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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지칠 때 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그곳에서 퍼덕이는 물오른 생선과 상인들의 힘찬 목소리에서 잃었던 활력을 얻는다. 뿌리째 탄탄한 푸성귀를 고르고 뜨끈한 장터국밥 한 그릇 먹으면 시들했던 삶에도 생기가 돋게 된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라서 배릿한 해변시장도 있고 오래된 담장을 끼고 사시절 골목시장도 열린다. 틈을 내어 버스라도 타면 역전시장에도 가고 도떼기시장이라 부르는 국제시장도 닿고 구제품이 즐비한 깡통시장까지 구경한다. 해변시장은 갈치와 꽃돔과 꼼장어가 얼음판 위에 버티고, 골목시장에는 아직도 맷돌을 돌려 콩물을 내리며, 명절이면 뻥튀기 기계를 돌려 쌀강정을 만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디 그뿐인가. 돼지껍데기가 쥑이는 집도 있고 서울 사람도 알아주는 부산 오뎅집도 반기며 옆에 있는 시숙도 몰라 볼 만큼 혀를 녹이는 돼지국밥집도 위풍당당하다.
생각의 끈이 풀리지 않는 날이면 만사를 제치고 헐렁한 스웨터 차림에 재래시장으로 향한다. 세련된 마트를 마다하고 눅눅한 장터를 찾는 것은 무엇보다 미로 같은 시장 길이 좋아서다. 길과 길이 마주하고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는 곳. 한 바퀴 돌다 보면 다시 제자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며 걷고 또 걷는다. 행여 길을 잘못 들더라도 되돌아가면 되고 지름길이 나오면 느긋하게 지나쳐도 그만이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엉킨 기억들을 풀고 조였던 숨통을 드러내는 곳, 사람을 품고 이야기를 담아내는 곳, 그곳이 시장이다.
시장 길을 걷는 것은 한 권의 사진첩을 넘기는 일이다. 한때 재첩장사를 했던 어머니가 다니던 길목과 점토를 주무르고 빚고 색을 입히느라 내 젊은 시절 땀을 바친 공방을 지나고, 무당이 되라고 아이들을 부추기던 박수부당집 대나무 그림자를 피해서, 선희네 교복 집과 난희 집 낡은 여관과 은이 아버지가 표를 받던 극장 터를 찾아 옛 추억을 만날 수 있다. 어릴 때 십리 길을 걸어 다니던 학교도 모두 저잣거리를 거쳤으니 나에게 있어서 시장은 문학적 상상력의 태胎가 되는 곳이다.
서민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곳도 시장이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우아하게 눈요기하는 백화점 사모님들과 달리 난장에서는 하루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섞인다. 명풍 브랜드의 고급언어가 아닌 민낯 그대로의 이름이 비뚤배뚤 맞춤법도 무시한 채 물건 값을 지킨다. 진상 손님도 있는 법, 그러니 육십 년을 시장 밥 드신 건어물집 노인은 가게도 법당, 장터도 법당이라 말한다. 수많은 사람을 대하면서 오죽 마음 상했으랴. 그것을 견디는 것이 마음공부이고 수행이거늘.
이곳에 오면 누구나 다 이웃이 된다. 스스럼없는 부대낌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 거리감을 없애준다. 준엄한 위계질서도 단번에 무너뜨린다. 장벽을 이루던 지위와 학식과 빈부의 차이가 지나는 손수레에 옥수수자루가 넘어지듯 우르르 허물어진다. 교양 있는 표준어에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점방이 열리고 리어카가 다니고 고무 다라이와 비닐 봉다리가 넘친다. 천 냥 마트에서 최신 뽕짝이 울려 퍼지고, 물건 값을 흥정하느라 목청을 높여 깡다구를 부리고, 오늘 개업한 과일집 총각의 손박자 소리와, 비좁은 골목까지 외제 승용차를 몰고 온 앳된 주부에게 쏟아지는 억센 야유까지 그야말로 싱싱한 시장 언어가 완성된다. 제각각의 경험과 불운한 사연들을 안고 살았지만 인심만은 지금도 흔전만전 넘쳐나는 곳이다.
밥 장사, 야채 장사, 양말 장사, 커피 장사 등 온갖 장꾼들의 생기가 왁작박작 펼쳐진다. 걸쭉한 팔도 사투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스며들고 거친 육담이 장바닥을 건너 몸을 불려 낸다. 그들이 내뱉는 욕설과 은어와 외설이 도시인의 겉치레를 조롱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장의 언어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의 말이 아닌가.
권위적이고 경직된 것들이 웃음과 패러디로 전복당한다. 부자도 빈자가 되고 정치인이 아저씨로 불리며 선생도 학생이 될 수 있다. 위엄이 박탈되고 현실과 꿈이 뒤바뀌며 과거와 미래가 한데 섞인다. 교양을 벗어던진 노골적인 삶이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파장 마당의 술판에서 세상 이야기를 마음껏 내질러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어김없이 새벽을 열어줄 이들이니까.
시장 사람들은 스스로 도시의 농부라고 부른다. 날마다 질곡의 연속이지만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켜내었다. 반 평의 난전 자리에서 생을 소진하더라도 자식을 키워내고 가족을 건사한 뒤 혼을 묻을 각오로 버텨낸다. 분노와 미움과 절망도 세월 속에 녹여내고 오롯이 현재에만 충실한다. 때로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 자책도 하지만 낮은 삶을 받드는 사람이 진정 숭고한 자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밑바닥 삶에서 건져 올린 진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도심 한복판 장터에 오늘도 유쾌한 축제 마당이 벌어진다. 덩달아 어물전 빨랫줄에 귀한 옥돔이 걸렸다. 열무 비빔밥에 짜박 된장이 나오는 보리밥집을 어찌 스쳐갈 수 있으랴. 똑같은 브랜드의 커피, 똑같은 모양의 빵, 똑같은 재료의 김밥이 식상해졌다면 시장 스타일에 젖어보시라. 약장수와 뱀장수와 각설이도 사라졌지만 아직도 시장은 매일매일 축제장이다. 삶의 활기를 찾고 싶다면 이 소란스러운 풍경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갈 일이다.
김정화 님은 △경남 김해 출생 △경성대 국문과 대학원(석사) △《수필과비평》 등단(2006)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경수필문학회, 수필과비평비평작가회의 회원 △제3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제12회 오륙도문학상 대상, 제19회 신곡문학상 △수필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 『가자미』 『장미, 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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