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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전봇대 단상斷想 / 이용수

부흐고비 2022. 4. 22. 08:44

가을비가 추적거린다. 온 산의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산행을 하는 중에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없었다. 고스란히 비를 맞으니 옷이 흠뻑 젖었다. 추위와 싸우며 산을 내려왔다.

길가 전봇대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비를 그냥 맞는다. 비를 맞은 나무들은 선 자리에서 꽃과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곱게 물들다가 겨울에는 이파리들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런 나무들도 전봇대처럼 선 채로 비를 맞는다. 나는 골목길에 서 있는 전봇대를 유심히 바라본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는 전봇대 아래였다. 여자 아이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가나 전봇대에 고무줄을 걸고 줄넘기를 하며 <무찌르자 오랑캐>를 불렀다. 남자아이들은 전봇대에 등을 받치고 말뚝박기를 하면서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전봇대는 전기를 나르는 줄을 붙잡고 있다. 줄이 쳐지지 않도록 버팀 기둥 역할을 한다. 그 전봇대는 서민들의 연락 장소 역할도 해 준다. 전봇대에는 이런저런 글자를 써놓은 딱지가 붙어있다. 땡처리, 알바 구함, 싼 이자 대출, 이삿짐센터, 족집게 과외 등 온갖 사연이 담긴 것들이 붙어있다. 광고주들의 사연이 적힌 딱지가 비바람을 맞아 누더기가 되어도 불평 한마디 안 한다.

힘들고 괴로워도 자기에게 의지하는 취객에게는 급한 화장실 역할도 제공한다. 그냥 주저앉아 자고 가도 일언반구 말없이 편안하게 내버려 둔다. 속이 거북한 사람이 먹은 음식을 토해내도 건드리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곳을 지나던 길 고양이들은 적나라하게 펼쳐진 메뉴에 재미를 본다.

어느 여인이 전봇대에 붙여놓은 광고지를 뚫어지라 쳐다본다. 그녀가 떼어간 종이에 글이 적힌 금액만큼의 셋집에서 나도 살았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방의 구조와 모양은 뒷전이고 전세 보증금과 월세가 제일 적은 전단지를 떼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 옛날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공기와 물과 햇빛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람일진대, 언감생심焉敢生心좋은 일을 하는 전봇대에게 한번이라도 고마움을 표시했을까 싶다.

빗물이 스며들어 그냥 서 있어도 버거울 텐데 이정표에 통신장비까지 붙잡고 있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동료들이 있지만 서로 기대거나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가 붙잡고 있는 전깃줄로 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당기고 밀어준다. 전봇대는 토요일, 일요일에도 휴식이 없다. 매주가 월, 화, 수, 목, 금요일이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도 비 오는 날에는 쉰다.

전봇대 아래에 구두 수선방이 있다. 전봇대는 자기 자리라고 너저분한 것들을 치워라 하지 않는다. 새 구두를 샀는데 발가락이 끼어 불편했다. 전봇대 옆에 있는 수선방에 갔다. 신발 볼을 좀 넓혀 달라고 했다. 수선방 아저씨는 말을 하지 않고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했다. 손가락으로 X 표시도 한다.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침 그때 구두 수선하러 온 아주머니가 내게 수화와 말을 동시에 해주었다. 내가 말하는 대로라면 신발 볼이 터진단다.

새 신발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X표를 한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뾰죽쇠를 넣어 망치로 두어 번 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수화로 구두수선 아저씨에게 나의 의사를 전했다. 농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뾰죽쇠를 넣어 두세 번 탕 탕 쳤다. 망치에 맞은 자국에 약칠을 해 주었다. 그의 손가락 표시대로 이천 원의 요금을 주었다. 나는 ‘왼손바닥을 펴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다’라고, 수화로 그를 추켜세웠다. 농아인의 환한 미소에 그날 기분이 좋았다.

이십여 년 전, 농아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수화를 배웠다. 두어 달 정도 수화교실에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같이 배우는 사람들과 도저히 진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수화를 배워 농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쉬움만 남긴 채 배움을 포기했다. 오늘 농아인을 만나니, 수화교육받을 때가 기억난다.

구두 수선방을 나서다가 문득, 옆에 서있는 전봇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빙긋이 웃는 듯하다. 이심전심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일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본연을 지키는 전봇대, 골목길의 파수꾼처럼 캄캄한 밤에는 환한 불빛으로 어둠을 물리쳐 준다. 그렇지만 교만하거나 생색을 내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세상에 쓰임 받는 일에 만족감을 느낀다.

다 해진 옷을 입고서도 고급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 있어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항상 영원을 추구하며 하늘을 향해 묵언 수행하는 산사山寺의 고독한 귀인이 이럴까 싶다.

인면수심의 추악한 일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국가의 녹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잇속만 챙기고 법을 문란케 하고 있다. 온갖 말썽을 부리면서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친다. 적반하장 격이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봇대는 두루 한 뼘 땅만 소유하고도 만족할 줄 안다.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자기 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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