보내 논 갈매기는/ 오늘도 어느 바다/ 길을 잃고 도는 걸까/ 무량심 파도로 밀려 무릎까지/ 오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환한 웃음 / 조오현

지난 입춘 다음다음날 여든은 실히 들어 보이는 얼굴이 강한 촌 노인 이 우리 절 축대 밑에 쭈구리고 앉아 아주 헛기침까지 해가면서 소주잔을 홀짝홀짝거리고 있었는 데 그 모양을 본 한 스님이 "어르신, 여기서 술을 마시면 지옥갑니다. 저쪽 밖으로 나가서 드십시오." 하고 안경 속의 눈 을 뜨악하게 치뜨자 가뜩이나 캉캉한 얼굴을 짱땅그려 스님을 치어다보던 노인이 두 볼이 오므라들도록 담배를 빨더니 어칠비칠 걸어나가면서 "요 절에도 중 냄새 안 나는 시님은 없다캐도, 내 늙어 요로코롬 시님들 이 괄대할 줄 알았다캐도 고때 공비놈들이 대흥사에 불쳐지를라칼 고때 구경만 했을끼이라캐도. 쪄대는 무논에서 뼈빠지게 일을 했다캐도 타작 마당머리에서는 뼈 빠진 놈은 허접스런 쭉정이뿐이라캐도 시님들 공부 잘 하시라고 원망 한번 안 했는디 아 글쎄 공비놈들이 나타나고 전쟁이 터지자 생사가 똑같다카는 대흥사 시님들은 불사처不死處를 찾아 다 떠나고 절은 헌 벌집처럼 헹뎅그렁 비어 있을 고때 여름 장마에 담장과 축대가 허물어지고 총소리와 비행기 소리에 기왓장이 다 깨지고 잡초가 무성하고 빗물이 기둥과 서까래를 타고 내릴 고때 공비놈들이 은신처가 되었을 고때 공비놈들이 소 잡아묵고 떠나면서 대웅전에 불을 지를라칼 고때 그 불 누가 막고 그 절 누가 지켰나캐도.......그 절 지킨 시님 있으마 당장 니와봐라캐도, 화재 막고 허물어진 축대 담장 쌓고 잡초 뽑아내고 농사지어 놓으니 불사처에서 돌아와 검누렇게 뜬 낯짝 쌍판대기가 게접스러운 데다 어깨와 갈빗대가 뼈 가죽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소작인들을 불러 놓고 절 중수한다꼬칼 고때도 낯짝만 몇 번이고 문질렀을 뿐이라캐도, 내 늙어빠져 요로코롬 시님들이 업신여기고 박절하게 괄대 천시할 줄 알았다캐도 고때 나도 불구경이나 했을끼이라캐도......."/ 이렇게 욕지거리를 게워 내는 것이었는데 그 욕지거리를 우리 절 개살구 나무가 모조리 다 빨아먹고 신물이 들대로 들어 올 봄 상춘객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로 환한 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환한 웃음을 선사하였습니다.//

 

일색과후 / 조오현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나절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0년/ 40년 지난 오늘//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

 

내 울음소리 / 조오현
한나절은 숲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내가 나를 바라보니 / 조오현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로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크고 작은 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은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떠 흐르는 수람* / 조오현
가을이 소나기처럼 지나간 그대 정원에/ 열매 하나가 세상의 맛을 한데 모아/ 뚝하고 떨어지는구나/ 다 쭈그러든 모과하나.//
* 수람: (사람의 마음을)끌어모음, (민심, 사태를)수습하다라는 뜻.

파지把指 / 조오현
조실스님 상당相堂을 앞두고/ 법고를 두드리는데// 예닐곱 살 된 아이가/ 귀를 막고 듣더니만// 내 손을/ 가만히 잡고/ 천둥소리 들린다 한다//

일월日月 / 조오현
하늘은 저만큼 높고/ 바다는 이만큼 깊고// 하루해 잠기는 수평/ 꽃구름이 물드는데/ 닫힐 듯 열리는 천문(天門)/ 아, 동녘 달이 또 돋는다.//

출정出定 / 조오현
경칩, 개구리/ 그 한 마리가 그 울음으로// 방안에 들앉아 있는/ 나를 불러 쌓더니// 산과 들/ 얼붙은 푸나무들/ 어혈 다 풀었다 한다.//

관음기觀音記 / 조오현
촛불켠 꿈은 흘러 연꽃으로 물들어도/ 마지막 목욕하고 앉지 못할 저 연대 (蓮臺)여/ 설움의 소리를 듣고 차마 못갈 보살// 손에 쥔 백팔염주 헤아릴 수록 무거움은/ 흩어진 상념들을 알알이 뀌움일레/ 달 뜨는 뜨락에 서서 지켜보는 저 정토 (淨土)!//

앵화 / 조오현
어린 날 내 이름은/ 개똥밭의 개살구나무/ 벌 나비 질탕한 봄도/ 꽃인 줄 모르다가/ 담 넘어 순이 가던 날/ 피 붉은 줄 알았네//

내가 쓴 서체를 보니 / 조오현
지난 날 내가 쓴 반흘림 서체를 보니/ 적당히 살아온 무슨 죄적(罪迹)만 같구나/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 이날토록 아린 가슴을 갈아놓은 피의 먹물/ 만지(滿紙)는 하늘 펼쳐놓자 역천(逆天)인가 온몸이 떨려/ 바로 쓴 생각조차도 짓이기고 말다니!//

견춘3제見春三題 / 조오현
1. 봄의 불식// 이 몸 사타구니에 내돋친 붉은 발진/ 그로 인하여 짓물러 다 빠진 어금니/ 내 불식 하늘 가장자리 아, 황홀한 육탈肉脫이여.//
2. 봄의 역사// 내 말을 잘라버린 그 설도舌刀, 참마검斬馬劍도/ 내 넋을 다 앗아간 그 요염한 독버섯도/ 젠장할 봄날 밤에는 꽃망울을 맺더라//
3. 봄의 소요// 목마르다, 목마르다. 꽃의 내분비에도/ 해마다 봄이 오면 잦아지는 내 목숨의 조고凋枯/ 올해도 한바탕 소요로 꽃은 올 모양이다//

내 몸에 뇌신雷神이 와서 / 조오현
이날 내 몸은 미친 하늘 뇌신이 와서/ 세상을 다 때려 부수고 서천 번개로 가자 한다/ 번개 그 불빛만 봐도 나는 잘 갑시는데// 이 모진 죽살이의 질긴 피죽 벗겨 보면/ 한치 흙도 파지 않고 인도에도 묻은 지뢰/ 한자국 높디딘 생각은 저 가교를 밟고 갔네// 슬픔은 날이 날마다 낙엽처럼 쌓이는데/ 끝까지 달아봐도 끝내 모를 자유의 근량斤量/ 먼 훗날 홀로 남아서 오늘을 점두點頭할 바위도 없다//

몽상 / 조오현
산에는 백도라지 들에는 민들레꽃/ 내 고향 아득한 기억은 우물 속 드리운 얼굴/ 담장가 등돌리고 섰던 순이 한 번 만나고 싶다.// 물올라 싱그러운 쑥 내음은 나도몰라/ 십리도 까마득한 언덕 달은 너무 밝아/ 못 지울 영상을 밟고 몰래 나온 조그마한 마을.// 마셔서 차지 않고 못내 비운 이날 밤은/ 어딘지 시름 번질 속 쓰린 항아린가/ 깨고난 잠의 자리엔 메아리만 감도네.// 잘못 살온 세상이라도 정화수 끝내 말고/ 초 한 자루 밥 한 그릇 외할머니 빌어주신/ 그날 그 돌상 곁에서 놀 수 없는 왕자여//

계림사 가는 길 / 조오현
게림사 외길 사십 리 허우단심 가노라면/ 초록산草綠山 먹뻐꾸기가 옷섶에 배이누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흰구름도 빛나고// 물따라 산이 가고 산을 따라 흐르는 물/ 세월이 탓없거니 절로 이는 산수간에/ 말없이 풀어논 가슴 열릴 법도 하다마는// 한 벌 먹물 옷도 내 어깨에 무거운데/ 눈감은 백팔염주 죄일사 목에 걸어/ 이 밝은 날빛에 서도 발길이 어두운가// 어느 골 깊은 산꽃 홀로 피어 웃는 걸까/ 대숲에 이는 바람 솔숲에 와 잠든 날을/ 청산에 큰절 드리며 나 여기를 왔고나//

재 한줌 / 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줌뿐이네//

들오리와 그림자 / 조오현
해장사 해장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 하십니다//

봄 / 조오현
밤마다 비가 오는 윤사월도 지쳤는데/ 깨물면 피가 나는 손마디에 물쑥이 들던/ 울엄마 무덤가에는 잔달래만 타는가./ 저 산천 멍들도록 꽃은 피고 꽃은 져도/ 삼삼히 떠오르는 가슴속 상처(傷處)처럼/ 성황당 고개 너머엔 울어예는 뻐꾸기.//

조춘(早春) / 조오현
봄도 이름 내 서창(書窓)의 파초 순 한나절을/ 초지에 먹물 배듯 번지는 심상이어/ 기왓골 타는 햇빛에 낙숫물이 흐른다.//

설산(雪山)에 와서 / 조오현
달은 뜨지도 않고 노여움을 더한 그 밤/ 포효하고 떨어진 큰 짐승 그 울부짖음 속에/ 눈보라 한 아름 안고 내가 왜 찾아왔나./ 사나이 다문 금구(金口) 할일할(喝一喝)에 부치랴만/ 내던진 한 생애인데 열망이야 없을소냐/ 무섭고 추운 세상에 질타 같은 눈사태여./ 돌에다 한을 새기듯 집도(執刀)해온 어제 날들은/ 아득한 그 원점에 도로 혼침(昏沈)이었구나/ 막대를 잡았던 손에 아픔은 남았지만./ 저승도 거역하는 이 매몰 이 적요를/ 스스로 달래지 못해 이대로 돌아서면/ 설영(雪嶺)을 더터온 자국 애안(涯岸) 없이 사윌 것을./ 억울해! 불료(不了)의 인생 내 물음을 내 못듣고/ 벌초할 하나 무덤도 남길 것이 못 되는데/ 사려 먼 붕도(鵬圖)를 그려 갈 길 그만 더듬는다.//

화두 / 조오현
하늘도 없는 하늘 말문을 닫아놓고/ 빗돌에서 걸어나와 오늘 아침 죽은 남자/ 여자도 죽은 저 여자도 빗돌에서 나왔는가./ 파아란 빛깔이다. 노오란 빛깔이다./ 빠알간 빛깔이다. 시커먼 빛깔이다./ 보석도 천 개의 보석도 놓지 못할 빛깔이다./ 무수한 죽음 속에 빛깔들이 가고 있다./ 삶이 따라가면 까무러치게 하는 그것,/ 내 잠을 빼앗고 사는 유령, 유령들이다.//

고향당古香堂 하루 / 조오현
하늘빛 들이비치는 고향당 누마루에/ 대오리에 엮어 만든 발을 드리우니/ 오늘 이 하루에 그냥 어른어른거린다.// 비스듬히 걸린 벽화, 신선도 한 폭/ 늙은 사공 노도櫓棹를 놓고 어주漁舟와 같이 흐르고/ 나는 또 어느 사이에 낙조가 되었다.//

조주대사(趙州大死) ―만인고칙 4 / 조오현
진작 찾아야 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저 살인도(殺人刀) 저 활인검(活人劍)/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 있구나//

북두장신(北斗藏身) ―만인고칙 6 / 조오현
하늘에는 낙뢰소리 땅에는 낙반소리/ 한 장 거적떼기로 덮어놓은 시방세계/ 그 소리 다 갖고 살아라 그냥 숨어 살아라.//

별경(別境)* / 조오현
받아들이고 있다 받아들이고 있다 가을 하늘은/ 밀물과 썰물 사이 너울을 부서뜨리며/ 그 바다 금린*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가을 하늘은 무슨 말로도 말할 수 없다/ 가을 하늘은 무슨 말로도 말할 수 없다/ 이 가을 햇볕을 일며 태금*하는 새여, 새여//
* 별스런 풍경. * 금빛 물비늘. * 감흙(사금광에서 금이 섞인 흙)에서 금을 이는 일.

춤 그리고 법뢰 / 조오현
죽음이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늦가을 오후/ 개울물 반석에 앉아 이마를 짚어본다/ 어머니 가신 후로는 듣지 못한 다듬이 소리//
* 법뢰(法雷)는 불법 또는 법어(法語)를 우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산에 사는 날에 / 조오현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말로는 말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 번 쳐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 일이다.//

심우尋牛 ㅡ무산심우도 1 / 조오현
누가 내 이마에 좌우 무인(拇印)을 찍어놓고/ 누가 나로 하여금 수배하게 하였는가/ 천만금 현상으로도 찾지 못할 내 행방을.// 천 개 눈으로도 볼 수 없는 화살이다./ 팔이 무릎까지 닿아도 잡지 못할 화살이다./ 도살장 쇠도끼 먹고 그 화살로 간 도둑이어.//

무자화無字話 1 / 조오현
하늘에는 손바닥 하나 손가락은 다 문드러지고/ 이목구비도 없는 얼굴을 가리고서/ 흘리는 웃음기마저 걷어지르고 있는 거다.//

무자화無字話 2 / 조오현
걷어가고 있는 거다. 걷어가고 있는 거다./ 때아닌 저 바다의 적조, 그리고 또 포말들을/ 이 겨울 밤의 마적이 걷어가고 있는 거다.//

무자화無字話 3 / 조오현
누가 건방지게 침묵을 하는 거다/ 온 몸이, 마른 하늘이 흔들리는 이 진렬/ 이 한낮 깊은 내 오수를 흐너뜨리고 있는 거다.//

된바람의 말 ㅡ무자화無字話 5 / 조오현
서울 인사동 사거리/ 한 그루 키 큰 무영수(無影樹)// 뿌리는 밤하늘로/ 가지들은 땅으로 뻗었다// 오로지 떡잎 하나로/ 우주를 다 덮고 있다.//

부처 ㅡ무자화無字話 6 / 조오현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감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뗘내려가는 뗏목다리//

무설설 1 / 조오현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이 머리 풀고 상여잡고 곡하기를 '불집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용기로 용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대요//

갈매기와 바다 ㅡ절간 이야기 2 / 조오현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로의// 그 신사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앉아있기에/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간 이야기 3 / 조오현
아득한 옛날의 무슨 전설이나 일화가 아니라 요 근년에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공부하는 암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물론 숲속에 파묻힌 돌담 주춧돌도, 천년 고탑도 비스듬한 그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밟히고 먹뻐꾹 울음소리가 옷자락에 배어드는 심산의 암자이지요. 그 암자의 마당 끝 계류가에는 생남불공生男佛供 왔던 아낙네들이 코를 뜯어먹어 콧잔등이 반만큼 떨어져나간, 그래서 웃을 때는 우는 것 같고 정작 울 때는 웃는 것 같은 석불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암자가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그 두루적막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노비구니스님이 그해 늦가을 그 석불 곁에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을 때 다람쥐 두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돌담 속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옳거니! 돌담 속에는 도토리가 많겠구나. 묵을 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어야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중얼거린 노비구니스님이 돌담을 허물어뜨리고 보니 과연 그 속에서는 도토리가 한 가마는 좋게 나왔지요. 그런데 그 한 가마나 되는 도토리를 몽땅 꺼내어 묵을 해 먹었던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놈의 다람쥐 두 마리가 노비구니스님의 흰고무신을 뜯어먹고 있었답니다. 그 흰고무신을 뜯어먹다가 죽었답니다.//

절간 이야기 20 / 조오현
우리절 종두鐘頭는 매일같이 새벽 3시만 되면 천근이나 되는 대종을 울리는데 한번은 "새벽 찬바람이 건강에 해롭다하니 다른 소임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어보니 "안됩니다. 노덕老德 스님 열반종涅槃宗도 저가 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조실祖室 스님 종성도 그 종소리 흐름이 얼마나 맑고 크고 길었는지…. 그 종성 듣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날 이후 이날까지 그 소리 한번도 못 들었습니다. 그날보다 더 조심을 해도 그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종도 뭘 아는가 모르지만 노덕 스님 열반에 드시면 그 소리 나올 것 같습니다." 하고는, "좌우지간 그 소리 한 번 더 듣고 그만 둬도 그만 둘 것입니다." 하고 그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종두 계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절간 이야기 22 /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險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서른둘에 시작했으니 한 40년 되어 갑니더"/ "그러시면 많은 사람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데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 하십니까?"/ "별말씀을 다 하시니... 산사람은 구별이 있지만서도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 다를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서도 이 짓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 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요.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대뜸/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스님에게 한 말씀 물어 봅시더. 이짓도 하다 보니 스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스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스님도 있고... 아무튼 스님들 법문도 가가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도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 듯 동서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 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본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검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하다가 또는 누명 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머라 하지요? 느낌이랄까요?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땐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고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 이렇게 갈것을 그렇게 살았나? 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척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껴? 그 돌쟁이도 먹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요...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요?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라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도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스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 절 노스님이 중될 팔자라 했는데 스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주검을 다루고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
* 염(殮)은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고, 싸매서 관에 넣는 일, 염습(殮襲)은 장례식이나 입관(入棺) 전 죽은 자의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것, 그 후 시신을 염포로 싸는 것을 소렴, 입관 시 관의 빈 곳에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을 채워 넣는 것을 대렴이라고 한다.

절간이야기 25 / 조오현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절간이야기 29 / 조오현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절간 이야기 30 / 조오현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절간 이야기 31 / 조오현
어느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위해 담장가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 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덩굴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놈 청개두리를 제題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 볼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劫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절간 이야기 32 / 조오현
절이라고 하면 산은 높고 골도 깊고 물도 맑아 그 부근에 가면 기우뚱한 고탑 석불 그을린 석등 버려진 듯한 부도 탑신 주춧돌 홈대 장독 무거운 축대 돌담 돌다리 설해목 같은 것이 보이고 그래서 조금은 서늘하고 고풍스럽고 밤이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날짐승 산짐승들 울음소리로 하여 적막을 더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어떤 도류道流들이 살다가 내버리고 간 그래서 담장은 진작 다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한 파옥 한 채가 있었는데 언제 어디서 왔는지 한 노승(양실良實;1758-1831)이 그 파옥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노승을 위해 노승이 외출한 사이 담장을 쌓고 풀을 뽑고 집을 깨끗하게 보수를 해 놓았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그 노승 왈 "풀을 다 뽑아버렸으니 이제는 풀벌레소리도 못 듣게 되었군."/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집을 보수를 해 놓으니 집 주인이 부자인줄 알고 도둑이 들었는데 노승은 도둑에게 줄 물건이 없어 입고 있던 옷을 홀랑 다 벗어 주고 알몸으로 마당가에 나와 둥근 달을 쳐다보고 밝아졌습니다./ " 저 아름다운 달까지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침목(枕水) / 조오현
아무리 어두운 세상을 만나 억눌려 산다 해도/ 쓸모없을 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나 또한 긴 역사의 궤도를 바친/ 한 토막 枕木인 것을, 年代인 것을// 영원한 고향으로 끝내 남아 있어야 할태백산 기슭에서 썩어가는 그루터기여/ 사는 날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도 있는 것을// 보아라, 살기 위하여 다만 살기 위하여/ 얼마만큼 진실했던 뼈들이 부러졌는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묻혀 사는가를// 비록 그게 군림에 의한 노역일지라도/ 자칫 붕괴할 것만 같은 내려앉은 이 지반을/ 끝끝내 바쳐온 이 있어/ 하늘이 있는 것을, 역사가 있는 것을//

불이문不二門 / 조오현
산너머 놀너머/ 일월마저 겨운 저녁// 머물던 하나 소망/ 그나마도 다 사위고// 긴 여운 남기는 바람/ 열어 놓은 내 가슴.//

여행 / 조오현
어떤 사람이 나를 만나 뵙고 싶다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참 잘난 놈이라고 속으로 웃고는 큰소리로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했더니 그 사람이 "언제 돌아오십니까" 하고 묻기에 "그건 나도 몰라 어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몰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길을 평생 나로부터 떠나고 떠나고 있다.//

어미 / 조오현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 빨리지 않은 젖통이 부어 온 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 통나무 구유에 담긴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긴 널빤지를 죽죽 깔아서 놓은 마루에 갈대를 결어 만든/ 자리도 번듯번듯 잘 생긴 이 집 가족들도 오늘은/ 꺼무끄름하다. 낯설다.// 다 알고 있다. 풀을 뜯어먹고 살 몸마저 빼앗겼음을,/ 이미 길들여지고 있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 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쇠똥구리/ 한 마리가 자기 몸 두 배나 되는 먹이를 굴리는 것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 그러나 그 어미는/ 그 밤을 혀가 마르도록 온 몸을 핥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팔려갔다./ 보았다. 죽으러 가는 그 어미의 걸음걸이를, 꿈쩍 않고/ 버티던 그 힘 그 뒷걸음질을, 들입다 사립짝을 향해 내뻗던/ 뒷발질을, 동구 앞 당산 길에서 기어이 주인을 떠박고/ 한달음에 되돌아와 젖을 먹여주던 그 어미의 평생은/ 입에서 내는 흰 거품이었다.// 이후 어미는 그 어미가 하던 일을 대물림 도맡았다. 코에는/ 코뚜레를, 목에는 멍에를 등에는 걸채를 다 물려받고 다 받아/ 들이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삶은 냉혹하다는/ 것을 알았고 앞으로 어른스러워졌다. 논밭을 갈고 바리바리/ 짐을 실어 나르며 몸하면 교배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며/ 하 그리 고된 나날을 새김질로 흘려보냈다.// 이제 어미는 주인의 잔기침소리에도 그 할 일을 알아차린다./ 아까부터 여러모로 뜯어보던 거간꾼의 엉너릿손*, 목돈을 받아/ 침을 뱉어가며 한 장 두 장 세는 울대뼈, 기다랗고 큼직한/ 궤짝에 들어갔을 목숨 값으로 눈물 많던 할멈 제삿날 조기라도/ 한 손 올렸으면 좋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뿔에 신기하게도 반쯤 이지러진/ 낮달 빛이 내리비치고 흰 구름이 걸린다. 다급하게 울어쌓던/ 매미 한 마리 허공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생감이 뚝 떨어진다. 두엄발치에 구렁이가 두꺼비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오줌을 질금거리며 사립을 나선다./ 당산 길 앞에서 그 어미가 주인을 떠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젖을 먹여주던 10년 전 일을 떠올리고 '음매'하고 짐짓/ 머뭇거리는 순간 허공에 어른어른거리는 채찍의 그림자.//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내를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 가면서 뒤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목매기는 보이지 않는다./ 두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은 아낙이 지나간다./ 맞은편 찻길 밑에 불에 타 그을리고 찌그러진 짐차, 사람들이/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농한기 산 너머 채석장에서 떠낸/ 석재를 싣고 읍내로 갔던 길,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갔던 길. 올 정초에는 눈이 많아/ 질퍼덕질퍼덕거리는 진창에 바퀴가 겉돌아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삐어 돈을 벌어 들이지 못했다. 지금 다 아물었으나/ 큰 힘을 쓸 수 없다. 힘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힘없는 죄 외에는 죽을 죄가/ 없다. 만약 조개더라면 물 위로 떠올라 껍질을 열고/ 만천하에 속을 다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 할멈은 속을 안다./ 힘들거들랑 쉬어라고 멍에 목 흉터를 만져주고 등 긁어/ 주던 할멈, 남몰래 밤재운 익모초 생즙을 쇠죽에 타주고/ 측백나무 잎을 우려낸 술도 잡곡가루를 풀처럼 쑨 죽도/ 먹여주던 할멈은 채마밭 건너 열 두 배미의 논에 곱써레질을/ 하던 날 죽었다. 시체를 관에 넣고 관뚜껑을 덮은 뒤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할멈의 장렛날 울었던 앞뒷산/ 먹뻐꾸기들이 일 년 내내 울어 그해 가을 그 울음을/ 받아먹은 텃밭의 감도 대추도 모과도 맛이 들대로 들었고,/ 벼도 수수도 여물었고 고추도 매웠고 끝동의 오이도/ 대풍이 들었지만 사람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언제나/ 처럼 마굿간이 썰렁했다. 할멈 보는 데서 고삐를 벗고/ 풀이 무성한 벌판을 단 한 번 달려보지 못한 것이 남아/ 있는 한이지만 사람도 죽는데 못 죽을 것이 없다고 할멈을/ 생각하는 사이, 떠밀려 도살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고/ 그 꽉 막힌 그 막다른 한순간// 어미는 목매기의 긴 울음소리를 아득히 듣는다.//
* 목매기: 아직 코뚜레를 꿰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
* 엉너릿손: 엉너리*로 사람을 그럴듯하게 꾀어넘기는 솜씨.
* 엉너리: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어벌쩡하게 서두르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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