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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 피울음 우는 유월 초순, 우리 일행은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와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여 길을 나섰다. 임진왜란부터 고종 시절까지 내시들이 살았다는 청도 운림고택을 찾아 나선 걸음이다. 허나 ‘내시’라는 무거운 단어가 뇌리에 박혀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에 해박한 K선생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청도의 볼거리를 먼저 둘러보고 가자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이끌었다. 여린 모가 발을 내리는 무논을 지나고 봇물 지줄 거리는 둑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시조시인 민병도 갤러리를 둘러보고 신지생태공원과 선암서원,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묵고 가셨다는 만화정과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둘러 본 뒤 임당리 내시고택에 이르렀다.

먹빛 기와담장에 에워싸인 내시고택을 들어서자 덩실한 한옥 몇 채가 위용을 드러낸다. 이 고택의 남자들은 임금의 시중을 들기 위해 性을 사멸한 사람들이다. 아내는 허울뿐, 자식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를 들이고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 혈연이 아닌 호적상 등재된 사람끼리 의리로 살아왔던 집이라서 인지 유월의 훈풍마저도 이 뜰에선 산지사방 흩어지는 느낌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무 벽이 버티고 있고 그 판벽에 눈꼽재기창을 만들어 놓았다. 性을 잃어버린 남편이 혹시 안채에 외간 남자가 드나들까 노심초사 불안했던가 보다. 패쇄적인 안채 공간에 드나들려면 눈꼽재기창이 있는 중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인간의 3대 본능 중 하나인, 성욕을 잠재운 남자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여자! 그 아내가 감시를 당하는 하트 모양의 창이 겸연쩍은 듯 배시시 웃고 있다. 그 창은 대장부가 눈을 대고 살필 수 있는 버젓한 모양새가 아니다. 임금을 보필하던 그 시대의 권력자가 소인배같이 틈새로 훔쳐보며 외간 남자가 드나드는 걸 살폈단 말인가. 하기사 남자의 사랑을 표출 못하는 그 심정은 오죽했으랴만.

내시 또한 측은한 운명의 남자이다. 가난한 부모의 자원에 의해 내시로 선발되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지. 그렇다고 가난한 부모를 원망해야 할까. 비록 남자 구실은 못하지만 아내 관리는 철저했던가 보다. 안사람이 거처하는 안채까지도 임금이 계신 서북향 방위를 보고 앉았다. 그건 허툰 생각하지 말고 자나 깨나 임금을 사모하며 살라는 암묵적인 지시가 아닐까 싶다. 오감이 살아있고 오장육부가 살아 숨 쉬는 사람이 그런다고 본능이 사라질까. 허울뿐인 지아비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 기르며 가문을 지켜 내느라 속 끓였을 여인의 삶이 한없이 가련하다.

토끼풀 빼곡한 뜰에 서서 안채를 들여다보니 동백기름 바른 낭자머리에 생모시 적삼 입고 망연히 앉아있는 부인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체통을 지키느라 몸단속 마음 단속하며 한 평생을 보낸 세월이 기둥에 친친 감겨 눌어붙었다.

이 고택의 안주인은 과연 바깥바람 쐬러가는 자유도 없이 안채 공간에서만 머물렀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사람의 본능을 무겁게 짓누르면 불만이 쌓이고 지나치면 터지게 된다. 이어붙인 이음새가 터지거나 아니면 원판이 터져 탈출해 버린다. 눈꼽재기창은 억눌린 성적 본능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외간남자를 막아내려고 만든 질투의 창이다. 열 사람이 지켜도 도둑 한 명 못 막는다는 말이 있는데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감시의 눈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무 판막이에 작은 하트 모양을 새긴 그 저변엔 채워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깔려있다. 그러면서 감시하다니! 차라리 혼기를 놓친 총각이 밤에 몰래 보에 싸서 데려가 버린다면 인간적이겠다는 생각까지 스쳐간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어낸 근원은 임금이다. 궁중에 있는 왕실의 여자들을 독점하기 위해 내시의 성을 거세 시켰지 않는가.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잔인한 일을 강행했던 왕권이 소름 끼친다. 궁녀들에게서 자식이 출생하면 혹시 내시의 씨앗인가 불안해서 性을 미리 거세했다고 하니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 자체였다.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권력자는 백성을 다스릴 자격이 없다. 하물며 하늘이 내린 인간의 성을 함부로 사멸 시킨 잔인한 임금을 존경하며 모시고 싶었을까? 조선시대 임금의 비서가 된다는 건 모든 걸 내려놓은 가벼운 몸이라야 버틸 수 있었겠다.

어쨌던 임금을 보필하는 내시가 되었으면 아내는 두지 말아야 했다. 한 여자를 애민하게 만들어 놓고 눈꼽재기창으로 감시는 왜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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