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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허전하다 싶더니 휴대폰을 깜박 잊었다. 지하철역 승강장에 와서야 집에 두고 온 걸 알아챘다. 출근길인 데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그대로 지하철을 탔다. 나를 애타게 찾는 지인이나 고객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본의 아니게 여유가 생길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휴대폰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사람들은 직접 통화하지 않아도 문자 기능을 활용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오늘 나에게 문자나 카톡을 한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발신 후 1시간이 지나도 읽지 않으니 업무가 바쁜가 보다고 여길 것이다. 3시간이 지나면 내가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라고 의심받기 십상이다. 5시간이 되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할 것 같다. 급기야 나에게 전화를 걸면 신호는 가는 데 받지 않는다. 졸지에 갖가지 오해와 의문, 궁금증의 대상이 되지만 어쩔 수 없다.
요즈음 휴대폰은 통신 이외에도 미니컴퓨터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지나치게 휴대폰에 몰입한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도 앉든 서든 휴대폰부터 꺼내 든다. 버스나 승용차를 타도 차창 밖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식사 중이나 휴식시간에도 휴대폰이 옆에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 저승 갈 때 손에 쥐고 가야 할 부장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휴대폰의 주인인지 휴대폰이 사람을 조종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식곤증이 몰려오는 오후, 사무실에서 설핏 졸다가 깼다. 무심결에 휴대폰을 찾았다. 문자나 카톡 온 게 있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아차, 집에 두고 나온 걸 깜박했다. 나도 스마트폰 중독의 초기 증상은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어찌 보면 휴대폰은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다. 강박적으로 어떤 행위에 집착하고 반복하는 것은 중독이 시작되는 시초가 된다. 문자나 카톡 확인, 인터넷 검색, 유튜브 시청,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야 세상의 변화를 따라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대폰은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많이 뺏도록 만들어져 사람들을 유혹한다.
초기의 휴대폰은 기능이 전화나 문자에 치중되었다. 그 앞에는 공중전화와 무선호출기(삐삐)의 전성기였다. 당시 공중전화는 기본이 3분이어서 용건만 전달하는 연락병과도 같았다. 지금은 사람들 손에 너도나도 전화기가 들려 있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언제 어느 때나 통화가 가능하다. 그뿐이랴.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화상으로 보며 울고 웃기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의 재롱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첨단 세상이다.
당시 공중전화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야근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특근까지 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앞사람이 길게 통화한다며 서로 다투기도 했다.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며 공중전화기를 찾았지만 보이지도 않는다. 일부러 찾으니 더 없다.
드디어 관공서 근처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전화기 두 대가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한 칸은 카드 전용이고, 다른 하나는 동전과 카드 겸용이었다. 이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연이 오고 갔을까. 나는 좁은 부스에서 갖가지 사연을 나누었을 사람들의 숱한 인기척을 느꼈다.
물끄러미 공중전화를 쳐다보니 까닭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신식 문화와 현대화에 짓눌려 신음하는 퇴물의 행색처럼 초라하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부스에는 적막감만 감돌뿐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휴대폰이 개인 필수품처럼 보급되자, 사람들은 공중전화를 바로 내쳤다. 그때 외톨이가 된 공중전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간의 간사함에 쓴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공중전화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걷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컴퓨터에 몰입되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존재는 무엇인가. 왜 인간들은 문명의 이기利器앞에 한번이라도 반발하지 않고 맹목적인가. 물질문명에 첨단 기능을 장착하면 편리한 만큼 도리어 기계와 시스템에 예속되지 않겠는가. 빨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굼뜬 아날로그 방식을 뭉개 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공중전화는 문물이 조금 단순한 게 더 바람직하다고 속엣말을 한다.
부스에 들어가 투박한 송수화기를 손에 든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송수화기도 전화기 본체도 모두 때가 끼어 있다. 내 지갑을 뒤져 보니 동전도 전화카드도 없다. 컬렉트콜을 선택하니 익숙한 신호음이 나온다. 가족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기억해 본다. 잊어먹지 않았으니 아직 휴대폰 중독은 아닌 모양이다.
휴대폰이 대중화되던 시절, 처음 샀던 때가 생각난다. 투박한 로봇 같은 공중전화를 사용하다 손아귀에 잡히는 개인 전화기가 무척 신기했다. 가벼우면서 세련되고 매끈한 몸매에 반했다. 세월이 흘러 휴대폰에 인터넷 기능이 장착되자, 나는 그때부터 시대의 변화에 뒤처졌다. 기껏 사용하는 건 사전과 메모장 기능이니 공중전화처럼 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덜 누려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공중전화는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미덕도 있다. 그는 오랜 세월 무시당하고 홀대를 받아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이다. 스마트폰에 빠져 메마르고 참을성 없는 학생들에겐 지긋이 지켜보는 교사가 되고, 온종일 전자파에 노출된 이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의사도 된다. 소나기를 만난 자에겐 비를 피할 부스를 내어주고, 손에 휴대폰조차 없는 위급한 사람에겐 통신 요금도 받지 않고 기꺼이 파발擺撥의 소임을 다한다. 그는 사치스럽고 조급한 시대의 통속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선비요, 깊은 적막 속에 고행의 길을 묵묵히 걷는 수도승과 진배없다.
공중전화가 없어지면서 정情과 의리, 사람의 도리도 많이 사라졌다. 지금은 스마트폰 창을 열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럴수록 정신문화는 점점 접속이 원활하지 못하고 사막처럼 황폐해지고 있다. 사람을 중히 여기거나 배려하기보다 기계를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태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휴대전화는 현대 문명의 총아가 되었고, 공중전화는 구닥다리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고급 승용차라면, 공중전화는 구불구불한 시골 도로에 어쩌다 보이는 군내버스 같다. 환한 대낮과 어두운 밤이 교차하듯, 구식과 신식이 공존해야 세상 살맛이 난다. 그것이 공중전화의 소박한 꿈이자 희망 사항일 것이다. 가끔 휴대폰과 작별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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