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고명 / 양일섶

부흐고비 2022. 4. 1. 08:37

부글부글 끓는 국수를 건져낸다. 찬물로 목욕재계한 면발은 매콤새콤한 양념장과 격렬하게 몸을 섞어 비빔국수로 재탄생한다. 송송 썬 오이와 고소한 깨소금이 축하의 꽃가루처럼 뿌려진다. 완숙된 달걀 반쪽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깨소금 위에 앉는다. 특별한 대가 없이 최고 상석을 차지한 미안함보다 음식을 예쁘고 맛있게 완성했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충분한 음식이지, 훌륭한 말이 아니다.’라는 격언처럼 인간의 삶에서 먹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굶주림에서 벗어나야만 희로애락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충분한’ 보다 ‘맛있는’ 먹거리를 원했다. 맛을 돋우는 양념을 획득할 목적으로 유럽에서는 후추로 인한 향료 전쟁이 벌어졌고, 여러 국가에서는 소금을 쟁취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양념은 사람들의 미각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고, 색다른 맛을 내기 위해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념 못지않게 중요한 고명을 잘 활용해야 한다. 양념이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맛을 가미하기 위해 넣는 재료라면, 고명은 시각적 효과에 중점을 두어 완성된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재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고명은 재료의 모양과 색깔, 특성을 잘 활용해야 한다. 번철에 부치거나 생으로 올리기도 하지만, 사각형, 마름모, 꽃 모양, 등으로 잘게 썰거나 가루로 만들어 음식 위에 얹기도 한다.

모든 식재료가 고명이 될 수는 없다. 미나리 파 버섯 지단 실고추 대추 밤 잣가루 깨소금 은행처럼 가공된 색이 아닌 순수한 청靑 백白 적赤 흑黑 황黃의 색깔을 띤 자연의 재료만 고명으로 이용된다. 이 다섯 가지 색을 동서남북과 중앙을 나타내는 ‘오방색五方色’이라 부른다. 악귀를 몰아내는 오방색은 예로부터 옷이나 장신구, 공예품, 음식을 만드는데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전통요리 전문가들은 오방색이 사람의 신체기관과도 연관되어 있어 음식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음식의 색조를 맞추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은 때깔이 고운 음식이 더 맛깔스럽게 보인다는 말이다. 국내의 항공사들이 기내식으로 제공하고 있는 비빔밥을 ‘화반花飯’이라 부르는 것처럼 음식에 고명이 더해지면 꽃을 올려놓은 느낌을 준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음식은 식사 분위기를 우아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식욕을 높이기도 한다. 게다가 고명이 올려져 있으면 이 음식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표시도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들만 있는 집안의 곱고 귀한 딸을 ‘고명딸’이라 부른다.

모처럼 가족이 다 모인 새해 첫날, 떡국을 끓여 먹기로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고명을 먼저 만든다. 달걀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서 지단을 만들고, 잘게 썬 소고기를 프라이팬에 볶고, 김을 조심스럽게 구워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조금 힘들고 지루하더라도 가족의 건강을 위해 참고 견뎌야 한다. 완성된 떡국 위에 고명을 정성스럽고 소담스럽게 얹어 식탁에 올린다. 가족들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결과에서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즐겁게 할 수 있다.

내가 먹어 본 비빔밥 중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어머니의 비빔밥이다. 차례나 제사를 지낸 후 어머니는 여러 가지 나물과 밥을 커다란 양푼에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어 비빈 후 먹고 싶은 희망자를 물었다. 나는 매번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대접에 가득 담은 비빔밥 위에 먹기 좋게 발라낸 흰 생선 살 몇 점을 고명으로 얹어주었다. 비빔밥의 매콤달콤한 맛과 생선의 짭조름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금도 집안의 행사가 끝나면 가끔 형수나 아내가 어머니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지만 옛 맛을 느낄 수 없다.

언젠가 『김소운의 수필 선집』 중에서 「가난한 날의 행복」이란 수필을 읽었다. 그 작품에 나오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쌀이 없어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한 아내를 위해 실직한 남편은 어렵게 쌀을 구해 점심상을 준비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반찬은 간장 한 종지밖에 없었다. 남편은 초라한 밥상을 대할 아내를 생각하며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 적은 쪽지를 상 위에 올려놓고 외출을 했다. 남편의 마음이 담긴 쪽지를 본 아내는 왕후가 된 것보다 더 가슴 뿌듯한 행복감을 느끼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아내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담긴 남편의 마음은 어떤 식재료와 비교할 수 없는 맛과 정성이 가득한 최고의 고명이다.

‘빛 좋은 개살구’,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있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과 모양을 띠고 있지만 맛이나 실속이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식당에서 맛나게 보이는 음식모형이나 사진을 보고 주문한 후, 실제 음식을 먹고 실망한 경우, 고명은 맛깔스럽게 보이는데 전체적인 음식 맛이 별로인 경우를 가끔 경험한다. 음식에 속고 낙심하면 좌절감과 배신감이 오래 남는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먹는 즐거움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겉과 속을 똑같이 중시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감도 오랫동안 기억된다.

고명으로 올려진 재료들은 자신의 색깔과 향만 내세우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음식과 조화를 잘 이루어 전체적인 맛과 멋을 돋보이게 한다. 음식이 그렇듯 사회도 마찬가지다. 고명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꿈꾸는 사람은 구성원들이 품고 있는 생각에 함께 젖어들어야만 진정한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다. 맛있는 음식처럼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더불어 나아갈 때 살맛 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비빔국수가 상석에 앉아 있는 반달 모양의 달걀이 어우러져 한결 더 맛을 낸다면 비빔국수는 비단이 되고 고명은 꽃이 되어 ‘금상첨화’라는 작품이 완성된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