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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이 엄마가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어느새 나를 할머니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가를 들여다본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왔니, 나의 천사. 요 발가락 좀 봐, 어쩜 이리도 보드라울까. 흠흠, 달큼한 냄새. 선물 같은 녀석이 고마워서 다시 또 본다. 길고 숱 짙은 속눈썹, 반지르르한 이마, 갓난아기가 밤잠을 푹 자니 어미가 한결 수월하다.
아가를 바라보는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젊디 젊은것이 내 새끼, 내 새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쏟아낸다. 뭘 안다고 그새 새끼 타령인가. 딸이 어미가 된 사실조차 어색한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허나 이내 곱게 눈을 흘긴다. 이런 날을 얼마나 고대했으면 저럴까 싶다.
혼인한 지 이 년 만의 수태는 온 가족을 설레게 했다. 두 번째 진료받으러 간 딸은 전혀 뜻밖의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픈 소식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다.
좀처럼 아기 소식이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딸을 데리고 한약방을 찾아갔다. 이름난 불임클리닉도 알아보았다. 부부가 나란히 의학적인 검사를 받고 처방한 약을 먹고 나면 합방할 날까지 정해준단다. 시키는 대로 한 몇 달 뒤, 날을 정하기도 전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딸의 표정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매일 출근 전에 아기를 지키기 위한 배 주사를 맞았다. 그것도 손수 말이다. 어릴 적 병원에서 주사 한 번 맞추려면 난리굿을 빼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단단히 마음먹었을 딸을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아이가 셋인 나로 하여금 자식하고의 귀한 연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클리닉에 동행한 그 날, 딸의 자궁에서 생명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었다. 그러나 딸은 여전히 무덤덤할 뿐이었다. 두어 달 지나서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담당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던 게다. 기다림의 시간을 익히며 어른에 한 발짝씩 다가서는 딸이 애틋하고 대견했다.
내 딸이 세상 빛을 처음 보던 날, 면회 시간이 되어 아가를 만나러 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유리문으로 이름표를 확인한 간호사가 침대에서 아가를 안고 왔다. 미간을 찡그리던 아가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뺑긋 웃었다. 배냇짓이 분명할진대 그렁그렁 눈물이 났다.
유난히 뽀얀 아이가 새까만 두 눈으로 발밤발밤 골목을 걸어 다니면 주변이 온통 환했었다. 동그란 마음처럼 어느새 가슴과 엉덩이도 둥글어지고 모든 것이 여물어갔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 품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딸이 신행(新行) 가던 날이었다. 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차에 싣고 새신랑신부가 출발하자, 무언가가 송두리째 빠져나간 듯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싱크대 앞에서 뒷정리를 하던 내가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안방에 있던 남편이 놀라 뛰쳐나왔으나 말없이 지켜만 봤다. 저녁 무렵에 그가 말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그토록 서러웠던 까닭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찔레꽃 피는 오월이었다. 한창 입맛이 당길 시기라 딸에게 먹고픈 음식을 사 줄 요량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개나리처럼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만삭에 가까운 배가 어지간히 불룩했다. 날씬하던 몸매가 마치 남산만하게 부풀어 올랐는데도 표정이 밝았다. 아기가 하루에 몇 번이나 배를 빵, 찬다고 조잘대는 목소리에 윤기가 흘렀다. 그런 딸이 너무 예뻤다. 의젓하고 담담하게 생명을 키워내는 모습이 거룩해 보였다.
딸이 병원에서 산후조리원으로 옮기던 날, 난생처음 내 딸이 낳은 아가를 안아보았다. 그때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일렁였다. 작디작은 발가락 손가락이 다섯 개, 눈도 코도 사랑스러웠다. 우리 아가 덕분에 네 어미가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구나. 무럭무럭 자라서 부디 네 엄마를 많이 웃게 해 주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이 아가는 딸 삶의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 딸은 가없는 사랑으로 아가를 품어줄 터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보냈다는 말이 언뜻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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