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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돌 / 이승숙

부흐고비 2022. 4. 25. 08:25

작은아이의 방문이 빼꼼히 열려 있다. 투명인간처럼 지낸 게 달포가 다 됐지 싶다. 문을 열었다는 건 마음을 풀고 싶다는 신호다. 묵언으로 시위하는 아이나 엄마인 나도 힘든 시간이다. 시시때때로 버럭대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적이 당황스럽다. 그럴 땐 ‘엄마’라는 자리를 던져버리고 싶다. 휘날리는 봄꽃처럼 내 마음도 난무한다.

화로의 불이 쉽게 사위지 않도록 눌러 놓는 돌이나 기왓장 조각을 불돌이라 한다. 평소 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차깔한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제 속은 오죽하랴 싶다가도 마들가리 같은 삶에 나도 지친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상처 받지 않으려는 것과 알량한 자존감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나도 아이의 마음을 풀려고 애달파하지 않는다. 노년의 나이에 그럴 기력도 없고 나 또한 냉전으로 응수한다. 제풀에 지친 아이는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보며 화해의 시간을 잰다. 그러면서도 먼저 다가오지 못하고 끙끙댈 뿐이다.

빨래를 넌다. 맑은 오후의 햇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꽃구경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곧장 통도사로 차를 몰고 달린다. 일주문 옆 수양매화가 다소곳이 꽃잎을 연다. 꽃이 피고 질 때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고 땅을 하늘 삼아 피는 매화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만첩홍매화와 분홍매화가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매화 꽃잎은 보통 다섯 장이 기본인데 다섯 장 이상인 것을 만첩매화라고 한다.

영각 앞 자장매화가 흐드러지다 못해 붉은 불을 뿜는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화려함의 극치다. 바람 따라 코끝을 스치는 매향에 정신이 아슴아슴해진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많은 진사들 틈에 나도 몇 컷을 눌러본다. 이런 모습이 일상인지 지나는 스님들은 무정한 눈빛 한 번 줄 뿐이다. 꽃은 늙지 않고 찾아오건만 나는 해마다 늙어간다. 아, 내게도 꽃 같은 시절이 있었던가.

달 밝은 밤, 그 누군가는 이곳에서 흐느껴 울 것이다. 왠지 외롭고 고독한 자들의 마음을 곱게 안아줄 것 같다. 자연은 그 어떤 절대신 보다도 성스러울 때가 있다. 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꽃처럼 화사하다. 행복을 주는 자장매화가 부처고 보살이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꽃잎도 공중부양을 한다. 꽃 지기 전에 어서 벗들을 부르고 싶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어도 좋고, 안개비나 작달비가 내리는 날은 더 운치가 있을 것이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한다. 자장매화의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율사의 지계持戒 정신을 표현한다 해서 자장매화라고 한다. 매화에 취한 사이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다. 상춘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도 곧장 집으로 향한다. 밀려드는 자동차의 붉은빛이 만개한 홍매를 뿌린 듯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어곡 교차로에서 ‘퍽’하는 순간 홍매의 환영에서 깨어났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고가 난 것이다. 평소에 눈 감고 다녀도 환한 길이다. 그것도 좌회전 1차선에서 직진을 하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황당한 일이다. 복잡한 퇴근 시간에 협소한 공단길로 왜 접어들었을까.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분명 넓은 국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엊저녁 꿈자리가 사납더니 꿈땜을 톡톡히 한 셈이다. 나의 안 좋은 꿈은 예전에도 신통하게 맞아떨어졌다. “사람 안 다치고 차만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이냐” 모두들 같은 말에 나도 동감을 한다. 내 생애 제일 비싼 매화를 봤으니 이젠 꽃길만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작은아이의 방문을 열다가 화들짝 놀랐다. 책상 위에 있던 선물 보자기 매듭이 가위로 싹둑 잘려져 있었다. 끈을 자르는 건 이해를 하지만 보자기를 그것도 새 보자기를 자르다니. 나는 화가 나기는커녕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매듭을 풀기보다는 가위를 먼저 들이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오해를 풀기보다는 그냥 자르는 편이다.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덮어 버린다. 정면돌파보다는 혼자서 더운 가슴을 식히다가 끝내는 내 마음을 닫는다. 어쩌면 마음 다치는 게 두려워서 미리 울타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내 탓이지 싶다가도 결국은 가시가 된다.

찬바람에도 꽃이 피는 강한 기질의 매화처럼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의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갇혀 있던 불시울들을 끄집어낸다. 오래도록 누르고 있던 마음의 불돌을 들어낸다. 삼월의 햇살이 갈지자로 들어와 앉는 봄, 봄이 또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윽한 매향이 휘도는 봄의 만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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