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보풀 / 이옥순

부흐고비 2022. 4. 29. 08:34

첫추위 예보에 옷장을 연다. 바로 입을 수 있는 카디건 하나를 손쉬운 위치로 옮겨놓는다. 사실 이 옷은 내 손에서 떠나보낼 뻔했다가 돌아왔다.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풀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 느꼈던 보드라움에 비해 질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취급 부주의인가 하고 각별히 조심해보아도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보풀을 핑계로 함부로 입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옷이 되고 말았다.

현관 앞에 내놓았다. 분리수거함에 넣기 위해서였다. 현관을 드나들다 어느 날 봉지 속에서 카디건을 건져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탁소에 맡겨보았다. 옷이 멀쩡해져서 돌아왔다. 보풀은 옷 전체를 생각하면 별 것이 아니었다.

그 옷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날 샹젤리제 거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을 때 개선문 쪽에서 눈바람이 휘몰아쳐 내려왔다. 날씨에 대한 대비는 경량우산 하나뿐이었다. 그 거리에 입성했다는 감격은 짧게 지나가고 말로만 듣던 루이비통의 본사라는 건물을 필두로 온갖 화려한 가게들의 열기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순전히 때 아닌 비바람 때문이었다. 화려한 불빛에 쫓기듯 뒷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겨우 찾아간 작은 케밥 집에서 비로소 시린 손을 녹일 수 있었다.

케밥으로 속을 달랜 후 계획대로 관광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개선문 전망대에 올라 구획이 잘 되었다는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다음날 갈 곳을 가늠해보는 동안에도 눈바람은 계속 날렸다. 순간순간 비바람으로 바뀌기도 했다. 옷과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들자 신경은 점점 추위로 옮겨갔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남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멀거니 바라보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이니 에펠탑이니 그런 것보다 그 순간은 집 생각이 간절했다.

출발할 때의 설렘은 컸다. 유럽 여행도 처음이었고, 자동차여행도 처음이었다. 롱샹성당에서 돌아 나오는 도로 위에서라든지, 체코 자작나무 숲길을 달릴 때는 물론 감격했다. 그런데 베른 장미공원에서 내려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고, 다음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평소 내가 쪼잔하게 굴 때는 남편이 허세를 부리고 남편이 쪼잔하게 굴 때는 내가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날 역시 베른에서 하루 더 보내자는 내 허세가 먹히지 않았다. 물가가 비싸다는 이유였다. 여행 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내 허세가 먹혔던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의 간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로기상태로 눈이 십 리는 꺼져 들어간 후였다.

남편이 종이 가방을 안고 뛰어왔다. 얼굴에는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안고 온 가방 속에는 까만 캐시미어 카디건이 들어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오르락내리락할 때 추위를 피하느라 어느 옷가게에 들어가 만져보고 입어보았던 옷이었다.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뛰어온 그 덕분에 카디건을 겹쳐 입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은 땅이 대신 걸어주는 듯했다.

숙소는 파리 변두리 캠핑장이었다. 그때는 파리 중심으로 들어가 호텔을 정하고 관광을 할 만한 배포까지는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남편생각은 아마 다르지 싶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는 분명히 그 캠핑장에 일부러 갔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에 왔으니까 파리를 빼놓을 수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시내 중심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그곳에 차를 세웠다. 오전 일찍 시내로 들어갔다가 해가 지면 빠져나오는 식이었다. 처음엔 공원 숲을 지나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만으로도 들떴다.

그러나 오랑주리에 입장해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감상해야 한다는 나와, 어차피 시간상으로 그림은 대충 보게 될 것이니 미술관이나 박물관 외관에서 건축적 예술성을 찾아보는 게 낫다는 남편과의 간극은 컸다. 각자 갈 데로 헤어졌다가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기도 하고 또 하나씩 양보도 했다. 의견이 물 흐르듯 맞아떨어질 줄 알았던 여행에서도 타협이라는 게 필요했다. 연일 걷고 또 걸으면 센 강변 아니라 구름 위를 걷는다고 해도 다리가 아플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렇게 다리가 아프거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은 밀린 빨래를 핑계로 하루를 비웠다.

여행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버릴 뻔했던 카디건을 건져 올린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행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의견 불일치 같은 건 아주 지엽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풀은 겉에 보이는 작은 트러블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수시로 보풀을 제거해가면서 편하게 입는다. 다시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다면 그 거리에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 내 가방 속에 카디건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그때의 여행으로써 그날그날의 여행에서는 권태를 느낄 수도 있지만, 여행 전체를 생각하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열광하는 여행자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목의 매력 / 고유진  (0) 2022.04.30
공중전화 / 이성환  (0) 2022.04.30
세상 끝에 서다 / 유영모  (0) 2022.04.29
새우눈 / 한경선  (0) 2022.04.28
언양의 세 가지 맛 / 김잠출  (0) 2022.04.2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