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칠漆 / 변종호

부흐고비 2022. 3. 17. 08:26

얼마나 많은 혼이 깃들었기에 이천 년을 넘어섰을까. 누군가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옻나무, 수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견디며 나무의 영혼을 담아 인간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칠漆이다.

마음의 고향이라서일까. 전통을 이어가는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색채는 은은하나 가볍지 않고 광택은 있으나 눈부시지 않으며 화려하나 질리지 않는다. 옻의 매력에 푹 빠졌다.

채취 현장을 보러 충북 옥천을 찾았다. 피부에 닿으면 옻이 올라 눈만 빼고 가렸으니 오죽 더울까, 물에 빠졌다 나온 몰골의 40대 칼잡이는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내뱉는 말은 가시 투성이고 눈총은 따가웠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찾아온 연유를 밝혔다. 그제야 생수로 목을 축이더니 잔뜩 세웠던 가시를 눕힌다.

야무지게 움켜잡은 칼이 옻나무 껍질에 V자로 홈을 내자 왈칵 피눈물을 쏟는다. 말간 첫 물에 이어 진득한 액이 흐른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전용 주걱으로 알뜰하게 긁어 담는다. 그래 봐야 칼집 하나에 고작 서너 방울이다. 속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가련하다. 십 년 가까이 몸집을 키워야 상흔을 훈장처럼 남길 수 있다. 칠은 종일 채취해야 200~300g을 얻을 수 있단다. 두어 시간 지켜봤지만, 전통을 이어간다는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채취는 유월부터 시월 말까지 하는데 육칠월 많은 비가 내린 후나 장마 뒤 채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초칠이란다. 팔구월에 나오는 칠은 성칠이며 시월에 채취하면 말칠이다. 한겨울 강물에 옻나무 도막을 세워 물 먹인 뒤 가열해 얻는 화칠은 식재료로 쓰인다.

아무리 귀한 생칠도 곧장 쓸 수는 없다. 두어 번 헝겊으로 이물질을 거르는 정제와 수분을 제거하는 교반을 거치면 색은 짙어지고 점성도 높아져 자연이 주는 최상의 도장재로 완성되는 셈이다.

우리가 옻을 사용한 시기는 신석기시대이며 접착제로 쓰였다고 한다. 살갗에 닿으면 독이 오르는 옻을 적소에 활용했던 선인先人의 지혜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옻은 방습 방염 방충 부패방지 접착제로 쓰이며, 전통문화용품이나 소반 제기 반닫이와 오동나무 관에도 사용했다. 남원의 실상사 아미타불좌상은 목불木佛이지만 삼베에 옻을 칠하여 붙이고 건조 후 다시 칠하고 겹쳐 붙인 건칠불로 육백 년이 지났지만 잘 보존되고 있다.

고려 시대 제작된 보물 제1975호 나전경합을 현대감각으로 재현하는 영상을 봤다. 목장이 잣나무로 백골을 짜고 칠장이 삼베를 안팎으로 붙여 말리고 덧칠하는 반복 과정을 거쳐 나전장에게 넘기면 조개껍데기를 자르고 갈아 모란 넝쿨과 마엽무늬로 장식했다. 이어 황동으로 만든 경첩과 자물쇠, 양쪽에 손잡이를 붙이면 경합은 완성되었다. 안목이 없는 탓인지 진품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찬찬히 톺아보면 어느 누가 멋스러움에 반하지 않겠는가. 가로 42cm, 세로 20cm, 높이 23cm의 목침만 한 나전 경합을 네 명의 장인이 2년간 혼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명작이다. 어느 시대든 명품이나 명작의 칭호를 얻으려면 얼마나 고뇌에 찬 고통이 따라야 했을까.

다른 장인보다 칠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손대현 장인은 정제와 교반으로 얻은 칠을 목재 함에 바르기 전에 몇 번이나 정성 들여 붓을 손질했다. 신에게 제를 올리듯 매우 신중한 손길로 한 겹씩 칠을 입히는 과정은 마치 진주조개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핵에 수천 겹의 물질을 바르고 묻혀서 영롱한 보석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그의 간절한 염원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칠을 채취하던 사람과 칠을 정제하고 교반 하던 당신의 혼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무엇이든 저렇게 공들이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옻나무를 가꾸고 칼로 그어 생칠을 얻음은 집필을 위해 끝없이 통찰하며 사유의 뜰을 넓혀가는 것이요, 칠을 정제 교반 하여 초칠과 마감으로 광택을 내는 일은 치열하게 쓴 작품을 한 자 한 자 조탁하여 완성하는 수십 번의 퇴고가 아니겠는가. 몇천 년을 넘어서 가없이 도전하는 칠을 보면서 지난날을 돌아본다. 읽고 나면 금방 잊히는 글이 아니라 독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몇 편의 작품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살아가는 지혜를 옻나무를 통해 한 수 배운다.

나무의 혼이 담긴 한 방울 칠漆의 가공할 내공은 영원을 향한 뚝심인 것을.


변종호 님2006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한 후 '섶다리', '마음을 메우다' 등 2권의 수필집과 '주천강의 봄'이란 선집을 발행했다. 수필과 비평 문학상과 홍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충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곶감 / 김응숙  (0) 2022.03.18
그날의 기적소리 / 김수봉  (0) 2022.03.18
시장을 품다 / 김정화  (0) 2022.03.17
순댓국은 그리움이다 / 조일희  (0) 2022.03.16
끼젓 / 조경희  (0) 2022.03.1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