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저녁 풍경 / 김이경

부흐고비 2022. 4. 11. 08:31

아파트 주변을 휘도는 냇물을 따라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천변을 산책하는 것이 요즘의 낙이다. 동쪽은 고속도로 가까이 까지, 서쪽은 물왕호수로 이어져 있다. 동쪽은 30여 분의 산책로이지만 서쪽은 호수를 돌아 나오려면 두어 시간이 넘는 제법 먼 거리다. 동쪽으로 걷는 날이 많았다.

들풀이 우거진 천변은 늘 바람이 수런거렸다. 가을로 접어들며 갈대와 억새꽃이 흐드러지고 고마리가 앙증맞게 물가를 장식했다. 여뀌도 꽃임을 주장하듯 물가의 푸른색에 붉은 점을 찍었다. 풀꽃 그림자 아래엔 작은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쉬고, 흰뺨검둥오리 몇 마리는 구색 맞추듯 수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평화로운 풍경화다. 가끔은 백로와 왜가리도 풍경을 더했다.

풀꽃 이름을 불러보고 멀찌감치 공원의 화살나무 붉은 단풍에도 눈길을 주다 문득 궁금해졌다. 강이라고 해도 좋을 제법 큰 물길인데 이름이 무엇일까?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하천의 이름이 쓰인 푯말이나 이정표를 볼 수 없었다. 물어볼 이웃도 없어 궁금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게로 와서 꽃이 된다”는 시가 아니더라도 날마다 만나면서 이름조차 모른다는 게 찜찜했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지 못하고 행정복지센터에서도 모른다기에 물어물어 시청 하천관리과에 문의했다. 다행히 하천관리과 직원이 양달천과 방화천 두 개의 하천이 흐르다 합쳐져 물왕 호수로 흘러든다는 설명을 제법 자세히 해주었다.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주 가는 동쪽 하천은 양달천이었다.

양달천의 가을과 함께 한 해를 보내며 가끔 물왕호수까지 먼 길을 걸어 돌아올 때도 있었다. 여기저기 뒤적거려 물왕호수의 물은 다시 보통천이라는 냇물을 지나 오이도 바다로 흘러간다는 것도 알아냈다. 가끔 바라보는 호수의 야경은 반짝이는 꽃밭이었다.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우거졌던 풀들이 야박하리만큼 잘려 밑동도 보이지 않는 천변 풍경도 추웠다. 냇물은 얼어붙었다. 그런데도 언 냇가를 걷다 보면 드문드문 웅덩이가 생긴 곳들이 있다. 특별히 깊은 것 같지도 않고 그곳만 햇볕이 비치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올라서도 꿈쩍 않는 얼음장 바로 곁에서 살랑거리는 겨울 물의 속살은 그 나름으로 새로운 풍경이었다. 짝을 지어 다니는지 물오리들은 늘 짝수로만 보였다. 오늘은 어느 웅덩이에서 오리들이 쉬고 있을까? 정말 제 짝하고만 다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오리가 홀수로 보이면 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버릇도 생겼다. 왜가리의 고고한 자태를 멀찌감치서 훔쳐보며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물오리의 빨간 맨발이 안타까워 괜히 내 손을 호호 불기도 하며 냇가를 걸었다.

제법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유난히 밝고 빛나는 날이었다. ‘찬란한 태양’이니 ‘오 밝은 태양’이니 하는 찬사는 아침 태양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맑고 밝고 따뜻한 겨울 햇살을 따라 발길이 저절로 서쪽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바라본 호수는 비스듬한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아득한 빙원이었다. 아슬하게 커다란 은빛 쟁반에 소복이 담긴 햇살이 춤추듯 노래하듯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빛무리! “햇살이 참 좋다.” 어디선가 양희은의 구성진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호숫가를 걸었다.

양달천 변 풀들이 알뜰하게 베어진 것과 달리 호숫가엔 온갖 풀덤불이 우거져 있다. 쑥, 개망초, 바랭이, 강아지풀…. 꽃과 이삭을 다 떨군 빈 몸을 호숫가에 부려놓은 마른풀들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더러는 늘어뜨린 가지가 물에 잠겨 얼어붙기도 하고, 더러는 구부정히 휜 허리를 언덕에 기대기도 하고, 양지 아래 금빛 보료인 듯 빛나기도 하는 마른풀. 온갖 남루함도 그곳에선 은빛 금빛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호숫물이 스미듯 젖어드는 것은 왜인지….

가지가 휘도록 꼬투리를 매단 떨기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셀 수도 없는 꼬투리가 짙은 갈색 껍질 틈새로 하얗게 빈 가슴을 언뜻언뜻 드러내는 큰낭아초. ‘이리의 어금니’란 이름과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꽃’이라는 꽃말에서 느끼는 묘한 어긋남이 겨울 낭아초 앞에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품은 씨앗이 조금 더 익을 때까지, 조금 더 마를 때까지 보듬고 기다리던 나무. 가만히 손만 대도 바스러지는 낡은 몸뚱이로 남아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나무의 희디희게 빛나는 빈 가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물이 빠져나간 강턱에서 나부끼는 키 큰 갈대와 억새는 황금빛 바람이다. 강턱 너른 땅에 드러누운 금빛 바람에 슬며시 섞여들어 걷는다. 저 안에는 달뿌리풀이란 이름을 가진 풀이 함께 있으련만 애써 가려내지 못한다. 미안하다. 그러나 달뿌리풀이면 어떻고 갈대면 또 어떤가. 마른 풀이 쑥인들 개망초인들 그걸 따로 이름 불러 무엇할까. 그저 마른 풀이거늘. 뒤엉키고 널브러진 풀더미들에서 얽히고설키며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물은 늘 합쳐지고 나뉘면서 흐른다. 오늘의 비는 어제의 강물이라고 했던가. 오늘 반짝이는 저 얼음은 봄이 되면 재잘거리는 강물이 되어 흐르겠지. 바다로 흘러간 물은 양달천도 방화천도 보통천도 아니다. 그저 바닷물이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여놓은 허망함일 뿐. 이름만 지우면 저들과 나는 얼마나 닮은꼴인가.

이대로 걷다가 풀더미 곁에 살포시 앉으면 나도 풀더미 하나가 될 것만 같다. 수많은 잡풀 더미와 함께 양지바른 호숫가에 앉아 풍경 하나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펜팔 여인 / 곽병길  (0) 2022.04.12
미안한 무게 / 피귀자  (0) 2022.04.11
연필 / 모임득  (0) 2022.04.08
여인천하 사건 / 김상영  (0) 2022.04.08
그녀는 너무 예뻤다 / 정재순  (0) 2022.04.0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