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박후기 시인

부흐고비 2022. 3. 10. 16:42

박후기 시인, 작가
본명 박홍희. 1968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으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격렬비열도』, 『엄마라는 공장 여자라는 감옥』, 『사랑의 발견』,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이 있으며, 사진 산문집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이탈리아 여행 사진 산문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그림책 『그림 약국』, 장편소설 『토끼가 죽던 날』, 『옆집에 사는 앨리스』 를 출간했다. 2006년 제24회 신동엽문학상, 2011년 제2회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엄마와 곤란 / 박후기
엄마가 나를 낳을때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를 낳은 후의 기쁨도/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내가 퇴원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울다가 웃던 엄마의 기쁨을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고통이거나 기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엄마라는 공장 / 박후기
생이 문 닫는 날까지.../ 엄마라는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 갑니다//

엄마라는 기계 / 박후기
엄마는 수 많은/ 작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사가 몇개 빠져도 문제없이 돌아간다// 엄마 몸속에서 가끔/ 빠진 나사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지만/ 엄마 만 그 소릴 듣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잘 돌아가던 엄마가 멈추고/ 병원엘 가서 엄마를 뜯어보면/ 이미 주요 부픔이 망가진 뒤다//

엄마의 인격 / 박후기
엄마에게도 인격이 있다/ 사랑, 헌신, 희생, 눈물 이전에/ 인격이 있다// 비굴을 견디는 일은/ 엄마의 본능이지만,/ 인격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섬 / 박후기
무언가를 참고 있는/ 엄마를 보면/ 고요한 섬 같았다// 다시 바다로 불려 나가는 파도처럼/ 엄마 앞에서만 요란한 아버지는/ 집만 나서면 잔잔해 졌다//

간 / 박후기
아버지는 침묵했다/ 병 앞에서/ 간처럼 침묵했다/ 아버지 등 뒤로/ 죽음 몰래 다가설 때마다/ 위험하다고 툭툭/ 등 두드리던 기침, 소리/ 침묵하는 간// 심장과 엄마는/ 언제나 혼자 뛴다/ 약을 사러 갈 때도/ 약을 먹여야 할 때도/ 두근두근 울먹울먹/ 혼자만 서두른다/ 아버지,/ 여전히 침묵하는 간// 심장은 간 옆에 있지만/ 피(血)는/ 간에 닿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엄마는 왜 날마다 병든/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는가/ 심장을 떠난 피는 어떻게/ 발끝까지 흘러갔다/ 간으로 되돌아오는가// 집 나간 자식들은/ 아버지 몸속을/ 흘러 다닌다 매일/ 변두리 혈관을/ 돌고 돌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죽은 아들은/ 아버지 몸속에서/ 그대로 죽은피가 되었다// 아버지 누운 볼기 아래/ 슬그머니 욕창이 슬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몸을 씻겨줄 때/ 자꾸만 커지는 아버지 음경/ 자꾸 커지는 엄마 한숨 소리/ 여전히, 침묵하는 간//

폐광 / 박후기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 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이 되었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나 뒤가 무너졌다// 나는 페치카 옆의 카나리아, 연탄가스를 마시며 놀았다/ 구멍보다 틈이 무섭다는 것을 나는 안다// 죽음의 生家가 텅 비어있다//

복서 2 / 박후기
지구의 스파링 파트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삭월(朔月)의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들 3은 실업자,/ 나비처럼 날아도 벌처럼 쏠 데가 없다/ 오늘도 집 안을 겉돌며 눈치만 살핀다// 꼭두새벽 집을 나서는 엄마는/ 정류장까지 로드워크를 한다/ 아버지가 녹아웃된 후/ 대신 엄마가 장갑을 끼고 매일/ 지옥의 링 위로 올라간다// 아들 3은/ 품속에 카운터블로를 숨긴 채/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달과 엄마처럼/ 숨죽이며 참고 견딘다// 탐색전이 지나치면/ 식구들의 야유를 받는다/ 나가 싸우지 않는 아들 3을 향해/ 아들 1이 경고를 보낸다/ 도대체/ 누가 적(敵)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랑했다고 치자,/ 아들 1과 한 여자가/ 링 위에서 엉겨 붙는다/ 사랑도 결국/ 사람과 무관한 일이 되어버린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로기 상태에 빠진 생이여/ 너에게 확,/ 수건을 던지고 싶다//

탈상 / 박후기
우리는 공중의 케이블카처럼/ 서로 어긋나며 살아간다/ 네가 올라갈 때 나는 내려가고/ 내가 올라갈 때 너는 내려온다// 가는 비 처마 끝 풍령에 잠시 내린다/ 바람이 종의 가슴을 칠 때마다/ 겨우 터지는 짧은 탄식,/ 젖은 소리는 멀리 가지 않는다//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는 생사/ 마치 어제의 일처럼/ 모든 고독은 잊히고/ 위독한 자는 위로받지 못한다// 아침 빛 속에 떠오르다/ 박모와 함께 내려앉는 생몰연대,/ 먼지는 태초의 기억이자/ 종말의 기록이다// 죽음이여,/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물을 수 없는/ 서글픈 불문곡절이여//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조우를 위해/ 끊임없이 어긋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검은 장화 속의 날들 / 박후기
1// 자식 걱정이 어떤 것인지,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지는 해를 등에 지고, 털벙털벙 비좁은 농로를 걸어가던 순한 어미 소가 자꾸 뒤돌아보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벼락처럼 등짝에 떨어지는 채찍 때문이 아니란 걸, 둑 위를 천방지축 뛰어 다니는 어린 새끼 걱정 때문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2//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검은 장화를 벗으면, 퉁퉁 불어터진 발가락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빚 보증 같은 건 서지 말라니까! 밤마다 엄마가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3// 나는 열아홉 살, 역 광장 앞 음악다방에서 해진 백판 재킷과 함께 너무 빨리 늙어 갔다. 어린 창녀들과 비틀즈를 들으며 낮술을 마셨고, 저탄장에서 날아온 탄가루가 내 몸을 더럽혔다. 취한 날엔 화물열차에 실린 미제 야포의 무늬처럼, 둥근 소매가 핏자국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4// 밤마다 명멸하는 유서(由緖),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가 얼어붙은 유리문 밖에 서서 힘겹게 불빛의 대(代)를 이어갔다. 나는, 뗏목처럼, 의자를 붙여 만든 잠자리에 누워 희미하게 빛나는 천장의 야광별 일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5// 피 끓는 청춘의 혈흔, 옷소매에 길게 얼룩진 핏자국은 손톱으로 긁어도 지지 않았다. 광장에 불려나가 눈보라에게 싸대기를 맞은 날엔 터진 입술 후후 불어가며 유리창 위에 손가락 시를 썼다. 일인(一人) 시화전을 열던 날 저녁, 눈사람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 아버지는 설탕도 넣지 않은 쓴 커피를 마시며,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는,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6// 사촌과 함께 텅 빈 역 광장을 지나갈 때, 붉은 유리창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아는 체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 뒤에 서서 걸었다. 아버지가, 어미 소처럼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날 밤, 중국집 둥근 요리 탁자에 둘러앉아 고량주를 마시며 듣던, 아버지가 이생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나는 천둥산 박달재를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지금도 가끔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빛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붉거진 핏줄이/ 한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내 가슴의 무늬 / 박후기
비가 그치자/ 나무들은 있는 힘껏 잎을 부풀렸다/ 성긴 나무의 뿌리는/ 부활절 사제의 분주한 발길처럼/ 햇빛의 설교를 땅 속에 퍼뜨렸으며/ 바람 앞에서 잎들을 성호를 그었다/ 죽은 잎은 쉽게 떨켜를 놓아 버렸지만/ 죽은 형의 애인은 끝까지 죽은 형의/ 관짝에 매달렸다 땅바닥에 뒹굴었다// 스무 살 여린 내 눈물이/ 군용 소보루 빵의 푸른 곰팡이로 피어났고/ 숨죽인 초소 뒤편/ 발목까지 바리를 풀러 내린 풀들의 수음이/ 은밀했다 바람에 뒤집혀 반짝이는/ 은사시나무 잎사귀들, 그토록/ 수많은 충고들 담아두기에 내 귀는/ 너무 천박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 혼자 튀겨나가는/ 폐타이어 화단의 봉숭아씨/ 나도 팍, 터지고 싶었다 그러나/ 터진 열매 껍질처럼 빈주먹 말아 쥔 채로/ 이리 저리 얻어터지며 원위치 하던 나는/ 후두둑 후두둑 후박나무 잎사귀/ 비맞는 소리 눈물겹던 그 여름의/ 나무 밑을 잊지 못했다// 일월의 쌀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쓸쓸하게 널부러진 갈색의 잎들/ 오그라들고 한때 부풀었던/ 많은 시간들/ 더는 뒤돌아볼 수 없음이여// 나무들/ 딱딱한 가슴 속/ 섬세한 울림으로 새겨지는/ 둥그런 생의 기록/ 아, 무엇을 쓸 것인가/ 얼룩진 무늬들, 덧없는//

목련 편지 / 박후기
몇 겹 어둠으로 덧칠해진 철문을 열면/ 보인다/ 알몸으로 떨고 있는/ 백목련 한 그루// 봉긋이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가/ 가난에 찌든 구옥의 내막을 희미하게 밝히고,// 어둠은 사월의 담벼락에 검은 천을 깔고/ 목필(木筆)은 달빛을 찍어/ 그 위에 편지를 쓴다// ― 아버지 위독하시다/ 뿌리가 깊어 옮겨 갈 수도 없고,/ 무허가로 꽃 피운 죄밖에 없는데/ 지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담장 밖 어둔 길 내다보며/ 초조하게 피고 지는 어머니,/ 재개발지구 목련꽃//

애자의 슬픔 / 박후기
전신주 위의 애자가 몸을 떨고 있네/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먼 데서 달려온 뜨거운 전기가/ 쉴 새 없이 애자의 몸을 핥고 지나갔네// 철조망에 매달린 물방울이 보이네/ 전선을 타고 흐르는 애자의 눈물이 보이네/ 고통은 길지만 지나가는 것이고,/ 생(生)은/ 애자의 몸을 시커멓게 더럽히며 사라진/ 찰나의 스파크 같은 것이라네// 깨진 애자의 젖은 몸이 길 위에 뒹굴고/ 미제 험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갔네//

슬픈 온기 / 박후기
비가 내렸고, 아궁에 물이 스몄다. 아버지, 삭정이 같은 팔을 뻗어 눅눅한 신문지 모서리에 성냥을 그어댔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불이 붙어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짙은 연기가 뱀처럼 부엌바닥을 기어 다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훅, 바람을 일으키던 아버지 입에서도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물 위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아직 어린 누이가 어두운 방안에 누워 열꽃을 피웠고, 나무 몇 토막 살 밖으로 끓는 수액을 밀어내며 타들어갔다. 검은 솥단지가 칙칙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굴뚝의 인후부를 간질이며 피어 오른 연기가 쓰러진 나무처럼, 하늘 바닥에 엎드린 채 비에 젖고 있었다.//

마디 / 박후기
비 온 뒤 대숲에 들어가면/ 보인다/ 빗물 받아먹고 통통하게 젖살 오른,/ 땅을 뚫고 쑥쑥 솟아오른 속 찬 죽순들// 온몸 골다공증 걸린 어미 대[竹]의 몸은/ 금 그어진 자[尺]와 같아서,/ 일각이 다르게 커가는 죽순의 키를/ 제 마디에 대보며 흐뭇해하지만// 때때로 죽순은/ 사막 같은 고비를 만날 것이며/ 고비를 지나칠 때마다/ 나이테처럼/ 몸에는 딱딱하게 마디가 질 것이다// 속을 비워야/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한 세상 꼿꼿하게 견딜 수 있다고,/ 마디마다/ 유배지에서의 각오가/ 시퍼렇게 물들 것이다//

거머리 / 박후기
장맛비 그치고/ 비바람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운다// 쓰러진 벼를 묶어 세우듯/ 아버지 굽은 등 곧추세워 주고 싶은 나는/ 그러나 아버지 종아리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한 마리 통통한 거머리// 피 같은 비가 내 가슴을 적시고/ 메디에서 떠내려왔을까/ 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사내를,/ 굵고 단단한 어깨에 새겨진 문신/ 참을 인(忍)자는 지키지 못할 각서 같은 것/ 어차피 참는 자에게 복은 없었다// --좋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부러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넌 그저 공부나 열심히 해라// 나는 대답 대신 두렁에 삽을 꽂은 채/ 키 작은 옥수수밭에 숨어 들어가/ 땀에 젖어 담배를 피웠다/ 빗물에 씻겨 밑동이 드러난 옥수수 뿌리가/ 거머리처럼 흙의 피를 빨아먹고// --삽을 함부로 내리꽂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쉽게 갈라지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피를 빨린 아버지도 언젠가/ 저 벼 포기들처럼 힘없이 쓰러질 것을/ 나는 안다.//

스무 살 / 박후기
나는/ 뒤돌아보지 못하는 한 마리 사과벌레,/ 청춘을 갉아먹으며/ 산속에 좁고 긴 굴을 뚫었네/ 굵은 망치와 뭉툭한 끌로/ 멀쩡한 바위의 심장을 쪼았네// 쿵,폭약 소리에 지축이 흔들리면/ 나무들은 서서쏴 자세로/ 푸른 하늘을 향해 새들을 젹발시켰고,/ 햇빛을 관통한 새들은 유탄이 되어/ 한탄강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네// 굴이 깊을수록 어둠이 깊어갔고/ 그리움이 깊을수록 상처가 깊어갔네/ 헤어진 애인이 보내준 화집(畵集)의 장정은/ 길들여지지 않은 군화처럼 딱딱해서/ 그리움의 첫 장을 넘기던 두 눈가에/ 몽글몽글 물집이 잡혔네// 벙어리장갑처럼/ 굴은 늘 앞이 막혀 있었고,/ 지뢰밭 샛길을 따라/ 땅굴 견한 관광버스가 손 흔들며 달려가던 날/ 나는 초코파이 한 박스를 손에 들고/ 달과 함께/ 몇 개의 능선을 뛰어넘었네// 그루터기에 앉아/ 밤공기를 마시며 빵을 씹을 때,/ 능선에 걸린 둥근 달이/ 구멍 밖으로 모래알 같은 달빛을/ 뿌려대고 있었네// 스무 살,/ 마음속에 품은 지도 한 장/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네/ 발 디디면 어디나 길이 되었고,/ 가지 못할 길은 없었으므로//

 

사십 세 / 박후기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를 본 적 있는가.// 한 순간도 머물지 못하고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 같은 시간을 살았다./ 마흔 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이생을 가로질러 빠르게 날아가는 내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그림자는 허공에 뜬 나보다 먼저 진흙탕 속에 발을 담갔다./ 나의 부리는 동족의 누란을 겨누었고,/ 입 안에 감춰진 작고 날카로운 혀는 연인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분주한 초침의 속도를 지나 어느덧,/ 느린 분침의 속도로도 익숙하게 시간 속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비탈진 강안(江岸)을 오르내리며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죽은 새의 그림자를 본 적 있다.// 비로소 그림자와 하나 된 죽은 새의 주검이/ 햇빛조차 무겁다는 듯 조금씩 제 그림자를 덜어내고 있었다,/ 정든 몸을 허물고 있었다./ 죽은 새의 그림자가 가슴에 깃을 꽂은 채 사라졌다.// 나는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발자국들은 생각의 무게만큼 깊었고,/ 실의에 빠진 두 발은 번갈아가며 각오를 다졌다./ 그림자를 움켜쥔 발자국은, 흔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집착에 가까웠다.//

움직이는 별 / 박후기
이삿짐을 꾸린다/ 좀더 넓은 집을 원했으므로,/ 나는 차갑고 어두운/ 우주 저편의 저밀도 지대를 향해/ 짐 실은 트럭을 몰고 간다/ 도시가 팽창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불러오는 풍선의 표면에 들러붙은 티끌처럼/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변두리의 버스 종점이 市 경계를 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듯/ 젖은 눈망울 반짝이는 어린것들을 이끌고/ 더욱 깊숙한 어둠속으로/ 나는 달려간다/ 뒤돌아보면, 불 꺼진 내가 살던 집/ 눈 감은 창문이여 안녕/ 나는 이제 더 이상/ 처절한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잠든 네 몸을 흔들어 깨울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호롱을 떠난 불빛과 같고/ 다만, 검은 그을음 같은 구름만이/ 뒤돌아보는 별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가린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멀어져가는 별들의 뒷모습처럼/ 보일 듯 말 듯 위태롭게 빛날 지라도//

별똥별 / 박후기
의사는 죽음을 잘 안다고 말했다. 말기(末期)라며, 안됐지만 99퍼센트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더 이상 모르핀을 주지 않았다. 그 말 들렸는지 호스피스 병상 위 아직 살아 있던 1퍼센트, 주르르 눈초리 주름을 타고 흘러내린다. 얼굴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의 속도로, 아픈 별 하나 조용히 눈을 감는다.//

새벽 우시장 / 박후기
무심한 발길에/ 노랗게 핀 달맞이꽃이/ 이슬에 젖은 몸을 툭툭 턴다/ 달은 기울고/ 함평 기산천 긴 방죽 위로/ 소 울음소리 가득 실은 트럭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에 코를 꿰인 채/ 죽음을 향하여 이끌려 가는 것/ 어둠 속 보이지 않는 손들이/ 코뚜레를 잡아당긴다/ 새끼를 잃은 어미 소가/ 왕소금 같은 눈물을 흘리고/ 소매를 걷어붙힌 수의사의 긴 팔이/ 암소의 자궁 속,/ 수렁처럼 깊은 곳을 더듬는다/ 팔려가는 소들의 서글픈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머리국밥을 먹는 우시장의 아침/ 죽어가던 소의 눈물이 배어 있는지/ 국밥 국물이 짜디짜다//

탄력에 대하여 / 박후기
낙원 간다/ 밥값이 싸서/ 허기진 호주머니 깊숙이/ 체면을 구겨 넣은 남자들이/ 식당마다 줄을 서는 곳/ 나는 강원도집에 들러/ 낙원의 명물인 돼지머리고기를 시켜놓고/ 고름 같은 막걸리를 마신다/ 껌을 든 노인이 내 앞에 선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흘리며/ 저토록 악착스럽게/ 피골(皮骨)에 달라붙은 그의 목숨도/ 서른 살까지는 상쾌하게 씹혔으리라/ 접시 한쪽 구석에서/ 젓가락질 한번 받지 못한 채 식어가는/ 두툼한 비계를 베어 문다/ 하악에 힘주지 않아도/ 물컹, 비계 속으로/ 이가 푹 박혀버린다/ 탄력이란 그런 것이다/ 제 몸에 박히는 세월의 일격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이미지를 입다 / 박후기
유리로 지어진/ 은행의 무인점포 안에는/ 고개 숙인 사람들의/ 뒷모습만 존재한다/ 바람이 지급불능인 그곳에서는/ 유리문 밖 가로수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바람이/ 유리보다 잘 보인다/ 신용카드는 욕망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 열쇠 구멍만큼 들여다보이는/ 희망의 계좌를 열고 나는/ 현급지급기의 입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재빠르게 지폐를 꺼내든다/ 욕망의 지급한도를 확인하는 얼굴에/ 검푸른 지폐의 이미지가/ 이끼처럼 들러붙는다/ 누군가 폐쇄카메라를 통해/ 내 이미지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나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옷의 이미지만 입고 다닌다/ 우울한 뒤통수만 달고 다닌다//

우울한 탱고 / 박후기
1//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중력에 이끌린다/ 느닷없이 꺾이는 리듬의 관절처럼/ 춤도 사랑도/ 예정된 길을 따라 걷는 듯하지만/ 종종 스텝이 어긋나기도 한다//
2// 틈,/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닌 둘이다/ 하나 같은 둘이다/ 은근한 욕망과 절제 사이로/ 나른한 계절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확, 불 댕겨버리고 싶은 성냥처럼/ 갈라진 틈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가슴과 가슴이여//
3// 춤추는 달이/ 지구를 붙잡고/ 빙그르르 돌아간다/ 열정 뒤에 숨겨진 우울을/ 달은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달의 뒤편처럼/ 남자는/ 보이지 않는 여자의 뒤편을/ 친절하게 더듬는다/ 달은 45억년 동안/ 지구에게 끌려다녔다/ 달아,/ 이제 그만/ 달.아.나.렴//

폐결핵 / 박후기
날은 어둡고,/ 가는 비 내리고 가는귀먹는다/ 가는 비에 뒤척이는 젖은 꽃잎,/ 골방의 한숨 섞인 수음처럼/ 납작 엎드린 채 부란(腐爛)하다/ 음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 내리는 날/ 아무도 없는 집//

불법체류자들 / 박후기
소읍 변두리 처가(妻家)/ 술 떨어진 밤/ 술 사러 간다/ 날벌레들 싸락눈처럼 몰려드는/ 가로등 밑 공중전화/ 똑, 똑/ 전화카드 돈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똑, 똑/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고향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소를 닮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축축한 달빛이 일렁인다/ 플라타너스 오그라든 나뭇잎/ 몰래 귀 기울이다 철커덕/ 수화기 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켜를 놓친 순간/ 나뭇잎도 지상(地上)의 불법체류자가 되나니,/ 불법체류자들/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밤늦도록 사각거린다//

철봉은 힘이 세다 / 박후기
폐교에 눈 내린다// 시소는 좀 더 어두운/ 하늘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줄 끊어진 그네는 지쳐 보였다// 흐린 연필심에 침을 발라/ 꾹꾹 눌러 공책 위에 글을 쓰듯/ 하얀 운동장에 자국을 남기며/ 내가 걸어간다/ 얼어붙은 운동장이 책받침 같아/ 내 흔적이 땅에 새겨지지는 않는다// 눈 덮인 운동장은/ 텅 빈 공동화장실처럼 고요하고/ 측백나무 울타리 아래/ 엉덩이를 반쯤 까고 주저앉은 폐타이어는/ 아직도 긴장을 간직하고 있는지/ 가벼운 발길질에도 탄력적으로 꿈틀거린다// 나는 가볍게, 무거운 몸을 끌어올려/ 물음표를 한 옷걸이처럼/ 철봉에 턱을 걸고 매달린다/ 철봉은 여전히 힘이 세다//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은 철봉을 향해 몸을 날렸고/ 더러는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맨발로 철봉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하루는 올가미에 목이 묶인 개 한 마리가/ 철봉에 느낌표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흔들리기도 했다// 눈발은 해마다 폐교를 찾아오지만/ 세상의 모든 졸업생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느니// 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어/ 철봉 대신 연봉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뒤란의 봄 / 박후기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단말마의 빗줄기처럼/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 위에서/ 땅 위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2호와/ 나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깨진 바가지 위로 봉분처럼/ 소복하게 눈이 쌓였고/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김승옥 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인용

순대를 먹으며 / 박후기
끓는 찜통 위/ 똬리를 튼 순대가 변의를 느끼는지/ 허리까지 탱탱해지며/ 연신 가쁜 숨을 내몰아쉰다// 어머니,/ 순대를 껌처럼 오래도록 씹고 계신다/ 쉴새 없이 여닫는 입술이 괄약근 같다// 똥은/ 항문이 떨구는 노랗게 익은 열매다/ 열매도 달리지 않는 가엾은 노구의 식탐이여/ 죽은 돼지가 남긴 염통이 몇 점/ 낮달 같은 접시에 담겨 두근거린다/ 죽음이 껌을 팔러 다녔다//

국수 / 박후기
늦은 밤/ 눈내리는 포장마차에 앉아/ 국수를 말아먹는다/ 국수와 내가/ 한 국자/ 뜨거운 국물로/ 언 몸을 녹인다/ 얼어붙은 탁자 위에서/ 주르륵/ 국수그릇이 미끄러지고,/ 멸치국물보다/ 싱거운 내가/ 나무젓가랏의 가랑이를 벌리며/ 승자 없는 싸움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부침개처럼/ 술판이 뒤집어진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막차가 도착하기 전/ 미혹에 걸려 넘어진 마음/ 다시/ 일으켜세워야 한다//

자반고등어 / 박후기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묵 / 박후기
주점 홍등 아래 앉아/ 묵을 먹는다/ 청춘을 잃고 뒤늦게/ 연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 잡힐듯 말 듯/ 의심 많던 손아귀에서 끝내/ 부서져버린 첫사랑을 생각한다/ 움켜쥔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탕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오늘이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여자도/ 도망칠 내일도 없던 날이었다/ 다시, 교문 앞에 돌아와/ 묵을 먹는다/ 젓가락질은 여전히 서툴고/ 정든 화실 앞에서/ 첫사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제 살을 베는 칼날/ 묵묵히 받아들이며 쓰러진/ 묵을 먹는다 어느덧/ 뜨거운 가슴 식어버려/ 몸에 칼이 들어와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나를 먹는다//

겨울 옥탑방 / 박후기
일요일 아침/ 지붕 위의 방 한 칸/ 문을 열면 빈산 가지에 얼굴이 찢긴/ 수척한 하늘이 밀려들어오고/ 고추장 단지 위 소복이 쌓인 눈처럼/ 눈이 부어 오른 아내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채/ 세탁기를 돌린다 느릿느릿/ 텔레비전 속에서 기어 나온 나는/ 주인집 대문을 두드리는 중국집 오토바이 소리에도/ 허기를 느낀다 오래 전/ 잎이 말라버린 화초는/ 썩은 이처럼 겨우내 뿌리가 욱신거리고/ 아픔을 참는 화분의 얼굴에/ 주름처럼 몇 줄 금이 간다/ 두꺼운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귀를 대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콘크리트 속/ 보일러 관을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물/ 봄은 오고 있는 것일까/ 빨랫줄에 이불이 내어 걸리고/ 이불에 핀 모란의 볼이 발갛게 얼어붙는다/ 겨울 한 자락이 집게에 매달려/ 얼어붙은 생각을 펼쳐 보인다/ 언 이불에 이마를 대 본다/ 차갑다/ 난간에 기대어 산 아래/ 잠든 개처럼 둥그렇게 웅크린 집들을 쳐다본다/ 기우뚱, 내려앉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집들은/ 힘겹게 비탈을 기어오른다//

지하철 정거장에서 / 박후기
지하철은 지구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지하철 안의 나는/ 지하철과 같은/ 속도로 달려간다/ 내가 너와 같은/ 속도로 살아가고/ 빛과 같은/ 속도로 죽어간다/ 다음 생으로 갈아타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나가는/ 이생을 향해 나는/ 지는 나뭇잎 같은/ 덧없는 손을 흔든다/ 지하철의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떠다니는 먼지의 밀도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이고/ 마음과 마음은/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보다 멀다/ 사람들의 얼굴에 열꽃이 핀다/ 지하철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도독뼈를 씹듯 온몸 마디마디/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지하철은 떠나간다/ 들여다보면,/ 그곳은 바람의 하수관/ 더러운 공기는 희미한 불빛과 뒤엉켜/ 시궁을 이루며 흘러가고/ 한번 가슴을 떠난 신음처럼,/ 지나간 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강철 혈관 / 박후기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속/ 구부러지고 엉킨 철근이/ 콘크리트 기둥의 혈관 같다 내려앉은/ 무덤 같은 잔해 속을 뱀처럼 파고드는,/ 절단기에 몸뚱어리가 절단날 때까지/ 제 몸에 들러붙은 마지막 살점을 부여잡고/ 끝까지 펄떡이는 강철 혈관, 아버지/ ㄱ 자로 꺾여 콘크리트 기둥 속에 갇힌 채/ 평생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 돌보다 단단한 기둥 속에서/ 묵묵히 검은 노예의 동맥으로 두근거리며/ 자식들 철석(鐵石)같이 붙어 있으라고/ 마디마디 동그란 나이테를 만들었다/ 못 하나 박히지 않을 것 같던 기둥에도/ 주름처럼 깊게 금이 가고/ 터진 혈관에서 흘러내린 녹물이/ 회색 기둥을 붉게 물들였다/ 아버지가 죽던 날/ 앰뷸런스 안에서/ 쓰러진 기둥을 끌어안고 울던 어머니/ 있는 힘 다해 녹물이 질질 흐르는/ 강철 혈관을 주물렀지만,/ 멈춘 맥박은 다시 뛰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이라는,/ 식량과 돈과 희망을 제물로 받는/ 가장 더럽고도 아름다운 신전을 떠받치던/ 기둥 속 강철 혈관이었다//

고통 한 근 / 박후기
산수(山水)분재원/ 이끼 낀 유리창 너머/ 여린 나뭇가지에/ 돌멩이 하나 매달려 있다/ 수형(樹形)을 바꾸기 위해/ 수형(受刑)의 짐을 지운 것인데,/ 기묘한 과일* 같은 것이/ 탱탱한 줄에 목을 걸고/ 온몸으로 가지를 당기고 있다/ 전족을 한 키 작은 나무들/ 자꾸 허리만 굵어지는 봄날,/ 휘어진 나뭇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고통 한 근//
*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껍질 / 박후기
개펄은 바다가 되기도 하지만,/ 꼬막이 자라는 밭이 되기도 한다// 콩 싹이 껍질을 벗고 떡잎을 내밀 듯,/ 꼬막들도 껍질을 벌려/ 새 혓바닥 같은 싹을 틔운다// 껍질만 남은 노인들이/ 호미처럼/ 등을 구부려 꼬막을 캐고 있다// 가끔/ 새가 날아와 꼬막을 쪼아 먹기도 하고,/ 껍데기만 남은 꼬막이/ 자식들이 속만 파먹고 내버린 가난한 노인들과 함께/ 쓸쓸한 바닷가를 떠다니기도 한다//

사랑의 물리학 ㅡ상대성 원리 /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제석봉에서 이별하다 / 박후기
산처럼/ 사랑도 오르는 일보다 내리막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죽은 나무들 사이로/ 당신이 떠난 후 깨닫는다/ 엎질러진 물처럼/ 사랑은 발 아래 스며든다/ 땀 흘리며 묵묵히 오르던/ 늦가을 벽소령/ 당신에게 건네던 물과/ 함께 쏟아진 마음을/ 다시 담을 수 없었다/ 물 한모금으로/ 더운 가슴 적시며/ 무거운 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좁은 외길/ 함께 걸을 수 없었다/ 어째서/ 모든 뒷모습은/ 눈 앞에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북어 / 박후기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소금쟁이 사랑 / 박후기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소금쟁이처럼/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물 위를 걸어다녔지만/ 당신은 가끔/ 파문 같은 미소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기에/ 나는 젖은 손발 슬그머니/ 거두어들였습니다/ 가슴으로 당신을 만나자마자/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양계장의 밤 / 박후기
우리들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밝아요/ 태양보다 밝은 전구가/ 머리 위에서 빛날 때/ 우리는 불빛과 섹스를 나누고/ 전구를 닮은 알을 쏙쏙 낳지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내일이 없다는 말과 같아요/ 슬픔은 항생제도 듣질 않아/ 우린 밤새도록 우울한 부리로/ 쇠창살 그림자를 쪼아대며/ 종(種)의 격리를 견디지요/ 밤이면 밤마다 모래주머니 속에/ 모래알 같은 시간을 넣고 삭히다/ 알을 낳을 수 없는 그날이 오면/ 우린 모두 끓는 기름 속/ 혹은/ 숯불 위로 몸을 던져/ 소신공양을 하지요//

촛풀 / 박후기
새벽 광장에/ 장대비 내리고/ 풀들은 등을 구부린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대궁이 부러지고/ 잎이 찢겼다/ 피 흘리는 꽃잎을/ 짐승의 발굽이 거칠게/ 밟고 지나갔다/ 뿌리 뽑힌 풀 몇 포기/ 바람 속으로/ 질질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 풀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졌지만/ 광장 어디에도/ 저 혼자 남겨진/ 풀은 없었다/ 쓰러진 풀들이/ 젖은 몸 툭툭 털며/ 땅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미산 / 박후기
지도 깊숙한 곳/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미산이 있다/ 그곳은 강원도의 내면(內面)/ 미월(未月)의 사람들이/ 검은 쌀로 밥을 짓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달빛이/ 서어나무 소매를 적시는 곳/ 나는 갈 곳 몰라/ 불 꺼진 민박에 방을 얻고/ 젊은 주인 내외는/ 버릇없는 개를 타이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멍든 개가 물고 간/ 신발을 찾아/ 어둠속을 두지는 밤/ 미산에서는/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이 빛난다//

시인들 ㅡ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생각함 / 박후기
스물여섯 살, 요즘 같으면 막 무언가를 시작할 나이.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겐 가난과 각혈로 얼룩진 생이 이미 끝나버린 때. 죽기 전, 힘겹게 구한 5엔을 손에 쥐고 밥을 먹는 대신 꽃집에 들러 1엔어치 목련과 1엔 짜리 꽃병을 샀다는 시인.// 목련과 선동가는 다르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선언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다릅니다. 바닥에 떨어진 목련의 혈담(血痰)과 내려앉은 새들의 투병과 4월의 선동을 밥그릇보다 먼저 시라는 꽃병에 주워 담습니다.// 그러나 결핍을 모르는 시인은 모자 속에서 시를 만들고 호주머니 속에서 악수를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밥이 되고 남은 것들이 겨우 시가 되기도 합니다.//
* 石川啄木(1886~1912), 일본의 시인.

호버링* / 박후기
1// 벌들은 왜 벌집/ 구멍 앞에서 멈칫거리는가//
2// 아빠, 안 들어가고 뭐해?/ 어디선가 나타난 딸이/ 등 뒤에 대고 묻는다// 나는 가끔/ 대문 앞에 서서 머뭇거릴 때가 있다// 잔잔한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키며/ 잠시 고민에 잠긴 헬리콥터처럼,/ 나는 무엇을 망설이는가//
3// 호버링,/ 땅 위에 주저앉지도 못하고/ 하늘 멀리 날아갈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가 있다// 靜中動의 사내여,/ 서러운 공중 부양이여/ 서글픈 가족 부양이여// 中年의 헬리콥터가/ 굳게 잠긴 대문 앞에서/ 갸우뚱거린다//
4// 집을 나설 때가/ 집으로 돌아올 때보다 더/ 홀가분할 때가 있다//

* 헬리콥터의 정지 비행을 이르는 말.

꽃기침 / 박후기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 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 지는 꽃들이/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꽃 진 자리 / 박후기
사과나무에겐 꽃 핀 자리가 똥구멍이다/ 꽃 필 무렵/ 사과나무는 온몸이 항문이다/ 꽃잎을 버림으로써/ 몸을 여는 항문의 개화기를 지나면/ 똥 덩어리 같은 사과 한 알/ 비로소 가지 끝에 매달린다/ 흉부에 꽂힌 가느다란 꼭지./ 식도 뚫은 튜브 통해 養分 받으며/ 여름내 있는 힘 다해 괄약근을 조인다/ 늘어진 살가죽 몸 안으로 끌어당기느라/ 얼굴 점점 붉어지고,/ 사과에겐 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 꽃 진 자리에 유난히/ 주름이 많은 것은/ 全生이 한꺼번에 쏟아질까봐/ 항문에 힘을 주기 때문이다// 사과밭 노인 병상,/ 어머니 관장하신다//

음악처럼 / 박후기
이별하는 사람들에게/ 레퀴엠을 들려주고 싶어/ 조금은 서글프고/ 북처럼 가슴 치는 음악으로/ 떠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무겁게 만들어주고 싶어// 싸움질하는 사람들에게/ 탱고를 들려주고 싶어/ 때론 끌어당기고/ 때론 밀어내지만/ 음악이 멈출 때까지/ 잡은 손 놓지 않는/ 탱고 춤을 추게 하고 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재즈를 들려주고 싶어/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마지막 숨을 들이켤 때,/ 은은한 트럼펫 소리를/ 폐부 깊숙이 불어/ 넣어주고 싶어//

유전자 트래킹 / 박후기
걷는다/ 어두워지는 들판/ 도꼬마리가 씨앗을 건넨다/ 바짓가랑이에 들러붙는 것이/ 도꼬마리의 정착은 아닐 것이다/ 도꼬마리처럼/ 몸을 스치는 발길에/ 마음을 맡긴 적이 있다/ 식물이 누대에 걸쳐/ 대륙을 건너듯/ 내 마음도 그렇게/ 당신에게 건너가고 있다/ 그러나 불빛은 너무 멀고,/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들은 끊임없이/ 어두운 앞길을 더듬지만/ 언제나 막장이다/ 별들이 악몽을 꾸며/ 뒤척이는 밤,/ 나는 당신의 집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6번 혈관 ㅡ콜트기타 해고 노동자들에게 / 박후기
기타 줄은 기타의 핏줄,/ 질긴 나의 혈관이다/ 팽팽한 생의 조율 위에서/ 언제 끊어질지 몰라,/ 나는 불안한 음계로/ 죽음의 열 네 계단을 오르내리며 매일/ 고통을 튜닝한다/ 당신들은/ 나의 노동이 느슨하다며/ 있는 힘껏 내 목을 조른다/ 나는 줄을 칭칭 목에 감은 채/ 온몸으로 소리친다,/ 울음으로 노래한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본의 공명을 위해/ 매인 몸, 하지만/ 줄을 조일수록 울림은 커지고/ 끊어지지 않는/ 6번 줄은 기타의 동맥이다,/ 가장 낮은 데서 두근거리는/ 살아남은 유전자의/ 깊은 숨소리다//

반월 / 박후기
물에 빠진/ 달이 반쪽,/ 저수지에 모인/ 필리핀 아이들/ 얼굴이 반쪽/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 가득 찬 수심// 공단 굴뚝에 걸린/ 희고 두툼한/ 달의 잇몸,/ 하얗게 미소 짓는/ 필리핀 여자의/ 예의 바른 두려움// 구름에 그을린/ 반월파출소,/ 수갑 찬 달이/ 꼼지락거리며/ 구름을 갉아 먹다/ 얼룩진 소파 위에/ 길 잃은 모국어를 토해놓는/ 구도(九道)의 끝자리//

비박 / 박후기
눈 내리고,/ 산장에서 비박하며/ 취사장 흐린 불빛 아래/ 차가운 벽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문밖엔 눈 덮인 빨간 우체통이/ 떠나가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품은 채/ 밤새 앓고 있다/ 구겨진 엽서 한 장/ 무릎 위에 올려놓고/ 볼펜 거머쥔 손아귀에 호호/ 입김 불어가며 적었던/ 살얼음 글씨 몇 자/ 결국, 보내지 못했다/ 너를 생각하면/ 얼어붙은 뺨보다 가슴이 더 시리지만,/ 사랑을 잃고 산길을 헤매는 사람끼리/ 체온을 나누어 갖는 밤도 슬프진 않다/ 어차피 네게로 가는 길도 지워졌으리라//

왜가리 / 박후기
목발을 짚고/ 네가 온다/ 너는, 절룩거리는 식탁처럼/ 불편하게 뵈진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암에 걸려/ 위(胃)를 모두 잘라낸 사내는/ 식도만 남았다/ 목이 길어지고/ 얼굴은 점점 작아졌다//

크레바스 / 박후기
아스팔트 도로가 폭삭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구덩이 속으로 처박혔다./ 집중호우 때 생긴 틈으로 물살이 파고들었고,/ 아스팔트를 떠받치고 있던 흙과 자갈이 떠내려갔다./ 아스팔트 포도는 한 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 자동차는 그곳이 바닥인 줄 알고 달렸다.// 빙산은 물 위에 떠 있고,/ 대륙은 맨틀 위에 떠 있다./ 나는 가끔 발아래가 의심스럽다.// 저수지 중앙은 얼지 않았다./ 저수지가 숨을 쉴 때마다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물고기들은 얼음장 밑에서 행복했다./ 나는 아파트 7층에 산다.// 고상돈은 매킨리 봉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다./ 자일에 매달려 날개가 꺾인 채 발견되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인지,/ 올라가기 위해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새들이 나는 곳이 모두 하늘은 아니었다.//

옆집에 사는 앨리스 / 박후기
1//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단추 같은 동정(童貞)을 떼어 버렸다//
2// 교련 선생한테 따귀를 맞은 날엔/ 집에 가지 않았다/ 첫눈이 내렸고/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여자 친구를 기다렸지만/ 그 애는 오지 않았다/ 바람 불고, 앨리스가 지나갔다//
3// Room for Rent!/ 빈 방이 있었지만/ 경호는 지하방에서 먹고 잤다/ 보일러실 파이프라인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면/ 술에 취한 경호가/ 연탄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열어주곤 했다//
4// 나는 지하방에서 기타를 퉁겼고/ 앨리스는 담배를 피우며/ 베개 대신 두툼한 팝송대백과를 베고 누웠다/ 앨리스의 아버지는 헬리콥터 조종사였다/ 경호는 앨리스 아버지의 항공잠바를 훔쳐 입고/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기도 했다// 눈이 그칠 것 같지 않던 겨울이었고,//
5// 술이 떨어질 것 같으면 나는/ 부대 앞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소주 두어 병 더 사다 놓고/ 쥐포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잠이 들곤 했다//

새벽길 / 박후기
이른 새벽, 비 그친 콘크리트 포장길/ 시멘트 채 굳기 전 누군가 지나간 흔적/ 서둘러 떠나간 발자국 깊어/ 움푹 파인 뒤꿈치에 어제 내린 빗물 조금/ 흙 묻은 어둠 조금 고여 있다/ 문득 뒤돌아보았을까/ 발걸음 잠시 길 밖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내 길 안으로 들어와 성큼성큼 걸어간다/ 벗어날 길 없는, 길 위의 인생/ 무덤가 솔밭에서 날아온 노란 송홧가루의 흔적/ 아버지 발잔등을 옭아맨 고무신 둥근 땟자국//

미월(未月) : 음력 유월 ㅡ퇴행성 관절염 / 박후기
물 대접에 담긴 젓가락이/ 힘없이 구부러지는/ 병상 위 밥상을 바라본다/ 뼈가 닳도록/ 먹을 것을 집어 나르던/ 저 가느다란 젓가락은/ 한평생 절룩이며/ 밥상 위를 걸어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팔순 노모의 몽당한 두 다리가,/ 닳고 닳아 길이가 맞지 않는/ 늙은 마리오네트의/ 고장 난 저 두 다리가/ 몇 년째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시름 젖은 병상이/ 물지게처럼 삐거덕거린다//

사랑 ㅡ글렌굴드 / 박후기
침묵은/ 말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아르바이트 소녀 / 박후기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가슴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삼 분이면 끝나거든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박제사들 / 박후기
어차피, 정신은 내장과도 같은 거야. 그러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긁어내 버려야 해. 썩을 건 썩어야 비로소 썩지 않는 것들만 남겨지게 되는 거라고./ ―社長이 자신의 배를 가르더니 방부 처리된 돈다발을 집어넣고는 다시 꿰매기 시작했다.// 사랑은 썩어 문드러져도 돈은 썩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애인의 배를 가르고 싶어. 流産된 사랑을 꺼내고 자궁 가득히 돈을 채울 거야. 돈이 돈을 낳는 거지./ ―市長이 멀쩡한 여자의 배를 가르더니 자궁 속을 돌덩이로 채우기 시작했다.// 저 사쿠라들을 좀 봐. 꽃들이 利子 놀이 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긴, 자기가 박제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엉덩이 툭툭 터는 꽃잎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긴 해./ ―議長이 윤중로에 떨어진 벚꽃을 봉투 한가득 쓸어 담고 있었다.//

박제들 / 박후기
박제사들은 칼 대신 구더기를 이용해 짐승의 뼈에 달라붙은 살점을 말끔하게 처리한다//
1// 아파트에 박제가 산다/ 박제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벽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거나/ 가죽 소파에 드러누워/ 털끝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박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조용한 가족이/ 시츄에이션드라마의 소품이 되어/ 아파트에 모여 산다//
2// 때가 되면/ 박제들은 늙은 부모를/ 박물관에 보내버리고,/ 박제사들은 구더기를 이용해/ 늙은이의 살점을 발라낸다/ 모골(毛骨)만 남은 노인들이/ 가슴에 이름표를 붙인 채/ 진열장에 누워 있다//
3// 누나가 시청 일용직 채용 면접을 보던 날;/ 봉제 공장에서 일한 적 있다고 했나요? 나도 청계천에 전시될 인간들을 박제로 만들어봤지만, 박제가 사람을 속이는 것은 아니지요. 중국 사람의 절반은 박제라는데, 정치인들은 그런 유권자들을 수입해서 쓰고 싶어 해요. 어쨌거나 취업을 하고 싶다면 당신은 박제가 되어야 합니다./ —면접관이 누나에게 말했다//
4// 자목련 한 그루가/ 주차장 담벼락에 입을 대고/ 피를 토한다// 거봐,/ 꽃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어요/ 서울 사람들처럼,/ 꽃과 나무도 아예/ 박제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니까// —자기 몸을 스스로 박제하며 아버지가 말했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병걸 시인  (0) 2022.03.15
장이엽 시인  (0) 2022.03.11
조남명 시인  (0) 2022.03.07
조오현 시인  (1) 2022.03.04
노향림 시인  (0) 2022.03.0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