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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길, 잠시 멈춤 / 김용순

부흐고비 2022. 5. 17. 08:45

길은 길어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전라도길’에 나오는 길을 떠올리면 너무나 길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잘름거리며
가는 길.

하룻길이 긴 날은 욕망이 분출하던 서른 무렵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한하운의 황톳길을 걷는다. 이드와 슈퍼에고의 충돌로 흔들리는 자아가 뙤약볕 붉은 길에서 헤맨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길이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가는 길, 옛날 한성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던 기나긴 길에 천안삼거리가 있다. 천안삼거리를 지나는 그 길은 너무나 멀어서 막걸리에 국밥까지 준비된 주막이 있었다. 주막 옆으로는 우거진 능수버들이 그늘을 만들어 뙤약볕에 지친 나그네를 쉬게 했다. ‘전라도 길’의 화자도 능수버들 아래서 지까다비를 벗었단다. 벗고 보니 발가락 두 개가 떨어졌더라나. 그렇게 먼 길 걸어온 발을 쉬게 하던 곳이 천안삼거리이다.

천안삼거리는 조선시대부터 주요 길목이었다. 대전, 대구, 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 방면과 논산, 전주, 광주로 이어지는 호남 방면 도로가 천안삼거리에서 갈라지고 합류하여 위로는 수원, 과천, 사당으로 향하여 서울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짚신 달랑거리는 괴나리봇짐 진 수많은 나그네가 만나고 헤어지던 곳이 천안 삼거리이다.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이 처음부터 휘휘 늘어졌던 건 아니란다. 길이 만남과 이별의 장소인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해오는 능소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에 능수나무 지팡이가 등장한다. 능소 아버지 유봉서는 변방을 지키라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홀로 키우던 어린 딸과 길을 나선다.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는 데려갈 수 없기에 주막에 딸을 맡긴다. 능수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이 나무가 무성히 자라면 돌아온다고 딸을 달랬다. 능수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는 동안 어린 능소도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 길에 주막에 들른 박현수 도령과 인연이 닿아 둘의 애틋한 사랑도 커간다. 능수나무 지팡이에 싹이 나고 자라자 과연 부녀상봉이 이루어진다. 이후 무성한 능수버들은 해마다 씨앗을 날려 천안삼거리 주변에 능수나무 군락을 이루었단다.

1980년 무렵에는 해마다 천안삼거리에서 천안삼거리문화제가 열렸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 능소아가씨 선발대회가 특히 성황이었는데 나는 무대를 비켜나 영남루 근처 잔디밭에 펼쳐진 천안삼거리주부백일장 행사에 눈길이 갔다. 글제는 ‘동행’이었다. 동행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원추리꽃 노란 산자락을 지나 요령 소리 타고 올라가시던 아버지의 하늘길이 떠올랐다. 능소아가씨는 천안삼거리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 흥타령을 부르며 잔치를 벌였지만, 나는 거기서 아버지와의 갈림길을 떠올리며 원고지에 이별의 아픔을 적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껏 문인의 길을 간다.

몇 해 전에는 천안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상록호텔에서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하계세미나가 열렸었다. 1박 2일 행사였는데 첫날 일정이 끝나고 저녁 시간에 시도별 장기자랑이 있었다. 천안 수필가들이 주축이 된 우리 충남 팀은 능소전을 코믹하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박현수 역의 모 선생님 익살로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다. 검은색 스카프를 땋아 붙인 댕기머리 차림의 나 능소도 꽹과리 장단에 옷고름을 휘날렸다. 그때 1등하여 받은 상금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에 없지만, 출연진이 한데 어우러져 흥타령을 부르던 흥겨운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지금도 인터넷에서 돌아다며 그날의 흥을 떠올리게 한다.

천안삼거리문화제는 천안흥타령춤축제로 이어져 오며 이제는 세계 춤꾼들의 잔치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공원화된 천안삼거리가 오가는 나그네뿐 아니라 천안 시민들에게 쉼터 역할을 한다.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길 아닌가, 길고 험한 인생길. 목마른 하룻길의 샘터로, 때로는 잔치마당으로 존재하는 천안삼거리, 시가지의 확장으로 능소가 살던 주막에는 학교가 들어서고 현재의 천안삼거리는 굳이 따지자면 삼룡사거리이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오늘도 단톡방에 천안삼거리 소식을 올리며 잠시 멈춤을 권한다.

“휘늘어진 능수버들 솔솔바람 시원해요. 쉬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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