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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심종록 시인

by 부흐고비 2022. 4. 25.

심종록 시인
1959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시집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쾌락의 분신자살자들』, 『신몽유도원도』 등과 전자 시집 『빛을 향해 간다』, 사진 산문집 『벗어? 버섯!』, 장편소설 『모리티우스를 찾아서』가 있다. 천상병 귀천문학상을 받았다.

 



코로나 시대 / 심종록
황홀하지, 핥고 빨다가 먹어버리는 건. 버전을 업 해 난도질해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기도 하는 건 사랑 때문이지. 사랑하면 따먹고 싶잖아. 따먹히고도 싶잖아. 절기마다 피와 살을 나눠 마시는 거룩한 카니발리스트들. 엽기적인 몬도가네들. 세상은 공존의 법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망각했어. 먹었으면 먹힐 줄도 알아야 했는데 오만방자했어. 글로벌 팬데믹; 관계의 역전이야. 주도권은 이미 넘어갔어. 갯세마네에 올라가 쓴 잔이 지나가길 빌어야지. 獨守空房 속의 히키코모리. 나가지 않으면 안전해. 不出戶 知天下라니깐.//

노란다발버섯과 별 / 심종록
-별들 소유할 수 없기에 내 것이 아니기에/ 더 아름답고 그립고 탐나고 때로 애틋해지는 존재들 -//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의 우물 속은/ 빨갛게 루즈를 칠하고 있는 입술 같고/ 터널을 향해 달리는 늦은 기차 같고/ 기차를 타고 흔들리다 졸다/ 문득 깨어 덜컹거리는 유리창 비춰 보이는/ 낯선 얼굴 같고 헝클어진/ 머릿결 같고/ 등받이 의자에 불편스레 기대 다시 감은 눈 같고/ 유년의 봄눈 내리던 날 피던 동백꽃 같고/ 떨어져 구르던 꽃잎 같고/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 습관적 귀향 같고/ 기차를 내리면 나를 기다릴 따뜻한 당신 같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으스러지게 껴안는 내 가슴 같고/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의 우물 속은/ 낯선 사람과 하룻밤 같고/ 아, 끝내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라는 역 같은/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의 우물 속은//

모퉁이 / 심종록
햇빛 고여 있던 빈 의자 앞에서 시를 쓰고/ 모래바람 일어나는 폐허의 골목길 밤하늘 아래서도 행복했던 이유는/ 귓전에 맴도는 노래 때문이었지/ 당신이 들려주어 알게 된 노래는 아름다웠어./ 그 곡조와 가사를 완벽히 익히려 얼마나 애썼던지 얼었다 녹은 봄눈처럼 당신은 없고/ 혼자 남은 사람이 쓸쓸한 노래 허밍 하며 굽어진 모퉁이를 돌아간다.//

떨어진 사과 / 심종록
나무에 사과/ 매달려 있음이여 주렁주렁/ 뿌리의 입덧이 한참 심해/ 선혈을 흘리며/ 내가 아픈 것은/ 어머니도 나를 배고 저 하늘을 베어 먹은 탓일까/ 철조망 근처/ 과수원 길을 걷다/ 떨어진 한 알을 줍네/ 한 쪽이/ 물들어 있는//

해금(奚琴) 23 ㅡ봄 / 심종록
나무들 불탄다 복숭아 살구 목련 아카시들 몸 뜨거워지는 한 시절 견디지 못해 제풀에 태양 휘발유 들이붓고 불 당긴다 나비여 벌이여 불나비사랑이여 어서 오라고 아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환한/ 저 꽃불들, 쾌락의 焚身自殺者들// 신록은 그래서 輓章이다//

다시 봄, 넋 / 심종록
이마를 짓밟더니 옆구리를 걷어찬다/ 공포가 일렁이는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벌어진 잎을 틀어막는다 목을 꺾는다/ 헹가레 치듯 허공 높이 들어 올렸다가/ 가파른 골짜기에 처넣는다/ 산이 허물어진 자리/ 없던 허공 하나가 환장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울창하던 계곡은 평지로 변했다/ 네 채의 건물이 평지 아래 40미터 깊이에 묻혔고/ 실종자 명단에 하나의 이름이 추가된다/ 우공이산은 고전의 지문에나 나오는 단어/ 무저갱의 깊이를 지폐의 위력이 묻어버린다/ 생은 그렇게 엎질러진다/ 묵묵한 막에는 막간의 틈이 있다/ 사라졌던 물길이 다시 나타나고/ 숨죽였던 바람이 다시 출렁이고/ 하늘 모서리에 찢어진 노을이 걸리는 것도/ 틈 때문이다 틈 속으로/ 떨어지는 낙엽은 흙이 되고 봄눈이 녹아 스며들고/ 오래 잠들었던 전생의 넋도 이생으로 건너오려고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청설모는 오줌 갈기고 나무를 오르고/ 뻐꾸기도 날아가며 물찌똥 투하한다/ 허공을 부유하던 씨앗 하나가 날아와 뿌리내리면/ 새 몸을 입기 위해 분주해지는 넋/ 저기 봐요 분홍색 꽃 예뻐요/ 바위틈에 아기 진달래 피었네/ 꺾어드릴까?/ 지대 메고 앞서 걷던 젊은 스님 헤벌쭉 돌아보며/ 수작질하는 봄//

봄, 행복 / 심종록
황사가 시야를 가린다. 세상이 보이지 않으므로 산수유 꽃 핀다 더는 기다릴 여력이 없었는지 막무가내/ 타클라마칸에서 발원한 모래먼지는 시야만 가리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증상을 복합적으로 안긴다./ 21시간 전; 산수유 꽃처럼 신열이 올랐다 해열제를 복용했으나 허사였다/ 9시간 전; 불면으로 뒤척이다가 일어나 창백한 거울 속 유령과 대면했다/ 4시간 전; 카카오톡으로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3시간 전: 중년남자의 충혈된 눈빛/ 1시간 59분 전; 청소차가 출입문을 가로막고 선 모텔 후문으로 여학생의 손을 잡고 나오는 교수 1시간/ 58분 전; 아들 학자금 대출을 받은 여자가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타려고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다가/ 00시 00분; 딱 마주치는 골목 1초 후; 봄에는 그런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물기와 불량과 쾌락과 의무와 맹목이 뒤섞이는 봄/ 한 세상 후; 네 손 움켜쥐고 세월이 그어놓은 무단출입 금지선을 넘다가 문득 뒤돌아 보면// 산수유 꽃 마른 강변, 햇살만 엎질러진다//

봄비, 통속적으로 / 심종록
봄비 맞으며 떠난 기차 밤비 되어 도착하는 순천/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충분히 젖어버리는/ 육식공룡 같은 대학병원// 사각의 제모를 쓴 수위 주차료 정산하는 주차장 지나/ 공룡의 항문쯤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안실은 필시/ 후미진 곳에 있게 마련이다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배설해내는/ 장기의 끝부분처럼// 응급차에 실려 공룡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싸늘한 시신이 된 너는/ 지금 생의 마지막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잠시 구치중이다/ 너는 없고 환하게 웃는 사진 한 장이 나를 맞이한다// 언젠가 너는 분명 저렇게 웃었을 텐데 도무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네 웃음이 더 쓸쓸할지도 모른다 웃는 사진 앞에 앉아/ 빚 갚으로 왔다가 빚만 남기고 떠나는 세상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다가 더는 회의할 것이 없어진 나는/ 잠시 유보해 두었던 이별을 끝내 감행한다/ 공룡의 항문 속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열차 시간은 멀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통속적인 봄비 속에서 나 또한 통속적이 된다/ 통속다방 미스 통이 통속적이게도 그리워진다/ 비에 젖는 순천 버스터미널 뒷골목 통속다방 미스 통/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통통한 젖무덤 위에 트럼펫/ 분다는 애인이 새겨주었다던 나비 문신/ 살짝 내보이던 문신은 나비 되어 날아가고 젖가슴만 출렁이던/ 통 양은 없고 통속다방도 없고 비에 젖은 거리는 여전히/ 그 시절만큼이나 통속적이어서// 나는 낡은 음악다방 지하 계단을 내려가 엽차 잔에 도라지위스키 따라놓고/ 봄비나 듣는 것이다 박인수도 듣고 이은하도 듣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불현듯 사라지는 것이리라/ 몸 비틀며 노숙하는 나뭇잎처럼 통속적으로//

아침노을 / 심종록
그제는 축하 자리에 다녀왔고/ 어제는 지인의 상가에 들렸다/ 날 받아놓고 부정 탈지도 모른다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집에 온 아이와 저녁을 먹고 와선에 들었다/ 흔들어 깨어보니 돌아가다가 차가 퍼졌다고/ 날 받아놓고 다리 다치더니 이번엔 엔진이 터져버렸다고/ 당신 때문에 부정 탄 거 아니냐며 남의 속도 모르고/ 왜 그렇게 쏘다녔던 거냐는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결혼식 날 일어날 상황도 아니고 내일 아침 출근 중에 벌어지지도 않았고/ 일요일 저녁 따뜻한 밥 나눠먹고 돌아가다 맞닥뜨린 것이 다행이라고/ 지난주에는 다리를 깁스하고 오늘은 차가 퍼졌지만/ 내일 예기치 않은 우연이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다행이 아침노을처럼 찾아올 거라고//

파지 / 심종록
강냉이 장사를 부른다/ 겨울을 준비하다/ 방안 여기저기 쌓이고 버려진 종이를 주워 모아/ 강냉이 장사를 부른다// 교보일번가에서 산 소월 시집도/ 아무렇게나 구겨 넣더니/ 관에 얼마라고/ 강냉이 한 주먹 값도 안된다고 한다// 내 살아온 날들에/ 구리나 양은 같은 것은 없느냐고//

취매역* / 심종록
세상이 마냥 헛헛하게 느껴질 때 취매역으로 향하네/ 취매역은 도취와 몰입의 환승역; 좁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홀로 앉아/ 술병을 까네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 되도록/ 때로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기도 하는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네/ 그건 당연한 일 오래전에 나는 사랑을 망가뜨렸으니/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릿한 슬픔과 모르핀 같은 회한// 남루한 사내가 이내를 털고 들어오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파삭 늙어버린 사내를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네/ 나는 고개 돌려 외면하네 관계는 끈적거리는 먼지와도 같아서 따분하기 짝이 없고/ 오래전에 청춘을 배반했으므로 은화 서른 냥에 스승을 판 사내처럼// 회한과 대작하며 마시는 동안 깜빡 잠이 드네// 복숭아 꽃잎 떠서 흘러오는 취매역 폭설 쏟아지는 취매역 토네이도 휘몰아치는 취매역/ 울컥울컥 토악질 올라오는 취매역// 비틀거리며 취매역에 내리네/ 자욱한 안개 매구처럼 나를 감싸네//
* 취매역(醉呆驛): 남춘천역 풍물시장 안에 있는 주점.

이, 별 / 심종록
대리석 바닥 위를 몰려왔다 몰려가는 사람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 초저녁달처럼 싱싱한 이, 별//

생(生) 한 송이 / 심종록
해안가 절벽/ 자주빛 꽃이 봉오리를 펴고 있다고/ 해풍에 쓸리듯 휘청대던 잎들이 꽃 피울 준비를 한다고/ 그대 보낸 엽서 한 장 무적처럼 도착한다// 해국 또는 바다국화라고도 부르는 국화과 다년생 풀보다 사실/ 그대 소식 더 궁금했다 자주색 꽃이야/ 해풍 속에 꽃 피우고 무서리 내리면 열매 익겠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태양의 흑점을 거느린 사람이여/ 간밤엔 어떤 폭풍이 백야의 잠을 방해했는지/ 어떤 자기장이 오로라의 시야를 끈질기게 어지럽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 그대 향해 달려간 것을 아는지/ 먹빛 하늘이 코발트블루로 깨어나는 시간까지 달려간 것을 아는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사람을 믿는 거라지만/ 해안가 절벽에 매달린 꽃 같은 사람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세상이 심장을 물어뜯더라도/ 살아라 부디 살아서 생(生) 한 송이 피워라//

민들레꽃 / 심종록
얼마나 가물었으면 민들레들은 꽃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앉은뱅이 꽃을 피웠나. 조선 포공영은 씨가 말라버렸는지 흔적조차 없네. 용래 할아방은 경주 교외에 피는 가을 민들레를 시인의 얼굴이라 했는데 메마른 봄날 꽃대도 올리지 못하고 뿌리 위에서 바로 꽃 피워버린 민들레꽃 자꾸만 여린 손 흔드는 민들레꽃//

꽃나무 / 심종록
시커먼 석탄열차 강을 건너면/ 새벽빛 따라 더디게 봄이 오곤 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누이는/ 철조망 너머 꽃나무로 서 있었다./ 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열병은 무서리 내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꽃나무 뽑힌 자리에/ 아파트 신축공사현장이 들어서고/ 벼락부자가 된 남자의 손을 잡고/ 누이는 여름 밖으로 사라졌다.// 뒷바퀴가 휘어진 자전거 핸들 위로/ 사금파리 같은 햇살만 쌓였다 흩어졌다./ 갈대가 치열하게 피었다가 시들었다.// 무서리 내리던 날./ 남자는 탕자처럼 돌아왔지만/ 누이는 오리무중이었다.// 증오가 그리움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눈이 강물 속으로/ 자맥질하듯 땅거미가 졌다./ 녹슨 자전거를 덮는 눈처럼/ 세상은 창백해졌다.//

로또 시티 / 심종록
밤색의 낡은 가방 다리 난간에 서 있다/ 넘실거리는 흙탕물/ 갈비뼈 드러낸 굶주린 개 떼들/ 저들의 허기에 걸려들면/ 신념도 희망도 무용지물이다/ 노래는 오열로 변한다/ 기도는 지하실의 익사체로/ 신은 시틋하고/ 인생은 찬미하기에 신음으로 벅차다/ 물안개 가려진 불임의 로또시티/ 밤색의 낡은 가방 같은 사내가 서 있다/ 그를 본 적이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다/ 삭은 난간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행복하고 싶었어 아프지 않고 싶었어/ 흐느끼고 있다//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우고/ 생은 함부로 끝나지 않는다//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의 생태에 관한 보고서 / 심종록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의 마지막 일격에 비명도 없이 혼절하는 세상입니다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이 실신한 세상을 끌고 지나갑니다 소스라친 풍경이 뒷걸음질칩니다 섣부른 참견은 일신상에 해롭죠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은 외모에 버금가는 욕망으로 빛납니다 세상을 독식할 기대가 화염으로 타오릅니다 혼절했던 세상이 깨어나네요 꿈틀거리는 사지가 무척이나 뇌쇄적입니다 마른침을 삼키며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 뜨겁게 발기된 소외를 모든 세상의 기원*속으로 밀어…넣습니다// 따뜻하게 부풀어 오른 주름 속에서 깨어난 에메랄드빛 바퀴벌레말벌의 애새끼 소란스럽게 세상을 폭식하기 시작합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접혔던 주름이 팽팽해지고 계절이 마구잡이로 꽃들을 토해냅니다 룰루랄라 없던 산맥이 허공에 활화산을 만들고 무아의 해일이 감각의 정수리를 넘실거립니다 기적의 극지방에는 뇌성이 연거푸 울고 적도에는 은총의 폭설이 길을 끊어놓는 그때 문득// 포만감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쳐들리는 창밖// 누가 저 얼굴 모르시나요//
* 세상의 기원: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김종삼 / 심종록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김종삼 시인을 만났습니다/ 반갑다고 어딜 가시느냐고 요즘도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가끔 자작시를 읽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그리운 안니 로리만 부르시고 계셨습니다/ 언젠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당신의 시를 읽는 아주머니를/ 뵌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때서야 뒤돌아보시면서 노망든 늙은이 아니었느냐고/ 아직도 자기를 쫓아다니는 철없는 처녀를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행복하시겠다는 내 말을 귓밖으로 흘리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는데 버스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이고 손잡이 끝에 매달린 북치는 소년의 어깨너머로 하나 둘 내리는 눈발/ 부소산성//

11월 / 심종록
단풍나무 숲으로 간다/ 안개가 길을 막아서지만 그는 완고하다/ 소란에 놀란 암묵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움추린다/ 숲은 폐업을 앞두고 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들이/ 감당하지 못한 정도로 비대해져서 빚만 지고 말았다/ 그보다 먼저 도착한 비바람이/ 목을 쥐고 흔든다 미처 포장지를 뜯지 못한 열망들에게까지/ 차압딱지를 붙이고 있다 난파선에 올라탄 난민처럼/ 위태롭게 발버둥친다/ 무모한 열정이 욕망의 원동력인 것은 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환하게 밝았다가 시무룩 꺼지는 것들/ 잃어야 얻는 것들 아니 얻었기 때문에/ 잃어주어야 하는 순리 새들마저 떠나버린 단풍나무 숲/ 서리가 발목을 휘감지만 그는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다//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 심종록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붉은 꽃을 던지고 싶다/ 그러니까 그대가/ 내 가슴에 한아름 안긴/ 한아름 피워 올린/ 뿌리 잘린 엉겅퀴꽃을 던지고 싶다/ 내 사랑은 뿌리 잘린 붉은 가싯잎/ 내 욕망은 뿌리 잘린 붉은 줄기/ 내 절망은 뿌리 잘린 붉은/ 내 권태는 뿌리/ 그러니까 안개꽃 더미 속에 어울리지 않게/ 생생한 내 주검도 붉은 꽃/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그러니까 욕을 던지고 싶다/ 욕도 붉은 꽃/ 줄기가 시퍼렇게 억세다//

사랑 노래 ㅡ홍시 / 심종록
온기 가졌던 것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려고 부산스러운 세상/ 기별 없는 날들 견디던 마음 흙벽으로 주저앉습니다// 잊힌 걸까요.// 기우는 햇발 동쪽으로 긴 그림자 끌며 설핏해지는데/ 황혼으로 쌓이는 소실점 앞에 선 사람이라서, 차마 사람이어서/ 세상을 지워버리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노라는 맹신 밀물로 가득 차오르는 밤/ 나무는 폐부 깊숙이 숨겨 두었던 심지를 돋우고 그리움의/ 스위치를 올립니다// 곧 다녀가시겠지요 기별이라도 주시겠지요/ 단념하지 못하는 마음 고봉으로 붉어지는 아침입니다//

홍옥 / 심종록
청량리에 간다/ 홍옥을 만나러/ 어디에도 있는/ 홍옥, 그러나/ 청량리에 간다/ 홍옥을 사러// 맨 처음/ 그댄 홍옥이 아니었겠지/ 마른 몸매에/ 살이 오르고/ 무성한 잎의/ 머릿결이 흩날리고/ 둥글게 씨방을 채워 나갈 때/ 태양이었겠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고/ 믿었겠지// 홍옥은 그대 이름/ 아니, 홍옥은 사과/ 사과의 즙을 마시며/ 어쩔 줄 모르는 그대/ 사과의 씨를/ 아무 곳에다 버리는 홍옥/ 정말 우연처럼/ 가지에서 떨어진// 헝겊으로 닦으면/ 빛나는/ 홍옥을 사러/ 청량리에 간다//

찔레꽃 / 심종록
누이를 다시 보았다/ 치솟는 전셋돈 감당할 수 없어/ 변방으로 쫓기듯 터를 옮긴 후였다/ 창신동 산 19번지 무너진 성벽 아래/ 최루탄 연기 안개처럼 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해 봄/ 낮은 지붕 하꼬방에서 미싱 돌리다/ 백골단에 쫓겨 들어온 앳된 사내 치마 속에 숨겨주고/ 사랑했던, 아티발 스무 알의 오기로/ 능멸하는 현실의 손목을 그었던/ 스물두 살 외롭던 마음이 잉걸처럼 타올랐던/ 아비 없는 자식을 낳고/ 핏기 없는 얼굴에 땀방울만 선명하던/ 썰물 빠져나간 개펄처럼 악착같이 버티다가/ 돈 때문에 인연까지 끊었던 누이가 이 봄날 아침/ 짙푸른 찔레덤불로 찾아왔다/ 소금 알갱이 같은 슬픔 먹먹하게 안고서//

진눈깨비 / 심종록
그녀는 찌그러진/ 막걸리 잔에 소주를/ 반쯤 따랐다// 한 모금/ 마셨다 밀가루 반죽의/ 파전을 뒤집다// 풍 병 든 노인/ 찢어진 비닐을 / 손보고 있다/ 진눈깨비/ 어깨를 적셨다// 소주를 마저 마시고/ 그녀는 파전을 찢었다/ 손님 아직 들지 않은/ 청량리 뒷골목의/ 낮은 지붕의//

전문가 / 심종록
손수레 끈지 3년 만에 종록씨가 집을 한 채/ 장만했다 구청 직원과 숨바꼭질하며/ 손수레를 빼앗기며/ 웃통을 찢듯 벗어 던지고 이 씨!팔 놈들아/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죄냐고/ 과도를 들고 날뛰던 종록씨가 손수레 가득/ 과일을 싣고 돌아다닌지 3년 만에/ 3층짜리 집을 한 채 장만했다/ 얼마나 눈물겨운 <인간승리>의 드라마냐고/ 여러분들 감동의 고개를 끄덕이시겠지...../ 만,/ 돈 벌고 싶은 분들 나처럼 해봐라 요렇게// 먼저, 쌕쌕 혹은 봉봉 깡통음료를 한 통 산다/ (주워도 상관은 없다) 알맹이는 따라 마시고/ 빈 깡통을 검은 비닐봉지로 감싼다/ 쌓인 깡통의 입구에 과도가 들어 갈 만큼 틈을 내고/ 백색의 가루 뉴---슈가를 넣는다/ 물을 삼분의 이쯤 넣고 잘 흔든다 그리고는/ 칼을 꽂은 후/ 손수레 한 구석에 쓰러지지 않게 잘 숨긴다/ 이제는 청량리나 가락동에 가서 물건을 산다/ 참외, 수박, 멜론....../ 물먹어 값이 터무니없이 싼, 그러나 때깔이 좋은 것으로/ 손수레 가득 싣고 나간다 가게나/ 다른 장사치들보다 조금 싸게 그리고/ 한 번 붙은 손님은 절대로 놓치지 말 것/ 어떤 것이나 칼로 쪼개어 맛 보여도 꿀맛인// 풋내기 장사꾼들은 조심해야 한다/ 숙련된 재빠름으로 깡통 속의 칼을 뽑아/ 과일을 자르고 다시 깡통 속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 설사 의심 받는다 할지라도/ 얼마나 위생적인 칼집이냐고/ 능숙하게 대꾸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지금 집을 산/ 종록씨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이것은 한 편의 시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다 능숙하게/ 나는 내 손님들께 한 편의 시를/ 팔았다 손님들은 내 시를 먹었다 나는/ 뉴-슈가를 조금 뿌렸을 뿐이다 얼마나/ 맛이 있으셨는지//

똥 누는 기쁨 / 심종록
꽃피는 봄날을 넘어가는 것이 어찌 기쁨 뿐인가 부드럽게 풀잎을 헤치는 징그러운 저 뱀의 능청스런 몸뚱이 자세히 보면 한쪽으로 뭉그러져 있다/ 이런 것들이 어찌 슬픔 뿐인가// 별이 누는 똥 새가 누는 똥 내가 누는 똥 똥을 성스럽다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똥을 똥 이하로/ 비하시키는 것은 더욱 수상한 일 떳떳하게 똥 누러간다 똥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만큼의 사랑만/ 가져준다면// 나는 기쁘게도 나는 똥이다 라고//

똥간 / 심종록
똥간 가요 새로 똥간 지었거든요/ 룰루 설치한 화장실 두고 무슨 궁상이냐며 아내가 얼굴 찌푸리지만/ 탱자울타리 뒤편 새로 똥간 지었어요 땅 판 후/ 적벽돌 얇게 쌓았죠 판넬 지붕 얹고 대충 못질해 사방만 겨우 가린/ 뒤 마려우면 똥간 가요 삐걱거리는 발판 위에서/ 허리띠 풀어 바지 내려요 불알 덜렁거리며 쭈그리고 앉아/ 시퍼런 탱자 익어가는 걸 보며 끙 힘주면/ 하늘과 땅 바다의 오사리잡것들이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된 후/ 찌꺼기로 남아 뜨끈한 똥 한 무더기로 떨어져요 설사/ 어젯밤 취중에 씹었던 도시적 쾌락이/ 자기비하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흘러내릴 때도 있지만/ 바지 치켜 올리고 재 한 삽 끼얹어 구석으로 밀쳐둬요/ 눈 내리고 얼음 어는 날도 똥간 가요 아퀴 맞지 않아 벌어진/ 틈 사이로 칼바람, 쪼그라든 불알 덜덜 떨면서 똥 눠요 똥 누면서 생각해요// 사람들은 왜 똥을 누는가/ -강물을 더럽히기 위해서// 사람들은 왜 강물을 더럽히는가/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은 왜 경제적 발전에 목을 매는가/ -룰루하는 삶이 룰루하니까//

다시, 똥간 / 심종록
탱자 꽃망울 천지에 가득한 날 다시 똥간 가겠어요/ 똥간 문 활짝 열면 뜨거운 열기 속으로 간직한 똥들이/ 재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겠죠 그치들 들깨워서/ 나무 아래 한 삽씩 뿌리겠어요 천지에/ 곰삭은 똥내 미열처럼 퍼지면 제 세상인 듯/ 애벌레들 꾀이겠지요 날 것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죠 소란스런/ 날개 짓 탓에 막 태어난 일개미들 막다른 곳까지 길을 내겠죠/ 어쩌면 탱자나무 뿌리에 즐거운 터널을 뚫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럼 탱자나무 소리 없이 휘파람 불며/ 제 가시를 좀 더 두텁고 날카롭게 손질할 거예요/ 폭우 두들겨 맞아도 탱자 잎은 끈질기게 짙푸를 거구요/ 가을이면 주먹만 한 탱자도 잘 눈 똥처럼 노랗게 익을 거구요// 오늘도 똥간 가요/ 룰루는 하지 않지만/ 룰루랄라 룰루랄라/ 허리띠 풀고 바지 내려요// 쭈그리고 앉아 불알 덜렁이며//

일용할 糧食을 위하여 ㅡ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롯기 3장 3절> / 심종록
끈적한 오후가 지난다/ 거리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灣을 건너오는 비릿한/ 저녁 안개와 더불어/ 아내는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색 바랜 검정 슬립 사이/ 쭈그러진 젖가슴 마른 구근처럼 바스락거린다/ 대문 앞, 가스 불 당겨놓은 가마솥/ 지글거리며 끓고 있는 기름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는/ 통나무 도마 위에 놓인 털 뽑힌 닭의 등뼈를 내려친다 닭은/ 우는 법을 잊은 지 이미 오래 불끈거리며/ 팔뚝의 힘줄이 솟지 않아도 스테인레스 칼날에/ 냉동된 살덩어리가 사방으로 튄다 색색으로 불을 밝히는/ 에덴의 동쪽/ 어둠이 스미고 도시의 성문이 열린다/ 무인반주기 속 색소폰이 흐느낀다 흐트러진/ 뼈다귀들이 일어서서 몸을 맞추듯이/ 하나 둘 잠에서 깬 딸들이 수은 빛깔의 젖가슴을 드러낸 채/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시간/ 젖은 런닝을 걸치고 전도자들이 하나 둘/ 바다로부터 돌아온다 메마른 갈증을 견디며/ 그들의 손아귀에는 폐수에 등이 굽은 몇 마리의 놀래미 새끼들/ 뿐이다 나는 지붕 위 간판 플러그를 꽂는다/ 처음 얼마동안 깜박거리던 불빛이 화려하다 치장을 끝낸/ 아내와 딸들이 어느새 차가운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있다/ 담배를 물고 냉동된 닭을 튀긴다/ 술병을 들고 다락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으슥한 다락방 구석/ 늙은 전도자 하나가 딸의 가랑이 속에/ 머리를 처박고 울고 있다 도취와 몰입의/ 시간 바닷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지는 않으리라 반쯤 빈 술병에/ 물을 부어 온 병의 毒酒를 만드는/ 나의 하루는 간판 플러그를 뽑으면서야 끝난다/ 시멘트 바닥에 뿌리를 박고/ 시들어가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흔들며 灣을 건너온/ 새벽이슬이 소리 없이 작은 숲을 적시며 내릴 때//

카타콤 / 심종록
마지막 연기가 뭉쳐졌다 흩어졌다/ 이제 너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낮술 환영 간판이 걸린 카타콤/ 이별도 익숙해지면 마냥 쓸쓸한 건 아니다/ 지나쳐 왔던 생을 잠시 돌아본다/ 치정의 노른자위가 생일지도 모른다는 한심한 생각/ 황사가 스산하게 오후를 가린다// 한때 규사를 항해 전력 질주하여/ 점화되는 성냥불 같았던 섹스/ 새벽 한 시를 흔들고 지나가던 질투/ 휘몰아치던 사연 그리고/ 관자놀이에 박힌 금속파편 같았던 석양/ 그 모든 선율의 근원이자 핑계였던 너를 버리고/ 카타콤으로 들어간다// 담장 너머로 느리게 목련꽂 피는//

내장산 / 심종록
밤새워 쓴 안부 부칠 곳 없는 아침 단풍나무 우듬지만 붉어졌다/ 별들이 흘린 생애가 가파르게 흐르다 얼어붙는 데크길/ 모주 한 잔에 속 풀린 술꾼마냥 햇살 든 자리 모락모락 입김이 솟고/ 정처의 방향을 따라 피고 지는 송엽국 붉다// 그래도 그늘은 두터워 햇살 미치지 않는 부근엔/ 무심을 가장한 서리, 그리고 생은 홀가분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윤슬 반짝일 때마다 무거워서 휘어져버리는 물길 따라/ 월세 밀렸다고 득달같이 달려와 재촉하는 건물 관리인 같은 가을// 도대체 타들어가는 속을 보여 줄 방식이 없는//

미스 오 이야기 ㅡ진부 / 심종록
장미를 참 좋아해요 어둠 속에서 딸칵, 라이타 윤전기를 누르면 황홀하게 살아 오르는 불의 꽃 한 입 가득 빨아들이면 빨갛게 타들어가는 장미 우리 정사 후의 나른한 피로감 속에 아직 남아 있는 흥분처럼 타들어가는 장미의 불꽃을 참 좋아해요 진부하다구요? 내 얘기가? 후훗,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진부한데요 손님 없는 일요일 저녁이면 배반의 장미를 시청해요 스토리의 연속적 긴장과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의 생동감! 그런데 보면 볼수록 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랑 아니면 눈물 비극 아니면 코미디 얼마나 뻔한 도식이냐고요 이 짓도 하다 보니 이력이 나서 힘들이지 않고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얼마나 진부··· 진부··· 내가 태어난 곳이에요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죠 도망쳤어요 베드로의 닭이 세 번 울기 전, 그날 밤 눈이 맞은 동네 아저씨의 은화 서른 냥이 든 가죽주머니를 훔쳐 줄행랑을 쳤지요 꿈이요? 진짜 진부하군요 초저녁 어둑한 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실 때 흐릿한 유리벽에 내 모습이 비칠 때··· 거울 속의 나를 박살내고 싶은 것이 내 꿈이죠 또 오세요 미스 오예요 잊지 마세요//

 

낡은 신발 / 심종록
신발을 잃어버렸다/ 백감독도 만나고 인디안 수니도 만나고/ 반가운 사람 손도 잡아 흔들고/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도 하고/ 삶과 죽음이 뒤섞인 자리/ 밤늦은 시간이지만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잔 마다하며/ 입술이나 축이다가 자정 근처에서 일어섰는데 신발이 없다// 다리 아래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첫 발 떼기 시작할 때부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지금은 몇 번째인지 톺아볼 순 없지만/ 여기까지 나와 동행한 신발이여 나의 분신이여/ 사제를 함께 하자던 도반이여/ 때로 똥 밟은 자존심의 더러운 위안이여 네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어느 쓸쓸한 날 세상과 하직하기 위해 백척간두에 올라서는 사람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후 한쪽 발부터 내민다는데/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열에 아홉은 그런다는데/ 호탕하게 웃고 있는 저이도 제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영정 안에 들었을 것인데/ 미처 못 끝낸 이 세상 일 하나가 갑자기 발목을 잡아/ 헐레벌떡 남의 신발 꿰어 차고 나간 것일까/ 사라진 신발 앞에서 전전긍긍하다 깨어나니 꿈이다// 꿈속에서도 집착하는 우바새여/ 입으로만 주절거리는 악다구니여//

태양의 사티 / 심종록
나는 또 분노를 참지 못해 휘발유 끼얹고 봄에 불을 붙인다 세상을 능멸하는 여분의 것들을 용서할 수 없어서 치욕을 숨길 수 없어서 지나치게 말이 많은 성가신 것들이 보기 싫어서// 그러나 너희들. 내가 없으면 바람은 무슨 인연으로 바람이 되고 구름은 무슨 예의로 구름이 되고 코끼리는 무슨 추억으로 코끼리가 되나 아기는 무슨 희망이 있어 어둠의 자궁을 빠져나와 환한 빛 아래서 태를 끊나// 꽃들은 무슨 염원으로 어미의 젖을 빠는 아이의 이마 위에 서늘한 꽃 그림자로 어른거리나// 하여튼 바다의 수심은 얕아서는 안 된다. 천길 만길로 짚어야 한다. 바닥에 눕기 위해 내려가다 보면 분노는 연민으로 바뀌고 소금밭에 뿌리 내리려는 여분의 것들이 가여워 나는 또 아침노을로 타오르겠지만//

철대문 ㅡ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 심종록
철대문은 열리지 않는다 쌓인 우편물 위에 오래 굶주린 낯빛의 황사 또 내려앉는다 캄캄한 밤에도 별빛이 내리지 않는 철대문 어슬한 안개의 품을 빠져나온 햇살이 헐거운 틈을 파고든다 굳게 닫힌 철대문 며칠 날이 눅은 어제와 오늘이 통과 한다 햇살의 채도가 유난히 강한 시간의 틈에서 노란 꽃 핀다 날이 궂자 꽃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다 먼지가 들썩이며 날아오르던 날 사이렌 도착한다 하얀 시트 덮인 들것이 철대문 빠져나와 해살 엎질러진 세상을 건너간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혐오가 역병처럼 맴돈다 칙칙하게 빛을 잃어가도 세상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저녁 바람이 까치발 들고 끼어든다. 굳게 닫힌 철대문 흔들며 노랗게 절규하는 고들빼기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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