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느낌

허은실 시인

by 부흐고비 2022. 6. 20.

허은실 시인
1975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다수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작가로 활동했고,

2010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는 잠깐 설웁다』와 산문 『내일 쓰는 일기』,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등이 있다. 제8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저녁의 호명 / 허은실
제 식구를 부르는 새들/ 부리가 숲을 들어올린다// 저녁빛 속을 떠도는 허밍/ 다녀왔니/ 뒷목에 와 닿는 숨결/ 돌아보면/ 다시 너는 없고/ 주저앉아 뼈를 추리는 사람처럼/ 나는 획을 모은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 속으로만 부르는 것들은// 네 이름이 내 심장을 죄어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 도요라든가 저어라든가/ 새들도 떠난 물가에서/ 나는 부른다/ 검은 물 어둠에다 대고/ 이름을 부른다//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내 이름을 내가 맞고서/ 엎드려 간다 가마/ 묻는다/ 묻지 못한다// 쭈그리고 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사람아/ 지난 계절 조그맣게 울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가/ 거미줄에 빛나던 물방울들/ 물방울에 맺혔던 얼굴들은// 바다는 다시 저물어/ 저녁에는/ 이름을 부른다//

푸른 손아귀 / 허은실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맨드라미 옆에서 말라갔다./ 어른들은 사내애를 건져놓고 담배를 피웠다. 비가 많은 해였다.// 사람 잡아먹는 산이라 했다. 비스듬히 빠진 두 골이 만나는 자리. 가뭄에도 물을 강에 안겼다. 강은 소용돌이와 모래 구덩이를 감추었다. 저녁 물소리마다 우렁이 굵었다.// 고요해진 물 위에 나는 벗은 몸을 비춰보았다./ 사나 여럿 후릴 상이라 했다./ 몸이 불은 강물 위로 물고기들이 튀어올랐다.// 비가 많은 해다. 무당은 자꾸 물이 보인다 했다. 아버지는 산에서 발견됐는걸요. 바위를 덮은 이끼가 젖었다./ 강물과 산이 푸른 웃음을 주고받는다. 만삭의 배를 감싸며 나도 씨익, 웃어주었다.// 아기는 뱃속에서 육십 년쯤 살고 나온 얼굴이다. 삼우제였다.// 청벽산은 푸르다./ 고요한 수면 아래/ 흰 발목을 잡아채는 푸른 손아귀가 있다.//

이별하는 사람을 위한 가정식 백반 / 허은실
아비는 춘궁이었네/ 기별 없이 찾아온 딸에게/ 원추리를 끊어다 무쳤네// 풋것은 오래 주무르면 맛이 안 난다// 꽃들에게 뿌리란 얼마나 먼가/ 이 맛은 수몰된 마을의 먼 이름 같군요// 아비는 오래 얼려둔 고등어 한 손을 내었네/ 고등어는 너무 비린 생선이에요/ 잡히면 바로 죽어버린다고요// 비린 날엔 소금으로 창자를 닦거라// 그런데 아버지 기일에 왜/ 미역국을 끓이셨나요// 너를 좋아하다가 죽은 남자가 있다는구나/ 새 옷을 지어다 태워주었다// 세상에 미역처럼 무서운 것이 있을까/ 한 줌이었던 것이 이토록/ 방 안에 가득하잖아요// 너무 오래 불리면 몸이 싱거워진다// 검은 혀가 흰 허벅지를 휘감아요/ 내 몸에서 당신의 머리칼이 자라요// 약불에 뭉근히 두어라/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속이 우러난다/ 불로 익히는 음식이란/ 뜸을 들여야 하는 거야// 누가 부르는지 귓속이/ 간지러워요 아버지/ 네가 피운 꽃들이 지고 있나 보구나// 아침을 차려준다는/ 저녁을 짓는다는/ 그 말이 어여뻐서/ 숟가락을 쥐고 울었네/ 아비는 말없이 가시를 발라주었네//

물이 올 때 / 허은실
풀벌레들 바람에 숨을 참는다// 물이 부푼다/ 달이 큰 숨을 부려놓는다// 눈썹까지 차오르는 웅얼거림/ 물은 홀릴 듯 고요하다// 울렁이는 물금 따라 고둥들이 기어오를 때/ 새들은 저녁으로 가나/ 남겨진 날개를 따라가는 구름 지워지고/ 물은 나를 데려 어디로 가려는가// 물이 물을 들이는 저녁의 멀미/ 저 물이 나를 삼킨다/ 자다 깬 아이가 운다// 이런 종류의 멀미를 기억한다/ 지상의 소리들 먼 곳으로 가고/ 나무들 제 속의 어둠을 마당에 홀릴 때/ 불리운 듯 마루에 나와 앉아 울던/ 물금이 처음 생긴 저녁//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숭어가 솟는 저녁이다/ 골목에서 사람들은 제 이름을 살다 가고/ 꼬리를 늘어뜨린 짐승들은 서성인다/ 하현을 닮은 둥근 발꿈치/ 맨발이 시리다/ 물이 온다//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 허은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뱉어내도 비워지지 않네/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더러는 얼굴에 묻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몸속에 신전을 짓고/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손금이 아파요/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괜찮다 아가, 다시는/ 태어나지 말거라// 서 있는 것들은 그림자를 기르네/ 사이를 껴안은 벽들이 우네/ 울음을 건너온 몸은/ 서늘하여 평안하네// 바람이 부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네/ 몸을 벗었으니 옷을 지어야지//

윤삼월 / 허은실
노인들은 화투점을 본다// 매화 벚꽃 낭창하니/ 부음이 들려오기 좋은 날이다// 햇빛에서는/ 개 꼬실르는 냄새// 치매에 걸린 가지들// 아래배드민턴 흰 공이/ 하늘을 잡았다 놓는다// 피어 조화가 되는 꽃들/ 산 채 묻힌 것들의 눈빛을 닮는다/ 죽은 아이들이 뜬눈으로 태어나 휘둥그레하다// 귀신도 모르게 수의를 짓고 이름을 바꾸고/ 귀신도 모르게 달을 낳지// 목을 지나온 검처럼/ 꽃잎을 가르는 허공/ 그 틈으로/ 소식이 올 것 같다// 가지에서 바닥까지의 무한,/ 무겁구나// 나무들 수의를 벗는다// 눈알을 핥는/ 연분홍 꽃잎들/ 다 누구의 빠진 손톱인가//

이식(移植) / 허은실
저것들이 나를 끌고 왔다/ 이삿짐 앞세워 따라가며/ 냉장고의 등을 본다/ 옷장이 나를 욕망한다/ 침대의 꺼진 자리가 나의 잉여다/ 삐걱이는 책상의 관절과/ 서랍 속의 숫자들/ 떨어져 나간 손잡이는 끝내 찾을 수 없다/ 닫히지 않는 문은 어긋난 채로/ 우그러진 냄비는 우그러진 채로/ 종일토록 비가 새는 이 세간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분갈이 무렵마다 주소가 늘어가도/ 알뜨랑 비누도 알뜰히 씻지 못하는 비루/ 강변엔 아파트들의 등고선만 높다/ 본적지 사람들 떠나길 잘했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가지를 북쪽으로 뻗고/ 삼겹살이 좋은 몽골인 바트 씨/ 여권에는 붉은 글씨/ —나는 에일리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식민지/ 어디서든 외계이다/ 거미는 거미를 잡아먹고/ 고속도로 위를 돼지 실은 트럭이 달린다//
* 외국인등록증에 이주노동자, 외국인은 alien으로 표기된다.

이마 / 허은실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칡 / 허은실
​ 뿌레기가 이파구꺼정 마커 버릴 대가 읎는 식물이래요. 뿌레기랑 꽃으루다가는 차르 울고요. 칡꼬렝이는 끊어다가 낭기나 곡석을 묶어요. 여름이문 칡반데라는 거르 해 먹었는데요. 옥시끼, 찰옥시끼래야 돼요. 갉으 빠 가지고 그 반죽으루 반데기를 맹그러요. 둥글넙적한 반데기 있잖아요. 그거르 칡아파구루 싸서 가매에 찐다 말이래요. 그래 가주구 먹으문 이파구 향이 배서 세빠닥이 싸아 해요. 칡이란 거그기 기래. 아무리 먹을 거 읎는 땅이래두 뿌레기 내리고, 디딜 대 없어도 다른 낭그 감고 게올라 가주구 빛 쪽으으루다 악착같이 얼굴 디미는 기라. 그러 바락바락 하늘루만 꽃 피우는 기 칡이라 칙,이라 하문 서운해요. 뭐 이래 그 얼켜오는 맛이 읎어 가주구 꼭 칡, 이라구 발음으 해야 한대요. 어머이라는 말처름 너무 찔겨 가주구//

 

둥긂은 / 허은실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알은 둥글다 살구는 둥글다 살구의 씨는 둥글다 씨방은 둥글다 밥공기는 둥글다 밥알은 둥글다 사탕은 둥글다 별들은 둥글다 꽃은 둥글다 물은 둥글다 ‘응’은 둥글다 그 밤 당신이 헤엄쳐 들어간 난자는 둥글다 원자는 둥글다 존재는 둥글다//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서/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서// 사랑은 둥글다/ 내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굴러가려고 둥글게 말린 혀가/ 입천장을 차고 나간다/ 나가서 너에게 굴러간다// 둥긂은 아름답고 둥긂은 그립고 둥긂은 입맞추고 싶고 둥긂을 안고 뒹굴고 싶고 둥긂은 들어가 눕고 싶다//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둥글어져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하나/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
* 2010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후루룩 / 허은실
대전역 플랫폼에 서서/ 가락국수 한 그릇/ 후루룩,/ 새 날아간 가지 덜컹인다/ 잎 진다/ 후루룩,/ 떨어지며 살 비빌 때/ 혀끝에 닿는 건전지의 맛/ 기차의 옆구리가 다른 옆구리를 스친다 빈 봉지 잠시 떠올랐다 다른 자리로 내려앉고 차창 안팎의 눈빛들이 교행하다 멈추고, 미끄러진다 후루룩,// 한 가락 국수를 기다리는 플랫폼/ 길들이 삭는다// 후루룩 입천장이 데이는 시절의/ 어둑신한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리는 한 소절의/ 후루룩,// 먼지 앉은 시계에 기대/ 살에 와 녹는 눈송이에 기대// (퉁퉁 불은 한 줄의/ 이 후루룩)//

폭우 / 허은실
바람이 어둠을 휘저었다/ 밤새 비가 들이쳤다// 마당 가득 끼쳐오는/ 풀 비린내/ 푸른 피 자욱한/ 생것의 냄새// 몸을 다 빠져 나가지 못한/ 흐느낌/ 가지 끝이 몸서리친다// 어린 감들 놓친/ 곷받침/ 빈 자궁에 남은/ 눈동자들 몇이서/ 그렁그렁하다// 햇살이 눈알들을 핥아주고//

더듬다 / 허은실
사타구니께가 간지럽다/ 죽은 형제 옆에서/ 풀피리처럼 울던 아기 고양이/ 잠결에 밑을 파고든다/ 그토록 곁을 주지 않더니/ 콧망울 바싹 붙이고/ 허벅지 안쪽을 깨문다/ 나는 아픈 것을 참아본다/ 익숙한 것이 아닌 줄을 알았는지/ 두리번거리다/ 어둠 쪽을 바라본다/ 잠이 들어서도/ 입술을 달싹인다/ 자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들의 꿈은 쓴가/ 더듬는 것들의 갈증 때문에/ 벽을 흐르는 물소리/ 그림자 밖에서 꼬르륵거리고/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

라이터소녀와 껌소년의 계절 / 허은실
모두들 너무 따뜻해서/ 이 거리의 사랑은/ 일회용 라이터처럼 흔해요// 라이터 하나에 가든과 라이터 하나에 모텔과/ 라이터 하나에 오빠 오빠// 열(熱)을 잘 간수해야지 겨울이잖니/ 소녀들은 자신의 열을 팔아야 구두를 살 수 있어요/ 소년들은 껌을 팔아 소녀를 만질 수 있고요// 엄마 신발을 신고 나와 소녀는/ 뺨을 맞고 울어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오빠는/ 무언극의 희극배우/ 울부짖고 있지만 우스워/ 모두들 너무 따뜻해서/ 이 도시의 눈물은 일인칭// 울음이 얼었으니 몸을 지펴야 해요/ 그러나 불꽃의 시간은 짧아/ 소녀의 판타지가 소녀의 국경/ 구름의 살점들이 몸을 덮으면/ 소녀는 당신이 씹다 버린 껌/ 봉인된 허구// 거리에서 라이터는 매일 사라지고/ 아무도 라이터 따위 줍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직도 잠들어 있어요/ 새들의 얇은 눈꺼풀만 아침을 울고요/ 라이터를 감춘 소년들이 망루로 갑니다/ 껌소년들의 이마에서 뿔이 자랍니다//

Man-hole / 허은실
눈이 날린다/ 구덩이 위로/ 얼어붙은 거리 위로/ 혼비백산 흩어진다/ 내몰린 먼지들은/ 구석에서 뭉쳐진다/ 바람이 집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집이 울고/ 돼지가 돼지와 혼음하여/ 귀 없는 거인을 낳는다/ 거인과 거인이 화간하여/ 거대한 입을 낳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허방/ 검은 아가리 속으로/ 당신은 비명도 없이/ 사라진다//

삼척 / 허은실
칼을 갖고 싶었지// 고등어처럼/ 푸르게 빛나는// 칼이 내 몸에 들어와/ 찔린 옆구리로 당신을 낳았지// 바다가 온다/ 흰 날을 빛내며// 칼이 온다//

불귀(不歸) / 허은실
나는 어느 묘비에서 빌려온 이름일까// 빈 집에서 당신이 외투를 깔고/ 손 베개 괴고 당신을 보네/ 진흙이 묻은 당신의/ 무거운 신발을// 꿈에는 또 파랗게 질린 꽃들이 피고/ 흐느낌이 몸 밖으로 흘러/ 당신은 잠에서 깨네// 날으는 새처럼/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낯선 어둠을 보네/ 울 수 없어 노래하는 밤이었네// 금 간 술잔/깨진 자리에/ 혀를 대어 보네 당신은// 모래도시 이방의 거리에서/ 音처럼 태어나/ 音으로 사라지는/ 연 없음의 연으로 우리/ 또다시 정처 없을 것이나// 빈 봄에 목련이 피면/ 당신은 몰래/ 울겠지// 새를 묻은 자리에/ 새가 날아오면//

제야(除夜), 우리들의 그믐 / 허은실
술집 밖에는 진눈이 내려/ 없는 것들 발부터 젖는다// 움츠려 올린 어깨들/ 피사체가 흐리다// 가장 아름다운 점자는/ 좁은 골목에 내리는 눈// 골목을 흔들며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 보아주는 것뿐/ 우리의 통점엔 차도가 없구나// 닳아버린 밑창으로 물이 들어/ 발가락을 구부려 보지만/ 제 문수(文數)를 벗을 수 없다// 택시는 아무래도 잡히지 않고/ 새해엔 구두를 사야겠어// 낙원떡집 앞에서 우리는/ 어색하게 복을 빌며 돌아선다// 바람은 발을 걸어 자빠뜨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기우뚱거리는/ 모습이 우습다/ 우습다// 타인의 발자국 위에/ 나의 발자국을 포개어/ 얼음을 다진다// 눈은 응달 쪽으로 단단해진다// 화분에는 몇 개의 잎이/ 새로 지고/ 문 앞에서 너는/ 젖은 발을 돌려야 한다//

치질 / 허은실
밑구녕까지 꽃이 피었다// 징후도 없이/ 예후도 모르는 채/ 부끄러움을 앓는다// 걸음마다 꽃이 도져/ 안지도 돌아눕지도 못하게 하는// 괄약근이여//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야릇 / 허은실
누군가 나를 뒤집어쓰고 있어// 병을 불러 아픈 날/ 곁에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계집아이/ 돌아보면 할머니가 꽃을 안고 웃고 있다// 어느 저녁엔/ 내 몸에 살림 차린 이들/ 밥물 끓는 소리// 등본은 발급되지 않고/ 번지수가 없어/ 오늘도 짐 풀지 못한 채/ 마루 끝에 앉아 있다// 누가 불러 나갔는데/ 나무들 무얼 숨기고 있는지/ 이파리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누가 깨워 눈떴는데/ 벽지 꽃무늬 사이로/ 사라진 옷자락만// 오래 집 비우고 돌아온 날/ 후다닥 숨는 기척/ 커튼 뒤의 수군거림// 어둔 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닮은 이 있네/ 문득 나 또한 누군가의 몸에/ 세 든 것을 알았네//

너는 너의 방에서 / 허은실
너는 너의 방에서 수음을 하고/ 나는 나의 방에서 울 때/ 그는 그의 골방에서 얼어죽고// 방문을 닫고/ 각자의 식탁을 차릴 때/ 쪽방에서는 살이 썩는 냄새/ 아무도 듣지 않는 비명// 당신은 이웃의 창문을 엿보고 당신이 보는 것을 나는 본다 당신을 오해하기 위해 I see you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던 것 아이들은 시소를 타며 영원한 비대칭의 게임을 배운다 봤니? 봤지! See? Saw! 이렇게 마주/ 앉아도 당신은 당신의 풍경을 나는 나의 풍경을 I see, I see// 우리의 동침은 돌아누운 등으로 이루는 데칼코마니/ 팔짱의 형식은 제 두 팔을 마주 끼는 일/ 삼투는 불가능하다/ 나는 나의 말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고장 난 시계는 고장 난 시간을 간다 그러나 부지런히// 당신은 지금 위독하고/ 배제된 자들은 위험하다// 조금 덜 배제된 자가 조금 더 배제된 자를 배제하고/ 문서에 포함되지 않는 신발들// 아무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처용엘레지 / 허은실
여기 잠든 짐승 나의 이승이구나// 뒤집어 입고 들어온 사내의 팬티를 빨면서/ 나쁜 엄마가 돼야지 벌 받아야지// 그러나 본디 안팎이 한통속이어니/ 뒤집어진들 어이할꼬// 어금니에 몇 톤의 원한을 싣고 가는 사내여/ 슬픔은 욕망과 한통속인가/ 항문과 입술의 조직은 동일하다/ 잘린 가지 끝에 송곳니처럼 흰 뿌리 돋는다// 머물렀던 곳마다 흘린 머리카락을 주우며/ 검은 날개를 꿈꾸는 밤/ 다르게 시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열두 개의 가면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제 얼굴이 무서워질 때를 맞이하므로/ 문득 어둠 속의 눈과 마주칠 때/ 고독은 완성될 것이다// 그늘을 흔들기 위해 바람이 분다/ 빨래통 속에서 팔과 다리가 뒤엉킨다// 창밖에는 비닐이 사납게 펄럭이는 소리/ 빈 액자 위에 내려앉는/ 고요한/ 먼지의 춤//

 

여름의 무릎 / 허은실

능소화가 피었던가 그날/ 자귀나무는 폭죽 같은 꽃들을/ 터뜨렸던가/ 향기로운 언어들로/ 흐드러지던 여름이었다/ 당신이 오지 않을까봐/ 꿈에도 발목이 젖어있던 밤들/ 보내고 돌아와 울 때/ 내 들썩임에도 떨어지던 꽃잎/ 무릎이 꺾여본 자만이 바닥을 알 수 있다고/ 당신은 가방에서 구겨진 꽃을 건넨다/ 다시 무릎을 굽혀 신발끈을 매어준다/ 무릎을 접고 앉아 등을 내어준다/ 신이 인간의 무릎에/ 두 개의 반달을 숨겨둔 이유/ 엎드려 서로의 죄를 닦아내는 일/ 정원을 가꾸는 일/ 무릎 속에 뜬 달 이지러질 때까지/ 대지에 무릎을 꿇고//

 

보호자 / 허은실

아이엠에프 때 갈라서고 안 해본 일이 없어유. (손을 거두어 뒷짐을 진다. 손가락 끝이 뭉툭하다.) 입원했을 때 보호자가 있어야 된대유. 지가 보호자 한다고, 옷도 다 입혀주구 밥도 먹여주구. (붉은 목울대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간다. 아 근데 이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갔으니 미치겠어유. (시든 귤을 쥐여준다.) 나기는 김제서 났지유, 죽을라고 소주 대여섯 병씩 먹고 실려가기도 많이 했어유. (발음이 정글다. 앞니 하나가 빠져 있다.) 그래도 억울한 거는 풀어줘야 딸 보러 갈 면목이 서지 않겠어유? (목에 걸린 학생증을 내려다본다.) 명색이 아빤데. (웃는다. 돌배같은 얼굴. 웃는다.) 사무실 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가시지유. (노란 잠바 속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딸 생각이 나서 그래유. 꼭 저만할 때부터 혼자 키웠시유. (다섯 살 딸애 에게만 원을 쥐여준다. 등뒤로 바다는 눈시울이 붉다.)//

 

/ 허은실

아침에는 미역국을 먹고/ 저녁에는 탕국을 끓인다// 아이는 소원을 빈다// 이건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끄기 위해 켜는 불이야/ 너의 숨으로// 아이가 최초로 불을 응시하는 순간/ 우주의 가로등 하나가 새로 켜진다// 너는 사로잡힌다/ 간단없는 일렁임과/ 간단히 사라지는/ 여기에/ 아이와 촛불이 있다// 촛불을 처음 본 눈이여/ 눈동자에 담긴 그 불꽃으로/ 너는 살아갈 것이다// 아침에는 초를 끄고/ 저녁에는 초를 켠다/ 아버지 이제 케이크를 드세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린다// 어린 외손의 생일 케이크까지/ 아홉 수저 드실 동안// 너는 바라본다/ 산 사람들의 눈 속에서/ 춤추다 사그라지는 불// 아버지는 소지처럼 떠났다/ 서툰 획들을 지우고/ 살라지는 종이의 가벼움으로// 사라지는 글자들을 향해/ 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방안에는 촛불 냄새// 우리는 술잔에 뜬 재를 마셨다//

 

Midnight in Seoul / 허은실

도시의 틈새에서/ 어둠이 새어나온다/ 홍등이 걸린다// 모텔 네온사인이 켜지고/ 묘지에 돋는 붉은 십자가들/ 라디오에선/ 이퓨렛미인 유네버로스트미/ 내부순환로 양방향정체// 방음벽 너머로 골리앗 크레인/ 도시를 굽어본다/ 피가 튄 곳마다 거인들이/ 태어난다고 하지/ 저 환한 통증들 좀 봐// 오그라드는 몸 위로 술잔이 건너가고// 구운 살의 냄새 가득한/ 성수 방면 마지막 전철/ 가방을 끌어안고 입을 벌린 채/ 기울어진 사내가/ 깨달음처럼 튀어나간다// 가방을 끌어안고 두리번거리는/ 등뒤로 스크린 도어가 매끄럽게 닫힌다// 철새들은 한쪽 눈을 뜨고 잔대/ 감지 않는 거겠지/ 기린처럼 아름다운 동물이/ 서서 자야 하다니/ 이상해 벌레들이 자꾸/ 집에 들어와서 죽어/ 오늘도 내 팔을 내가 베고/ 쥐며느리처럼 등을 말고 잠이 들면/ 이상해 올라가고 있는데/ 추락하고 있어 이 꿈은//

 

흘* / 허은실
어린 것들은 눈썹이 수평선에 닿았다/ 달 없는 밤/ 예촌양서방조카도 멜 후리러/ 저 바다로 나간다/ 멸치떼를 그려보는 내 눈에/ 사금파리 하나/ 깨져나간 글자의 귀퉁이가 걸려있다// 여기는 용두 할아버지네 집터/ 혼수였을라나 그러면// 희,/ 발음하면/ 담장 뒤로 사라지는 옷자락 같아// 사발에 담기지 못한 것들을/ 함부로 떠올린다// 더는 물 고이지 않고/ 한해살이 풀들만 흔들리는 곤흘**// 늙은 새신랑은 돌아가지 못한 채/ 풍을 앓는다/ 마비되는 얼굴이 우는 듯 웃고// 헐린 담장 아래/ 스무 살의 신방(新房)을 더듬는 내게/ 산책객은 재개발을 묻고 간다//
* 흘: 성읍이나 촌락의 의미로 쓰이는 제주의 지명 접미사.
** 곤을동은 늘 물이 고여있는(곤) 마을(흘)이라 곤을마을로 불렸지만, 제주 4.3 사건 당시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고 주민들이 총살된 뒤 폐촌된 대표적인 ‘잃어버린 마을’이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혜빈 시인  (0) 2022.06.22
주영국 시인  (0) 2022.06.21
허은실 시인  (0) 2022.06.20
이현호 시인  (0) 2022.06.17
서대경 시인  (0) 2022.06.16
김이강 시인  (0) 2022.06.15

댓글0