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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장욱 시인

by 부흐고비 2022. 4. 27.

이장욱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1968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3년 시로 제8회 현대시학작품상, 제6회 시와사상 문학상, 제24회 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등이 있다.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오의 희망곡 / 이장욱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객관적인 아침 /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왼손의 돌멩이 / 이장욱
갖고 싶은 게 있나?/ 골라 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펴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 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어젯밤 굳게 먹었던 마음을 바꾸었네.// 아아, 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랑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의 돌멩이//

돌이킬 수 없는 / 이장욱
내가 뒤돌아보자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렀네./ 나는 미소를 짓고 나서/ 열심히 우스운 이야기를 떠올렸지./ 놀라운 속도로 충돌한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 다른 곳에서 시동을 걸었어./ 부릉부릉, 당신을 좋아한 뒤에/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어요./ 옥상에서 까마득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핫 둘, 핫 둘,/ 뒤로 걸어서 계단을 내려갔지만./ 환멸을 느끼기 전에 먼저/ 무심해진다는 것./ 겨울이 가고 가을이 오면/ 당신이 거기 없겠구나./ 어디선가 말 없는 소녀가 자라고 있겠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은 아침이 지나간 뒤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밤이 오네./ 혼자 앉아 있는 노인의/ 생후 첫 웃음같이./ 내일 오후에 당신은 나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아침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연 뒤에는/ 캄캄한 새벽에 깨어났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천장을 바라보는 당신./ 드디어 당신을 한꺼번에 깨닫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겨울의 원근법 / 이장욱
너는 누구일까?/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 나는 너의 얼굴을 토막토막 기억해/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스쳐갔을 때/ 혀를 삼킨 입과 외로운 코를 보았지/ 하지만 눈과 귀는 사라졌다/ 구두는 태웠던가?// 너는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했네/ 계란의 속도로 부서졌네/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렇게 태어난다/ 가까운 눈송이와 먼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나는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너를 생각해/ 이제는 아무런 핵심을 가지지 않은/ 사슴의 뿔이 무섭게 자라나는/ 이 완전한 계절에//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 이장욱
새벽에 눈을 뜨면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느리게 건너오는 늙은 개의 이빨을 느낀다 나는 집을 나와 외곽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자의 눈빛이 안개 저 편에 깜빡이며 저물어간다 안개가 섬을 만든다 이것은 그리운 명제이다// 한 여자의 발자국이 안개의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나, 나는 한 여자의 발자국만을 따라 이곳에 왔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도대체 무엇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바게뜨 안에서 낯선 사내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멸종을 앞둔 마다가스카르 거북의 사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거북의 눈으로 안개가 내리는 녹천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냉소적인 미소였던가 여전히 안개는 섬을 만든다 섬은 그러므로 존재한다// 외로운 이빨은 그렇게 빛나는 것이다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너간 늙은 개가 안개 너머 먼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그 끝의 해안에서, 이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개는 섬을 만든다//

정주역 / 이장욱
이미 너도 놓여 있는 궤도를 따라가는 여행. 나와 같은 궤도로, 너도 핑핑 돌고 있지.// 역사를 나오면 어디든 사람들이 보이고, 사람들도 또 가판대에서 석간을 살 뿐. 그걸 깨닫기 위해,/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석간 기사 안을 소리 없이 통과하는 내장산행 막차.// 行間 속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인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신비주의는 삶을 유연하게 만들지. 그런데 이를 어째. 여긴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곁길. 혹은 길 바깥만 있네./ 가령 사슴 싸롱. 정주 여인숙.// 그 뒷골목. 내 사랑./ 그대와 청소년 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던 아, 그리운 한시절. 금지된 저 너머에서만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던 때. 근데 믿음이 생을 망쳐요,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지.// 종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온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이 끝이었어. 이를 어째, 여긴 또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온통 비어 있네. 내장산행 막차는 떠나고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는 몇 편의 드라마를 석간 신문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사회면, 애인을 살해하고 자살한 朴某氏(29)의 1단짜리 평생./ 내장산.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2면./ 지워진 생애들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될 때, 나는 신문의 시학을 외경에 가까운 심정으로 읽는다. 아아, 이게 해탈이군.// 물론 아무도 行間은 읽어주지 않는다. 뻔한 <사이>들만 창궐하는 정주역 부근. 허리를 껴안은 저 남녀들은 모두 노골적이다. 뼈가 다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저 흰 뼈들로써 아름다우나니, 저기 아득히 손 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겨울 나무들.// 용서해 줘. 나는 行間만으로 너를 이루려 했지. 누군가 키 작은 시계탑에 기대 길 끝을 보고 있다. 그를 실루엣으로 만드는, 모텔 캘리포니아, 라고 적힌 붉은 네온./ 사람들은 신문을 접어들고 정류장을 떠난다. 막차는 이미 지나갔다.// 다만 저무는 어느 날, 나는 결국 안개 낀 내장산을 흘러갈 것이다. 이기적인 몸, 어디다 부리고 보면 제일 편한 곳이었지. 새벽의 자욱한 行間을, 나는 안개가 되어 거니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 / 이장욱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오해 / 이장욱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신호등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이 내 생각을 휘감아/ 반대편 창문으로 몰려가는데/ 내 생각 안에 있던 너와/ 바람과/ 용의자와/ 국제면 하단의 보트 피플들이 강물 위에 점점이 빛/ 나는데,// 너와 바람과 햇빛이 잡지 못한 나는/ 오전 여덟 시 순환선의 속도 안에/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고정되는 중./ 일생을 오해받는 자들/ 고개를 기울인 채/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다.// 누군가 내 짧은 꿈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의자 / 이장욱
허공에 의자가 있다/ 아무도 의자라 부르지 않는/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은 햇빛이 감전사하고 있다/ 의자에 앉은 바람이 떨고 있다/ 허공에 의자가 있다/ 의자인줄 모르는 의자가 있다/ 의자 옆에 안테나가 있다 그 옆에/ 십자가가 있다/ 꼬리연이 감겨 있다/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다/ 허공에 의자가 있다/ 매달린 의자가 있다/ 낭떠러지인 의자가 있다/ 움켜잡아야만 하는 의자가 있다/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의자가 있다/ 걸어다니는 것의 의자는/ 지상에 있다/ 날아다니는 것의 의자는 공중에 있다/ 내가 같이 앉을 수 없는/ 의자가 있다//

독심 / 이장욱
너의 마음을 읽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너와 멀어졌다./ 나의 잘못인가.// 오늘은 나의 의지가 아닌 것들과 화해하려고 했다./ 일기예보,/ 먼 도시의 우연한 사고,/ 잘못 걸린 전화// 너는 이상한 옷을 입고 낯선 발음으로 부정하는 말을 했다. 심지어 우리는 국적도 인종도 달라진 것 같았 는데,/ 나의 잘못인가.// 너는 비 내리는 거리도 아니고 상하이의 교통사고도 아니고 거기 중국집 아니냐고 묻는 한밤의 전화도 아니다.// 나는 식물들을 모르고 펭권과 거미를 모르고 반도체나 합성수지에 대해 영영 무지하겠지만// 드디어 우산도 없이 낯익은 발음으로 수긍하는 말을 했다. 그것은 독한 마음이었다가/ 고독한 마음이었다가// 오늘의 날씨가 급하게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달려온 자 동차가......// 밤하늘은 폭력적인 기호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너무 멀어서/ 이토록 가까이// 너의 마음이 거대해진다./ 나의 잘못인가./ 너의 마음과 이렇게 오래 싸우고 있다./ 나의 잘못인가.//

중독 / 이장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실종 / 이장욱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내 발이 지상을 떠나가는 풍경을/ 행인들은 관람하였다./ 내 눈썹과 입술과 또 어깨가/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실종 중일 때/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누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햇살 속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복화술사 / 이장욱
1/ 서랍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서랍 속으로 들어오듯/ 어느 날 다시 돌아오는/ 오래전의 목소리.//
2/ 가령 골목을 따라가다 다른 골목을 만나면/ 두리번거릴 수밖에/ 갑자기 나타난 곳에서/ 갑자기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골목이 끝나면 펼쳐지는/ 오래된 신세계.//
3/ 저곳인지도 모른다./ 조금 낮은 지상이면 어디든 입을 벌리고 있는/ 다른 세계로의 통로,/ 가령 담 아래 수챗구멍들./ 보이지 않는 개미 동굴들./ 우리들의 벌린 입.// 다른 세계로 사라진 것들이 자꾸 치밀어 오르는/ 밤과 호리병의 나라.//
4/ 문득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봐./ 내 표정은 가능한 한/ 어떤 의미도 담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걸어 들어온 곳을 숨죽여 바라보면/ 어느새 마른 나무들의 윤곽이 바뀌어 있고/ 담장 위 깨진 병 조각들 속으로/ 어제의 달빛은 재빨리 스며든다.//
5/ 이제 다른 세계가 돌아오는 시각./ 욕실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 머리카락들/ 흑백 사진 속으로 사라진 천연색/ 우이천 살얼음에 새겨진 물결/ 오 분 전의 구름// 아무리 여행을 계속해도/ 둘러보면 다시 그곳인,/ 밤과 호리병의 나라.//
6/ 나는 지구의 회전을 느낄 때가 있다./ 세계는 무한한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순간 너를 습격하는 상형 문자들./ 너의 내부에서 드디어/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이 있다./ 혹은 돌아오는 날.//

구름의 戰士 / 이장욱
나는 그대를 그대는 구름을 구름은 다시 그대를/ 천천히 통과하는 오후, 너는 이제/ 날 만지지 말라. 나도 이제/ 널 만지지 않겠다// 저 먼곳 석양이 내리는 빌딩 숲 너머에서/ 슬로모션으로 떠오르는 붉은 헬리콥터./ 나를 향해 소리없이 기총 소사하는.// 나는 꽃으로 피어 난무하는 총알들을 피하는 자./ 나의 "매트릭스", 나의 모태는 이 부드러움이야./ 이 부드러움 안에서 나는/ 하염없는 죽음의 풍경과 만난다./ 헬리콥터, 헬리콥터, 그대여 무차별/ 난사해다오./ 투하해다오.// 먼데서 몰려오는 검은 비는 허공을/ 허공은 바다를 바다는 제 몸의 심연을/ 고요히 통과하는 밤./ 어느덧 심연의 그대가 다시 나를 향해/ 천천히 떠오르는 풍경./ 진주만 공습의 낡은 필름처럼/ 고요히 다가오는 헬리콥터.// 그대도 시뮬레이션인가? 나는/ 부드러운 영혼의 집./ 오늘은 먼 하늘 구름을 통과하는 새의 부리가/ 천천히 클로즈 업되는 새벽,/ 제 몸의 끝, 그 단단한 첨단에 온몸을 걸고/ 혼자 구름을 통과하는 새.//

코끼리 / 이장욱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날 저녁 14인치 브라운관을/ 황홀하게 적시던 사바나의 석양과, 코끼리의 한 生 너머에서/ 이제야 다른 生을 꿈꾸듯 너울거리던 코코야자수들의 풍경을/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 멀리 있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 천막 바깥은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들처럼/ 잦아들고 잦아드는 섬들. 그렇군요,/ 보도블럭을 들어 보라 그곳에 해변이 있다,/ 라는 저 불란서 68세대의 구호에는 이상한 미신이 스며 있습니다./ 迷信. 혹은 迷路. 헤매면서 붉어가는 바다에 일렁이는 섬들./ 지금 인천에서 출항하는 바지선에 시선을 두고/ 온 밤을 공포로 소진하는 유약한 사내에게도 미신은 있습니다./ 그의 술병에 떨어지는 쓸모 없는 流星 하나,/ 그리고 그만두라 그만두라 중얼거리듯/ 일생을 해변에 묻은 初老의 여자, 여자의 낮은 휘파람./ 이제 무심히 온몸을 그을린 그녀의 피조개 몇 점과 더불어/ 황혼은 부두 쪽의 검은 공장들 뒤로 인천 하늘을 적십니다.// 문득 그의 生을 관통한 납탄이/ 아주 오랜 세월의 오장육부를 지나 천천히/ 의탁할 무엇도 없는 황홀한 황혼으로 내리는 풍경을 그대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다리가/ 그토록 섬세하게 구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누군가는 더러운 황혼녘의 부두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 멀리 있는 이여,/ 가장 단순하므로 애절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것들을/ 한 번만 보아주세요. 서해 바다의 14인치 브라운관 속에서/ 처연히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져서, 무너짐으로써,/ 고요히 무너져가는 것들을.//

인파이터 ㅡ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이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 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근하신년 ㅡ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지./ 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 비닐봉지처럼 유연해./ 자동차들이 착지점을 통과한다./ 나는 자꾸/ 몸무게가 제로에 가까워져/ 밤새 고개를 들고 열심히/ 너를 떠올렸다./ 속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가 있을 뿐./ 나는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 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고 싶어./ 가령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 나를 지배하는/ 기압골의 이동경로, 혹은/ 저녁 여덟시 홈드라마의 웃음./ 나는 명랑해질 것이다./ 교보문고 상공에/ 순간 정지한 비닐봉지./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공릉동의 바람 속으로 ㅡ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그렇지. 나는 어쩌면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혹시 모른다. 행복할 리도 황폐할 리도 없는 바람들/ 이 애초에 공릉동의 주민이었는지도, 혹시 모르지. 이곳에서 모든 빛들은 현재형으로 명멸한다. 너무 상투적인/ 가? 하지만 그때 한 마리 늑대가, 월계동 쪽의 불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문득 망망한 비가 내렸는지도, 혹시 모르지. 그의 마른 등을 향해 몇 장의 낡은 신문이 날아들었는지도./ 명멸하는 것들이 관해서라면 내게도 할말이 있는지, 혹시 모른다. 그때 나는 걷고 있었지만, 맹세컨데 가늠할 수 없는 증오 따위는 없었지. 불빛과 물빛 사이로 흘러가는 한 마리/ 늑대를 향해 외치고 싶었을 뿐. 배회하지 말라. 배회하지 말라/ 너무 주제 넘은가? 하지만 노래는 깊고 울울하다. 다만 늑대가 도시를 배회한다는 게 이상했을 뿐. 도대체 한 마리/ 늑대의 정갈한 보폭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경복궁 / 이장욱
형식은 성실하고 친구가 없었다. 소진되지 않는 목적을 생각하며 기원에 갔다. 바둑은 졌지만 석양을 좋 아했다. 병원에 가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죽은 사람과 대화를 했는데 그것이 형식에게 어울렸다. 대기 실에서 누가 허공에 대고 욕을 하다가 형식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이 자꾸 너 창식이냐고 창식이 맞네라고 창식아 이 새끼야라고 오랜만이다라고... 형식은 사실 창식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디 사는지 뭐 하는 새낀지도// 창식은 사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주 잠이 들었다. 창식은 오늘따라 머리가 아팠는데 열심히 일을 했다. 퇴근 후에 창식은 취해서 떠들고 울다가 웃다가 이건 뭔가 이상한 삶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귀갓길에 창식은 전화를 걸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리치며 승차를 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식은 입이 닫히고 눈이 감기고 코와 귀가 막히고 웃음도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경복궁을 지날 때// 형식은 창식의 전화를 받았다./ 경복궁은 멋진 곳이라고 했다.//

기울기가 사라진 뒤에 / 이장욱
막 떨어지는 나뭇잎이 허공을 구성하는 각도/ 새벽의 꿈에서 깨어나자 스며드는 생시의 각도/ 추락하는 사람에 대한/ 사후의 각도//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기울기가 있어?/ 영원에는 기울어진 것이 없습니다./ 수평과 수직이 사라진 뒤에/ 비스듬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뿐// 저기 전화를 하는 저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갸우뚱히 바라보는 이유는/ 그림자 안에 해가 지고 있어서/ 조용한 말이 그이의 귓가에 스며들어서/ 그건 그렇게 갸우뚱한 상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뒤에 나무가 스르르 기울었다./ 거리의 행인들과 지금 듣는 음악의 각도가 바뀌었다./ 수평선과 쏟아지는 빗줄기의 기울기가/ 오늘의 초침이 분침에서 멀어지려고 미친 듯이// 당신이 고개를 기울이자 나뭇잎이 다른 곳으로 떨어졌네./ 당신이 생시에서 사라지자 내가 깨어납니다./ 그림자가 일어나 혼자 걸어가는 세계에서// 분침과 시침이 겹치는 순간/ 날카로운 알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나의 아주 가까운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

은행 앞 네거리에서 질문의 없음 / 이장욱
당신은 거기서 왜 혼잣말을 했다./ 자동차들은 어째서 자꾸 경적을 울렸다./ 밤마다 구름의 자리에서 당신이 어떻게 잠들었는데/ 낮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길로 나아가 어디로 걸어갔는데/ 은행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대체 무엇을 요구했는데,/ 당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가까웠다./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친근해졌다./ 우리는 국민체조를 하고 산수를 배우고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의 머나먼 어디로 떠났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불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의혹들은 언제부터 확신의 형태로 자라납니다만/ 질문이란 왜 형식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을 텅 비어 있지 않은 것으로 채우기/ 그런 것이 어째서 우리의 일생이었던 것입니다./ 체조를 할 때는 팔 다리를 가장 멀리 휘두르기로 하자./ 대화를 할 때는 초과량의 욕설을 사용하기로 하자./ 당신은 어째서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을 향하여/ 당신은 은행 앞 도로 한복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체 무엇을 요구했다./ 아주 명료한 곳에서 당신과 나는 왜//

반딧불의 잔존* / 이장욱
마지막으로는 반딧불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병이었고/ 멈출 수 없었고/ 새벽에 깨어나 두려웠기 때문에/ 잘 지내나요? 요즘엔 미세먼지가 기승이에요.// 반딧불은 착한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외롭지는 말라고/ 실은/ 자신의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단순하기로 해요 모든 것이. 내가 나에게서 벗어난 뒤의 밤을 기준으로,/ 어디에서도 그런 것은 아름다웠는데요.// 침묵 뒤에는 침묵/ 침묵 뒤에는 다시 침묵/ 침묵 뒤에는 더 단순한 침묵을 따라서 드디어// 반딧불이 없는 새벽에 깨어나 나는 생각을 하였다. 생각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구원에 가깝다고// 마지막의 뒤에는 반딧불에게 내가 전화를 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반딧불이 떠도는 밤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출 수 없어서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멈추어 있어서요.// 아무래도 전화는 받지 않았다.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라고/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에게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나는 단순해져서 중얼거렸다.// 반딧불이 허공으로 반 뼘쯤 떠올라 빛을 내었다./ 그것이 참 조용한 거짓말을 닮았는데/ 드디어 사라지지 않았는데//
* 반딧불의 잔존: 조르주 디디 – 위베르만

변절자의 밤 / 이장욱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깨어났는데/ 그것이 밤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옛날 밤//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마치 마치…… 하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이야기/ 설마 설마…… 하면서 점점 무서워지는 이야기/ 병든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엄습하는 것이 있더군요/ 마침내 당신을 잊고 당신의 먼 곳에서 새롭게 깨어났는데/ 다시 옛날 밤// 밀레니엄이 추억이고 4.19가 전생이고 꿈속의 해방을 거쳐 식민지의 새벽 두 시까지// 나는 잤다./ 옛날 밤에 잤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아침을//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백조와 창조와 폐허를 창간했다./ 카프와 신간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이봐요, 경성에서는 무서운 살인사건이……// 당신과 함께 적진에 침투했는데/ 내가 변절자였어./ 나는 왜 자꾸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나는 왜 나도 모르게 지혜로워지는가.//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이제 그만 그만…… 하면서 다가오는 결정의 시간에/ 모든 것이 바로 지금인 이야기// 새벽 두 시에 깨어났는데 마침내/ 새로운 마음이었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한 번도 얘기해보지 못한/ 무서운 감정//

엉뚱해 / 이장욱
갑자기 흥겨워지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지쳐버린 사람이 있고/ 내일이 오자/ 문득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아침에는 私心이 없어졌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갔다/ 중력은 고마워, 그게 없으면/ 십 년 전은 어디로 갈까/ 어제는 또 어디로// 나는 펭귄처럼 무심해졌다/ 뒷골목을 헤매도 삐라가 없고/ 인공위성의 고도를 상상할 수 없고/ 북극의 밤은 길어// 우리는 엉뚱하게/ 年金을 부었다/ 갑자기 미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어요// 저 앞에서 뒤뚱거리며/ 펭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엉뚱해 역시/ 펭귄이란//

내 인생의 책 /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밤의 독서 / 이장욱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일관된 생애// 태어난 뒤에 일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눈코입의 위치라든가 뒤통수의/ 방향 같은 것인가/ 또는 너를 기다리는 표정// 나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였다. 갑자기 슬픔에 빠졌다. 변성기는 지났습니다만// 저는 살인자이며 동시에/ 이웃들에게 아주 예의바르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덕목,/ 정중하게 넥타이를 매고 예식에 참석했다가/ 취한 뒤에는 술잔을 던지고// 가로수가 언제나 거기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길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골목의 밤을 깊이 이해하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매우 일관되었다고// 오늘도 변함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재자와 신비주의자가 싫었어요./ 제게도 미친 듯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내가 어느 날 당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술집에서 떠들다가 문득 침울해질 것이다./ 살아가다가/ 이제는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어제의 옷을 다시 입고/ 오늘의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된 삶에 대하여 계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밤의 상점 /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음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개에 한 번씩/ 혐오감을 위해 팔았다.// 아무것도 후회할 수 없었다./ 이제 불 꺼진 네온사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팔아야 하나./ 손목을 팔고도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나.// 안녕, 잘 있나요?/ 새벽이 오면 여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올게요./ 이 비 그치면/ 이 비 그치면/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혀를 팔아치우겠어요.// 발끝에서 처음 보는 그림자가 피어나고/ 등이 휘어 외로운 곡선을 이루었다./ 냄새와 모양을 상상하는 힘으로/ 끝나지 않는 편지를 이어갔다.// 부디 악몽을 느끼는 근육은 그대로 남겨 줘./ 솔직한 관절은 내 곁에 있어 줘./ 발목의 뼈들을 모두 팔고도 힘이 남는다면/ 콩팥을 쥐고/ 폐를 쥐고/ 텅 빈 밤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개 이전에 짖음 / 이장욱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 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이런 길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법이죠.//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나의 팔짱을 끼었는데/ 내 팔이 스르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별도 없이 친근한 길이었다. 길을 잃는것이 익숙한 길이었다./ 누구나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미래의 당신의 오후의 조용한 기억 속에 담긴/ 잼 같은 것인가봐요./ 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 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짖으며 따라왔다./ 저것은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구나./ 우리는 검고 맑은 하늘을 향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우리는 편백나무들 사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 녹아버린 한쪽 팔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를// 당신은 곧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져요. 그것이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산책이기 이전에 걸음, 새벽이기 이전에 불안이니까요./ 잘 구워진 빵에 빨간 잼을 발라서 꼭꼭 씹어 먹어요. 맛이 있지 않나요? 맛이? 정말 맛이 있어서/ 그게 슬퍼서// 당신의 얼굴이 다 녹아버렸어요./ 나의 생각은 지금 너무 뜨거워./ 빨갛고 달콤한 잼이 된 것 같아요./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어요.//

키 재는 사람 / 이장욱
키가 큰 사람이 자정에 혼자 창 밖을 바라볼 때/ 아무리 바라보아도/ 내리는 비의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때/ 유리창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실내를 바라보자/ 죽은 식구가 그의 등 뒤를 타닥타닥/ 걸어 다닐 때// 실내의 식물들은 냉정하게 자라나고/ 자라나는 중이고/ 자라나는 모습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어느덧 구름의 고도가 높아지자/ 구름의 과거가 강렬해지고/ 비 맞는 전봇대들은/ 극적으로 이어지고/ 아무도 전봇대의 키는/ 측량하지 않고// 키가 큰 사람이 자정에 혼자 창 밖을 바라볼 때/ 키를 재는 사람은 성실하게/ 그의 등 뒤를 타닥타닥/ 걸어 다니고//

사랑의 신비로운 표정 / 이장욱
길 잃은 개들처럼 사랑해/ 날아가는 총알처럼 사랑해/ 비 맞는 지붕처럼 사랑해// 토요일에는 조금씩 늙어가고/ 일요일에는 시간 여행을 하고/ 월요일에는 돈을 세고// 비 맞는 지붕처럼 무거워지다가/ 당신을 향해 곧장 날아가다가/ 길 잃은 개처럼 혀를 내미네// 감정을 절약하고/ 장부를 정리하고/ 발자국들을 생략하고// 낡은 기분으로 비가 내리네/ 퇴근시간의 살인을 꿈꾸네/ 이번 주에도 당신을 사랑해// 여름의 나무 아래로 은행원들이 지나가고/ 누구나 은행원이 되고/ 어느덧 은행원들도/ 신비로운 표정으로/ 사랑을 하는 계절이 되고//

코인로커 / 이장욱
두 시간 동안 코인로커 속의 어둠에 몰두했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는 서류와 비슷한가./ 사과와 비슷한가./ 사각형인가. 얼마나 붉은가./ 어둠은 소중한 것과 훔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무심한 것과 슬픈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움직여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겹쳐놓는다./ 모퉁이마다 낯선 얼굴이 서 있는 밤// 어둠의 입장에서 보면 목적지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계단 쪽일까. 비상구 쪽일까./ 혹은 환승역./ 오늘도 사람들에게는 자꾸 맡길 것이 생긴다./ 의심스러운 봉투와 검은 가방./ 음식물./ 시신의 일부// 코인로커 속에서는 어둠이 모든 것을 만들지만/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터널 속을 달리는 나와 그대와 신문들/ 오해와 농담과 말다툼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란 그러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사망신고서/ 손가락이 들어 있는 가방의 모습// 나는 어둠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코인로커 속에서 가장 슬픈 자세는 무엇일까./ 지금은 붉은 사과가 무릎을 모은 채/ 어둠에 몰두하고 있다./ 캄캄해지는 것은/ 사과인가./ 목적지인가./ 누군가 코인로커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사각형의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물건을 회수해 간다.//

극적인 삶 / 이장욱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복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천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사신의 눈을 찌르며 외진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응하는 사람 / 이장욱
적응하는 사람은 조금씩 자신이 아니라서/ 좀 안 맞는 옷이나 신발을 착용한 체로도 어느덧 잘 걸어 다니고,/ 외로움이라든가/ 암세포/ 에도 적응을 해서 어느덧/ 저녁의 공원에// 공원은 공원이니까/ 빈 공간이 있고/ 빈 공간에는 사실 공기도 있고/ 몇 년 전 당신이 한 말도 있지만 그래도// 공원은 달과 태양 사이에 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 있다/ 빌딩 숲 사이에 있다/ 빌딩 안에서는 수많은 직원이 움직이고/ 밤에 장례식에 가야 할 사람도/ 직원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오늘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이가 죽은 세상에서도 직원은 역시/ 직원인데/ 직원은 직원의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그이의 없음에 익숙해진다./ 그이의 없음도 직원에게 익숙해지자/ 보이지 않는 그이는 문득/ 눈을 떴다.// 오늘은 공전하는 발들의/ 조용한 배열 같은 것/ 수금지화목토천해.... 같은 것/ 별 하나가 지워진 뒤에는 조금씩 이상하고 조금씩/ 허전하다고 생각하다가 조금씩/ 잊었다.// 하지만 자정의 캄캄한 배회라든가/ 외진 골목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는 골목 끝에서 불현듯 / 내가 내 손목을 긋는 모습/ 에도 적응이 되는가?// 나는 지금 횡단보도에 나란히 선 부적응자들을 둘러본다./ 먼 신호를 기다리는 부적응자들을 다정하게/ 불러본다./ 부적응자들이여,/ 부적응자들이여,/ 적응을 하고 난 뒤에는 옷이 사라지고/ 신발이 사라지고/ 당신의 외로움과 또/ 죽은 사람이 사라지리라.// 나는 처음 와보는 공원에 앉아 있다./ 오늘은 모든 게 조금씩 궁금한데 마침 / 뒤뚱거리며 걸음을 연습하는 저 아기는/ 무엇에 적응하고 있는지?/ 공기 중에 지구의 공전에, 또는/ 먼 후일 당신이 할 말에?/ 아기는 불현듯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갸우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공원의 텅 빈 시간에는 / 아기 아빠도 아기 엄마도 보이지 않는데 / 나는 내가 사라진 뒤의 세상에 적응하는 사람인데 직원이 슬픈 표정으로/ 빌딩을 나오고 있다.//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 이장욱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낯선 입모양으로 지낸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일까요?/ 부디 당신의 영혼을 말해주십시오./ 지붕은 새와 구름과 의문문/ 그리고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 나는 시체의 진심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상한 입모양을 하고 있다.//

부드러워진 뭉크, 절규 / 이장욱
8월의 햇볕은 뜨거웠습니다./ 양어깨, 얼굴, 팔다리 할 것 없이 쏘아댑니다./ 태양의 불꽃은 정오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에서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일개미도 한 마리 보이지 않습니다./ 풀밭의 그늘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까요?/ 창공을 나르는 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적막감만 감돌고 있습니다.// 부드러워진 뭉크풍 자연​/ 8월초 오전 풍경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담으면서/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한여름의 절규인 듯 보이기도 하고 좀 더 부드러운/ 터치를 한듯이 보였습니다./ 태양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절규// 모든 것은 등 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 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 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뒤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 뒤의 세계.//

친척과 풍력발전기 / 이장욱
친척은 어디든 살고 있고 친척은 캠핑을 간다.// 다른 이들이 고기를 구워 먹고 물놀이하는 것을 친척은 바라본다. 마치 밤하늘을 바라보듯이/ 나는 친칙과 술을 마셔본 적이 있지만 제사는 지내지 않았지. 물놀이는 더더구나// 친척은 법원에 근무하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곧 청춘이 갈 것이고 사랑은 떠날 것이고 죽음이 올 것이며 세상의 풍력발진기들은 빙빙빙 돌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듯이 친척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계곡의 물살은 거세고 법정에서는 누구나 목소리를 높이고 별빛 내리는 밤의 숲속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바라보는 밤// 친적은 집중하는 사람으로서 연인의 전화를 받는다. 연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전화 저편에서 말을 했는데 사랑해, 사랑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 말이 진부해서 웃음을 터뜨린다면 당신은 나쁜 사람, 풍력발전기는 육중하고 친척은 공무원이고 격한 감정에 휩쓸린다. 친적이 울음을 터뜨리자 나도 울음을 터뜨린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서 친척은 감사한다. 그런 것들이 있어서 친척은 잠수를 하지 않고도 물속처럼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 문서를 남기지 않고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것// 나는 친척과 외로움과 밤하늘의 근처에서 빙빙빙/ 육중하게 빙빙빙/ 풍력발전기처럼 돌아간다./ 그것은 거대하고 한 대에 40억 원이고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전기를 생산하는 기구인데 영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저렇게// 친척은 캄캄한 숲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고 말한다./ 친척은 랜턴을 거 들고 숲속을 향해 불빛을 비추었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친척은 집중하는 사람이고 먼 곳의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어왔다./ 마치 오래전에 종말이 지난 영혼과 같이//

 

얼음처럼 /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먼지처럼 / 이장욱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토요일의 관심사 / 이장욱
오늘의 푸른 하늘은 마치 어제의 푸른 하늘 같애./ 진부하고 아름다워.// 뭐랄까,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태랄까./ 1루로 뛸 수도 없고 뛰지 않을 수도 없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문장은 비문인가 아닌가?// 나는 허무주의자,/ 오타쿠,/ 각종 폐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오늘 화양리 뒷골목에서 박복순씨(82)가 모은 폐지의 양은/ 15.5kg, 근래 최고였지.// 하지만 내 인생에 흥미로운 것이라곤 없다./ 휴대폰을 껐는데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 않네.// 침묵의 기술을 연마한 자만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 늦어도 정오까지는 일어나자./ 어제의 푸른 하늘이 떠 있을 테니까./ 우울한 야구선수들이 게임을 시작할 테니까./ 박복순씨의 리어카를 향해/ 늙은 개들이 짖어댈 테니까.// 오늘은 또 모든 것이/ 토요일의 관심사.//

우리 모두의 초능력 / 이장욱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초점 / 이장욱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갔다.// 겨울의 깊이가 맞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각종 세금을 내고/ 신문을 읽고/ 거짓말을 했다./ 조금씩 너를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너의 끝까지/ 닿으려고도.// 나는 명료하게 살아갔는데/ 거울 속의 내가 어딘지 흐릿하였다./ 말을 했는데 또/ 하려던 말과 조금 달랐다./ 액수가 맞지 않고/ 기사마다 오탈자가 있었다.// 그것들이 아주 흡사해서/ 나는 원숭이의 길고 아름다운 팔을 쭉 뻗어서/ 저기 저 어둠이 아닌 것을 콱!/ 움켜쥐었다.// 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안경을 바꾸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더 깊은 곳에서 누가 그것을/ 살아갔다.//

택시에 두고 내렸다 / 이장욱
뒤늦게 나는/ 다른 세계를 깨달았다./ 방금 지나온 세계를.// 그 세계에도 너라든가/ 너에게서 먼 곳 같은 것이 있을 텐데/ 깃털도 있고/ 깃털이 있으니 새도 있고/ 저녁의 하늘 쪽으로 쓰윽/ 사라져버리는 것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그건 두고 내린 휴대전화인가./ 지갑인가./ 죽은 사람인가./ 나는 만취한 채 택시를 타지도 않았다./ 분실물 보관소가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야. 후회라니 그런 건,/ 개에게나 줘버려! 그 순간 불현듯,// 나는 어둠이 매일 온다는 걸 처음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다른 하늘의 새 떼를 깨달은 사람이./ 내가 없는 너의 하루를/ 가만히 수긍한 사람이.// 차갑고 뒤늦은 곳에서 무엇인가 나를 불렀다./ 목이 돌아가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오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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