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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선우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11.

 

 

정선우 시인
부산 출생.

2015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모두의 모과들』

 

 



정선우 / 정선우
삐딱하게 파이프를 물고 있는 시선과 마주친 후/ 거울을 열고 조심스레 진입해요/ 귀를 만지며 나직이 이름을 부릅니다// 거울을 뒤집어도 울지 않을 거예요/ 믿음은 언젠가 거울처럼 깨지니까요/ 습관적인 김 서림은 당신이 있다는/ 확증// 얼음 속의 표정/ 표정 속의 얼음// ​얼굴을 파묻으면 펼쳐진 공간/ 낡은 의자가 보여요 버리지 못한/ 고독을 닮았어요/ 이해해요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잖아요// 피부가 빛나고 목이 긴 여인은 믿을 게 못돼요/ 제비처럼 날아가버린 제비다방/ 종로 1가 33번지 붐비는 사람들/ 두꺼운 상황을 처리 하는 야윈 손가락들// 바람의 통로를 알고 있는/ 나무들은 팔을 움직여 무언갈 하는데/ 나의 양팔은 추억처럼 점점 굳어가요// 때마침 착한 비가 내려 기분을 망쳤어요/ 웃다가 웃어요 원고처럼 구겨져/ 거울 밖은 안전하지 않아요/ 함께 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박쥐바람 / 정선우
나는 박쥐의 자세로 매달린 바람/ 길을 찾아 읽는 초음파/ 멀리 있는 표정을 찾아요/ 지상의 이면들은 모조리 행방을 숨겨요/ 돌아보는 얼굴로 서로를 모른 채// 여러 날 툭-툭 병든 도토리만 떨어져요/ 희박한 날개로 허공을 한방, 먹여 봐요/ 흉터처럼 얼룩덜룩 하지만 상관 안해요/ 나를 기억할 각별이 있기나 할까요// 거미줄에 거미도 없는 요요한 밤/ 누군가 소리를 질러요 귀가 따가워요/ 비등점 아래의 달집처럼 뜨거워/ 발톱이 찢어지고 심장은 부풀어요/ 중심부터 타들어가고 있어요 구불구불한 연옥煉獄 같은,// 타들어가 울지도 못하는 나는/ 백 년 전의 집터처럼 나쁜 꿈처럼 쓰러져요// 가라앉는 지상의 호흡을 삼키며/ 까마득한 초음파는 수없이 오다가 사라지고// 비문은 한 줄이면 충분해/ 다시 읽지 않으면 해요/ 치환되지 않을 마지막 자리 거기에,//

달팽이를 읽다 / 정선우
상추 잎에 움츠린/ 민달팽이 한 마리 외로웠나/ 나지막한 어깨 하나쯤 필요했는지 모른다/ 꾸물거리는 것/ 잎사귀 끝이 흔들리자/ 순간 허공을 움켜쥐다 놓친다/ 곱송그린 생이 더 깊게 주름진다/ 놓친 뒷모습은 아릿하다/ 시시로 붉은 꽃피우는지/ 물컹한 근육의 힘들/ 왼쪽 무릎 관절반월이 다시 시큰하다/ 뿔을 가지고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른 내력을 몸짓에 받아 들었다/ 끈적하게 뱉어낸 시름 하루를 끌고 간다/ 괄약근을 푼 주름마다 물비늘이 쓸쓸한/ 생은 숙성중이다/ 담요처럼 닳아가는 무릎을 읽는다//

숨은그림찾기 / 정선우
늦은 저녁을 접는다/ 서랍에 잠갔다 창틈 모서리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손바닥 같은 울음/ 더 자랄 것도 없는 요약처럼/ 몇 소절의 울음이 뻗어서 담장 넝쿨이 되었다/ 아주 짧고 간단하게 줄기를 뻗었다/ 낮은 어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밤의 경계를 물고 있다// 마음 한 편이 뻐근하다/ 슬픔의 방향은 늘 편도였다/ 다가온 우두커니/ 모질게 쓸어내지는 않았다/ 결핍의 이름 몇 개 수첩에게 주었다/ 저녁은 아직 게으르고/ 수렁 깊은 늪 속으로 달을 먹은 구름이 따라온다/ 어둠은 물컹한 뒤꿈치를 들고/ 서서 자는 것들을 불러 모은다/ 지나간 뒷모습은 지나간 적이 있다//

푸른 감자가 있는 풍경 / 정선우
손톱자국입니까/ 궁금한 흉터에서 죄다 싹이 트고 있어요/ 창문을 여는 동안 중천 어디에도 해는 보이지 않네요/ 구석으로 굴러가는 감자의 향방이 궁금해요/ 감자를 쥐고 구석에 앉아요/ 몸이 가려워요/ 나도 모르게 곪아 있던 것들/ 감자분처럼 이내 목이 메이는 휴일이에요/ 잘라도 다시 자라나 그만큼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 25시 편의점엔 아무도 보이지 않네요/ 불빛만 오후를 졸고 있어요// 누구의 부재입니까/ 하얗게 속을 드러낸 가슴 언저리/ 오랜 고적함이 포슬포슬 벗겨져요/ 열대어가 살지 않는 빗살무늬 어항에/ 푸른 감자가 쪼글쪼글해요/ 열대어가 알을 낳듯 여린 싹들이/ 지느러미를 흔드는 오후예요//

어제의 모과​ / 정선우
그림자를 물고 날아가 버린 새는/ 그림자를 통째로 잃고 하루를 잃고/ 다시 날아오지 않는다// 접근 금지 구역이 된 나무에서/ 썩은 모과 냄새가 이방인처럼 건너왔다/ 꽃을 잃고 모과는 더 이상 모과가 아니다/ 굴러온 모과는 썩으며 흘러내린다/ 모과를 듣다가 시꺼먼 모과를 만지다가 손등 같은/ 흙 속에 꾹꾹 파묻은 가을/ 모과는 가벼운 비문으로 시작된다/ 모과나무 건너 언덕길에 누군가/ 흔들리는 어깨와 붉어진 눈/ 저승꽃같이 까만/ 블라우스가 휘적휘적, 지나간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어제 읽은 나무의 마지막 물음을 떨어뜨린다/ 얼룩진 바닥은 나무의 유언장/ 모두의 모과들 한때의 어제로 적힌다//

쇠라*의 오후 / 정선우
두서없이 흩날립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랍처럼/ 칸칸이 어지러운 무질서입니다// 기억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도마뱀 꼬리 툭 끊어지듯/ 이쪽과 저쪽에서/ 자꾸만 멀어지다가 파닥이다가/ 깜빡이는 무늬처럼 찍힙니다/ 물감을 흩뿌리며/ 떠오르는 확률을 점칩니다// 우거지는 생각만으로 숲이 될 수 있는/ 그 상상이 그 뿌리를 찍어내고 있습니다/ 슬며시 끌고 온 부풀부풀한 상상//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문지릅니다/ 손끝으로 알아차린 이목구비/ 넓은 이마가 깊어집니다/ 깊어지므로 비로소 뚜렷하게/ 말랑말랑한 덧칠/ 물방울 같은 반응입니다//
*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프랑스의 화가이자 신인상주의의 창시자.

크루아상 / 정선우
차지게 어디 한번 부풀고 싶었네/ 마음 딱지 사이사이/ 달팽이처럼 돌돌 말아/ 더 멀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한껏 단단한 마음이고 싶었네/ 네게 닿지 못할 모서리가 있어/ 부풀어 부풀어도/ 닿지 못할 그곳 어디서/ 번짐과 옅어짐의 온도로/ 어쩌면 모르는 척 빠져들고/ 사소한 눈길로 슬며시 머무네/ 둥글게 입술을 오므린/ 침묵의 순간에 대하여/ 연민은 눈빛으로 구워지네/ 애쓰지 않아도 피어나는 겹겹의 슬픔은/ 비파의 노래처럼 부풀어가네/ 부스러기도 남지 않는 그 말, 지독한/ 궁근 설움 몇 덩이 지켜보면서/ 기어이 오늘을 내팽개쳐 놓고//

루시*의 수첩 / 정선우
파란 지붕의 흰 구름 때문이 아니예요/ 기분이 좋은 건/ 회색 담장에 기댄 빼빼한 해바라기의 잎들이/ 바람에 맞춰 박수를 쳤다고/ 기분이 좋아진 건 더욱 아니에요// 낡은 동굴의 제건축은 햇살에 맡겼어요/ 설계는 깐깐한 거미들의 몫이죠/ 지붕에는 만약이라는 끈끈한 상상으로/ 길쭉한 접시와 뾰족한 포크를 준비했고요// 이따금 해바라기가 큰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거미줄에 걸려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심술은 말하지 않았죠/ 입맛이 같아야하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너무 작고 삭은 뼈조각이에요/ 뼈의 움직임으로 미세한 마음을 알 수는 있어요/ 몸짓이 먼저 진화하느라 뼈는 스멀거려요/ 뼈는 밤낮없이 진화 중이고/ 뾰족한 뿔을 가진 말言은 혀가 굳어요// 전력을 다해 돌보지만/ 수십 마리의 양들을 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모두 어딘가 보고 있네요/ 마멀레이드를 먹을 시간이란 걸 알아요/ 쿡 찍어 먹는 달콤한/ 딱딱한 껍질을 까야 하는 땅콩으로는/ 엉클어진 뼈들의 수다를 막지 못하죠// 셀로판 노을이 피고 있어요/ 노을을 흠뻑 먹은 양들을 데리고/ 동굴로 돌아가야 할 낯선 시간/ 셀로판 틈새를 찢고 몇 개의 어둠이 빠져나가요//
* 약 320만 년 전에 살았던 여성의 뼛조각

모하비의 시간 / 정선우
갈증 난 바람을 따라/ 사막에 솟아난 사구沙丘는/ 낙타가 남기고 간 육봉이다// 누대의 시간이 무덤처럼 많은/ 출생의 비밀을 봉 속에 감춘 낙타/ 전생과 현생을/ 짊어진 살아있는 고분이다// 지루한 황톳길을 걷고 걸었을 등짐장수처럼/ 등의 무게를 끌어안았다/ 금빛 모래는 서러운 뫼비우스의 띠/ 사막은 살아있는 것들을 길들인다/ 한때, 물이었을 풀숲이었을 날비린내를 기억한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내의 무릎은/ 모래언덕을 내닫는다, 이내/ 녹슨 부속품처럼 삐걱거리는 관절/ 삭은 길목에 걸린다// 모래 속의 물을 찾아/ 기다란 생의 발톱이/ 사막의 내장을 긁어내고 있다// 울컥, 달을 토해 내는 사막/ 사내 등에 느닷없이 생의 육봉이 솟는다//

이미지, 몽(夢) / 정선우
눈빛은 심드러안 더위를 물고 있다 맞짱뜨는 자전거 사이를 어설프게 끼어드는 얼굴,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완전히 다른 수요일 건너편 눈치를 켠다 신호등을 깨문 입술은 귀의 시위를 벗어난다 무릎 우두둑 노란 하늘을 일으킨다// 입술을 비집고 올라온 송곳니 꽃향기를 피우며 싱ㅅ깅하게 외출한다 손목을 잡아끄는 엄마는 공원이 취향이다 어슬렁거리는 눈동자는 주인 없는 풍선을 잡고 노래는 끝났으니 산책해야지, 꽃무늬는 여름을 건너간다 게으른 운동화를 벗어둔 맨발 꾹꾹 혼잣말을 디디고 떠났다 배꼽을 숨기기 좋은 곳을 찾기 틀렸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얼룩 고양이의 발목을 잡은 나팔꽃이 진다// 허물을 벗은 검은 비닐봉지, 목젖에 잠겨 무슨 말을 하다가 만다 소나기 죽비처럼 후두둑 등짝을 내리친다//

피아노가 그려진 창문 / 정선우
창문을 바라본다// 아무 말이라도 좋았다/ 눈썹을 찡그리지 않으며 말했고 우리는 나무들 아래에서 바람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오줌색 같은 달이 달맞이꽃을 되돌려주지 않았지만/저녁은 대체로 평화로웠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냉담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어서 소모되는 것들이 아깝지 않았다/ 나무의 이파리 끝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뿌리의 견고함이 사라질까 걱정했다// 낄낄거리는 아침엔 다짐이 필요했고/ 눈물이 이해되는 저녁에는 따뜻한 국물이 생각났다// 만지작거리던 마리오네트 매듭을 끊어내었다, 밤은/ 더욱 서글펐다/ 그냥 여기에서/ 익숙함이 사소해지고 오월이 갔다// 깨어나지 않은 잠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를 부르는//


지심도 동백 / 정선우
바람은 몇 번이나 다녀간 걸까 찰나라는 말을 삼킨다 섬과 섬 사이에 있던 안개가 전하는 바람을 먹고 해풍 위에서도 그림자는 자라고 있다 붉음에 지쳐 자지러지는 핏빛 모가지는 제 팔 아래 떨어뜨린 생의 환멸이다 붉은 소인이 찍힌 부고다// 죽음을 껴안은 파랑의 보폭 위로 다시 피는 후생, 파도는 혀끝에 목숨꽃을 물고 치명을 피워 올린다 불온한 포말이 떠돌고 있다 발설하는 절명, 쓰러지며 반복되는 파도, 파도// 동백 촛불이 켜지고 유혹의 표정으로 케이크는 붉어지고 있다 통째로 떨어질 맹세는 벼랑 아래로 뛰어들고 모가지 붉은 탄원은 유품으로 박제되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섬, 불현듯 사랑은 그 절벽에 이를 것이다//

안개꽃 / 정선우
너는 너를 모르지/ 앞을 보여주지 않고/ 갈대처럼 휘기도 하지/ 파스를 떼어내도 남는 흔적 같은/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가벼운 바람을 위장한 안부들이/ 너를 의심하지/ 가렵고 사라지지 않는/ 반쯤 가려진 관심 따위는 모르는척하지/ 완벽한 가면을 쓴 줄 알지/ 오직 꽃이기를 바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겹겹이 포장한 표정을 지은/ 애매모호한 몸짓/ 가까워서 먼 옆모습 같은/ 언제나 덥석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잡히지 않는/ 너는 어쩌다/ 꽃이었다,/ 안개였다//

식물도감 / 정선우
노란이끼버섯이 피었다 저것을 태워 먹으면 울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다 보여주는 건 절망적이다// 4시가 지났다고 생각했다 숲의 소실점에서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가 팔을 벌려 알려 주었다// 귀를 닮은 머위 잎, 바짝 말려 먹으면 흉이 사라진다고 했다 안개가 머위를 덮치고 귀는 희미해져 갔다 귀가 더 커졌다// 이 숲은 누구의 것일까/ 배가 고파왔다/ 첫 표정이 기분을 좌우했다// 햇살은 숲을 키우고 한낮을 다독이는 일에 열중했다 안개가 사라지고 여뀌 꽃이 흐무러져 있다 삶아 먹으면 피가 멈춘다 했다 무심결에 베여 손가락 하나를 잃은 소년을 알고 있다// 벌깨덩굴, 처녀치마, 홀아비꽃대, 광대수염 너희의 시작과 끝, 접혀 있는 페이지마다 그늘이다// 손금을 쥐고 최소한으로 피었다가/ 최대한 흔들려 보는// 맨발로 일어서는 나무가 경계를 지웠다// 산딸나무 가지 끝에 얼굴이 사라졌다//

 

드라이플라워 / 정선우
다물었던 입술이 열렸다/ 얼레빗으로 빗은 헤진 시간, 차마/ 삼도천 건너지 못한 미투리/ 달의 골수에 유빙처럼 찍혔다/ 검은 머리카락 동여맨 은자의 편지*/ 한 가닥 지푸라기 같은,/ 목마른 혀에 불려 뭉개진다/ 뜨거워진 뼈처럼 휘어진 그믐달/ 밤의 몫이 된 얼레빗/ 저렇게 뿌리 깊은 사백 년인데/ 이처럼 담담할 수 있다니/ 갈증은 그저 갈증일 뿐이라고/ 꽃 같은 시절도 봄 한철뿐인/ 눈부신 시간은 뼈처럼 부스러진다//
*1998년 안동, 고성 이씨 분묘(1586년)에서 발견된 편지

 

그녀마네킹 / 정선우
그림처럼 앉아 있는 나무의자에/ 누가 두고 간 꽃 한 송이/ 시든다/ 눈빛은 비눗방울처럼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는 시폰원피스/ 도돌이표 같은 계절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길 건너 왕벚나무는 깜짝 세일이 끝났다/ 맛보기처럼 맛있게 지나간 봄날은/ 왕벚나무 언저리에 잠깐/ 그 환한 표정을 그리워한다/ 슬픔을 목구멍에 건 목이 긴 쓸쓸함은/ 바람이 꽃잎을 날려 보내듯 부질없다/ 사랑니를 뽑았다/ 함부로 물들지 않으려고/ 꽃 한 송이 샀다/ 어제보다 시든 가슴을 달랜다/ 흩어지고 모이는 오후의 표정들/ 수피가 엷어지는 봄의 전언/ 가다가 돌아서는 그림자 서 있다//

붉은 입술, 아다 / 정선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혹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말함// 동그란 붉은 입술, 남천 열매 같은/ 그 입술 앞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녀갔다// 탁목조의 모든 소리는/ 탁목조에게서 나오고// 꽃 같은 말의 간격을 배우는, 아다/ 비밀스런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붉은 부리를 물고 새가 날아간다// 혓바닥 깊은 무늬 하나 새긴/ 비애를 녹여 먹던 붉디붉은 입술/ 몽유의 미혹을 삼키고 더욱 또렷해진다/ 폭죽 터지듯 붉은 입술 햇살을 바른다// 내내 입속에서 끊어질 듯 말 듯/ 재탕되는 말들이 혓바닥을 굴리며/ 흘러내리고 사라지려 하고,//

흔들리다 / 정선우
바닥이 흔들린다/ 어깨를 들썩이며// 은행나무의 은행이 눈물처럼 떨어져 내린다/ 별의 반짝임을 받아 적던 석탑의 두부가/ 두부처럼 흔들린다/ 숨죽이며 석탑을 읽는 잎과 입이 분절된다// 오랫동안 흙격지에 묻혔던 쐐기의 문장이 떠들썩하다/ 몸으로 받아쓴 촘촘한 주름들/ 바닥 저 깊은 돌의 시간이/ 벌레 먹은 알밤의 숨구멍이 되었다/ 수백 년을 견딘 깍지가 풀리고 있다// 비스듬히// 열어보지 않아도 의심스러운/ 속내가 쩍쩍 틀어지고 있다/ 민감한 소문을 물고 뜯고 아수라장이다/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찰나의 햇살이 은행잎을 움켜쥔다//
* 흙격지: 지층과 지층 사이

셀프텔러 / 정선우
다시, 꽃샘추위다.// 무료함을 깔고 있는 방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지만 오후는 뒤집어지지 않는다. 손바닥의 방식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먹다 만 생수병과 따지 않은 생수병 사이에 에프킬라는 일 년째 그 자리. 지겨워. 물린 자리를 긁다가 피를 볼 것이다.// 꽃샘추위예요.// 며칠이 지난 귤을 까먹다 시들한 나 같아서 단면으로 잘라 채반에 펼쳐 놔요. 동작 그만. 나도 그 옆에서 햇살 쬐며 해바라기 시늉해요. 쉽게 까먹은 얼굴들. 두려워.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하죠. 터진 알맹이 마냥 새는 기억을 주먹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변명을 하고 장래희망을 말했다. 희망은 변명의 또 다른 말. 내 이야기가 진담이 될까봐, 식은 밥에 물 말아 먹으며 음악을 듣는다. 나를 꿀꺽 삼킨다. 오지 않는 것들을 배웅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안부 묻는 사람을 선택하기로 한다. 당신의 입장을 선호 한다.//
*self-teller: 내 안에서 나에게 말하는 존재.

Mr. Pegasus / 정선우
별은 금방 자랄 거라고 했다/ 석간신문을 뜯어먹고/ 하루치의 의미를 소화중이다/ 날개를 던져버린 옆구리가 시시하다/ 굴러다니는 고삐를 찬 우유부단한 맨발/ 물구나무를 서서 그냥 자란다/ 바닥을 일으켜 세우면 페가수스*처럼/ 용감해졌다 별사탕 한 움큼 쏟아진다// 좋은 별자리를 키울/ 서쪽 문을 열고 별빛을 부르는 손짓/ 별은 별꽃으로 몸 바꾸려 한다/ 밤마다 푸른 자장가를 불러야 했다/ 밤새도록 별을 다독이는 마두금/ 문지를수록 더 깊어진 어둠/ 별꽃이 무덕무덕 피어나는/ 은하는 수레를 타고 천천히 굴러간다/ 캄캄하고 매끄러운 뒷모습/ 구만 리나 더 멀리 별을 키우고/ 천상의 부스러기 별의별로 환승 한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돋친 천마(天馬).

밤하늘의 트럼펫 / 정선우
밤하늘이 당신의 취향입니까// 골목 가로등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서 있고/ 흑백의 서늘한 그림자가 속눈썹을 스치는,/ 오래전 표정이 골목의 맨 뒤에 있습니다// 두서없는 길의 시작은 미련 때문/ 한 쪽만 푸르다는 것은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잘려버린 대나무 숲/ 길냥이 울음이 바람소리 속에서 뚜렷합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아서 별이 쏟아져 내립니다// 밤이 밤을 다시 풀어 쓰고/ 마지막에 두는 말,/ 누구도 울지 말아요// 지난 일은 깜빡할 사이 희미해지는 티끌입니다/ 밤이 기울어진 쪽으로 생겨난 절취선// 그 밤입니까// 어둠의 쇄골을 문지르며/ 밤이 먼지처럼 뭉쳐지고/ 밤에 밤을 덧대면 하룻밤이 생겨납니다//

괄호 열고 괄호 닫고 / 정선우
괄호가 열리고 지하철 안이다/ 모르는 사람들 마네킹으로 나란히 앉아/ 우린 무언극의 등장인물이다/ 모두가 비몽사몽/ 안내방송을 듣는 사람은 없다//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나/ 바쁜 표정으로 싱거운 말을 주고받는다/ 얼굴 좋네, 일은 잘 되지,/ 언제 밥 한 번 먹자// 괄호가 열리고 지하철 밖으로/ 밀고 밀려나오는 등짝들의 안간힘/ 사방으로 흩어지는 말들// 지하에서 지상으로 떠오르는 동원역/ 오늘이 보이고...// 문득, 나는 생각 한다/ 그러므로 존재 한다는 데카르트는 뭘 발견 했을까// 지하철 꽁무니에 매달린 무심한 봄날,// 내 빈손을 내려다보다가// 괄호가 닫히고//

세로로 가로로 / 정선우
비 내린다/ 세로로 세로로 하염없이/ 흐릿한 간판들을 두서없이 긋고 지나간다// 한 번은 만나지 않았을까/ 우리// 빗방울은 모호성을 가진 은화 한 닢// 허공의 줄들이 흔들/ 전깃줄 위 빗방울들 혼자 혼자서 젖는다// 비옷을 입은 투명인간/ 손바닥 내밀어 축축한 귀를 훔친다// 비옷 같은 마음이면 좋겠어/ 너의 하루가 솜처럼 말라갈 거야// 손등과 손등을 포개면 긴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몰라/ 돌멩이와 유리에 새겨 넣을 이름/ 쏟아지는 기억들// 제로는 세로로 명징하게/ 가로는 가로로 간곡하게// 육교 위에 손 흔드는 사람을 뒤로하고/ 버스는 강을 건너가고//

기린을 기다리는 해변 / 정선우
의자는 조금 기울어져 있다/ 저것은 기린이 아니다// 한쪽으로 구부러진/ 흰 소라껍데기가 빛난다/ 귀를 기울여 소리를 쏟아낸다// 수평선이 상하로 펄럭인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해변에서 해변까지/ 뛰어가는 몇 개의 발자국// 기린의 형식으로/ 목을 늘어뜨리고 몸을 최대한 낮춘다// 어두워진다/ 기린은 아직 오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 파도// 한번 가서/ 다시 오지 않는// 모래 글자 위에 찍힌 발자국들// 사라진 글자 위로 모래바람이 분다// 의자는 더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기린이 아니다//

눈사람 / 정선우
언제까지 서 있을 거예요// 나는 눈사람이라 불리는 사람// 어스름과 노을이 한 번에 도착한 저녁/ 밤보다 달빛이/ 찢어진 불빛이 살점보다 더 아프다//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발이 보이지 않는다// 쭈그러진 털모자와/ 배낭에 주워 담을 밤이 필요해// 언제 한 번 큰 소리 질러 본 적 있나/ 입만 까맣게 벌리고 있었지// 달이 굴러가는 소리 요들송/ 이를 다 드러낸 달/ 곁에 있는 아름다운 사람//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숲/ 발목을 휘감은 바람/ 발목을 잡는 목소리/ 발목을 지우는 눈발// 달빛엔 브레이크가 없다// 슬픔에 젖은 목도리가 흘러내린다// 아침이 몰려온다// 나는 서둘러 떠나는 사람//

여름 방학 / 정선우
책을 펼치니 여름이 쏟아졌다// 시소를 탔던/ 캐치볼을 했던/ 혼자 노는데 익숙했던 여름은/ 종점과 종점을 오가며 조금씩 자랐다/ 오로지 초록이 되었다// 조금씩 낮아진 목소리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쓸쓸한 그 말// 매일이 같은 날이어서 새롭다// 화분이 있는 방향으로/ 뒤꿈치를 들고 발을 옮기는 불빛들/ 이름을 부르면 화들짝 뒤돌아본다// 슬리퍼 같은 다정한 세계, 그곳에서/ 여름으로 하루를 살다가/ 풀처럼 일어서는 벽을 닫고 나왔다// 책을 읽었다/ 나를 덮었다//

몽당연필 / 정선우
접은 노루꼬리처럼/ 왼쪽 눈썹 끝을 밀어 올린다/ 오늘 운세에 트집을 잡는/ 모호한 바람이 왼쪽 눈썹에 걸린다/ 부추꽃 같은 눈/ 슬픔은 언제나 애매모호하다/ 뽀족한 꽃잎에 흔들리다가/ 둥근 꽃술 가장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려놓은 눈동자 속의/ 또 다른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내 안의 나를 손짓하고 있다/ 함부로 그린 불완전 이름씨/ 나는 불완전을 지우려고/ 멀리 있는 동사를 끌어온다/ 분명한 흔들림이 나를 부추긴다/ 연필은 아직 불완전 이름씨에 있다/ 눈을 그리다가 눈 속에 고이는/ 바람의 우물 하나 길어 올린다/ 어쩌다 뿌리째 흔들린다/ 우물에 내려놓은 두레박은/ 바닥에 아직 걸려있다/ 오래전의 침묵이었을까 우물은/ 두레박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고기자리 여자 / 정선우
설핏 잠이든 새벽/ 잠옷의 덩굴무늬가 수심으로 뻗어가는 꿈이었다/ 방문이 삐꺽 열리며 지느러미가 사라진다// 둥근 탁자에 앉아/ 소금도 없이 달걀을 먹는다/ 삶은 노른자 가루를 어항에 뿌린다// 어항 수초들 사이로 물고기들이 몸을 숨긴다, 나의/ 슬픔은 몇 마리 남았나// 보고 있는 건/ 물고기만 그려진 그림책// 아직 남은 슬픔이 유효한지// 가까스로 헤엄치는 법을 알았다는 듯/ 죽은 물고기가 수초를 빠져나온다// 어디든 가야 한다는 것처럼//

그 여자 / 정선우
낯익은 몸짓이 뭉개졌다/ 껍질만 남아 나비날개처럼 접힌/ 희끗한 기억의 비늘을 줍는/ 맨발의 통점은 불쑥불쑥 자랐다/ 핏기어린 기억 아직 붉다/ 일정한 거리로 물끄러미/ 이곳과 그곳/ 먼, 은진/ 물그림자 너머로 걷는다/ 시간 밖에 있는 혼잣말/ 부르기 위해 입술을 다물었다// 웅크릴 어깨도 허물어진/ 소리 없는 소리도 없는/ 시월 한 묶음, 반야산/ 연지 가득 부풀어 오른다/ 가벼운 한 때는 날아가고/ 찰나를 입에 문/ 은진, 오른손에 앉은 나비/ 날개는 접어두고/ 천년의 시간을 옮겨 앉은/ 물빛 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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