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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범벅 / 변종호

부흐고비 2022. 4. 21. 08:23

불현듯 그리웠다. 날리는 눈발 탓일지도 모른다. 누르고 살지만 가끔 훅하고 들이닥치는 게 그리움이다. 구실이야 입맛이 동해서라지만 속내가 다르다는 걸 40년 살붙이고 살아온 아내가 모를 리 없다. 그저 군소리 않고 따라나서는 게 고마울 뿐이다.

차림이라야 감자옹심이와 옹심이가 들어간 칼국수, 감자 부침개가 전부이다. 모두 감자가 흔한 고향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소박한 음식이다. 향토음식점 주인은 강원도 태생이거나 그곳에서 오래 살았을 게다. 예전에는 빈 좌석이 없더니 코로나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두 테이블에 두 명씩만 앉아있다. 온기가 있어야 할 실내 공기조차 써늘하다. 깡마른 데다 푸석한 파마머리의 표정 없는 주인 얼굴을 보니 정말 힘들구나 싶었다.

구수하고 진한 국물이 일품인 옹심이를 주문했더니 맛이나 보라며 작은 접시에 강냉이 범벅을 내놓았다. 이 얼마 만인가. 횡재한 기분이다. 적은 양이라 젓가락으로 몇 개 집어 눈을 감고 찬찬히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식감은 쫀득하고 맛은 달곰하다. 적당히 무른 밤콩과 찰기 있는 찰강냉이가 잘 어우러졌다. 뻐근해오는 목울대, 고개를 숙이면 곧바로 쏟아질 것 같아 뿌연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접시를 보니 아내는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는다.

걸쭉하면서도 들깨가 들어가 구수한 감자옹심이를 앞에 두고도 몇 개의 알갱이로 겨우 입맛만 다셨지만 맛을 또렷이 기억하는 가슴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쫀득하고 달달해 구미가 당기던 어머니의 범벅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유년 시절, 워낙 나이 차가 많은 피붙이의 외면으로 어디든 어머니의 치맛자락만 붙잡고 따라다녔다. 오랫동안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봐서인지 웬만한 것은 곧잘 하는 터라 겨울이면 별미로 만들어주던 강냉이 범벅에 도전하기로 했다.

음식 재료는 강원도 고향에서 주문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재료라야 껍질을 벗긴 찰강냉이 알과 밤콩뿐이다. 강냉이 알은 삶으면 쉽게 말랑해졌지만 밤콩은 뜨거운 불 맛을 보면서도 단단한 몸뚱이를 쉬이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리 불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않았지만, 물이 졸아들면 붓고 또 붓고 서너 번을 더 부으며 만든 범벅은 실패작이었다. 때깔도 맛도 어머니 범벅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뭐든 눈으로 보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대로 안 되는 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모양이 그럴듯하면 짜거나 너무 달았고 간과 단맛을 맞추다 보면 강냉이 알이 다 풀어져 곤죽이 되었다. 세 번의 실패 끝에야 밤콩이 너무 무르지도 않고 강냉이 알이 말랑하면서도 쫀득하고 걸쭉한 농도의 색깔도 맛도 어머니의 범벅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범벅을 쑤다 보니 어쩌면 부부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깍지가 씌었으니 망정이지 살아보면 어디 좋기만 할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에 정작 자신은 모르거나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단점과 아집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모서리는 살면서 부닥치며 떨어져야 원만해지거늘 채 그런 과정도 견디지 못하고 등 돌리는 부부도 많지 않은가.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보니 영락없이 돌같이 딱딱한 밤콩이었다. 남보다 일찍 햇볕과 비바람을 견뎌내며 단단하게 공글러서일까, 쉽게 물러지지도 않고 자리도 내주지 않았으며 품는 노력조차 않았던 젊은 날의 나였다. 아내가 품으려 들면 간섭이고 집착이라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아둔하게도 피가 뜨겁던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반면, 꾀도 요령도 부리지 못하는 아내는 은행 직원, 어미, 아내라는 1인 3역을 하면서도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을 녹여가며 모질고 단단한 밤콩 같은 남편을 가슴으로 품었던 찰강냉이였다. “오래 묵고 많이 참는 단련 과정을 거쳐야 그윽한 사랑을 할 수 있다던가.”

뾰족한 모서리를 갈아내느라 아웅다웅하며 살아온 사십 년이 얼굴에 그냥 금만 긋고 떠나간 건 아니었다. 인생이란 큰 바다에 부부라는 배 띄워놓고 가야 한다면 서로 이해 못 할 것도 참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알게까지 이만큼 살아온 세월이 필요했다.

잘 쑤어진 범벅 같은 부부가 되려면 지녔던 아집, 고질병 같은 습관, 부질없는 욕심, 서 푼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까지 내팽개칠 일이다. 게다가 나긋나긋한 심성을 위해 뜨거운 불 맛을 보며 푹 삶기는 단련을 통해 몸을 녹여 서로 품어 안으면 그만이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치를 다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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