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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네티컷 윈저 지역의 A사 창고 건축 현장에서 여러 개의 올가미가 발견됐다. 당연히 공사는 중단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사법 절차 없이 흑인들을 목매달았을 때와 같은 형태의 고리형 밧줄이란 이유에서였다. 플로이드 사건과 더불어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아시안 혐오 범죄가 이어지는 요즘, 사안이 예민해서인지 A사 측은 인종차별과 혐오는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며 강한 어조로 입장을 밝혔다.
동네를 걷다가 달콤한 향에 고개를 들었다. 목련이었다. 하얗다 못해 고귀해 보이는 꽃의 얼굴은 혹여 고개가 땅으로 떨어질까 싶어 하늘을 향해 곧게 쳐올려져 있었다. 미카도 실크를 한장 한장 겹쳐 놓은 듯 꽃잎은 빛을 받아 우아한 광택을 뿜어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리도 향기로운데 목련을 보고 있는 내 마음 한구석이 먼 기억 속에서 축축한 감정으로 젖어들었다.
포플러 나무에 검은 열매가 달려 있다. 향기로운 매그놀리아(목련) 향 대신 탄내가 나는 이상하고도 슬픈 열매가 남부의 더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다가 따뜻한 햇볕에 서서히 썩어간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이상한 열매’ 가사 내용이다. 그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빌어 전해진 인간의 이기와 우월주의가 낳은 참상. 허무하게 거꾸러진 생명이 달린 포플러 나무와 나무에 달려 태워진 흑인들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피부색이 다른 어떤 인간의 류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그들은 그날, 자신들의 인간성도 이상한 열매와 함께 나무에 달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동물 이상이든가 동물 이하다’라고 말했다. 백인들은 자신이 전자라 생각했고, 흑인들을 후자라 생각했다. 이렇듯 저급한 우월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의 속성 안에 몰래 숨어 비열하게 기생한다.
인간성(humanity, humanitas)이란 단어가 ‘매장하다(humanda)’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혹 옛사람들은 문명의 원리를 장례에서 찾은 건 아니었을까.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인들이 화장지부터 허겁지겁 사들인 원인이 인간다움 즉 인간성에서 나왔다고 했을 때 과연 그런가, 하고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주장엔 일면의 일리가 있다. 동물은 배변 후 닦는 행위를 하지 않기에 인간성을 한낱 화장지에서 찾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보편적 동감이라는 인간성의 뜻과 만나는 지점이다.
때론 그 보편적 동감이란 게 오용되기도 한다. 인간의 이기가 작용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유리한 편에 세워 상대적으로 약한 쪽을 향해 불의의 힘을 가하게 된다. 결국 인간성마저도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 인간이란 뜻이다. 그것을 분별하는 선은 피부색, 성별, 국가, 이념 등으로 옷만 바꿔 입을 뿐 오랜 시간 동안 본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냥 이걸 포괄적인 인간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마저 든다. 하지만 그러자니 목련 향이 계속 내 속을 메스껍게 한다. 탄 내를 풍기기 때문이다. 불편하다.
포플러 나무에 달았던 건 검게 변색한 인간성이다. 지나가는 이웃의 티셔츠 문구에 눈길이 간다. 아시안 혐오를 멈추세요. 이 문장을 다른 말로 바꿔 본다. 인간성을 회복하세요. 인간성을 나무에 달지 마세요. 인간성에 올가미를 씌우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향기로워야 할 당신의 인간성은 메케한 냄새를 풍기며 더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다가 따뜻한 햇볕에 서서히 썩어갈 것입니다.
빌리 홀리데이는 ‘이상한 열매’를 부를 때만큼은 기도하는 것처럼 오로지 가사와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했다. 노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애초에 루이스 앨런의 시에서 시작된 이 노래는 후에 릴리언 스미스의 소설로도 발표됐고, 지금도 일러스트레이터 수 코우의 목판화와 수많은 사람을 통해 고발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유명 설치미술가인 양혜규 작가의 동명 작품 역시 인종차별을 고발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 코일 케이블에 달린 건 검은 몸뚱이가 아닌 화초들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열매, 소중하고 아름다운 생명에 대한 추모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며칠 후 나간 산책길에서 그 목련을 다시 만났다. 봄바람에 떨어진 하얀 꽃잎들이 누렇게 변색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하늘을 향해 쳐들었던 고고한 얼굴이 이젠 땅에 떨어져 사람들 발에 짓밟히는 신세가 됐다. 떨어질 줄 모르고 고개를 쳐들었던 것에 대한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우리 주변을 어지럽게 서성인다. 단지 미국에 오욕을 남긴 현대 역사가 아니다. 인류 문명이 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어쩌면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이유를 찾는 것, 경계(境界)를 경계(警戒)하는 것, 진짜 봐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것. 그래서 인간다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가, 외면하고 싶은가, 여전히 속이 뒤집힐 정도로 불편한가. 하지만 불편한 이야기는 불편하게 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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