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오렌지 맛 오렌지 / 성석제

부흐고비 2022. 4. 7. 09:02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신참치고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아는 건 모두 조금씩 틀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사전이나 그 사전을 끼고 십 년 이상 먹고 살아온 우리를 의심하는 쪽을 택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의 별명을 그 실수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어 줌으로써 복수를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비읍 씨. 일 안 하고 아침부터 거기서 뭐 해요?”
“차장님. 저 문방구 앞에서 우산 들고 있는 아가씨 다리 참 죽여줍니다. 가히 뇌살적이군요.”
“비읍 씨. 이거 비읍 씨가 교정 본 거죠? 그렇게 뇌살 좋아하면 쇄도(殺到)를 살도라고 하지 왜 그냥 놔뒀어요?”
“하하하. 리을 선배님. 선배님의 다리 역시 뇌살적이지만 저 아가씨는 춘추가 선배님의 연치에 비해 방년 이십 세는 적어 보이고 따라서 또 뭐냐, 원스 어폰 어 타임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지금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얏!”
그다음부터 한동안 그의 별명은 ‘살도’가 되었다. 한동안이란 그로부터 한 달 뒤 ‘흥미 율율’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여름철이 되고 고등학교 야구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비읍은 제가 나온 학교도 아니면서 고향 고등학교라는 이유로 열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로서는 표 사서 야구장에 갈 일은 없었고 편집부 안에서 신문을 보면서 입으로 하는 응원이 전부였지만.

“우와아! 차장님. 어제 우리의 경상고 피처가 연타석 홈런을 깠습니다. 캐처는 타석 타수 안타, 유격수는 도루가 네 개, 결승 진출은 맡아 놨구만.”
“이거 봐요. 비읍 씨. 그 학교가 자네 학교야? 그 동네는 그 학교 근처만 갔다 오면 다 한 학교 출신이 되나?”
“헤헤. 차장님, 모르시는 말씀. 경상시야 한국인의 영원한 구도(球都) 아니겠습니까. 야구하면 경상, 경상 하면 야구지요.”

듣고 있던 리을이 나섰다.
“그럼 동네 이름을 야구시로 짓지 그랬어요. 아냐, 비읍 씨 고향을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가 비읍 씨를 야구 씨라고 불러 줄게.”
어지간하면 질릴 법도 하련만 비읍은 천하태평이었다.

“이거 사방에 적군의 노래뿐이니 완전히 사면초가(四面楚歌) 일세. 오호 통제라.”
“비읍 씨,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말예요. 사면초가에서 왜 적군이 초가를 불러요?”
“역시 리을 선배님은 여자라서 역사는 잘 모르시누만. 그게 말임다. 항우가 적벽대전에서 유방에게 포위가 됐는데 말임다.”
“적벽이 아니라 해하(海河)겠지.”
“차장님, 적벽이나 해하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포위하고 오래 있다가 보니까네 초나라 유행가를 다 배웠다는 검다. 항우가 듣다가 그 노래가 너무 슬퍼서 아, 졌다 하고 자살을 했단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 노래를 불러 줬다구?”
“그쵸. 그게 장량의 작전이었다 이 말임다. 아, 근데 차장님은 한참 이야기가 흥미 율율할 만하면 꼭 초를 치십니까, 그래?”
“흥미, 뭐?”
“또 초 치셔.”
“비읍 씨. 나도 못 들었어요. 흥미 뭐라고 했어요?”
“아, 율율!”
“율율?”
“율! 율! 왜 욧!”
흥미진진(興味津津)을 흥미 율율(興味律律)로 우겨 바라던 ‘야구’ 말고 ‘율율’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한동안 자중을 하는 듯하더니 문득 결혼을 했다. 편집부에서 집들이 차 그의 집을 가면서 오렌지 주스를 샀다.

“이봐. 거 뭐 마실 것 좀 내오지.”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비읍은 십 년 넘게 마누라를 호령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면이 깎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그의 부인 역시 십 년 넘게 살림을 해 와 살림에 이골이 난 여인네 같은 몸빼 차림으로 나타나 홍분(紅粉)의 아리따운 새댁을 보러 갔던 사람들의 기대를 꺾었다. 그리고 그 부인이 내온 음료수가 비읍에게 새로운 별명을 선사했다.

“내가 산 건 백 퍼센트 천연 무가당 오렌지 주스였단 말야. 그런데 그게 언제 오렌지 맛 음료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어. 정말 환상적인 부부야.”

일동은 그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그를 당분간 ‘오렌지 맛’이라고 부르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를 혼자 마시고 있을 그의 부인은 ‘오렌지 부인’으로 부르기로 했고.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인천하 사건 / 김상영  (0) 2022.04.08
그녀는 너무 예뻤다 / 정재순  (0) 2022.04.07
마지막 선물 / 최달천  (0) 2022.04.06
숨바꼭질 / 한상렬  (0) 2022.04.06
불편한 노래 / 박보라  (0) 2022.04.0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