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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펜팔 여인 / 곽병길

부흐고비 2022. 4. 12. 08:46

오랜만에 학창 시절의 앨범을 보며 옛일을 상기시켰다. 사진은 이미 빛이 바래 누랬다. 오래전 묻힌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어린 시절로 가고 있었다. 이름도 잊은 얼굴들이 지나가고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얼굴도 있었다. 사진은 왠지 먼지 묻은 그리움이 쌓여있는 것 같았다.

앨범을 넘기는 손가락이 저리었다. 넘겨지는 면마다 희미해진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풍 가서 찍은 사진, 교정에서 어깨동무처럼 해서 카메라에 몸을 맡긴 포즈는 어린 티가 너무나 보였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입꼬리가 스스로 올라갔다.

계속 낡은 앨범을 뒤로 넘겼다. 몇 장을 더 넘기니 아름다운 여학생의 사진이 나왔다. 제법 큰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소녀는 큰 나무 옆에 서 있었다. 흑백사진이지만 그렇게 빛이 바래지는 않았다. 그때 보낸 편지도 함께 보관되었다. 영어로 된 편지 끝에 자기 얼굴을 손수 그려 놓았다. 어찌 보면 청순함이 묻어 있는 초상화라고 할까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엔 일본어로‘사요나라’라고 적혀 있었고 이름은 한자로 적혀 있었다. 펜팔로 받은 편지 속에 사진이 함께 있어 놀랬지만 그동안 보관하고 있음도 놀라웠다.

고등학교 시절 펜팔 친구였던 일본인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하토리 마미꼬였다. 편지엔 펜팔 친구가 되어 주어 반갑다는 인사로 시작되어 있다. 자기의 취미와 앞으로의 꿈이 적혀 있고, 나에게도 취미가 무엇인지 앞으로 뭣이 되고 싶은지를 묻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 페이지가 떠올려졌다. 그때가 1966년도였으니 지금쯤 마미꼬는 할머니로 어딘가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당시 제법 연정을 느끼며 편지를 주고받고 했지, 싶다. 만나고 싶어 했던 마음이 그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 후 수년이 지나 한 번 기회가 되어 집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은 편지밖에 없었다. 그것도 손 글씨로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간 마음을 떠올리면 행복을 주워 담듯 기쁨이 넘쳤지 싶다. 지금처럼 메일이라는 전자 우편 같은 것이 없었기에 일일이 영어를 그림 그리듯 대문자, 소문자를 필기체로 썼었다. 우편으로 주고받는 옛적 이야기지만 그런 시대에 외국 여학생과 펜팔을 한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자랑이었다. 국내 여학생보다 훨씬 편하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 좋았다.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외국인과 펜팔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세상을 알아가는 계기가 된 듯했다.

때문에 영어 공부도 많이 했었다. 주고받는 소식은 일상적인 생활 영어로 시작했다. 호기심이 많은 일본의 문화에 대해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한 답이 오곤 했었다. 사진으로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상상하면 흥미가 절로 났었다. 내가 사회인이 되면 꼭 일본으로 가 만나보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꿈꾸는 자에게 희망이 있다고 했으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니는 직장에서 일본에 연수 갈 기회가 생겼다. 직장 생활할 때 배워둔 일본어로 여유롭게 떠났다. 가면 마미꼬를 만나고 싶었다. 아는 일본인은 마미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 수영 공항에서 출발하여 오사카에 머무는 동안 줄곧 마미꼬를 생각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만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 달의 시간을 거의 다 보내는 동안 마음이 급해졌다. 궁리 끝에 지도를 보며 후지야마가 있는 시즈오카 쪽 근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펜팔의 여인으로 만나고 싶었다. 시즈오카 쪽은 온천도 유명하지만, 관광을 겸하여 가면 더 좋을 것 같아 찾아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미 결혼했을 터이고 그냥 옛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찾기로 했었다. 하지만, 집 가까이에 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산다면 만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쉬는 날 여행 겸 떠나기로 했다.

오사카역에서 시즈오카행 신간센을 탔다. 오사카 밑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도착해서 주소를 들고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더니 약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일본 택시비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버스로 가기에도 아직은 일본의 거리에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했다. 한참 가다가 멈춰 선 곳은 전형적인 일본 집 앞이었다.

초인종을 눌러 누구라도 나온다면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궁리하며 망설이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용기 내어 초인종을 눌렸다. 마미꼬의 어머니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드신 분이 나와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마미꼬가 보내준 편지를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아직 이 이곳에 살고 있는지 물어봤다. 편지를 보더니 놀래면서 당황해하셨다. 결혼해서 멀리 가 있다고 했다. 맞벌이 부부인지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관광 길에 생각나 혹시나 해서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괜찮다며 뒤돌아 나왔다. 돌아 나오는 내 모습이 묘했다.

집과 직장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지만, 메모만 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용기였는데 다시 약속하여 만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 있고 직장생활로 바쁠 텐데 전화해서 목소리만 듣는다면 더 어색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온천에 가서 목욕이나 하고 돌아왔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외국인을 편지로 사귄다는 것은 호기심 때문일 거다. 결국 만남의 다리가 없으면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헤어진다. 마미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을 앨범 속 사진에서 잠시 과거로 돌아가 회상한 것뿐이다. 그러나 연민의 정을 느낀 사람들은 잊히지 않는다. 추억을 어루만질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 난 아니라고 보고 앨범을 접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지면서 집집마다 전등을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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