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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축원祝願 / 임석재

부흐고비 2022. 5. 11. 07:20

임해음林海音 선생님이 쓰신 <무말랭이 맛>을 읽었습니다. 진이 엄마가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선생님께서 답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이 엄마는 정성을 다해서 싸준 도시락 반찬과 밥이 매번 무말랭이와 푸석한 재래 미쌀로 바뀌어 있었고 하루는 도시락까지 바뀐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벌을 받을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어린 아들의 영양식을 누가 가로채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개의 달걀부침이든 혹은 닭다리든 남편의 박봉을 알뜰히 저축하여 간신히 마련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오늘은 진이 눈앞에서 큼직한 쇠고기완자찜을 한 덩이 도시락에 넣어주었다고 하면서 이 일을 밝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진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가다가 잠시 숨을 내쉬었습니다. 옛날 1960년대에 내가 근무했던 농촌의 시골 학교가 떠올랐습니다. 막 대학을 졸업하고 앞으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르고 옹동 산록山麓에 자리한 작은 학교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때 시골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콜타르 칠을 한 나무 벽과 유리창의 벌어진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거침없이 들어왔습니다. 난방이라고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의 체온과 조개탄 난로가 고작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목이 푹푹 빠지게 눈이 쌓여도, 귀를 떼어갈 듯 매서운 삭풍이 불어도 60명의 고사리 같은 아이들은 십여 리나 먼 곳에서까지 책과 도시락을 책보에 둘둘 싸 어깨에 메고 등교를 하였습니다. 차디찬 도시락을 난로 위에 쌓아 올려 데운 뒤 점심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밑에 있던 도시락은 타기도 하고 위에 있는 도시락은 찬기만 가신 밥을 김치 하나에 웃으며 꿀떡같이 먹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론 우리 반에서는 도시락이 바뀌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들 이리저리 흠집 난, 한눈에 바로 알 수 있는 저마다의 오래된 도시락들이었으니까요.

오늘도 고무공만큼이나 큰 쇠고기완자찜 도시락을 든 군이가 “또 누가 잘못 가져갔구나!”하고 소리쳤습니다. 역시 아무도 바뀌었다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안을 돌아다니다가 홍조 띤 조그만 얼굴 앞에 와서 발을 멈추었습니다. 그 아이는 허둥지둥 무말랭이를 밥 속에 쑤셔 감추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옆 빈자리에 앉아서 귀에다가 입을 대고 가만히 물었습니다.

“무말랭이 맛이 어떻지?”

뜻밖에도 그 아이는 바로 편지를 쓴 어머니의 아들 진이였습니다.

혈기왕성한 초년 교사였던 나는 “어, 너 왜 이 도시락을 먹고 있어? 어머니가 너를 위해 애써 싸주신 반찬을 안 먹고?” 하고 큰 소리로 사건을 해결한 탐정처럼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 아이들 모두 이 광경을 보게 되고 그동안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번번이 갈비며 달걀부침, 닭다리에 오늘 커다란 쇠고기완자를 먹은 군이도 보았겠지요. 그렇습니다. 누가 되었든 이 일이 친구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린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뒤를 총총걸음으로 쫓아온 진이는 부탁합니다.

“선생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셔요. 군이네 집은 정말 가난해요. 군이는 날마다 무말랭이만 먹는대요. 그래서….”

어쩌면 어린아이의 생각이 이토록 때 묻지 않고 순수할까요. 그 마음에서 선생님도 다음 세대의 밝은 미래를 바라보았겠지요. 아마도 군이와 진이는 훌륭하게 자라나 그 옛날 인생의 여러 맛을 갖추고 있는 무말랭이를 먹던 어린 시절을 추억할 것입니다. 무말랭이라도 먹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가난과 궁핍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돕고 보살피는 것은 실은 나를 돕고 심성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것도 느끼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그날 바로 답장을 쓰셨습니다. 먼저 선생님은 진이의 마음에서 ‘선량한 인간의 본성은 거칠고 추한 이 세상에서도 우리 다음의 세대만은 잃어지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였습니다. 벅찬 감정에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선생님의 심성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었습니다. 바다는 크고 작은 많은 갈래에서 흩어져 들어와도 하나를 이룹니다. 더럽거나 깨끗한 물도 가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조심성과 배려에서 제자를 사랑하는 큰 울림을 듣습니다.

채근담《菜根譚》의 서문을 예로 들었습니다. ‘나물 뿌리를 취하여 책 이름으로 함은 원래 청빈은 단련 끝에 얻어지며 또한 스스로 가꿀 수 있으며….’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맛있는 음식과 평안함을 좇아 풍요와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저의 부끄러운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선생님의 답서를 다 읽고, 진이 어머니는 아들의 고운 심성에 감동해서 어려운 살림이지만 같은 반찬을 하나씩 더 만들어 보냈습니다. 林海音 선생님도 형편이 어려운 군이의 학비를 보태어 상급 학교 진학을 도와주셨고 종생토록 아동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남의 형편을 헤아리는 마음에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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