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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멀미 / 강향숙

부흐고비 2022. 5. 9. 07:20

* 전학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하늘색 원피스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책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서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앉아있던 참새들이 포르르 날았다.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마을 어귀에서 만났다. 큰길에서 모퉁이로 접어들어 좁은 논둑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잘대며 걸었다. 학교가 파하면 동무들과 냇가에서 붕어를 잡기로 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가방을 메고 나오라 했다. 복도에는 흰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교에 오시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 같지 않게 나를 보고 웃지도 않으시고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따라간 곳은 교장실이었다.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 올린 머리 때문에 이마가 유난히 훤해 보이는 교장선생님이 하회탈 마냥 웃으며 맞았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나는 그 자리가 어색해 아버지 옆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제 여식이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잘 보살펴 주셔 감사합니다.”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낼 겁니다.”

서울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밤마다 내게 젖가슴을 내주던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오늘 친구들과 한 약속은 어떻게 하지? 그러면서도 서울 갔을 때 맛보았던 국화빵의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극장 앞에서 쪼그려 앉아 별 모양 뽑기를 하던 일도 떠올랐다. 그 옆 문방구에 들어앉은 갖가지 학용품은 또 어떻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달근달근했다. 게다가 남자아이들의 놀림에 시달리던 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향숙이와 ○○이는 뽀뽀했다네~’

누군가 변소 벽에 분필로 휘갈겨 쓴 낙서 때문에 짓궂은 남자애들이 수시로 나를 놀려댔다. 그 애랑은 말도 섞지 않았는데 창피하고 억울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죽여 울었다. 여자애들이 몰려들어 내 등을 토닥거리면서 같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문 속 주인공은 낙서를 지울 생각은 않고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와 껌이랑 사탕을 슬며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그 애가 보는 앞에서 땅에 패대기를 치며 발로 짓밟아 버렸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우우~~ 하며 야유를 보냈다. 멀미할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 기차

아버지는 이 길로 바로 기차역으로 간다 했다. 그때서야 아버지 손에 들린 네모난 여행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교장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교문을 나섰다. 텅 빈 신작로에 꽂히는 유월의 하얀 햇빛을 밟으며 읍내까지 걸었다. 영산포역까지 가는 버스는 비포장도로 위를 요동치며 달렸다. 아마도 아버지는 역에 도착하면 짜장면을 사주실 것이다. 입에 척척 붙는 맛있는 짜장면이랑 시큼 짭짜름한 단무지를 먹을 생각에 시무룩하던 마음이 풀어졌다. 기차 안에서 저만치 군것질 수레가 나타나면 나는 잠든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빵이랑 엿이랑 찐 계란을 까먹으며 집을 떠나온 것마저도 잊어버렸다.

갑작스런 나의 전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에 사는 오빠들이 도시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했다. 칠 남매 중 네 명이 먼저 올라가 있었는데 막내인 나와 큰오빠와는 열아홉 살 차이였다. 어쩌면 무조건 애정을 쏟아붓는 나이 든 부모에게서 떼어낼 작정이었는지 모른다. 형제들은 엄한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나는 아버지 턱 밑에 앉아 재롱을 떨었다. 아버지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오빠와 언니들에게 꾸지람을 하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금니가 드러나도록 웃어 주었다. 딱 한번, 아버지 서랍에서 돈을 훔쳐 친구들과 과자를 사 먹고 들어온 날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손목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가 잔뜩 겁에 질린 내 눈을 외면하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후려쳤다. 그날 아마 이불에 오줌을 쌌을 것이다.

나의 오줌싸개 버릇은 학년이 올라가도 나아지지 않았다. 싸개 신이 오는 날이면 꿈속에서 익숙한 바다가 나왔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는 지점에는 먹거리가 풍부했다. 여름날 동네 여자들이 복합비료포대에 호미를 들고 바다에 가면 아이들도 쫄랑쫄랑 뒤따라 나섰다. 물 빠진 바닥을 파내면 부채살 모양의 줄무늬가 있는 바지락과 황갈색으로 윤이 나는 재첩이 노다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물새를 따라 바닷물이 달음박질쳐올 무렵이면 묵직한 포대를 끌고 쫓기듯 밖으로 나왔다. 꿈속에서는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달랑 혼자 바다에 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러다 물이 들어오면 어쩌나. 불안 때문에 아랫배가 찌릿찌릿하고 배가 부풀어 올랐다. 눈물이 찔끔 나오고 오줌도 지렸다. 새어 나오던 오줌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나면 아프던 기가 가셨다. 뜨듯해진 물을 손으로 퍼트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오메!’하는 엄마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이 가시내 또 쌌네.”

정말 갯바닥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 이부자리에서 쫓겨나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또 잠이 들었다. 엄마는 엽엽하지 못한 어린것을 떼어 보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자식들의 채근에 못 이겨 마지못해 서울로 올려 보내기로 한 때가 오학년이었다.

상경한 다음날부터 나는 서울 학생이 되었다. 나긋한 말씨와 깔끔한 차림의 아이들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봐 입을 꼭 다물었다. 학교는 단층이었던 시골학교보다 삼층이나 더 높았다. 운동장도 공동묘지에서 흙을 파다 메우던 시골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게 넓었다. 운동장 가에 있는 갖가지 놀이 기구에 놀라 자꾸 입이 벌어졌다. 오빠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들이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넓은 도로를 걷다 샛길로 빠지면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층계가 나왔다. 아래까지 내려서면 고개를 쳐들어야 위가 보였다. 층계 끝에 있는 슈퍼를 돌아가면 장충체육관이 보이고 학교는 그 건너에 있었다. 나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오빠들이 사는 집은 좁다랗게 이어진 골목 초입에 있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끼고 나란히 딸린 방과 부엌이 있었다. 연탄아궁이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가 집안에 진을 치고 떠다녔다. 수돗물에서도 소독내가 났다. 역한 도시 냄새에 나는 속이 메슥거렸다. 잠깐 다니러 왔을 때는 싫증이 나면 떼라도 쓸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럴 수 없었다. 오빠들은 어렵기만 했다. 나는 낯설고 물선 땅에서 외톨이처럼 떠돌았다.

부모님은 어쩌다 한 번씩 오셨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양 손으로도 모자라 끈으로 꽁꽁 여민 박스를 끌고 집으로 들어섰다. 짐 속에서는 텃밭에서 기른 갖가지 채소랑 젓갈이며 바지락 같은 갯것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좁은 방이 비릿한 냄새로 가득 찼다. 모처럼 맛보는 익숙한 음식은 배를 채우는 이상의 포만감을 안겨 주었다. 오랜만에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들면 잠결인지, 꿈결인지 까칠한 손길이 느껴졌다. 얼굴을 매만지는 익숙한 손길에 쌓였던 외로움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 밤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 밤을 보낸 아침이면 충혈된 엄마 눈에 쌍꺼풀이 풀려 있었다. 나는 정성을 다하는 오빠들 앞에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뻥끗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방학을 기다렸다. 방학을 하면 그날로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얼마지 않아 전봇대랑 네모난 논이랑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을 휙휙 지나쳐 갔다. 그렇더라도 앞서 달리는 마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잠을 청해도 눈은 더 말똥해지고 통로를 몇 번이고 오가도 시계는 째깍째깍 제자리걸음만 했다. 아버지는 뭣하러 이 먼 곳까지 나를 보냈을까. 몸이 배배 꼬여 지쳐갈 즈음에야 비로소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서둘러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쿨렁거리며 두어 시간을 달렸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과 길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 다정하게 어깨를 두른 낯익은 산이 보이면 가슴이 요동쳤다. 삼거리 전방 앞에서 내려 신작로 길을 날다시피 달렸다. 멀리 우리 집 장두 감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가 보이면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렀다. 감격과 안도 속에 방학이 시작되었다.

* 닭죽

나는 그새 서울말을 썼다. ‘느그들 잘 있었냐’, ‘뭣이냐, 그랑께’보다 ‘애들아 잘 있었니?’,‘저기 있잖아…’ 라며 말끝을 올렸다. 도시에서의 사투리는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이곳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은 달라진 내 말투에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리다 금방 예전처럼 어울렸다. 매일 해가 꼴딱 넘어갈 때까지 들판을 쑤시고 다녔다. 떠나온 날 지키지 못했던 붕어 잡기는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종아리를 간지럽히는 물살을 거슬러 살금살금 걸으면 고기들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돌 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돌을 감싸듯 손을 갖다 대면 포위망을 뚫으려는 붕어의 파닥거림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고기를 잡을 때마다 붕어처럼 팔딱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너울대는 물결에 멀미가 날쯤에야 물 밖으로 나와 쨍쨍한 햇볕에 젖은 옷을 말렸다. 서울에서 가져온 책들은 바깥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 방학은 냇가 송사리 떼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부모님은 내가 떠나기 전날이면 닭죽을 쑤었다. 나는 그날만큼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마솥에서 쉭쉭 김 솟는 소리가 울고 싶은 내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엄마는 새초롬하게 있는 내게 닭다리가 담긴 양푼을 턱밑에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 했다. 꾸역꾸역 퍼 넣은 죽은 꼭 탈이 났다. 엄마는 내 배를 문지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일어나지 못하게 아파버리기를 빌었다.

“허어, 녀석이 처음 서울 갈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니 이제 철이 드는가 보네.”

“부모 떨어진 어린것, 생각만 해도 짠하요.”

떠나는 날은 엄마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왔던 대로 되밟아 가는 길을 나는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느릿느릿 걸었다. 오빠들이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 아버지를 대신해 주지 못했다. 정류장에는 내가 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 헛구역질이 났다. 역까지 가는 내내 몸을 구부리고 쓴 물이 올라올 때까지 속에 것을 다 토해냈다. 내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던 엄마도 덩달아 멀미를 했다. 우리는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떠나기 싫은 마음을 삭히지 못하고 비닐봉지에 번갈아 토해냈다. 역에 이르러 봉지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다시 기다림의 시작이다. 엄마는 차창 밖에 서서 기차가 떠날 때까지 꼼짝 하지 않았다. 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엄마 모습이 물속으로 잠기는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때를 돌아보면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오십 년을 돌아 나는 다시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마련을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갈증처럼 남아있는 그리움이 채워지는 것 같아서이다. 여전히 뼛속에 밴 촌 아이 그대로인 나를 사람들은 서울댁이라 부른다. 이미 도시에 길들여진 세월의 간극을 메울 수 없는 건지, 고향에서조차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시골 내를 풍기려 해도 도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 시선에 나는 또다시 멀미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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