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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담 / 김백윤

부흐고비 2022. 4. 22. 08:46

민박 온 손님의 시선이 돌담에 한참을 머물러 있다. 자연스러운 게 오히려 멋스럽다며 이런 담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손님들에게서 자주 듣는 소리다. 담도 담이지만 초가 덕분에 돌담의 미가 더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담은 그리 높지 않다. 담의 기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위한 담이라 아담하다.

제주에는 돌이 많다. 돌은 담을 쌓는데 좋은 재료다. 그렇게 쌓은 담을 돌담이라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어려서부터 돌담에 친숙하다. 덕분에 그에 관한 얘깃거리도 많다. 어이없었던 사건 하나도 돌로부터 시작된다. 남의 집 입구를 막아버린 일이 있었는데 어렸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집주인은 인근 고등학교 서무과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남자들은 청소년기에 깝죽거리며 다니는 시기가 있다. 나도 친구들과 놀 때는 객기를 부리고 담배도 피우며 몰려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무과장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일장 훈계를 들어야 했는데 그날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시시콜콜 간섭하며 우리의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한 친구는 대들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다. 한창 반항기가 자리할 때여서 불끈했다.

우리는 보복할 방법을 찾았다. 그 집 입구를 돌로 막아버리자는 제안에 친구들은 찬성했다. 며칠 후, 한밤중에 친구들과 낑낑대며 돌을 모아다가 쌓았다. 높이도 울담과 같게 해서 어디가 입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비밀로 하고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헤어졌다.

아침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야단법석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한 줄도 모르고 어떤 놈들이 남의 올레를 막았다고 역정을 내셨다. 차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돌담에 숨어 주변을 살폈다. 동네 어른들이 돌을 치우면서 분개했다. 하루가 지난 이튿날, 어머니가 나를 찾더니 다짜고짜 등짝을 후려쳤다. 동네 사람들이 내가 주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한 친구가 동생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바람에 탄로가 나고 말았다. 우리는 그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입구를 막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올레를 막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단하여 그 집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라 했다. 어린 시절이라 철모르게 한 행동이 파장을 몰고 올 줄 몰랐다. 장난삼아 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어쩌면 그만큼 주위에 돌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이 없었으면 다른 궁리를 했을 테니 말이다.

검은빛의 다공질(多孔質) 현무암은 쓰임새가 많다. 밭의 경계로 쌓으면 밭담, 집 주위를 두르면 울담, 목축장의 잣담, 바다에는 원담, 무덤가 산담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했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빙 둘러 쌓은 진성과 환해장성도 있다.

돌담은 들이나 마을, 해안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제주 특유의 경관이다. 섬 전체를 두른 돌담은 검은 용이 용틀임을 하듯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하여 흑룡만리(黑龍萬里)라고 불린다. 돌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고자 밭담 축제도 연다. 밭은 으레 밭담을 조성한다. 집 밖에 나가보면 흔하게 볼 수 있어 친근함까지 더해준다.

제주를 상징하는 풍경 중의 하나가 된 밭담이 정착한 것은 고려 고종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당시는 경작지의 경계가 불분명해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목장이 확대되면서 방목하던 말과 소가 밭을 넘나들어 밭작물을 훼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를 전해 들은 제주판관 김구(金坵)가 지방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토지 소유의 경계로 돌을 이용해 담을 쌓도록 했다.

돌담을 쌓은 후부터 토지 경계의 분쟁이 사라졌다. 방목했던 소와 말에 의한 농작물 피해도 줄었다고 한다. 또한, 제주의 세찬 바람을 막아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에도 그만이다. 돌밭에서 돌을 치우고 나니 경지 면적이 넓어져 농사일도 편해지고 수확량이 늘어나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제주돌문화공원에 김구 판관의 공적비를 세웠다.

밭담을 쌓을 때는 밑돌 두 개 사이에 윗돌을 올린다. 이는 윗돌에 의해 밑돌이 받는 힘을 분산시켜서 안전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함이다. 또한, 밭담의 돌 사이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바람이 그 틈새로 빠져나갈 수 있어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돌담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만큼 축조 방법이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특히 외담은 잡담이라고도 하며, 주변에 흩어진 돌들을 외줄로 크기나 모양에 상관없이 쌓은 돌담을 말한다. 주로 밭의 경계를 두를 때 이용한다. 담을 쌓은 후 한쪽 끝에서 흔들면 담 전체가 흔들리도록 쌓아야 제대로 된 것으로 친다. 유연하므로 거센 바람에도 안전하다. 제주의 밭담은 서로 완만한 곡선으로 연결되고 이어진다.

밭담과 울담에는 제주 사람들의 생활 속 지혜가 담겨 있다. 숭숭 구멍이 나 있어 금세 쓰러질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단단하다. 바람을 막는 담이 아닌, 바람을 맞이하는 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어설픈 듯하지만 실은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다. 트멍 하나 없는 시멘트 담이나 벽돌담의 막힘과는 다르다.

촌락의 울타리나 흙담처럼 제주의 돌담도 풍경을 아우른다. 우리 집 주위를 두른 담이 밋밋하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초가의 예스러움과 마당의 여유를 표현하는 데 부족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분위기를 품기에는 돌담이 제격이다. 오래되어서 더 정답고 울퉁불퉁한 담, 날이 갈수록 운치를 더해가는 평범 속의 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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