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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저마다의 착각이 없다면 재미있는 일이, 재미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어쩌면 우리의 착각들로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착각을 잘한다. 그 남자의 가출사건과 그 여자가 혼자 착각에 빠진 사연을 가지고 소설의 플롯을 짜면 멋진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착각으로 요 며칠 즐거웠다.

늦은 가을 무렵 뒷집 남자가 사정이 생겨 집을 떠났다. 그 사정이란 게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이웃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후에는 그집 부인이 짐을 챙겨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남자가 우울증이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부부가 같이 있다는 소식은 그런 중 다행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환갑이 넘도록 살던 곳인데 얼마나 아프면 집에를 오지 못할까 다들 걱정이었다. 언젠가 막걸리 먹을 때 부르지 않은 걸 후회하기도 했다. 사실은 그는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오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는 골목에 흘리고 다니는 소똥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걸 걸려 했다. 농기구와 트럭에 먼지가 쌓여갔다.

어느 날부터 앞집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 모이는 곳에 자주 나타나 유쾌하게 웃던 모습을 내내 볼 수가 없었다. 세워둔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승용차를 보면서 수영장 평생 회원권이 아깝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수영장 문을 닫았거나 장기간 여행 갔거나 아니면 그쪽도 개인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기다렸다.

봄이 되었다. 그 남자가 돌아왔다. 평생을 밟고 다니던 땅을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두릅나무, 가죽나무, 엄나무 순이 세어질까 걱정되었나 보다. 여느 해처럼 거름을 내어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기고 밭을 돌보았다. 소똥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막 뜯은 어린 머위를 싣고 내려왔다. 간혹 읍내에도 나다녔다.

그래도 전 같지는 않았다. 마당에 내려앉은 참새같이 까불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새치름한 표정이었다. 인사를 해도 그저 빙긋 웃어 보이고는 가던 길을 갔다. 그 꼴을 보는 우리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건 핑계였다는 걸 이미 들은 후였기 때문에 집에 돌아온 것에 대해 마냥 고운 시선으로만 봐줄 수가 없었다.

내내 보이지 않던 앞집 여자가 옻나무 밑에 나타났다. 친척들을 불러 옻순 잔치를 하는 날 웃음소리가 집 밖으로 흘러나왔다. 옻순으로 기분전환이 되었는지 형제들의 우애가 힘이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건재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며칠 뒤 앞집 여자가 그간의 두문불출에 대해 이유를 말해주었다. 본인이 뒷집 남자가 우울증에 걸리게 한 원인 제공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말을 끊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고 계속 들어 보았다. 자기 집 울타리와 경계하고 있는 그 남자의 밭 측량선 때문에 싸운 이야기였다. 자기가 모진 소리를 퍼부었기 때문에 그 남자가 우울증에 걸렸을 것 같아 내내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그 남자, 오래전에 본인 친척에게 지은 죄가 들통 나서 도망을 다녔고, 그걸 돈으로 보상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못 들은 것 같았다.

옻순을 먹고 그 여자는 다시 수영장에 나다니기 시작했다. 본인의 거친 말에 대해 자책한 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계속 미안해하는 게 좋을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채는 게 좋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난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다. 언젠가 그녀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지면 그때, 아직은 그녀만 모르는 그 사건에 대한 후일담을 귀띔해 줄 생각이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은 눈도 귀도 없는 줄 안다. 본인이 진짜 아파서 병원에 다녀온 것 같은 행세를 한다. 동네 사람 누구도 표 내지 않으니까 다시 골목에 소똥을 흘리고 다닌다. 우리가 소똥에 대해 관대한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제 그런 하찮은 것보다는 좀 더 고상한 것에 신경 쓰고 살고 싶다는 걸 언제 어떻게 알릴까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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