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세상 끝에 서다 / 유영모

부흐고비 2022. 4. 29. 08:32

문득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들은 내겐 삶의 이유이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때론 진부한 일상에 나태해질 때면 무작정 길을 나서게 된다. 그 낯선 길에서 빠져드는 사유는 또 다시 방랑을 하게하고 거기서 겪는 새로운 경험들은 놀라운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그 달콤한 유혹에 매혹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 보니 그만 세상 끝에 와 버렸다.

안데스 산맥을 등뼈처럼 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끝자락 파타고니아까지 몇 날이 걸렸는지, 기억에도 없다. 그저 꿈을 꾸듯 훠이훠이 오다 보니 순백의 빙하 위에 서 있었다. 칼날같이 치솟은 설산을 뒤로하고 그레이 호수 위로 무너져 내리는 빙하는 오싹한 소름마저 돋게 했다. 우레 같은 천둥소리를 동반한 파편들은 곧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유히 수면 위를 떠돈다. 눈과 얼음, 바람과 신록이 한데 어우러진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는 과연 신이 숨겨둔 정원이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복잡했던 머릿속은 그리지 않은 도화지처럼 하얗게 비어져갔다. 시간은 멈추고 자의식은 저만치 사라진지 오래다. 세상을 온통 다 가진 듯이 난 긴 억겁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노인의 뱃가죽처럼 이리저리 주름이 잡힌 빙하 위에는 구름이 떠도는 작은 웅덩이들이 널려 있다. 애써 힘들게 빙판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갈증을 해소하는 천혜의 오아시스였다. 조심스레 두 손을 모아 목을 축였다. 찌르르 목젖을 타고 내리는 상쾌함이 어디 비할 데 없다. 때론 세찬 바람이 수시로 부는 곳이지만 지금 이 순간, 천년의 얼음 샘은 나만의 쉼터였다.

따가운 여름 햇살에 반사된 표면은 투명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들어버릴 것 같다. 악마의 목구멍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가 산재해 있지만 푸른빛이 감도는 얼음 구덩이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공룡의 등짝 같이 울퉁불퉁한 빙판 위에 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가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이젠을 단단히 졸라매었어도 그 섬뜩한 아가리에 등골이 서늘하다. 간신히 기다시피 엎드려 억겁의 시간을 내려다보았다. 켜켜이 세월의 층을 이루고 있는 구멍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현재에서 과거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짜릿한 쾌감마저 들게 했다. 수만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빙벽은 블랙홀처럼 까맣게 그 깊은 속을 감추고 있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태고의 시간 속에서 온전히 나를 잊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가져다준 빙하 조각을 띄운 칵테일 한 잔으로 억겁의 시간을 마셔본다. 오랜 체증이 빙하가 붕괴되듯 녹아내렸다.

세상의 끝인 파타고니아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를 아우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이다. 대 항해 시대 마젤란 탐험대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좁은 해협을 지나다 원주민인 거인 족 ‘파타곤’을 보고 파타고니아라 이름 붙였다. 사계절이 한꺼번에 교차하는 그곳은 광대한 조물주의 캔버스였다. 일필휘지 그린 듯이 거칠고 황량해 보이지만 감히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정돈 된 질서가 있었다.

작은 조디악(고무보트)으로 세라노 강을 거슬러 토레스 델 파이네(삼형제 봉)로 가는 숲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원시림 사이 오솔길은 울창한 녹음 속에 짙푸르다. 빙하가 훑고 간 피요르드 지형에 표표히 흐르는 푸른 강과 호수, 만년설을 머리에 인 창공을 향해 치솟은 설봉들은 감히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신이 빚은 걸작이었다. 수만 년의 시간이 옥빛 호수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잔해는 속절없이 흐르는 허무한 시간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넋 놓고 있을 때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지만 이곳의 여름은 순식간에 겨울로 바뀌어 버린다. 계절의 흐름이 엉켜버린 길목에서 짙게 깔린 안개마저 가던 길을 망설이게 했다. 타박타박 하룻밤 묵을 야영지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싸늘한 겨울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불의 땅, 티에라델푸에고로 가는 길은 벌써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12월의 남반구는 당연히 여름이어야 하는데, 여분의 겨울옷을 가져와 그나마 다행이다. 추위에 떨며 밤새 달려 온 버스는 마침내 칠레의 마지막 항구 푼타 아나레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도시는 온통 새벽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르헨티나 행 버스를 타려면 아직 한 참을 기다려야 했다. 흔히 푼타 아나레스를 세상의 끝이라지만 국경너머엔 또 다른 세상 끝 마을 우수아이아가 있었다. 어느 항구가 더 남극에 가까운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기어이 가고 싶었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 배 떠난 부둣가에서 서성거리다 옅은 불빛이 깜빡이는 터미널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운 거리라지만 그래도 꼬박 한나절을 더 가야 했다. 죽음보다 깊은 마젤란 해협너머 불의 땅 우수아이아가 있었다.

핀 델 문도(Fin del Mundo)! 마침내 세상의 끝에 섰다. 남극으로 가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 제도 우수아이아에 왔다. 은빛 설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이곳에서 남극까지는 불과 천키로 남짓, 쉼 없이 달려온 안데스 산맥이 마지막 가쁜 호흡을 가다듬는 곳이다. 안데스가 흘러내려 수면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우수아이아는 거센 바람과 추위로 과거엔 유배된 죄수들조차 몸서리쳤던 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극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마구 요동치게 하는, 지구 끝 마지막 항구이다.

낯선 곳이지만 낯설지 않다. 구름 위 하얀 설봉들이 흘러내려 점차 초록의 원시림과 어우러져 검푸른 바다 속으로 잠겨 갔다. 얼핏 온 천지의 빛깔이 스펙트럼 된 듯 눈이 시리도록 투영되었다. 졸듯이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와 울긋불긋 목재의 질감이 살아 있는 원색의 건물들은 유럽의 어느 도시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차가운 바람조차도 게으른 오후의 햇살 속에 잦아들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난 벌써 그 허허로운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해거름의 바닷가는 더없이 평안하다. 하늘과 잇닿은 수평선에는 하나 둘 불 밝힌 어선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 끝을 알리는 바닷가 표지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USHUAIA fin del mondo’ 표지판의 하얀 글씨가 이젠 멈추라 한다. 더 나아 갈 곳이 없다. 멍하니 바라보다 차가운 바닷물에 손을 적셨다. 전율처럼 짜릿한 상쾌함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머릿속이 휑하니 비어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세상 끝 바다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토해 낸다고 한다. 아픔도 슬픔도 모두 토해 내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남극을 지나면 또 다른 육지가 이어지니 이곳은 바로 세상의 끝이자 출발점인 셈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는 비글 해협 크루즈 선에 올랐다. 남극해에 접해 있는 좁은 바닷길은 찰스 다윈의 탐사선 비글호를 딴 이름이다. 거센 바람과 빠르게 흐르는 해류, 수많은 배들의 무덤인 해협은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하지만 내려앉은 하늘과 거친 파도, 바다사자와 펭귄이 위험한 공생을 하는 바위섬들이 없었다면 그건 이미 세상의 끝이 아니다.

파도에 잠길 듯이 떠있는 작은 바위섬에 지구의 마지막 등대 에클레이우스가 깜박깜박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색에 하얀 띠를 두른 오래 된 등대는 짙어가는 어스름에 유난히 빛이 나고 있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실연당한 영혼 아휘의 눈물을 묻어둔 곳이다. 혹독한 환경에도 이백년이란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등대는 짊어진 짐 다 벗어버리라 한다. 불같은 욕망도 안타까운 아쉬움도 모두 다 내려놓으라 한다. 삶의 시련과 불확실성에 길을 잃어도 끝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닌가. 먹구름 가득 머금은 수평선에는 홍시보다 진한 붉은 낙조가 번지고 있었다.

우수아이아의 여름밤은 밤 열시가 넘어도 어둡지 않다. 낮인지 밤인지, 시간의 흐름마저 아리송하다. 빨간 우체통 하나가 뎅그러니 바닷가에 외롭게 서 있다. 마치 버려진 듯한 칠 벗겨진 우체통에는 씁쓸한 옛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기에 쓸까말까 망설이다 작은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식 편지는 제법 운치가 있다. 가물거리는 옛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가벼운 흥분마저 일었다. 언제 집배원이 올지는 몰라도 그래도 가슴은 콩닥거렸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마음 담은 소식만 전하면 되는 것을.

극지의 세찬 바람은 이젠 오히려 훈훈하기만하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낯선 사람들은 구태여 적응하려 하지 않아도 편하게 다가왔다. 단지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질퍽한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세상의 끝, 인생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내일은 탈 수 있으려나? 남극으로 떠나는 뱃고동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흩어져 갔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중전화 / 이성환  (0) 2022.04.30
보풀 / 이옥순  (0) 2022.04.29
새우눈 / 한경선  (0) 2022.04.28
언양의 세 가지 맛 / 김잠출  (0) 2022.04.28
평온한 오후 / 고유진  (0) 2022.04.2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