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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구재기 시인

by 부흐고비 2022. 4. 30.

구재기(丘在期) 시인
1950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충남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농업시편』, 『천방산에 오르다가』,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모시올 사이로 바람이』, 『목마르다』, 『제일로 작은 그릇』 등 20여 권이 있다. 충청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한남문인상, 신석초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충남문인협회장 및 충남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시(詩) / 구재기
쓸모없는/ 구절들만 모아/ 그 구절들로만 이루어진/ 백 편 천 편의 시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곧 시다// 꼭 쓸모만큼/ 잎 돋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가진 거 다 버리고는// 깊은 동안거에 들어간/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다//

무게에 대하여 / 구재기
무게를 가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제 주어진 길을/ 가다가 멈춘 울산바위는 슬프다/ 멈춘다는 것은/ 제 무게로 제 자리를 가진다는 것/ 울산바위는 제 몸의 무게로/ 자리하여 멈추고는 마냥 슬프다// 민들레꽃에게도 무게가 있다/ 그 꽃의 무게만큼/ 질기고 긴 곧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로 제 몸의 무게를 감당하다가/ 마침내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생애 중 가장 큰 무게를 가진/ 그 꽃자리에 돋아난 꽃씨/ 무게를 버리고 나니 가볍다/ 가벼울수록 멀리 날 수 있다// 민들레 꽃씨는/ 바람과 함께 바람에 실려/ 울산바위 위를 가볍게 날아, 설악을 넘어/ 울산바위가 훤히 보이는 동해 바닷가/ 너르고 푸른 밭 언덕에 사뿐 자리했다//

허수아비 / 구재기
허수아비들이/ 날더러 허수아비라 부른다/ 넓은 들판 진흙 속에 막대 하나 박아 놓고/ 고작 입다 쓰다 버린 누더기와 밀짚모자를 걸쳐놓고/ 날 허수아비라 부른다// 몰려오는 참새 떼/ 굶주림을 워이워이 쫓아내라고/ 정자나무 그늘에서 장기판이나 두드리면서/ 이리저리 요행이나 바라면서/ 날더러 날더러 허수아비라 부른다// 진흙 속의 내 다리가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마을 이장이나 지서장이나 면장이나/ 공판장에 나온 농협 조합장까지도/ 하나같이 날더러 허수아비라 부른다/ 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모두가 자꾸만 허수아비라 부른다//

으름넝쿨꽃 / 구재기
이월 스무 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려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이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들이 시집 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 속으로/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 지금은 어머니와 두 兄들의 혼을 모아 쭉쭉 뻗어나가고/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는 으름넝쿨꽃/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담자색 으름넝쿨꽃//

백합 / 구재기
백합이/ 하얗게 피었다/ 향기가 너무 좋았다// 본래부터/ 하얀 꽃이/ 향기가 좋다고 한다// 상복 입은/ 옛 애인의 모습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적이 있다//

상사화 / 구재기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지나는 바람과 마주하여/ 나뭇잎 하나 흔들리고// 네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내 가슴 온통 흔들리어// 네 또한 흔들리리라는 착각에/ 오늘도 나는 너를 생각할 뿐//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것이다//

태산목꽃 피던 날 / 구재기
태산목 하얀 꽃을/ 그리도 덩달아 좋아하더니/ 무슨 까닭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아침에 불던 맑은 바람처럼/ 눈부신 햇살 품은 이슬처럼/ 잘 웃던 웃음조차/ 함께 사라져버린 오후/ 텅 빈 뜨락에 서서/ 태산목꽃 홀로 피고 있으니/ 차라리 그 향기에나 묻혀야겠네요/ 장지문으로 다가서는/ 한낮의 허기진 구름 무리/ 웃다 울다 지쳐버린 눈물 자죽처럼/ 메말라 붙어버린 가슴속 아픔을/ 한 올 한 올 꺼내 보아도 되겠지만/ 이제는 정말/ 싸늘히 아름다워지던/ 뒷모습이나 그려볼 수밖에 없네요/ 향기 아슴아슴 피워 올리는 태산목/ 꽃잎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젖은 눈조차 감은 채로/ 저절로 자라나는 슬픔이나/ 아낄 대로 아껴가며 살아야겠네요//

튤립나무 한 그루 ㅡ신석초 선생 생가마을에서 / 구재기
바람이 분다/ 흰 눈이 섞여 내린다/ 간간히 손등에 떨어지면서/ 섬뜩하니 옹크려든다/ 온몸이 으스스 떨려온다/ 지금 튤립나무는/ 스스로의 아픔을 견디고 있다/ 이미 겨울은 깊어지고/ 깊어져서 튤립나무는 시방 알몸이다/ 알몸이어서 떨어뜨릴 잎 하나 없다// 많은 세월을 홀로 살아왔다/ 때로는 숨 넘어갈 때/ 숱한 번뇌와 고뇌에 휩싸여왔다/ 짧은 호흡지간을 위하여/ 수십 년을 살아 숨 쉬면서/ 빗방울과 바람과 구름과 햇살/ 하나하나 온몸에 새겨넣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끝은 어디로 가든지/ 편안하기는 할 터이지만/ 깨닫지 않고는 모두 모르는 것 뿐/ 알음알음 알아온 것으로/ 다 안 것처럼 넘어가 버리는 것은/ 곧 삶의 문제,/ 고요한 생각을 다스리며/ 튤립나무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는다/ 포근한 햇살과 함께/ 바라哱囉의 맞부딪는 소리가/ 온 누리 가득 넘쳐나기 시작한다//

풀씨 한 알 / 구재기
아침 햇살이/ 가슴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나는 네 발걸음에 밟히는/ 풀씨 한 알이고 싶다// 축축한 흙 속에/ 조근조근 뿌리를 내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켜 나가고/ 다시 넝쿨로 번지어/ 너의 가슴을 감싸고 싶다// 자칫 한삼넝쿨처럼 되어/ 너의 아픔일 즈음이면/ 박주가리 같은 흰 젖을 물리고/ 포근히 감싸 안았다가/ 다시 기도하듯 날리고 싶은/ 씨알 하나// 내 마음을 내기 전/ 혹시라도 겨울이 온다면/ 내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뿌리와 싹이 그대로 한 몸/ 깡마른 풀씨 한 알이고 싶다//

잡초 ㅡ둑길行 / 구재기
밤새도록/ 폭풍우가 몰아쳤는데도/ 자고 일어나 나아가 보니/ 둑길의 잡초들이 살아 있었다/ 아, 아침 햇살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하이야니 저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꽃샘추위 / 구재기
꽃밭에 얼굴을 부비며/ 빈 꽃가지를 흔들며/ 또 그렇게 지나야 하는 겨울,/ 그 비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뒤안길을/ 보듬어 스스럼 열며/ 꽃철을 맞아 사위어져 가는……// 최후의 만찬.//

금강의 별 ㅡ서천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김인애님께 / 구재기
넉넉한 흐름에/ 하늘빛을 모아야/ 별이 되는 것만이 아니다/ 지상에 내려/ 삼천리 곳곳에 맺히고 맺힌/ 피끓는 함성이 되어 그 함성이/ 금강물 흐르듯 흐르고 흘러/ 아, 저기 저 울밑으로 우우우 몰려오는/ 거센 바람과 함께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쉬지 말고 멈추지 말고/ 치맛폭에 서리고 서리다 보면/ 마침내 이루어 놓은 빛/ 찰나 찰나마다/ 똑바른 마음을 세우고 세워/ 일체 다른 생각을 낼 수가 없다/ 항상 깨어나 있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하다 보면/ 금강의 별이 된다/ 금강 물결의 빛이 된다//

음복(飮福) / 구재기
음복을 마치고/ 대추알 하나 집어들다가/ 울컥, 목이 메인다/ 그 불콰하고 단단하고/ 윤기 자르르 넘치던 얼굴이/ 이리도 주름투성이가 될 줄이야/ 집었던 대추알을/ 화급하게 내려놓고/ 다시 재배를 올리다 보니/ 문득 보꾹*에 매달린/ 시래기 몇 두릅/ 낡은 두루마기를 펼치듯/ 아버지가 찬바람을 막고 계시다//
* 보꾹: 지붕의 안쪽

기꺼운 일 / 구재기
떠나는/ 바람의 등에/ 삼배(三拜)를 올리듯/ 풀잎이 자꾸만/ 몸을 눕히는 걸 보면// 바람에/ 매달리고/ 깊이 빠져 드는 것이/ 풀잎으로서는/ 너무도 기꺼운 일이다//

휘어진 가지 / 구재기
열매가/ 가득 차면/ 가지는 절로 휘어진다// 열매를/ 다 쏟아내고서야// 휘어진/ 가지는 비로소/ 똑바로 돌아간다// 일 년 전/ 하던 짓 그대로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대하여 / 구재기
나이 68살이 되는/ 햇볕 좋은 봄날/ 어제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을/ 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그래서 친구가 된 지/ 벌써 60년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을/ 문득 깨닫고는/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들어가/ 60년 된 친구임을 두루 알렸더니// 또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그걸 바로 깨닫는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지상에 없는 친구까지/ 뒤늦게 달려와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높여/ 눈물로, 60년을 외쳐대기도 했다//

내 몸은 / 구재기
높고 낮음/ 많고 적음// 넓고/ 좁음 사이// 삶과 죽음/ ㅡ 과 같은 개념들이// 모두 담긴/ 그릇된 그릇이다// 내 몸이/ 너무 크다//

잡초 뽑기 / 구재기
별나게 울어대는 까치 한 마리를 보고/ 이른 아침 골아실 돌밭에 앉아/ 잡초를 뽑아내는 것일까, 아버지는/ 허이연 뿌리째 뽑혀지는 잡초를 볼 때마다/ 훌훌 옷의 먼지라도 털어내듯/ 땅을 마다하고/ 모조리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의 생각을 되살려낸다/ 어느 잡초더미에서 작물로 자라/ 연약한 목을 내밀고 있을까/ 때로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기도 하지만/ 하나의 잡초가 뽑힐 때마다/ 그만큼 넓어지는 視野/ 돌밭 둔덕에 학처럼 앉아/ 마지막 힘을 더하여 날개를 퍼득이며/ 세상의 구석구석 모든 잡초를 뽑아낸다, 아버지는//

저수지에서 / 구재기
물결이 흔들리자/ 모든 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모든 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물결이 조용해지면서부터였다// 조용해진다는 것은/ 제 몸을 스스로 낮춘다는 것/ 저수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물밑까지/ 훤히 보이는가 싶다가// 항상 높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이/ 조용한 물 속에/ 몸을 내릴 줄 안다는 것을/ 머리 숙여 하늘을 우러르며/ 처음 알았다//

좋은 일 / 구재기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햇빛 사냥 / 구재기
사과나무에서 사과알로 미처 다 익지 않은 것은/ 햇빛 사냥을 시작한다// 멍석 위에 동그마니 앉아/ 하늘을 닮아 가는 연습을 하다가// 바람 한 줄기를 만나면/ 바람에 실린 햇빛까지도 사냥한다// 청청청청 가을 하늘이 살아서/ 죄 없는 지상의 자리// 넉넉한 햇빛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붉은 기억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하여/ 미처 다 익지 않은 사과 알들은/ 멍석에 동그마니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흔들의자 / 구재기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세상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이토록 편안할 줄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물결이/ 출렁이면서 바다가 살아있다는 것이/ 보인다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은 것들도/ 한 번쯤 흔들리고 나면 정이 붙는다/ 흔들릴 때마다 하늘이 내려와 앉고/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이 치솟다가/ 물 속에 잠기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씻은 듯이 사라질 무렵/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배 한 척이 수평선 위에 뜨기까지/ 얼마동안이나 육지를 밀어내며/ 흔들려 나아갔을까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본다//

보석에 대하여 / 구재기
유리칼로 유리를 잘랐다/ 단단한 유리가/ 어떤 몸부림처럼 소리하며 둘로 잘려나갔다// 유리를 자른 단단한 것이/ 금강석이라 했다// 금강석은 보석이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사랑이 보석이라 했다/ 그 보석이 결국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잘려진 유리가 유리창에 끼워졌을 때/ 안과 밖이 생겼다 안과 밖에서/ 우리의 사랑이 마구 울었다// 바람이 겨울로 가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 구재기
마른 땅에 비가 내렸다/ 흘러내릴까 했는데 나무 밑에서/ 빗물은 이내 땅속에 스며들었다./ 지금쯤 빗물은 아직 한 번 본 적도 없는/ 지상의 사랑 이야기를/ 나무 뿌리들에 속삭여주고 있을 것이다.// 아, 아, 나도 빗물이고 싶다./ 여자의 마른 몸에 빗물로 스며/ 가슴의 뿌리를 적시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내 사랑을 속삭여주고 싶다./ 그렇게 또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소주에 대하여 / 구재기
우리는 소주를 좋아했다./ 입술을 제 빛으로 촉촉이 적시고/ 맑음을 가진/ 소주와 같은 사랑을 했다.// 남들처럼 입술에 거품을 물고/ 배부르게 사랑하는 걸 싫어했다.// 우리의 사랑은 가난해서 좋았다./ 가난을 만날 때마다 슬픔이 자주 일었다.// 가난은 서로 나눌 슬픔이 있다는 것// 우리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곧잘 사랑을 마셨다.// 사람들처럼 거품을 물지 않고/ 우리는 맑은 사랑으로 입술을 적시며/ 슬픔으로 가까이 슬픔을 길러/ 더욱 더 가난하게 소주를 마셨다.//

오늘이고 싶다 / 구재기
매양 오늘 같이/ 사랑에 취하고 싶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소나기 내리듯/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싶다/ 산등성이로 이는 구름 속에 묻혀/ 지상의 어느 누구도 바라볼 수 없는/ 하늘의 자리를 마련하고/ 햇살처럼 찬연히, 뜨거웁게/ 온 몸을 달구고 싶다//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해도/ 오늘 같이/ 오늘의 사랑은 오늘이고 싶다//

길을 가는 데는 / 구재기
길을 가는 데는/ 굽이가 있어야 한다/ 빠른 걸음을 좀더 더디게 할 수 있는/ 가로질러 갈 걸 돌아갈 수 있는/ 바로 곁이 아니라/ 좀더 멀리할 수 있는/ 더딤이 있어야 한다// 큰 강을 건너는 데에는/ 다리가 없어야 한다/ 먼 건너를 가까웁게, 성큼성큼/ 너른 물을 좁으막히, 넝큼넝큼/ 바로 건너가 아니라/ 아득한 저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옛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아/ 너와 내가 걷던,/ 빠른 걸음을 부끄러워 할 때쯤/ 너와 나는 분명한 이별이었나니/ 스러졌어도 남아 있어야 할 노래도 없이/ 먼 길 따라 가쁜 숨결 따라/ 헉헉헉헉 숨 차 오르는 지름길로 다가서서는/ 끝내 눈물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길을 가는 데는 언덕이 있어야 한다/ 함께 걸어야 할 너와 내가/ 산길 굽이굽이 함께 올라가야 할/ 무엇보다도 충분히 걷고 걸어야 할/ 아무리 길눈이 어두워도 함께, 찾아보기 쉽게/ 이 세상의 언덕을 넉넉히 챙겨 놓아야 한다//

내일 / 구재기
오늘의 바람도/ 자정을 넘으면/ 내일로 가댄다// 겨울 숲은 언제나/ 눈부시게 부서질/ 가슴만을 만난다//

돼지가 웃었다 / 구재기
살아서는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는 하늘 한 번 보기가/ 평생 소원이었는지라/ 목숨을 버려서야 목욕재계하고/ 온몸을 뉘인 채/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돼지는 입만 슬쩍 벌리고 헤헤헤 웃었다// 살아생전 웃을 일 전혀 없었던/ 돼지는 몸통마저 버린 채/ 머리만으로 높은 상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은 저승 갈 노자까지/ 입에 물려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하였다// 돼지는 소리 없이 크게 흐흐흐 웃어댔다//

무지개 / 구재기
하늘이여/ 나는 이 순간/ 시인으로 태어나/ 비로소/ 언어의 사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5월 / 구재기
1/ 산빛은/ 저물녘에 이우르고/ 산기슭/ 외딴 초가/ 연기는/ 줄줄이 피어오르는데/ 노승(老僧) 한 분/ 산사(山寺)를 뒤로하여/ 바람 끝에/ 하롱하롱/ 오동꽃/ 송이송이//
2/ 빗방울에 씻기고 씻기어/ 마침내 튕겨져 나온/ 햇살 무리들아/ 허리를 구부리고/ 무슨 금맥(金脈)이라도 찾으려는가/ 하늘 끝 어디쯤서/ 뺨 부비고 눈부시게 살이 올라/ 저기, 저,/ 젖가슴 철철 넘치는 청보리빛/ 눈물 찬 꽃봉오리야//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 구재기
지난밤의 긴 어둠/ 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 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 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 맑은 날 과분한 이파리를 매달고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 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 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어둠을 틈 타 참회의 눈을 하고/ 부끄러움처럼 비어있는 천정(天頂)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무게만을 감당하고 싶다/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다/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며 웃는 게 눈부실 수 있다/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 무게로 채워진 바위/ 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다/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 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 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다//

가을 하늘 / 구재기
울타리 밑에서 호박은 핑크빛으로 늙어갔다/ 마른 넝쿨손이 울타리목을 잡은 게 필사적이었다/ 은행잎이 노라니 익어가는 언덕길 끝은/ 푸르디 높은 하늘/ 어디서, 쩡쩌엉쩡, 대낮의 장끼가 울어댔다/ 하루가 소리 없이 빨리도 지나가지만/ 다가오는 먼 그림 속 빛깔들이/ 바람 속에서 다투어가고 있었다//

그림자 / 구재기
세상의/ 맑은 곳일수록/ 햇살 밝은 날일수록// 내 삶의/ 무게만큼/ 내려놓고 싶다//

금강(金剛)으로 향하며 / 구재기
금강으로 향하여/ 바다를 달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뱃길// 발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는 오라/ 흙탕물을 밟지 않은/ 전투화를 벗어 던지고/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곳으로 오라, 오라// 금강으로 가는 길/ 하늘의 모든 구름이 쏟아 부은/ 온갖 설움과 슬픔과 원망을 딛고/ 너와 나는 비로소/ 한 마음 한 몸이 될지니// 두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 뱃길로 오라/ 이 푸른 알몸의 바다로 오라// 청정의 창해/ 햇살이란 햇살들이/ 이곳에서는 애시당초/ 심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 푸른 물낯을 터전으로 하고/ 금강의 그림자를 얼싸안을 수 있는/ 너른 가슴인 자는/ 이 뱃길에 온몸으로 뛰어 들어라// 금강으로 향하여/ 뱃길을 간다/ 청정의 순한 길/ 모진 두 손을 씻으며 닦으며/ 금강과 한 몸 되려/ 하얗게 일어서는 창해의 햇살로/ 뱃길을 빚으며 간다//

황홀한 군무(群舞) / 구재기
참새가 떼 지어 놀던 자리/ 무사히 떨어져 있는 깃털을 본다./ 그토록 많이 떨어뜨리고/ 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어떻게 날아다닐 수 있었을까./ 은은한 향기까지 내뿜는/ 빛깔 고운 꽃이 다발을 이루듯/ 참새들이 벗어놓은 깃털이/ 가장 외지고 낮은 자리/ 담장 밑 구석에 몰려/ 바람에 실어 휘날리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으로 떠돌고 떠돌다가/ 마침내 제 집으로 깃든/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모양새,/ 온갖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텅 비어 있는/ 저 깃털들의 황홀한 군무(群舞)//

뒤늦은 깨달음에 대하여 / 구재기
나이 68살이 되는/ 햇볕 좋은 봄날/ 어제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을/ 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그래서 친구가 된 지/ 벌써 60년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을/ 문득 깨닫고는/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들어가/ 60년 된 친구임을 두루 알렸더니// 또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그걸 바로 깨닫는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지상에 없는 친구까지/ 뒤늦게 달려와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높여/ 눈물로, 60년을 외쳐대기도 했다//

앞니 톱자리 / 구재기
앞니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고모의 앞니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과년에 시집가서/ 남매를 낳고/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우리 고모/ 앞니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앞니가 파졌어요/ 모시를 얼마나 많이 째댔으면/ 마치 톱으로 가로질러/ 썰어낸 듯한 톱자리가 생겼을까요/ 그러고 보면 모시 올이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가 봐요/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요/겉으로는 부드럽기 한량없는 우리 고모/ 하루 한 날/ 토해내고 싶은 말이 없었을까요/ 참고 참으면서 모시만 쥐어뜯은 거에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시집살이의 열기를/ 입으로만 소리 없이 내뿜어대면서/ 모시만 째다보니/ 앞니에 톱자리가 생긴 거예요/ 겉으로 한량없이 부드러운 우리 고모/ 속은 타고 또 타서/ 억셀 대로 억세진 거예요/ 억센 톱 자리가 앞니에 생긴 거예요//

설날 아침에 / 구재기
설날 아침/ 창 밖 감나무 가지/ 아래위로 내려앉아/ 직선으로 들려주는/ 까치 가족의 지저귐을/ 꿈의 소리로 듣는다// 입춘을 넘기고도/ 남새밭, 서릿발을 녹이며/ 파뿌리 적시어 가는 동안/ 따뜻한 떡국 한 사발 앞에 놓고/ 서로의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하는 동안// 만들지 않는/ 마주 보는 눈빛/ 나이 한 살 더한 만큼/ 더욱 깨어 있기를 기도한다/ 가장 동일한 목소리로/ 가장 조화로운 목소리로//

정월(正月)에 / 구재기
정월은/ 스스로 매어/ 떠날 줄을 몰라도/ 아무런 걸림이 없는 달/ 허물이 없는 방편으로/ 한량없이 너른 지혜로/ 무엇을 바라보며 나아갈 것인가/ 여명黎明으로 빚어낸 누리를/ 향으로 사르고 싶은 마음, 그 사랑처럼/ 어느 빛줄기를 하나로 삼아야 할까/ 정월을 맞고, 또 가고 있는 동안/ 뜨거워지고 싶은 숨결이/ 간간이 살아 오르듯/ 그만큼 커지고/ 그만큼 높아가고/ 또 얼마만큼은 지순해지고 싶다/ 뒤돌아보는 눈가에/ 착하고 맑은 눈물 가득/ 고이게 하고 싶다, 정월에는//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 구재기
그냥 걷는 길가에서/ 하늘을 본다/ 움푹 파인 곳마다/ 물은 깊은 호수로 고이고/ 그 속에 하늘이 내려와 있음을 본다// 매일매일 하늘을 굽어보면서/ 길을 걸어가면서// 아무리 굽어보아도/ 높은 하늘인 것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대여, 사랑은 그렇게/ 매일 걷는 나의 길가에 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보듬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먼저 와 있다//

틈 1 / 구재기
보도블록/ 사이, 틈이 생기자// 민들레꽃/ 한 송이 피어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사이/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

목마르다 / 구재기
우물이 깊을수록/ 두레박의 끈은 길다/ 심한 목마름에/ 한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려도/ 목마름을 위해서는/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할 뿐// 하늘의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우물에 빠지면/ 그때마다 나는 급히 목마르다/ 서둘러 두레박을 내리지만/ 끈이 긴 두레박의 물은/ 쉽게 내 입술에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쉽게/ 나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깊이 빠져드는/ 한 덩이 달이 되고 싶다///

물소리를 찾다 / 구재기
어둠으로 하여/ 침묵이 눈멀게 할 수는 없다/ 물소리를 찾는다/ 그러나 후곡천*의 물속에는/ 작은 달그림자 하나 없다/ 소리가 살아있는/ 깊은 어둠으로 어둠을 거둘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어둠으로 길을 열어/ 무너져 내리는 침묵에 싸인다/ 한 걸음도 나아갈래야 나아갈 수 없는/ 지금, 자꾸만 어둠을 지어가면서/ 물소리를 찾는다/ 그러나 한걸음도 옮기지 못한다/ 바로 침묵을 눈멀게 하고 깨닫는 길/ 그렇다, 이제 그 동안/ 지성(知性)처럼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씻어내기로 한다/ 차츰차츰 흔들림 없이/ 멈춤 없는 물소리를 찾는다/ 짙은 어둠으로 세상을 덮고/ 본래 뿌리 없는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침묵으로부터/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튼튼한/ 물소리를 찾는다, 찾아 나선다// 어느덧 저 멀리 아침을 맞고 있는/ 금강소나무길 후곡천 물소리//
*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대광천길로 흐르는 물줄기. 금강송길 아래로 이어져 흐르고 있다.

속 찬 배추 / 구재기
속 찬 배추가/ 속이 차는 게 아니라 실상은/ 속 차지 못한 어리디 어린 손이/ 멋모르고 밖으로 밀쳐 나오려는 걸/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감싸듯/ 겉으로 얼싸 안아주는 것이다/ 긴 바람 매운 비를 알 리 없는 어린 속잎/ 갓난아기 손가락 같은 노오란 어린잎이/ 품안을 벗어나 밖으로 밀치며 나오다 보면/ 어린잎도 자라나서 손톱이 굵어지고/ 그제서는 이미 손등은 겉잎처럼 누렇게 들뜨고/ 진기마저 다 빠뜨린 채 말라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배추 속잎을 필사적으로 얼싸안는 것이다/ 마른 배추잎이/ 그렇게 왜 살아왔는가를/ 왜 그렇게 살아와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다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어느 새 배추는 지상에 뿌리를 박고/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한 포기 속 찬 배추가 되는 것이다//

운용매(雲龍梅)*를 바라보며 / 구재기
운용매 꽃이 피어나자/ 바람이 향기를 몰고 갔다/ 곁의 나무가 자꾸만/ 몸을 흔들어댔다// 짙은 그림자가/ 갑자기 드리워지더니/ 흐르는 구름도/ 제 모습이 아니다// 한 잎 한 잎/ 꽃잎이 지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향기는 이미/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아,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나는 결코 너를/ 소유하고 싶지 않다.//
* 운용매(雲龍梅) : 나무 가지는 용(龍)처럼 몸을 비틀며 자라고, 꽃이 구름처럼 희게 피는 매화(梅花)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매화의 한 종류.

갈대 / 구재기
말하지 마셔요/ 마음에도 없는 나의 몸놀림을/ 비웃지 마셔요// 그림자 하나로// 바람 앞에서 바람 가는 대로/ 흔들리는 몸짓을 엿보지 마셔요// 흐르는 맑은 물 속/ 나의 뿌리는 살아있는데/ 보리밭 깜부기 날리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셔요// 세상 헛웃음 사라지고/ 별 볼 일 있는 날이 오기까지/ 침묵으로 기다리는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마셔요// 텅 빈 가슴인 나를/ 제멋대로 꾸며/ 말하지 마셔요//

고구마를 캐면서 / 구재기
넝쿨을 젖히고 거두어낸 뒤/ 이랑이랑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옹골지고* 오달진* 덩저리가 묻힌 데마다/ 땅거죽이 빠각빠각 터져 있음을 보았다/ 맑은 햇살 아래에 드러난 뒤/ 굵은 것일수록 살가죽이 갈기갈기 찢겼음을 보았다/ 깊고 어두움의 땅 속에서/ 얼마나 푸르고 짙푸르게 하늘을 그려왔던가/ 얼마나 담차고 줄기차게 어둠과 맞서왔던가/ 그 동안 응어리져 살아온 탓인지/ 이랑이랑 끊임없이 알차게 솟구치는 열기로/ 고구마를 캐는 데에도 헉헉 숨이 찼다/ 땅이란 본래부터 비어있는 여인/ 봄이 비바람을 견디어야 가을이 되듯/이 굳세고 질긴 피땀의 줄기로 땅을 뒤덮어 버리고/ 굵은 씨알을 기르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 오늘에서야/ 젖가슴의 그리움과 피땀의 향기, 그 차이를 알았습니다//
* 옹골지다: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 오달지다: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무게에 대하여 / 구재기
무게를 가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제 주어진 길을/ 가다가 멈춘 울산바위는 슬프다/ 멈춘다는 것은/ 제 무게로 제 자리를 가진다는 것/ 울산바위는 제 몸의 무게로/ 자리하여 멈추고는 마냥 슬프다// 민들레꽃에게도 무게가 있다/ 그 꽃의 무게만큼/ 질기고 긴 곧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로 제 몸의 무게를 감당하다가/ 마침내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생애 중 가장 큰 무게를 가진/ 그 꽃자리에 돋아 난 꽃씨/ 무게를 버리고 나니 가볍다/ 가벼울수록 멀리 날 수 있다// 민들레 꽃씨는/ 바람과 함께 바람에 실려/ 울산바위 위를 가볍게 날아, 설악을 넘어/ 울산바위가 훤히 보이는 동해바닷가/ 너르고 푸른 밭 언덕에 사뿐 자리했다//

아침 일곱 시 반 / 구재기
커피를 마시며 곧 헤어질/ 오늘 하루의 아내와 만난다/ 하나 된 인연으로/ 얼굴을 익히며 몸과 마음으로/ 천년을 움직이고도 남을/ 쓰디쓴 기쁨의 이별을 준비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을 가야 할 시간/ 자신 있게 떠나보내고 나면/ 의심하는 것보다 서로를/ 믿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일이로구나/ 잠들기 전/ 혹은 잠에서 깨어나서야/ 뜬눈으로 마주하는 데는 겨우 서너 시간/ 하루 이십사 시간의 삼, 사를 위하여/ 눈물 없이 맞아야 할 아침 일곱 시 반/ 출근 전/ 아내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신앙 같은 이별의 만남을 다짐한다//

흔적(痕迹) / 구재기
댓돌 위에/ 삐뚤어지게 놓인/ 신발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저만큼/ 토방 밑에서 뒹군다//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놓기도/ 쉽지 않다//

새의 길 / 구재기
새는 부리로/ 길을 만들며 날아간다/ 하늘을 날아갈 때나/ 땅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앞으로 나아갈 때면/ 목부터 먼저 앞으로 쭈욱 뻗는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두 눈을 번뜩이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는 것/ 바로 선 자리에서/ 오직 앞으로만/ 지나온 자취가 새겨질 때// 지상에 새겨진 자취가/ 사실은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안다/ 그래서 먹이를 찾을 때에도/ 고개 숙여 속죄를 거듭하다가/ 날갯죽지 확 펼쳐 몸을 털어내다가/ 먼 하늘을 우러르다가/ 마침내 새는/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날며/ 부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끊임없이 지워댄다 그걸 알고/ 하늘을 지나는 구름은/ 지상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새의 발자국을 자꾸만 덮어준다//

헌책방을 찾아서 / 구재기
헌책방에 들려/ 누군가 읽다가 버려 예까지 와버린/ 헌 시집 한 권을 샀다/ 정가의 오분의 일도 되지 못한 시집 한 권/ 왜 그렇게 싸냐고 물으니/ 요즈음 같은 때 시 같은 걸 누가 읽느냐/ 한 두어 편 읽다가 버리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헌책방 주인이 오히려 이상하게 날 바라보았다/ 시내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아/ 떱뜨름한 가슴을 열어 시집을 펼쳤다/ 누가 그랬을까?/ 사랑, 별, 햇살 등이 나오는 시 구절마다에/ 붉은 볼펜으로 굵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을 처음 펼쳤던 사람에게도/ 뜨거움이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한때의 뜨거움을 가진 자는 이렇게 버릴 줄도 안다/ 그 동안 어떠한 뜨거움도 없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탕진하며 미적거려 왔던가/ 문득 나의 사랑과 별과 햇살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만 달리는 버스에서 내려/ 잊고 살아왔던 내 사랑과 별과 햇살을 찾아/ 다시 헌책방을 찾아서 힘차게 내달렸다//

정기 검진 / 구재기
작년보다/ 키가 또 줄었다// 해가/ 갈수록// 발 디딘 흙이/ 더욱 가까워진다//

새 한 마리 / 구재기
한 마리/ 새소리로 하여/ 세상 두 눈을 떴다// 비로소/ 아침이 열리고// 사람들이/ 그제 서야 무리를 지어/ 소리 하기 시작한다//


섬 / 구재기
할 말이 많다고/ 일제히 외쳐대는 무리 앞에서/ 애욕이 완전히 꺼진 상태로/ 열반으로 알고 있는/ 빈 그릇마냥// 부동인 것이 곧 사랑이다// 파도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외도(外道) / 구재기
집을 나선/ 바람의 발걸음은/ 가볍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어떤 지음[作]도 없다// 거칠 것이 없는/ 발걸음// 바르지/ 않은 길을/ 바르게 걷는// 바람은/ 발걸음을/ 보이지 않는다//

고향의 달 / 구재기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고속도로 멀리에 두고/ 굳이 지방도로로 달린다/ 오가는 차량/ 띄엄띄엄, 산모롱이/ 굽이로 돌고 나면/ 오래된 정자나무/ 아직까지 살아있고/ 냇물이 흐르고/ 모두들 호수에 모여 있다// 문득 달이/ 마중 나와 있음을 본다/ 반가움에/ 달을 안을 듯 다가간다/ 그러나/ 달은 언제나/ 저만큼 앞서 있다/ 아무리 달려보아도/ 여전히 앞서서 있는 달/ 구름을 벗어나며/ 객지처럼 차갑게 웃는다// 고향에 도착하여도/ 달은 또 저만큼에 있다/ 도착하고 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모든 걸 다 놓아버리는데/ 달은 또 차갑게 웃어댄다// 허기 끝의 찬밥처럼/ 반갑기만 한/ 고향의 달은 이미/ 내 안의 달이 아니다/ 길은 아직도/ 끝을 보이지 않는다//

좋은 일 / 구재기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모내기 / 구재기
지난 해의 굶주림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봇물이 엄청히 넘치는 두렁배미/ 무엇보다도 기뻐 노래하고/ 숲속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한해를 점치며/ 허리를 굽히고/ 소중한 기대를 조심스레 쪼개어/ 물 속 깊이 꽂는다/ 못줄의 붉은 표식에서/ 피 묻은 숨결이 한 줌씩 묻어난다/ 어차피 이제 질긴 겨울은 가고/ 주린 창자를 조이며/ 싸리꽃 무성히 피어나는 산 둘레/ '솥탱 솥탱'이 아니라/ '솥 작다 솥 작다' 하고/ 저리도 애타게 외치고 있나니/ 허리 펴고 진종일 하늘을 우러르며/ 배짱으로 배짱으로/ 목숨 부지하는 일을 서슴없이 생각는다//

간이역이 있던 자리 / 구재기
아무렴, 간이역이 있던 자리에는/ 코스모스 한 두 포기 막심을 다하여 흔들어대겠다/ 간이역이 사라져 멈출 일이 전혀 있을 리 없는/ 기차는 그냥 바람결로 지나쳐 버리고/ 기다릴 일도 손 흔들어 줄 일도/ 슬퍼할 일도 반가운 일도 없어진/ 지금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거름녘/ 달빛 가득한 야음을 틈타 간이역에 내린/ 바람 한 줄기로 남아 쭈욱, 기운이 빠져버린/ 코스모스 간신히 꽃대궁을 흔들어대는 데야/ 그림자인들 바로 세워질 수 있으랴, 그래도/ 기찻길 위에는 희끄무레 쇠잔한 햇살이 비쳐 들어와/ 일상의 하루를 마무리 하려는데 한 차례의 습격처럼/ 급행열차는 재빠른 회오리로 바람을 거두어간다/ 아무렴, 간이역임에랴 저녁햇살로나/ 등에 받아들고, 머언 산기슭의 외딴 초가/ 골짝 안개로 깊어가는 곳으로/ 코스모스 꽃 한 송이 무거운 등짐인 듯 짊어지고,/ 동녘으로 향한 걸음을 서둘러야겠다//

 

추가 서면 시계도 선다 / 구재기
길이 길로 이어져/ 끝을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가던 길을/ 멈출 수 있으랴/ 하나의 나뭇잎은/ 바람결에 날리더라도/ 굳센 대지 위에/ 결국 몸을 낮추어 자리하고/ 눈부신/ 하늘의 햇살도/ 잠시 구름 아래/ 얼굴이 가려지는 걸 보아라/ 두텁고/ 단단한 씨알이/ 껍질 속 깊이/ 초록을 키우는 걸 보아라/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 나서면/ 길은 언제나/ 다시 뻗는 새로운 길/ 그렇다!/ 추가 서면/ 시계는 멈추고 만다/ 비록 낯설고/ 어둡다 하더라도/ 추의 흔들림은 멈출 수 없다/ 길의 시각을 멈출 수는 없다//

햇귀 / 구재기
녹슬고/ 무디어진 칼을 갈면/ 빛이 난다/ 어둠도/ 밤을 세워 갈고 나면/ 찬란한 빛이 된다/ 보아라,/ 아침마다 치솟는/ 저 눈부신 빛의 칼날을//
* 햇귀: 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

경전 한 권 / 구재기
휘갈겨 쓴 글씨를 보고/ 지렁이 같다는 말/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다/ 며칠 이어 구절구절 비 내리고 간 뒤/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 햇살처럼 번득이는 일필휘지의 글씨/ 누가 저리 갈겨놓고 떠난 것일까/ 휙휙 바람을 차고 지나가도/ 차바퀴 용하게 벗어나 펼쳐져 있다/ 그렇지, 그래/ 아무리 휘갈겨 쓴 글씨라 하더라도/ 글씨 속에는 경전 같은 큰 뜻이 숨겨져 있기 마련/ 하물며 온몸을 다 바쳐 쓴/ 저 지렁이 글씨를/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으랴/ 갑자기 글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만히 드려다 보니/ 글씨의 뜻에 감읍한 개미들이/ 휙휙 지나가는 차바퀴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까맣게 몰려와/ 소중한 글씨를 실어 나르고 있다/ 일생을 바쳐 겨우 완성한/ 단 한 권의 경전을 읽고 있다//

목어 / 구재기
속창새기* 썩는다/ 애간장 녹아난다, 시더니/ 결국 물에 들어/ 거슬러 올라와서는/ 속을 텅 비워놓은/ 산사의 물고기 한 마리/ 저물녘이면 울고 계시다/ 이승에서처럼 어머닌 울고 계시다//

감 / 구재기
기차가 내를 건너 굴을 뚫고 지나가다가/ 깊은 골에/ 다 쓰러져가는 양철집 한 채/ 본다/ 아무도 살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누가 제왕이 되어/ 하늘에 올라 앉았는가/ 가진 것/ 다 벗어버린/ 하늘에 올라앉았는가/ 가진 것/ 다 벗어버린/ 알몸의 감나무 가지 끝/ 후끈, 해탈의 부귀는 붉고/ 뜨겁다//

대춘(待春) / 구재기
매화는/ 범을/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겨울을 지날 뿐/ 대웅전 앞/ 염화미소 한 잎/ 그늘을 덮는다//

무구덩이를 파다가 / 구재기
땅거죽이 단단히 얼어붙어/ 곡괭이로 찍어내다가/ 얼어붙었던 흙도/ 무구덩이 안으로 들면 들수록/ 본래부터 부드러웠다는 것을 안다/ 작은 알갱이의 흙/ 그 속에서 무들이 하나같이/ 상처처럼 움푹 패인 온 몸의 자국에서/ 하얗고 가늘한 실뿌리를 내밀고는/ 부드러운 흙을 움켜쥐고 있다/ 그렇구나, 부드러움이란/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생명을 기르는 것/ 무청에서 돋아난 샛노란 무싹이/ 무구덩이에서 밖으로 나오자/ 필사적으로 햇살을 빨아들이고 있음을 본다/ 어머니 속살의 부드러움을 뚫고 나온/ 내 까칠한 살갗을 찬찬히 뜯어본다/ 무수히 패어버린 내 살가죽의 털구멍/ 내 몸의 어둠이/ 밖으로 뛰쳐 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어둠처럼 새까맣게 돋아난 털이/ 작은 바람에도 파르르르 떨고 있다//

둥근 것은 아프다 / 구재기
둥근 것은 아프다/ 둥근 알로부터 껍질을 깨고 나와/ 햇살 찬란한 지상으로 나온 새가/ 공중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은/ 아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둥근 것은/ 둥글어서 뒹굴다가 떨어진다/ 맑디맑은 눈물이/ 두 눈에서 둥글게 맴돌다가/ 이별처럼 지상에 뚝 떨어진다// 그러나, 둥근 씨앗이/ 껍질 채 땅 속에 묻혀/ 흔적 없이 사라지겠는가/ 싹을 틔워, 붉디 붉은 양하고/ 눈부시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하늘을 날며/ 마음껏 기쁨을 누리는 새여/ 붉은 꽃밭 속으로 숨어들어/ 꽃잎 진 자리/ 둥근 아픔 하나 맺혀다오// 껍질 두터운 씨알이 되어/ 껍질을 깨뜨리는 마음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있을 때쯤*/ 마음껏 사랑하고픈/ 아픔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싶다//
*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있을 때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태자를 떠받들었다고 한다.

미움에 대하여 / 구재기
미움 하나 가지고 싶다/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움 하나 기르고 싶다/ 미움이 자라서/ 쓰러진 자리에 나무가 싹트고/ 그 나무로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서/ 붉은 열매로 익어가는/ 사랑 하나 낳고 싶다// 미움이란 말이 듣기 싫어서/ 문득 고개를 돌리고 나면/ 미움이 가득한 가슴에서도/ 가볍게 날아오른 치미의 날개/ 하늘의 구름인 양 치솟아/ 어느 사이 열병의 사랑이 된다// 키 큰 나무를 미워하며/ 목을 조이고/ 마침내 말라 죽어버린/ 나뭇가지 가지마다 치렁치렁 매달린/ 등꽃의 향기여, 칡꽃의 향기여/ 미움이 일구어 낸 갈등/ 그 죽은 나무의 향기로/ 곧은 사람이 핀다//

산문을 나오다가 / 구재기
이러구러 날이 저물어/ 산문을 나오다 보면/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이/ 더욱 밝아진다/ 산녘에 심어 놓은/ 몇 그루의 나무/ 언제쯤 큰 산의 나무가 될까/ 그늘에 젖어 우는 새소리도/ 가지에 걸린 바람소리도/ 모두 살아있는/ 나무의 특권이 된다// 산문을 나오다가/ 걸음의 노고를 쉬면서/ 한 그루 나무를 보면/ 나무 몇 그루 심어놓은 것이/ 그리도 큰 산에 기쁨을 준 듯하다/ 그렇다 기쁨은/ 남의 품에 안겨 주었다가/ 돌아올 때에는/ 나의 큰 행복이 되는 것// 구름처럼 걸리는 일이 없이/ 산문을 나오다가/ 평생 말하지 않아도/ 나무는 잘 자라줄 것이라/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 구재기
존재하지 않는/ 낯선 나를 만납니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면서/ 수없이 만나고 만날/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열리는 문밖으로/ 또 다른 나를 끄집어 냅니다/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찾아가고 싶은 사람들/ 내 생명의 고행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나를 세우고 무너져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로부터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로, 하늘의 구름이/ 끊임없이 그늘을 내립니다/ 낯선 나 하나가, 또/ 그늘 아래 동그마니 서 있습니다//

주름진 사과 / 구재기
주름진 사과를 깎는다/ 칼날을 드밀어도 주름에는/ 쉽사리 칼날을 허락하지 않는다/ 골 진 부드러움이/ 탱탱한 피부보다도 강하다 했던가/ 긴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굴에 주름을 엮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얼굴에/ 무디어진 나의 칼날// 주름진/ 사과는 달다/ 껍질 채로, 한 입 한 입/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어린 것들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 구재기
아침 햇살이 시끄러워/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나팔꽃들이 무리지어/ 햇살 모으기에 정신이 없다/ 씨알 너덧 뿌려 놓고/ 대나무 가지채로 꽂아 두었더니/ 어린 넝쿨이 언제/ 저리도 하늘 높이 솟아올라/ 이리도 야단스러울까/ 그러고 보니 담장 너머에서는/ 어린 호박 넝쿨이 솟아올라/ 울안을 엿보고 있다/ 오,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어린 것들// 참죽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하눌타리의 저 어린 넝쿨, 머루넝쿨, 다래넝쿨, 댕댕이넝쿨,/ 으름넝쿨, 칡넝쿨, 담쟁이넝쿨, 등넝쿨, 청미래넝쿨, 능소화넝쿨,/ 박주가리넝쿨…/ 하나 같이 솟지 않는/ 어린 넝쿨이 있으랴/ 저런 고이얀!/ 어린 것들이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문득 넝쿨의 밑동을 본다/ 온몸이 갈라지고 터지고/ 검버섯처럼 돋아난 버겁에 싸여/ 혼신을 다하는 상처투성이/ 제일로 큰 상처로 앉아/ 돌아가신 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갈대밭에 갔었네 / 구재기
복사꽃이 피고/ 아까시아 향기가 마구 바람을 흔들던 봄날/ 갈대밭에 갔었네, 봄안개를 걷고/ 가볍게 걸음 한/ 내 고향 충남 서천의 한산면 신성리/ 영화 JSA 촬영지/ 남북이 서로 처음으로 사람의 문을 열던 곳/ 갈대밭의 갈대들은 여전히 몸을 흔들고 있었네/ 누렇게 죽어있는 갈대와/ 파랗게 새싹을 물고 자라나는 갈대가/ 한데 어울려 온몸을 흔들고 있었네/ 한 뿌리로 발목을 물속에 담고 있었네/ 죽어서도 살아서도 한 뿌리인 갈대/ 문득 아버지를 불러 보았네/ 입 속마저 빠져 나올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하고/ 부르자, 갈대밭에서/ 큰 소리로, 왜 그려-? 흔들림이 있었네// 늦가을인 오늘, 다시 갈대밭을 찾았네/ 사위는 된서리로 덮이고 바람 센 늦가을 아침/ 내 고향 충남 서천의 한산면 산성리/ 아버지의 큰 목소리는 간 데 없고/ 누렇게 뜬 갈대밭, 푸르름도 사라지고/ 갈대들이란 갈대들은/ 또 다시 푸른 새싹이 피어나도록/ 타고난 천성으로 제 몸을 흔들며/ 두 발목을 모두 물 속 깊이 담고/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네// 남북고위급회담 소식이 아침 뉴스로 전해오던/ 늦가을 오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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