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이성목 시인

부흐고비 2022. 4. 28. 08:17

이성목 시인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금오공고, 제주대학교 법학과 졸업.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주겠다』, 『뜨거운 뿌리』. 『노끈』. 『함박눈이라는 슬픔』, 『세상에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

 



봄, 알리바이 / 이성목
여자의 몸에서 휘발유 냄새가 난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꽃들은 만만한 나뭇가지를 골라 호객을 일삼는다. 나무들은 비틀거리며 꽃 가까이서/ 꽃값을 흥정한다. 이미 몸에 불을 당긴 꽃잎이 재처럼 떨어진다. 꽃을 만났던 나무들은/ 순한 잎의 옷을 걸쳐 입는다. 내 몸에서도 휘발유 냄새가 난다.// 기억한다./ 나는 붉고 여린 수술을 내밀었을 것이다. 목련은 순백의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으므로,/ 세상과 나는 서로 결백했을 것이다./ 기억한다./ 그 해 3월 마지막 날, 영등포 선반 공장 뒷골목, 홍등가, 절삭유 질펀한 바닥, 생의 마디가 손가락처럼 잘려나가던 어둠 속, 늙은 가로수처럼 서서 전화를 했으며, 안산행 총알택시를 탔다.// 멀고도 아득했던/ 불혹에 닿아 몸의 곳곳에 만져지는 꽃자리 아직도 아프지만/ 그곳에는 꽃도 나무도 없었다. 나도 그때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봄을 기다림 / 이성목
​산에 가서 종일 산처럼 서 있다가/ 개울물 소리 따라 산 밑 정류장까지 내려옵니다./ 길 가 산벚나무 일제히 돌아서서/ 김 모락모락 피우며 오줌을 눕니다. 저기/ 모퉁이 삐죽 고개 내밀고 올라오는 마을버스가/ 애벌레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벌레들이/ 우리 마을에도 속속 도착하리라고 생각하면서/ 햇살 아래 동그랗게 허리를 구부린/ 늙은 바람의 꽁무늬에 줄을 섭니다./ 병들어 기다리는 동안에도 냉천 둑길은/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앞지른다 생각하면서/ 짤랑짤랑 이마를 부딪는 동전 한 줌 꺼냅니다./ 마을버스가 부르릉, 오줌진저리를 칩니다.//

길 밖의 모텔 / 이성목
그대 용서하기 위하여/ 새벽, 홀로 욕조에 앉아 때를 민다/ 축 늘어진 배를 씻는다// 이렇게 뻔한 몸을 나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나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대, 이 많은 먼지와 굴곡을 데리고/ 나를 다녀갔다는 말, 기억한다// 그대 말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세상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제 몸에 길을 내는 욕조의/ 저 물결, 저 흔들림이/ 내 몸을 읽어 낸 상처임을 보여준다//

옛날 노래를 듣다 / 이성목
낡은 전축 위에 검은 판을 올려놓는다/ 전축은 판을 긁어 대며 지나간 시대를 열창하지만/ 여전히 노래는 슬프고, 잡음은 노래가 끝나도록 거칠다/ 소란스럽던 시절의 노래라서 그런 것일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 먼지가 끼어서 그런 것일까/ 몇 소절은 그냥 건너뛰기도 한다 훌쩍 뛰어 넘어/ 두만강 푸른 물이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로 내리고/ 눈보라치는 흥남부두로 소양강 처녀가 노 저어 가기도 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음절과 음절을, 이념과 이념을/ 덜컹 뛰어넘는 저 몇 개의 세선들/ 한때 우리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낡은 전축이 요동을 친다/ 긁히고 패인 한 시대를 털커덕 털커덕 넘어서며/ 판을 뒤집자고/ 이젠 뒤집어 노래하자고//

쓸만하다. 내 발 / 이성목
발은 더 이상 나를 미지로 데려가지 않는다./ 어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 오늘은 그 자리를 다른 당신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아주 먼 곳, 융단의 강을 건너 당신의 나라에 보내고 싶었는데, 그 일을 도맡아 해야할 발이, 생각이 먼저 딱딱해졌다. 냄새도 나고, 냄새나는 생애는 내가 신고 다닌 신발 같은 것이었으나 쉽게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발가락 사이, 당신과 나 사이에 물집처럼 부풀어오른 추억의 쓰라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발만이 발을 버릴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시민이었던 나는, 오래 쓰면 닳아 없어지는 것들의 목록에서 발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발의 소임이란 당신의 그곳 소멸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 얼마나 무모한가. 내가 여기 나를 남기려 했던 것, 밥을 벌러 안산과 서울사이를 오갔던 무수한 발자국들. 발목에 넥타이를 묶고, 발바닥에 봉급봉투를 신고 마음속에 살아서 꼼지락 꼼지락 거리는 무엇, 벌레 밟듯 지긋이 눌러 죽이는 것뿐이었으니/ 발은 나에게 새로운 생의 발자국을 찍게 하지는 않을 것이나, 아직은 쓸만하다. 닳고닳아 마침내 모든 휘청거리는 걸음걸이가 끝나는 곳에 당신의 나라가 있는 것처럼//

용암이 흘렀던 자리 / 이성목
당신, 지워 버릴 수 없어요.// 나는 흙이었고 당신은 내가/ 뜨겁게 구워 낸 흙발자국/ 내 가슴에 쿡쿡 찍힌,// 잘못 찍힌/ 흔적이란 말 마세요// 내가 내 살을 파내고 새겨 넣은/ 당신을, 당신이//

목어회 먹으러 가다 / 이성목
당신, 속이 텅 빈 물고기 한 마리 키웠다 하시고, 당신,물고기 속으로 닥나무 몽둥이를 들고 들어가 빈속을 두들겨댔다 하셨습니다. 나무는, 어찌할 바 모르는 물고기는, 눈 한 번 끔뻑거리고 목탁소리를 냈다 하셨습니다.// 나무 비늘이/ 흰 꽃잎처럼 흩날려/ 당신의 거처에 이르면/ 온 삭신이 저리다는,/ 몸이/ 속에서 밖으로 터지듯 아프다는/ 당신 속으로/ 칼을 들고 들어가는 자/ 오늘도 보았습니다.// 당신, 혀끝이 매워 눈물 한 종지 쏟았습니다. 당신, 눈물 한 종지 다 찍어 먹었습니다. 붉고 맵게 끓는 당신 속 어찌할 바 모르는 나는//

깊은 산 속 옹달샘 / 이성목
물의 몸에 주름이 잡혀 있다/ 셀 수도 없는 나이가 이렇게 맑다니!/ 햇살 무수하게 반짝이는/ 주름살 사이로 살 속 환한 산천어 지나간다/ 주름살이 더 넓게 퍼진다/ 산이 한 뼘 안에 들어와 깊어진다/ 외롭기도 했을 텐데/ 수절이랄까 고집이랄까/ 외할머니는 곱게도 늙으셨다//

모래시계 / 이성목
처음에는 한 알의 모래/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모래의 서걱거림 모래의 쿨럭임 모래의 헛기침이 사라진 곳으로 가기를 원했다/ 더 이상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는 한 알의 모래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 낯선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질 여행의 종말/ 오로지 한 알의 모래인 세계가/ 무수히 많은 한 알의 모래들을 받아내는 참혹과 맞닥뜨릴 뿐// 미지는 벌써 제 하반신을 모래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좁고 긴 도시의 병목을/ 안간힘으로 빠져나갔다 해도 결국은 다시 사막으로 되돌려지는/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모래알 같은 열망이 시간에 금을 낼 수 있을까만// 처음의 그곳으로 되돌아온 무수한 한 알의 모래들/ 한 알의 모래로 시작하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상반신을 바람에 날려버린 행상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대장간 칼 / 이성목
밤새 나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깨어나지 않을 참입니다 바람대로라면 당신 혓바닥에 올려놓을 얇은 꽃잎 한 장이지만 나는 나를 두드리는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전생에 그는 나를 오래 두드려 새파란 낫을 건져갔던 사람입니다 낫에 잘린 꽃들을 애도하기에 늦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피 냄새나는 꽃들의 후생으로 내가 가서 어떤 날끝에도 잘리지 않는 꽃잎 한 장 세상에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다시 두렵습니다 두려워 지금도 불을 견디고 망치질을 견딥니다 한때는 저 소리에 깨어난 쇠스랑이 하루 만에 손가락이 잘려 돌아온 걸 보았습니다 이빨이 다 망가진 도끼도 보았습니다 늙어 고부라진 꼬챙이도 있었지만 아무도 원했던 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용광로 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다 지우고 내 곁에 누워 있는 지금 번번이 잠들고 번번이 깨어나는 아침이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쇠붙이로 가득 찬 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깨어나지 않을 참이지만 대장장이는 내 속에서 무엇을 건져냈을까요 아 억겁이 쇠의 굴레라지만//

혀를 위한 우화 / 이성목
검은 동굴 속 붉은 짐승을 가두었다 입구를 막아두자 짐승은 침에 몸을 적시며 고요해졌다 축축한 벽을 비비며 꿈틀거리던 짐승은 동굴보다 먼저 늙어 동굴의 귀신이 되었다 털 한 올 없는 붉은 살덩어리 귀신이 배를 바닥에 대고 물방울처럼 부화하는 소리의 유충들을 핥아주었다 소리는 자라서 동굴의 생각 동굴의 어둠 동굴의 웅얼거림을 몸으로 받아 침묵이 되고 말이 되고 언어가 되고 물컹거리고 투명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이 열릴 때마다 붉은 짐승이 뱉어낸 말은 일제히 제 몸을 부풀리며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말이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때로는 저희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로 동굴의 냄새 동굴의 언어 동굴의 표정이 번져갔다 사람들은 붉은 것을 제 입속에 집어넣고 다녔다 짐승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짐승이 길러낸 말들만 동굴을 찾아 소문처럼 세상을 들쑤시며 다녔다 오늘은 내가 가두었던 동굴 속 붉은 짐승 한 마리 떠돌이 말들의 기척에 욱, 뛰쳐나오려 했다//

풀잎에게 / 이성목
바람이 그대를 흔들고 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대가 꼿꼿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을 그대가 참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대가 한순간에 바람을 흔들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대 티끌이 되어 눈 속에 콕 박히는 느낌, 생각해보니 소식보다는 언제나 전율이 먼저 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가 초록에 물 드는 시간을 평정한다는 가을입니다.// 모든 소식 끊어주십시오. 이제 불멸을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대를 대신하여 참아줄 울음이 내 안에도 가득합니다.//

별과의 일박 / 이성목
너를 사랑하는 날은 몸이 아프다/ 너는 올 수 없고 아픈 몸으로 나는 가지 못한다/ 사랑하면서 이 밝은 세상에서는 마주 서지 못하고/ 우리는 왜 캄캄한 어둠 속에서만 서로를 인정해야 했는가/ 지친 눈빛으로만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는가/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너를/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나는/ 한숨도 못 자고 유리 없는 창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우리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디선가 별이 울음소리를 내며 흘러갔고/ 어디선가 꽃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그건 언제였던가/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빗방울 가슴치며 너를 부르던 날/ 그때 끝이 났던가 끝나지는 않았던가/ 울지 말자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은/ 누구나 마음이 아프다고/ 외로운 사람들이 일어나 내 가슴에 등꽃을 켜 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별빛을 꺼 준다//

단체사진 / 이성목
나는 왜 늘 뒷줄에만 서 있었을까/ 누렇게 얼룩지고 빛 바랜 흑백사진/ 눈부시게 터뜨려 주던 플래시 불빛과/ 좀체 터지지 않던 억지웃음들이/ 그땐 어쩌면 이렇게도 어정쩡한 자세였는지/ 앞선 자들에게 얼굴 가려지고/ 청춘이 반쪽으로 남은 사내/ 얼마나 더 뒤꿈치를 들고 견뎌야만 할까/ 세상의 뒷줄들은//

집에 대한 기억 / 이성목
용담동 건천 주변/ 진눈개비 종일 흩뿌리고, 나는/ 복음과 찬송이 온수처럼 흐르는 천변 교회로/ 어머니를 찾아 다녔다./ 낡은 곤로와 희미한 이부자리 개지 않은/ 아버지의 무능을 힐끗 돌아보고/ 아버지의 꺼질 듯한 절망을 방문 걸어 놓고/ 눈길로 어머니 부르며 가는 날은/ 가난보다 더 가난의 습관이 자욱한 방/ 깨어진 라디오에서는 늘 노래가 쏟아지고,/ 언 구들목에서는 바람든 무 같은/ 아버지의 다리가 걸려 나오는/ 방의 몸서리가 따라 다녔다. 겨우내/ 구석으로 밀려 나간 아버지/ 연장 가방을 뚫고 나온 못 하나 자꾸/ 마음에 걸리고, 걸려서/ 자주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던/ 빙판길, 그 위에/ 허구의 집 하나 있었다//

문상 / 이성목
우리가 이렇게 살자.// 죽은 자가 산 자를 불러/ 술과 고기를 먹이는,// 우리 이렇게 살자/ 앓는 동안// 죽음은 얼마나 딱딱한가/ 죽음은 얼마나 싸늘한가// 밤새 퉁퉁 불은 눈으로/ 부르튼 입술로,// 동백꽃// 쉰 목을 꺾어/ 마당에 내려놓는다.//

버스가 여기 멈추어 설까요? / 이성목
지하도 입구,/ 깡통처럼 찌그러져 있는 사람 있습니다/ 사람 위로 눈이 내립니다// 찌그러진/ 깡통 같은, 버스는 또 늦습니다/ 만져지는 동전들이 손바닥 따뜻하게 기다리는 동안// 세상 끝에 엎드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몸이 전부 바닥인 그의 등에 눈이 질퍽입니다// 그 사람/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찌그러진 깡통 속을 보며/ 손목에 묶었던 차가운 시간을 풀어 보태어 주면서/ 찌그러진 마음에 딸그락 딸그락/ 눈송이 수북하게 쌓일 때까지//

편육처럼 / 이성목
내 살을 이렇게 저며 낼 수 있다면/ 너무 얇아 생이 투명해질 때까지/ 칼날 위에 나를 거듭 눕힐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깊은 춘궁/ 당신의 혀에 감겨/ 아주 잊혀 버릴 수 있다면//

깡통처럼 / 이성목
찌그러지면 좋겠네./ 찌그러져 속엣 것들 모조리 게워 내고 가벼워지면 좋겠네. 가벼워 심사가 자주 뒤틀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네. 뒤틀린 만큼 큰 소리를 낸다면, 쥔 주먹이 푸른 탱자 알맹이 같은 아이들 다 불러내어 그것들의 발길에 채여 다니며 아주 납작해져 보았으면 좋겠네. 자동판매기 속의 캄캄한 서열이 아니라면, 효수된 내 머리 퉁퉁 두드려 통째 들이밀 재생 공장이 아니라면 좋겠네. 속에서 부글거리는 절망을 거품처럼 게워 내도 먹는 자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드는 폭로라면, 나를 다 버려도 좋겠네. 찌그러져 끝내는 어느 낯선 풀섶에 버려져도 좋겠네. 굼벵이나 지렁이들의 뒷간 어디쯤 온갖 더러움 다 거두어 주다가, 세월에 녹이 슬면 녹슨 곳 뚝 떼어 풀들의 자리로 내어 주고, 쓰라린 살갗에 뿌리가 깃들어 저 깊은 땅 뜨거운 노래를 듣게 되었으면 좋겠네. 내가 담아 내야 할 세상의 내용물들이 여느 사람의 속엣 것과 다르지 않다면, 찌그러지고 채이다가 아주 버려져도/ 가는 길은 조금 소란스러우면 좋겠네./ 떨그럭거리며 사는 이들의 남루한 소리 오래오래/ 빈속으로 울려 왔으면 좋겠네.//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 이성목
어둠에 등을 대고 부음을 듣는다/ 목덜미를 스쳐 어깨를 넘어가는/ 울음은 주름살 사이에 고여도 깊다/ 그렇게 떠날 것은 무엇인가/ 기별을 꽃처럼 전할 것은 무엇인가/ 맺혔다가 풀리고/ 풀려서 수런거리는 강물이/ 한 몸을 받아 철렁 내려앉은 봄날/ 낮고 아득한 흔들림에 귀 기울이는데/ 꽃잎 한 장 이마를 짚는다/ 그 찬 손에 화들짝 깨어나면/ 얼굴 가득 번지는 열꽃/ 붉게 피었다 져도 나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듯도 하건만/ 사는 일이 이렇게/ 어둑해질 것은 또 무엇인가/ 당신에게 살을 석어도 모를/ 나는 누구냐고 자꾸 되물으며 여자가/ 아이를 지우고 돌아온/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아파서 손 댈 수도 없는/ 멍이 배에 가득 번지는 것처럼//

사막에서 / 이성목
공중에서 내려다 본 도시는 선인장 군락 무성한 사막입니다. 사랑은 뜨겁기만 할 뿐, 차라리 적막에 가깝습니다. 모든 소리는 사구 아래 비밀의 통로를 지나갑니다. 느리게, 사람들은 선인장 물관을 따라 올라가 저무는 지상을 내다보고 돌아갑니다. 눈에 돋은 가시가 붉게, 그러나 피 한 방울 없이 가슴을 찌릅니다. 모든 생애, 모든 순간들이 멀티비전 화면 속으로 번쩍이며 사라집니다. 당신 살았다던 썬랜드 홈 201호 사방연속무늬 벽지 이미 뜯겨져 추억은 당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형상은 바람에 휩싸인 모래언덕에, 무너지는 내 어깨 죽지에 아프게 꽂혀 있습니다. 이제 사랑은 소멸하지도 부활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바람의 발자국에 감염되고, 시도 때도 없는 육욕에 노출되었습니다. 점점 희미하고, 낡고, 병이 깊어 당신 말 귓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쏟아버렸습니다.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워요. 선인장 가시를 꺾어 붉은 손바닥 편지를 씁니다. 얼굴 구멍 속으로 모래가 흐르고 눈은 어둡습니다. 검은 눈으로 당신의 홀로그램을 바라봅니다. 신기루 같습니다.// 그러나,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숨표처럼, 마침표처럼,/ 무수한 생의 종지부들, 모래알들//

개울물에 비추어 보다 / 이성목
새가 죽은 물고기를 밟고 간다/ 아가미에 꽂힌 발자국이 낚시 바늘 같다// 나를 만나야겠다고 종일 바람을 따라 다녔다. 인두자국 같은 너는, 버려야겠다고 담뱃불로 살을 지졌다. 나는 물의 혀로 살았다. 늙은 수초의 허리를 핥아대며, 달팽이 귓속에 뜨거운 농담을 불어넣으며, 들과 길을 회유하며, 속이며, 녹이며, 나는 흘러왔다.// 입안에 고인,/ 혀는 썩어 뭉개져도 뽑혀나가지 않는다.// 흘러서/ 가는 곳을 모르는 내 시는/ 스스로 무엇을 비추어 깊어질까.// 햇살과 물결을 번갈아/ 단근질하는 새의 혀 같은,/ 물달개비 싹이/ 내 아가미에 툭 꽂히는/ 짧은 통증에도/ 파르르 떨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낙화유수 / 이성목
창을 반쯤 열고 담배 연기 풀풀 내뿜다가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밖을 본다. 당신 이미 늙어, 꽃 지면 마음 먼저 무너진다 하셨는데// 빈 수레를/ 끌고/ 또, 밀고 가는/ 저 노부부./ 나를 꽃구경하듯/ 느릿느릿,/ 나를 꽃구경하듯/ 어칠어칠/ 걸음걸이/ 자꾸 휘어진다.//

무화과를 먹는 저녁 /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꽃, 무화과나무를 찾아서 / 이성목
그대, 꽃다운 나이에 꽃피지 못하고/ 불혹에 다다른 나를 찾아왔네.// 불볕처럼 뜨거웠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봄날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네./ 이미 가지에는 과일이 농하고/ 나는, 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는 것도// 늦었다. 너무, 늦었다./ 지친 잎들이 붉은 얼굴로 나를 뛰어 내렸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네./ 꿈에 조차 볼 수 없던 것이 만개였으니,/ 모든 꽃들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라 해도/ 나는 받아들이려네.// 세상의 뒷마당 한 구석에 얕게 내렸던/ 나무 뿌리 뻐근하게 힘을 주는 동안만이라도/ 순간만이라도//

꽃 진 자리 / 이성목
죽음에 달려드는 것이/ 똥파리만은 아니네.저 꽃은/ 죽은 나뭇가지의 지척에 있네.꽃이라고/ 열매를 남기는 것만은 아니네.꽃의 죽음에/ 달려드는 푸른 잎사귀도 있네.잎사귀는/ 바람의 지척에 있네. 잎이라고/ 언제나 무성한 것만은 아니네.절정이란/ 물러서는 자리일 뿐,네 몸에도/ 모조리 지워낸 나의 일부가 있네. 너에게/ 꽃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네.//

쓸쓸한 환유 / 이성목
살아있는 뱀으로 술을 담글 때, 술병에 술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뱀이 술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견딘다고 한다. 그 허기진 뱀은 제 꼬리를 조금씩 잘라 먹으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한다. 훗날 그런 술병 속에는 눈을 치켜뜨고 죽은 뱀의 머리통만 주먹만 하게 불어서 둥둥 떠 있다고 한다.// 양파가 붉은 망을 뚫고 푸른 촉을 내밀었다. 뿌리도 없이 양파의 몸을 뚫고나온 촉에 손을 대는 순간 둥근 양파의 몸이 푹 꺼졌다. 양파의 촉은 제 몸을 빨아먹으며 한 방울의 육즙도 남지 않을 때 대궁을 부풀리며 자진한다.// 몸에 없는 것이 아플 때가 있다. 오른 쪽 다리를 잘라낸 친구는 다리를 잘라낸 뒤에도 발목이 시큰거리고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고 한다. 잠결에 발바닥이 아파 뒹굴며 발에 손이 갔을 때, 발은 어디 있는지 잡히지 않고 뿌리 없는 통증은 며칠을 그렇게 몸을 다녀갔다고 한다. 다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목숨을 구하지 못했으니, 그는 날마다 몸의 일부를 떼어주며 내생을 향하여 절룩절룩 걸어갈 것이다.// 나는 꼬리뼈를 퇴화시키며 사십 년을 살아 왔다. 날개 죽지를 지우며 몸 안으로 숨은 지 사십 년이 지났다. 쇄골 사이로 내다보는 바깥, 없는 꼬리, 없는 날개를 흔들며, 긴 팔 덜렁거리며 춤추는 나를 본다.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다니! 그림자 둘둘 말아 쥐었던 손바닥을 펼치면, 투명 날개를 단 나비 떼가 날아오른 자리에 손금이 둥근 물결처럼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뜨거운 뿌리 / 이성목
식당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풀어 넣는다./ 솥바닥의 푸른 김이 천장까지 확 끼친다./ 양파는 가늘고 긴 뿌리를 뽑아 내린다./ 유리잔에 양파의 입김이 뿌옇게 서려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국수가닥을 건져 올리던 한 노년이/ 희뿌연 안경을 벗어놓고 잠시/ 자신의 가늘고 긴 숨을 끊어 뜨거운 국물 속에 내려놓는다./ 나이 어린 손자는 후루룩 후루룩 그 뜨거운 소리를 먹는다./ 땀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세상의 모든, 푸른 것을 밀어 올리는 뿌리는/ 이렇듯 뜨거운 바닥에 맨발로 서는 것이다./ 그렇지. 이제 필생의 뿌리를 나도 내려야겠다./ 당신과 함께/ 칼국수를 먹는 속이 훅 달아오른다./ 뜨거움이 온 몸에 퍼진다.//

고로쇠나무 / 이성목
나무는 일생 동안/ 뿌리로 빨아 올린 물을 몸에 가두고/ 물 위에 이는 파문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나무의 몸에, 그러므로/ 마음이 출렁거렷던 흔적, 그것을 테라고 하자./ 몹시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옹이라고 하자./ 마지막 날의 테와 옹이를 만들기 위하여/ 솜씨 좋은 황천 친구가 찾아왔을 때/ 아버지의 내면이 순간 거세게 소용돌이쳤다면/ 몸으로 다 막아낼 수 없는/ 그 격량은 무엇으로 다스렸을까./ 아무도 모른다./ 나무가 가지를 들어 옹이를 열고/ 시원하게 소변을 보던 아침/ 앞소리 메기듯 개울이/ 곡소리 내고 갔다는 것/ 나무의 내면을 내가/ 깨끗하게 한 사발 들이켰다는 것/ 내 몸에 담은 물이 넘쳐/ 한없이 쏟아져 내렷다는 것/ 그것뿐, 휘청/ 나무가 옆구리를 잡고 쓰러진 후/ 물을 가두었던 저수지는/ 나무의 몸 어디에도 없었다.//

뼈다귀 해장국에 대하여 / 이성목
몸이 먼저 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시장 골목 허름한 밥집으로 가라/ 세상이 다 버릴 것 같았던 뼈를 거두어/ 세상이 다 버릴 것 같았던 우거지 덮어/ 불룩해지는 뚝배기 속을 보라/ 뼈는 입김을 뿜어 그대 얼굴 뜨겁게 만질 것이다./ 마음이 벼랑 같아 오금을 접고/ 캄캄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정강이뼈 쓸어안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보잘것없는 뼈마디 하나가/ 얼마나 뜨거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뚝배기 두 손을 모아 감싸는 경배/ 그 손바닥 가득 번지는 것이/ 몸을 다하여 그대 만나려 하는 뼈의 몸짓이다./ 그래서 뼈는 뜨거운 것이다./ 한때 나도 여자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산 적이 있다./ 무슨 짐승인지도 모를 뼈를 발라내어/ 뜨거운 신음을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몸 속 가득 뼈를 숨겨 놓고 살 냄새 풍긴 적 있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뜨거운 눈물에 뼈를 먼저 적셔라/ 뼈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진국이다.//

지삿개를 말하다 / 이성목
1.// 균열이라고 해야겠다. 스며들고 새어나간 사이라고 해야겠다. 처음에는 불이었다가, 재였다가, 문턱에 기대놓은 발자국에서 푸른 물 뚝뚝 듣는다고 해야겠다./ (몸이 뜨거워지자 몸에 가두었던 문자들이 모든 사슬을 끊고 날아올랐다. 문자가 사라진 다음 나는 물보다 더 묽어졌다. 묽어서 보이지 않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당신이 왔다.)// 온전히 내 몸에 들어 내가 된 당신이라고 말해야겠다./ 나였던 당신이며 당신이었던 나, 몸인 마음과 마음인 몸, 갈피에서 서로를 꺼내어 햇빛 좋은 마당에 내다 말리는 동안이라고 해야겠다. 가파른 옆구리에 손을 찔러 흰 물결을 꺼내는 순간이라고 해야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격렬한 온도로 들끓고 차갑게 식어갔던 기록이라고 해야겠다./ (내 몸은 문자의 감옥이었다. 당신은 노래의 열쇠를 철렁거리며 왔다. 죽은 문자의 흰 뼈마디 와르르 쓸려나가는 해안, 이미 문자는 흔적 없었으나, 돌과 바람과 물결은 제각각의 음역을 가진 화음이 되었다.)// 오줌을 눈 것도 아닌데 오줌 진저리를 치는 몸에 대하여 나는 전율했다./ 마음의 신전이 낭떠러지 끝에 우뚝 섰다고, 돌의 귀는 물소리로 봉인했다고, 소낙비가 화살처럼 내 뒤편에 시퍼렇게 우거졌다고 해야겠다./ (내가 당신을 내 몸에 가두었을 때, 몸 안의 희고 검은 건반을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가늘고 흰 손가락들이 뼈에 닿자, 내 몸에서 문자가 흘러나왔다.)//
2.// 울음은 진원지가 없다. 갈라지고 부서진 곳으로 파고드는 물결이 그 여진일 뿐, 당신을 허벅지에서 꺼내 철커덕 가슴에 넣는 소리, 환청이라고 해야겠다./ 울음소리는 어떤 유물보다 오래되었으나 발굴되지 않으므로, 몸에서 몸으로 녹아들어, 내가 된 당신을, 절벽에 앉아 붉은 육각 도장을 찍어주는 중이라고 해야겠다.// 내 이마에 찍힌 화인을 당신이라고 해야겠다.//

자반고등어 / 이성목
오래 소장하고 싶다면/ 이 책은 표지만 읽어야 한다/ 첫 쪽을 쓰다가 고스란히 백지로 남겨둔/ 이 육신을 눈으로만 읽어야 한다/ 이면과 내지가 한 몸인 그를/ 몇 장 넘겨보기도 했지만/ 뒤집을 때마다 생살 타는 냄새가 나는/ 이 책은 너무 오래 읽어서는 안 된다/ 그 기록은 물로 쓰고 소금으로 새겨져서/ 팍팍하고 짤 뿐만 아니라 비릿한/ 등 푸른 언어와 유선형 문장은 쉽게 타버린다/ 쉽게 부서지고 쉽게 헤져서/ 가시와 살점이 지글지글 뿜어내는 푸른 바다와/ 바다의 내밀한 구전을 다 읽지 못하게 된다/ 슬쩍 넘기다 우연히 본/ 온몸 빼곡히 쌓아둔 흰 종이들/ 그를 읽을 때는 그 백지마저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한장 한장 넘겨 보아야한다/ 육신을 제본했던 스테이플러 같은 가시가/ 목구멍에 컥 걸리기도 하는/ 난해한 이 책은/ 붉은 혓바닥으로 받들어 읽어야 한다//

칠면초 사전 / 이성목
지는 해에/ 한순간 화르르 타고 없어질 풍문도/ 저 혼자서는 불붙지 못하지/ 일곱 번 몸을 뒤채고 바꾸어/ 내가/ 당신 만났던 순간을/ 발화라 하겠다/ 바짝 마른 혓바닥에 소금이 일어/ 혓바늘 돋은 문장은 다 뱉어내고/ 화근처럼/ 갯벌에 몰래 묻어둔/ 저 붉은 명사를/ 당신이라 하겠다//

노끈 / 이성목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른 꽃대를 볕 아래 놓으니/ 마지막 눈송이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 남은 향기를 품고 사라지는 걸 보았다/ 몸을 묶었으나 함께 살지는 못했다/ 쩡쩡 얼어붙었던 물소리가 저수지를 떠나고 있었다/ 묶었던 것을 스르르 풀고 멀리서 개울이 흘러갔다//

불편한 죽음 / 이성목
추운 날 땔감으로 쓸까하여/ 공사장 폐목자재를 얻어다 부렸더니 온통 못투성이다/ 하필이면 나무에 빠져 죽었을까/ 죽은 못을 수습하는 동안/ 나무의 까칠한 잔등에 긁힌 자국이 소금쟁이 같다/ 죽은 것들을 위하여 겹겹의 나이테를 다 퍼낼 수 없어/ 아궁이 밑불을 뒤적거리며/ 퉁퉁 불어 저절로 떠오르기를 기다려도 보았지만/ 바닥은 개흙, 못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과 침묵 사이엔 얼마나 두터운 합의가 있었을까/ 나무판자를 덮고 잠들었던 노숙자는/ 죽은 지 열흘 만에 말라비틀어진 몸을 삶에서 빼냈다/ 못대가리를 장도리 끝에 걸어 당겼더니/ 쇳소리를 내며 합판을 빠져나오는/ 잔뜩 꼬부라져 죽은 못은 죽어서도 쭉 뻗지 못하였다//

두근두근 해적 룰렛 / 이성목
등에 칼을 꽂았어/ 옆구리에 슬며시 칼을 찔러 넣었어/ 식은땀이 흐르네/ 이거 정말 소름 돋네/ 끝내 불알 두 쪽만 남았는데/ 이런 씨발/ 대갈통이 날아가네// 선택에는 언제나 목이 따라다니지// 어떤 놈의 칼을 받아야/ 어느 부위로 칼을 품어야/ 내 머리를 가장 먼 공중으로 데려다 줄 것인지// 장고 끝에도 대갈통이 날아가네/ 아차하면 대갈통이 날아가네// 아무도 모르는/ 캄캄한 통 속으로 칼을 밀어 넣는/ 누구나 다 아는// 저 두근두근/ 통속//

다우너 / 이성목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 소가죽인데도 뒤축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 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갈 시간이 없다.//

나무밑동 의자 / 이성목
의자를 두고 가서 슬프다/ 밤새 함박눈이 내렸다/ 거기, 나이테 얼룩은 내부로부터 왔으니/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라지면서 의자를 두고 가서 슬프다/ 의자라서 슬프다/ 뿌리로 빨아올린 물은/ 몸에 고여 무슨 파문을 일으켰나/ 깔고 앉는 슬픔이 슬프다/ 축축해지는 슬픔이 슬프다/ 몸에서 결만 남겨두고 물을 전부 퍼낼 수 있나/ 톱이라면 그럴 수 있나/ 도끼라면 그럴 수 있나/ 핏자국 하나 없이/ 너를 내 안에 앉혀야 하는데/ 바닥이 몸이라서 슬프다//

토담이 무너지는 동안 / 이성목
어느 여름 장맛비 사나흘에/ 젖은 토담이 스르르 무너졌다/ 누군가 세웠을 옹색한 높이며/ 거처의 안팎이나 구분 지었을 허술한 경계가/ 조용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훗날 당신이 나를 떠나는 하루나/ 내가 당신 떠나는 절명이 저리 순했으면 싶어/ 몇 날 며칠 담이 무너진 곳을 서성거렸다/ 흙탕물 범벅이었던 자리/ 물이 길을 내고 바람이 공중을 여는 것인지/ 망촛대 하나 툴툴 털고 일어서/ 둥글게 허리를 젖히고 있었다//

첫눈 / 이성목
팔순의 할머니를 아기처럼 무릎에 올려 앉히고 예순의 자원봉사 할머니가 흰밥 한 숟가락 퍼 올려 입에 댄다. 자아, 드세요. 입술만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다 마는 입맛에게 왜 안 드세요? 말하고 한 숟가락 먹어보고, 맛있어요! 말하고 한 숟가락 먹어보고, 귀가 먼저 먹어서 먹을 것을 듣지 못하는 팔순의 할머니 귀를 열어 옳지! 옳지! 한 숟가락 넣어주고 또 떠 넣어주고 예순의 할머니가 어이쿠 벌써 다 드셨네!/ 앞섶에 묻은 밥알을 툴툴 털어내자 밥상이 어느듯 새하얗다.//

노란 주전자 / 이성목
잠 덜 깬 새벽에 가슴 더듬더듬 젖꼭지를 찾아 물고 오물오물 빨다가 다시 잠이 든다.// 어미는 몸을 다 기울여도 물이 나오지 않자 엉덩이 치켜세워 허공에다 퍽퍽 뒷발질을 한다.// 나는 모르는 척, 아내를 흔들어본다.// 뚜껑이 열린,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단단한 고삐에 코 달린, 우리 집 염소는 새끼를 낳고부터 찌그러진 깡통 소리를 낸다.// 돌아눕는, 뿔에 옆구리 자주 받힌다./ 속 보글보글 끓다가도, 입에 젖을 물리고 안고 뒹굴고 어루만지던 저를 내가, 벌컥벌컥 들이켜서, 빨아 대서, 평생이 우그러졌다, 고.// 나는 모르는 척, 뚜껑도 없는 주전자를 거꾸로 뒤집어 흔들어본다.//

그늘 속 / 이성목
나이 마흔이 힘에 부친다고, 이백 근이 넘는 덩치와 옻닭을 먹으러 갔다. 먼저 온 몇은 벌써 벌겋게 낮술에 취해, 저녁 해처럼 골아 떨어졌다.// 코고는 소리가 빈 뼈를 두드렸다. 독하기가 사람만한 것이 있겠냐. 덩치는, 제 마누라를 뼛속에 쟁여 넣은, 혼자된 친구를 흔들어 깨우고, 옻이 올라 벌겋게 부푼 얼굴을 쓰다듬으며, 독을 가졌으니, 너는 이제 죽을 수도 없지. 술을 따르고// 나는 슬며시 방을 나와 검은 숲에 마주서서 알약을 삼켰다. 이제 내 속은 어떤 불길에도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환청에 귀를 잃은 바람이 독사가 벗어 놓은 허물을 핥아먹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고통이 짜르르 몸을 따라 내려갔다.// 맹독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는 것. 뼈를 태울 것 같은 화독이 올라, 독사 같은 머리를 꼿꼿하게 세웠을 친구, 온 몸 벌겋게 오른 옻을 씻으러, 허물은 몇 번이나 벗었을까. 혼자서는 불길 다스릴 수 없어, 여기 친구들 무릎 근처 이백 근이 넘는 그늘을 파고들어 벌겋게 누워있었다.//

한여름 밤의 꿈 / 이성목
당신은 등불처럼 희미하게/ 밤이 깊도록 눅눅한 옷을 개고 있어/ 아이들은 당신곁에 잠들어 있어/ 선풍기 잠시 고개 돌려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아빠처럼/ 아이들의 아빠처럼 늦은 귀가를 하지/ 개다만 옷가지 아무렇게나 잠이 들면/ 잠든 사이 우리도 사랑을 나눌까/ 땀에 젖은 말들이 거실을 서성이는 사이/ 뒤꿈치를 들고 바퀴벌레 모여들지/ 아무래도 저 많은 발들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땀흘리며 무엇을 할 것이다/ 생각 사이로 새벽이 오는지/ 당신 이마에 뜨거움이 번지는데/ 서러움이 목에 가득 차오르는데/ 눅눅한 옷가지 푸륵푸륵 잠을 깨워/ 나는 남편처럼/ 당신의 남편처럼 이른 출근을 하지//

저수지 / 이성목
얼음장에 혓바닥이 쩍 달라붙어 있었다./ 극약을 삼킨 개는/ 내장에 붙은 불길에 쫓겨 혀를/ 물 속에 첨벙첨벙 적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겨울이 왔을 것이다./ 눈보라치는 하루/ 청산가리 먹은 꿩이 얼음장에 머리를 처박았다./ 저수지는 저들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둥근 출구였을 것이다./ 개와 꿩의 영혼이/ 얼음장 밑으로 지느러미를 흔들며 떠나는 것을 보았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훗날 나는 나를 떠나/ 한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사소한 후일담도 들려왔다./ 저수지를, 자신이 빠져나갈/ 출구로 잘못 안 사람도 몇 있었다고 한다.//

낙엽 / 이성목
엎어진 밥상이라 하자// 콧물 범벅이 된 아이들의 따귀라 하자// 죽자 죽어버리자 엄마가 울고/ 아이들은 무서워, 엄마 무서워 울고/ 내 못나서 그렇다 아버지도 울고// 까뭇까뭇 꺼져가는 백열등이/ 술에 취한 짧은 혀가/ 짝이 없는 신발 한 짝이// 밤새도록 뛰어내린/ 그 아래/ 가지 아래/ 난간 아래// 발목 없는 발자국이라 하자/ 자루 없는 칼이라 하자//

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 이성목
별이 되려다가 실패한 인생들이 별을 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환속에 실패한 그림자가 지하도 계단에 앉아 등을 구부렸다/ 세상의 호명을 기다리던 자판기 속/ 분내 나는 화장지 한 겹 한 겹 광장 모퉁이로 모여들었다/ 말의 단맛을 본 공중전화는 어떤 시대와도 소통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저 쪽의 부재를 알리는 단속음이 오래/ 들려 왔다 야음을 틈타 상경했던 완행열차 쇳소리 같은/ 추억이 잠시 서울에 세 들어 살다가, 서울이 되려다가/ 실패한 신도시와 함께 총알택시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한때 너도 세상의 성모가 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중년의/ 여자는 80년대식 가투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번만/ 우리 다시 피비린내 나는 섹스를 즐기지 않겠냐고 가끔은/ 옛날이 그립기도 했었다고 쪼그라든 젖꼭지에 담뱃불을 비볐다/ 몸에 불꽃이 일던 새벽, 공중변소에 오줌을 질질 흘려 놓고 나는/ 옛사랑 버렸다 버린 놈에게 무슨 놈의 인생이 있겠냐고 진저리 치며/ 미화원들이 리어카마다 깨진 불알을 소복하게 쓸어 담았다/ 서울의 일박이 실패한 사랑을 싣고 어디론지 떠나고/ 집 나온 똥개 한 마리 미명을 가로질러/ 넥타이를 질질 끌며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옛사랑, 포도밭에서 / 이성목
옛사랑 여자와 마주 앉아 포도를 먹는다/ 껍질을 벗겨 내며 한낮 뜨거웠던 알몸을 추억하는 동안/ 지나간 세월의 껍질이 소복하게 쌓였다/ 다시는 버리지 않으려고 움켜쥐었던 손바닥으로/ 달게 흘린 옛시절의 눈물이 흐른다/ 삶이 가끔은 이럴 때가 있다/ 버릴 수 없다고 움켜쥐면 쥘수록/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포도의 시린/ 알맹이처럼, 껍질처럼 제각각 버려질 때가 있다/ 이제 와서, 내가 버렸던 옛사랑의 굵은 눈망울과/ 식탐을 앞세워 마주하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지/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포도 알처럼 훌러덩 벗겨지는/ 그의 검게 젖은 눈동자를 받아 드는 일이/ 또한 얼마나 입맛을 쓰게 하는지, 가슴에 침이 고이고/ 맹세는 작았으나 단단했던, 옛사랑의/ 몸밖으로 서슴없이 튀어 나갔던/ 여문 포도 씨들이 한물 간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아, 나는 나의 껍질을 잡고 더 오래 버틸 수 없어/ 옛사랑 곁을 떠났던 적 있다. 포도 알맹이처럼,/ 모든 아픈 육신을 황홀하게 뭉개어 줄/ 세상의 혓바닥으로 순순히 들어섰던 적이 있다 나는/ 이제 어떤 연대의 넝쿨손에 깍지를 끼어야 하는지/ 어느 바닥에 내뱉어지는 껍질이 되는지 알지 못하고,/ 옛사랑 버린 적이 있다. 밭머리에 소복하게 쌓이는 포도/ 껍질 검게 태워 버리고 싶었던 폭염 아래서도/ 달디달게 저항했던 한 시절 기억하는 것인지/ 마른 잎 버팀목 부러지는 곳을 가리는 사이,/ 늙은 옛사랑 여자의 음부처럼 너덜해진/ 포도껍질, 쓸어 담는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는다//

도원결의 / 이성목
나는 여기서/ 더 오래 나를 기다려야 한다./ 죽은 울타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봄을 맞이하듯/ 두엄 냄새 그윽한 편지를 보냈지만,/ 개울을 따라 내려간 소식은 어느 차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봄 날 하루/ 산죽은 바람에 칼을 벼리고,/ 한 생을 탕진하고 돌아온 나는/ 사지를 꺾어 꽃잎 한 장에 나를 건다./ 햇살에 손목을 그어 내미는/ 복숭아나무 가지에 입을 대면/ 목젖에 닿는 이 뜨거움이 당신 아니던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턱을 괴고/ 혓바닥까지 스며드는 가시 같은/ 내 사랑은 거듭 거듭 덧나야 한다./ 상처 물컹하게 짓무르도록/ 몸에 마음이 차고 넘치도록//

발굴 / 이성목
무덤을 열자 그는 없고/ 순장한 낡은 그림자 한 장이 나왔다/ 저 검은 생가죽을 어떻게 벗겨냈을까/ 죽은 그에게 수의를 입히기 위하여/ 이승의 옷이었던 저 한 벌을 벗겨냈을 것이지만/ 그대 곁에, 반쯤은 그대 몸에 스며들어/ 누울 때 따라 눕고 뒤척일 때 따라 뒤척이는/ 이 오랜 관계도 세상에 발굴되어질까/ 안으로 문을 잠그고 거기/ 서로 먼저 낡아 서로에게 순장한/ 생가죽 같은 마음도 다 벗고 사는/ 그대와 나는 언제쯤 환하게 흙속에서 드러날까/ 부장품으로 생몰 연대를 추정하는/ 고고학의 연대측정법으로 보아도/ 끝이 닳아 뭉툭해진 이 숟가락 두 개가/ 여기 일생을 묻었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두꺼운 무덤을 뚫고/ 세상과 내통하기 시작한 날 오래되었다.//

적소에서 / 이성목
꽃 지는 소리 시끄러워 문을 닫아 둡니다,/ 솜이불 귀를 떼어 바람의 귀를 막습니다./ 아침에는 탱자나무 울타리에 굴뚝새 날아들어/ 까칠해진 공중에 손바닥 도장 찍어 둡니다./ 깃털이 폴폴 날고, 그 이른 시각에/ 부엌에서 무얼 하다 나오는지 부지깽이/ 벌겋게 단 얼굴을 물웅덩이에 댑니다./ 빨랫줄에 걸어 둔 젖은 길/ 마르지도 못한 채 염문은 시들합니다./ 저녁에는 방안에 헛기침 가득 들어차서/ 모로 누울 자리조차 없습니다.// 세상이 말리는 사랑을 내가 하였으니// 종일 발자국 중얼거리는 댓돌 아래/ 개가 물어다 놓은 뼈마디/ 욱신욱신 아픈 것을 모르겠습니까.// 마음 드나드는 소리 아뜩하여/ 몸의 문을 닫아 둡니다//

끓는 물 / 이성목
저 투명하게 지워진 물의 기억 속에도/ 물결이 남아있을까// 그대 몸에 손을 댄다 그렇게 뜨거웠다던/ 사랑의 신열은 아직도/ 끓는점을 지나가지 못한 것 같았다// 불이 닿자/ 희고도 눈부신 그대의 영혼이/ 물의 몸을 벗어던졌다// 나는 뜨거운 물의 날개를 잡으려 했다// 그대 기다려주지 않았다/ 손바닥에/ 그대 살던 물집 하나 남아/ 내 사랑 이토록 쓰라리고 아픈 것일 뿐// 한번 불을 본 물은/ 어떤 형식에도 묶이지 않았다//

그늘 속 / 이성목
나이 마흔이 힘에 부친다고, 이백 근이 넘는 덩치와 옻닭을 먹으러 갔다. 먼저 온 몇은 벌써 벌겋게 낮술에 취해, 저녁 해처럼 골아 떨어졌다.// 코고는 소리가 빈 뼈를 두드렸다. 독하기가 사람만한 것이 있겠냐. 덩치는, 제 마누라를 뼛속에 쟁여 넣은, 혼자된 친구를 흔들어 깨우고, 옻이 올라 벌겋게 부푼 얼굴을 쓰다듬으며, 독을 가졌으니, 너는 이제 죽을 수도 없지. 술을 따르고// 나는 슬며시 방을 나와 검은 숲에 마주서서 알약을 삼켰다. 이제 내 속은 어떤 불길에도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환청에 귀를 잃은 바람이 독사가 벗어 놓은 허물을 핥아먹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고통이 짜르르 몸을 따라 내려갔다.// 맹독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는 것. 뼈를 태울 것 같은 화독이 올라, 독사 같은 머리를 꼿꼿하게 세웠을 친구, 온 몸 벌겋게 오른 옻을 씻으러, 허물은 몇 번이나 벗었을까. 혼자서는 불길 다스릴 수 없어, 여기 친구들 무릎 근처 이백 근이 넘는 그늘을 파고들어 벌겋게 누워있었다.//

폐가, 대통밥집 고양이 / 이성목
당신은 입속에 하얀 송곳니를 숨기고 오셨지요 칼바람 마당에서 장작을 쪼개는 동안 아궁이에 표창처럼 꽂히는 진눈개비 보아요 그걸 당신 가슴에 꽂으면 검은 숯가루 부서져 날리며 속치마 같은 얇은 밤이 오는 것을 보아요// 목숨은 제가 가진 허기만큼 서로를 먹어 치우는 것이에요 당신은 이 풍습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어떤 헛기침에 화들짝 상을 엎지만 불은 이미 장작처럼 딱딱해지고 흰 눈 수북하게 쌓일 가마솥 대통에는 결코 더운 김 오르지 않을 것이에요// 꼬르륵 꼬르륵, 몸이 내는 소리는 비어있는 것들의 속을 마음이 대신 끓어 들려주는 것임을, 허기는 영혼의 존재를 소리로 만나게 하는 것임을 알아요 얼음장 밑 물소리가 그저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듯 몸으로는 가질 수 없는 공중이 있어요// 펄펄 날리는 저 눈송이, 뜸은 어느새 들어 서로가 서로를 먹어치운 것인지 멀리 대숲에서 댓잎들 발톱 곧추 세우는 소리 서걱거리며 잦아드네요 불에 덴 자국이 눈에 선명한 낙죽을 나누어 가졌으니 겸상을 할까요 우리 말고 누가 이 빈솥을 쓸고 닦고 한 몸 안쳐 밥을 짓겠나요//

감자 이야기 / 이성목
제주시 오라동 문간방 세 들어 살던 때 일이었어요. 그 주인할머니 감자 한 광주리씩 캐서는 서문시장 아니면 신제주 오일장 굽은 등 자주 펴고 앉아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 모습 하도 고단해 보여 그 감자 제가 사겠노라고 슬금슬금 후한 인심 미리 세어 넣었더니. 검은 비닐봉지에 캄캄하게 넣었더니. 할머니 펄펄 뛰며 젊은 것이 이렇게 셈 어두워 어쩌냐고. 비닐봉지 뒤집어 하나 세고 훑어보고 다시 보던, 그런 감자가 있었어요.// 그랬어요. 그 할머니 말씀으론 무자년 4.3때, 낮에는 관덕정으로 밤에는 산으로 끌려 다니며 쓴 침조차 삼킬 수 없었던 춘궁이 있었대요. 그래도 살아야지 빈 집 돌며 거두어 온 씨감자 한 바구니 있었는데, 어느 바람 거친 새벽 젊은 놈 찾아와 그 감자 몇개냐고 물었대요. 세어도 세어도 자꾸 틀려 하나 둘 틀리는 거 뭐 어떠랴 어떠랴 얼버무려 일렀는데, 다음날그 서청 놈 말하길 감자 두개 어쨌냐고, 밤새 산으로 내통했냐고, 머리채 질질 끌고 산길 내려 갔었다고 할머니 울먹이며 말 잇지 못했어요.// 할머니 아직도 양지바른 뜨락에 앉아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셈이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다. 꼭 맞게, 틀리지 않게, 세고 또 세어야 산다고, 먹고산다고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그날을, 세고 또 세고 있을 거예요.//

청성淸聲자진한잎 / 이성목
바람이 불었다. 밤새 산비탈을 쓸던 바람은 날이 밝자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덧없다. 들어앉을 몸을 얻으려고 산죽을 바닥까지 휘어놓고도, 들어앉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깊은 잠 속의 흐느낌처럼 소리로만 육체를 드러낸다.// 당신은 시김새 없이도 한 생을 이루었다 저 바람처럼, 어쩌면 몸 없이 회오리치는 것이 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소리로 인해 일어서고 드높아진 영마루 같다.// 바람이 누웠다 소리로 와서 소리 없이 사라질 줄 아는, 높새바람이었다.//

질문 / 이성목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침묵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입안에 공기가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것/ 입을 벌려도 빼낼 수 없는 커다란 풍선이 자라는 것/ 침묵은 질문이 만들어 내는 공포/ 그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총의 언어를 어떻게 알아들을까/ 온몸의 감각을 총구 앞에 모은다/ 두근거림이 사라진 질문이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 또 다른 질문이 이마를 민다/ 질문은 이마를 밀고/ 대답은 등에 매달려 버둥거리는데/ 나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그와 마주하고 있다/ 침묵은 질문이 모르는 또 다른 질문/ 총구에서 하품이 터져 나와/ 이마에 붙은 차가운 꽃잎 한 장/ 애초에 이 꽃잎은/ 질문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한지에 수묵 / 이성목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플라스틱 트리 / 이성목
나무 엉덩이에 전기 플러그를 꽂아 거실에 세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꽃잎 켜지는 걸 보고 있다/ 창틀이 어긋나 벌어진 틈으로 찬바람 들어/ 꽃술이 필라멘트처럼 발갛게 얼었다/ 오늘은 성자가 태어나는 밤/ 말구유에 아기를 버리고 돌아온 여자의/ 닫힌 방문은 오랜 시간 안으로 잠겨 있다/ 이 허허벌판에 카시미론 솜눈을 내려야겠다/ 폭설이 내린 거실은 이글루처럼 따뜻해지리라/ 나는 곱은 손을 비벼 나무 품에 넣는다/ 없는 밑동의 따스함이 손바닥에 번지고/ 날 낳느라 아래를 다 써버린 내 어미처럼/ 빈 집도 쓸고 닦으니 백열등처럼 빛났다/ 텅 빈 거실 구석에서 아기 전나무 그림자/ 여자의 닫힌 방문 앞까지 아장아장 기어간다/ 창밖으로는, 죽은 나귀 울음소리가 공중에 가득하다/ 나무는 숨이 멎을 듯한 비애로도 푸르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재기 시인  (0) 2022.04.30
이소호 시인  (0) 2022.04.29
이장욱 시인  (0) 2022.04.27
배세복 시인  (0) 2022.04.26
심종록 시인  (0) 2022.04.25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